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230923 토새
제목 : 야긴과 보아스, 새겨진 신앙 건립의 하나님 능력과 역사를 방임과 소망 중 자기 선택
찬송 : 108장(험한 시험 물속에서)
본문 : 열왕기상 7장 21절 -
이 두 기둥을 전의 낭실 앞에 세우되 우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좌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그 두 기둥 꼭대기에 백합화 형상이 있더라 두 기둥의 공역이 마치니라
기둥이 18 규빗으로 서 있고 5규빗의 머리가 그 위에 있고 둥근 5규빗의 머리는 그물 모양으로 앉히고 또 따은 모양의 사슬로 두르고 7개입니다. 그리고 또 석류를 두 줄로 돌려 두 줄, 한 줄에 1백 개 두 줄에 200개의 석류로 두르고 그리고 4규빗의 백합화 모양을 또 만들었으며
이렇게 네 가지 면으로 머리를 장식하여, 생각하되 신앙의 기둥이 되는 이런 행위 이런 생애를 네 가지 면으로 생각을 하되 오늘 아침 이 기둥을 “전의 낭실 앞에 세우되 낭실 앞에 세우되” 이 기둥은 그냥 표시입니다. 건축적으로 필요해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두 기둥, 말씀을 모신 말씀의 생활 주님을 향한 우리의 주님 동행에 늘 두 기둥, 이렇게 좀 든든해야 소망이 있는 것이라, 우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야긴에 1자가 들어가 있습니다. 글자는 맨 밑에 보면 ‘저가 세우리라‘라는 뜻입니다.
기둥을 히람이 만들어 솔로몬이 세우거라 해서 세웠으니 솔로몬의 명령과 솔로몬의 돈으로 기술자 히람이 세워 놓았는데 ‘저가 세우리라?’ 히람이 세우리라? 솔로몬이 세우리라? 이미 세워놨는데 왜 세우리라 그랬을까 전에 우편 기둥 볼 때마다 세우시는 분, 앞에서는 사람이 세우고 알고 보니 하나님이 세워주시고 이게 이어지는 한 사람은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태어난 아이가 스무 살 건장한 청년이 되기까지 그게 잘못 넘어져 다쳐 장애자가 될 확률은 많습니다. 아이들끼리 놀다가 눈 하나 다쳐놓으면 그 눈 하나 잃어버릴 그런 위기 그런 아찔한 때가 많습니다. 낭떠러지 조금 장난치다 다쳐 큰 사고되고 책걸상 앉아 공부하는 학교에 아이들 좀 장난치고 그러다가 모서리 잘못 맞아놓으면 평생 장애자로 사는 겁니다.
예전에는 차는 없었는데 왜 집마다 그렇게 마루가 높았는지 이게 습기 때문에 통풍 때문에 높이 만들기는 만듭니다. 그러면 계단이라도 한 서너 개 하지 계단도 건강해야 올라가지 노인 올라가기 어렵고 아이들은 다치기가 딱 좋습니다. 요즘은 문턱까지 없이 다 안전한데 또 차가 그리 많습니다. 뭐 그냥 순간 아닙니까? 한 아이가 20년 건강하게 문제없이 성장한다는 거 아이를 염려하고 길러봐 보면 이건 기적이다 할 만합니다. 기적이라 할 만한데 뭐 우리 집 아이든 너희 집 아이든 또 장애자가 그리 흔합니까? 별로 없지. 멀쩡하게 다 20년 건장한 청년이 되지 않았느냐, 몸이 건강하다면 그 속에 들어있는 인격은 장애가 세 개, 네 개, 다섯 개가 들어앉았지 요즘 멀쩡한 스무 살 봤습니까? 뭐 이만하면 우리 교회 최고의 청년이라 할 만한 스무 살도 한두 가지 장애는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세 가지, 네 가지, 다섯 가지 장애가 되어 예전으로 말하면 눔뱅이에 귀머거리에 빼딱하게 등이 마구 굽어 곱추 보다 더한 얼굴은 빡빡 얽어 험하게, 험하게 아이고 저것도 인간인가, 독사 같은 스무 살, 살쾡이 같은 스무 살 온 천하가 달라 들어 전부 엉망진창을 만들었는데 그게 스무 살에서 서른 살 이십대를 지나가며 스스로 자기 인격의 문제를 깨달아 고치면 야 얼마나 좋습니까?
그냥 간단하게 이십대에 결혼하고 진행되는 사람은 고쳐질 기회라도 있는데 이 시기 놓친 것들은 하나님 앞에 단정합니다. 신앙과 인격은 평생 고치기 어렵습니다. 이런 면을 하나님 앞에 놓고 보면 “저가 세우리라 저가 세우리라” 잘 자라 결혼하고 잘 안정된 사람, 이건 뭐 이 시대에 없는 신앙이고 이 시대에 찾아보기 어려운 인격인데 참 감사할 일인데 돌아보니 하나님이 위에서 광야 40년을 지켜 인도하듯이 ‘참 그리 된 겁니다‘ 이 말밖에 나올 게 없습니다.
그래서 간절하게, 간절하게, 간절하게 주여 잘 길러주옵소서, 그럴수 밖에 없는데 여기서 또 귀신이 길목을 딱 기다립니다. 하나님이 기르지 인간이 기른다고 되더냐, 그러니 뭐 요즘 아이들 그냥 행복한 대로 좋은 대로 풀어놓고 웃고 살거라, 부모 입장이 딱 그렇게 되면 부모 그 둘이 마음먹은 걸 보니 하나님께서 이 아이는 포기하셨구나, 안 봐도 못 고칩니다. 그리고 이것이 나중에 부모가 만사를 알 때 그 속을 애간장을 다 녹여 먹혀 죽든지 암 걸려 죽든지 아니면 차라리 죽지 이거는 공연히 살았다 하도록 피눈물을 그 아이가 세월 속에 다 난도질을 할 겁니다. 아이를 통해 난도질이 돌아온 겁니다. 아, 네 인격과 네 소원과 네 실체가 그러했구나, 그걸 보이는데 애들을 통해 보이는 게 하나님의 살아생전 심판입니다.
마지막의 결론은 네가 말씀으로 너를 고칠 기회에 네가 고치기를 거부하니 네 아이들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너의 내면을 신앙을 영생을 다 난도질한 것이라 옆집 보고 미리 고치는 게 낫지 뭐 애들인데 어떡합니까? 이 사람은 아직도 뜨거운 맛을 보지를 못했고 하나님께서 아직도 시작도 안 하셨구나, 그리되어집니다. “저가 세우리라” 하나님이 세우지 사람이 세우지는 못합니다. 옳고 바르게 좋게 만들어 놔도 알고 보니 하나님이 세운 겁니다. 하나님이 세웠는데 하나님이 아무나 따나 마음 들면 이거는 세우고 저거는 말고 그러시느냐 하나님의 주권 섭리이기 때문에 그러한데 하나님이 미리 표시를 해주십니다. 봄에 씨 뿌리는 사람을 보면 가을에 열매가 가능하겠구나, 희망이라도 가지는데 그 옆 논에 봄에 모 도 심지 않으면, 봄에 모를 심지 않으면 이거는 가을에 하나님이 능력으로 열매를 주실 건가 여기에 해당도 없습니다. 넌 뿌리지 않았으니까 가을에 추수는 절대 없겠구나, 네가 가을에 먹는 것이 있다면 훔쳐왔거나 아니면 남이 거지라고 동정을 했겠구나, 아닌가요?
저게 학교 다니면서 16년간 공부 다니는데 좋은 직장을 털컥 들어갔으면 하나님의 은혜인가? 굉장히 불행한 길로 지금 잘 나가는 롯과 같이 롯이 소돔 고모라를 택할 때 횡재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경쟁했으면 이기기가 어려웠을 건데 아브라함이 양보하는 판에 그냥 그 좋은 횡재하는 소돔 고모라 땅을 그냥 거머쥐고 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소돔 고모라로 간 것은 축복인데 가서 잘못됐다 그리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네가 소돔을 눈에 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들인 거다, 불러들인 거다 아브라함 때문에 기회를 줬고 마지막에 아브라함 때문에 소돔에 심판조차 기준을 낮추고 낮추고 낮추고 아브라함이 더 이상 기도를 할 수도 없을 만큼 낮춰, 네 짓이다 그 말입니다. 왜 부모 탓하냐, 왜 자녀 탓하냐. 왜 자녀를 가르친 학교와 세상의 분위기 탓을 하냐 세상과 분위기에 네가 좋아 뛰어들어 그쪽에 한 편이 됐지.
마지막의 결론은 믿는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이 1 대 1로 상대하십니다. 너하고 나하고 단 둘이 앉아 계산해 보자, 누가복음 15장 이게 청지기 비유입니다. 너하고 나하고 둘이 셈해보자, 단 두 사람의 셈입니다. 부모가 이러고 저러고 이러고 저러고 이래서 나는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딴 소리 말고 너보다 더 험한 부모를 만났는데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복된 사람이 되었느냐, 저는 원수 사울이 이 잡듯이 이렇게까지 수색을 하니 제 인격과 신앙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다윗은 그런 원수 때문에 더 나쁜 인간이 됐냐? 그런 원수 때문에 더 좋은 다윗이 되어졌냐? 핑계를 대는 순간 돌아올 회개의 다리를 자기 손으로 잘라버린 겁니다.
내 주변이 이리고 저리고 그럴 때 내 모습을 주님이 보여주신 겁니다. 나를 좋게 만들려고 했는데 내가 내 인생을 내가 쥐고 내가 망가뜨린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망치려고 마음먹고 나설 때는 도와줄 길은 없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겁니다. 누구 때문에, 누구 때문에, 환경 때문에, 저 인간 때문에 내가 어릴 때 부모 혜택을 못 받아서 뭐 부모가 나를 이렇게 감싸 안아서 내가 이렇게 무르게 됐습니다. 전부 귀신 소리입니다. 네가 귀신이구나, 네가 귀신인데 귀신이 귀신 탓을 하는구나, 그건 짜고 치는 거지 그건 정말 싸우는 것은 아니구나, 귀신은 귀신을 향하여 스스로 싸우지 않는다 했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딱 가르쳐 놓은 겁니다.
주님은 환경을 동원해서 어렵게 힘들게 만들어 가고자 했는데 그걸 악용해서 내가 내 인생을 완전히 내가 망가뜨린 겁니다. 그건 자기를 향해 회개해야 되지 남을 향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야긴입니다. “저가 세우리라” 좌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는데 보아스라는 말은 그에게 능력이 있다 주님이 세울 겁니다. 말만 아니고 세울 능력 역사가 뒤를 따라갈 겁니다. 내가 열심히 믿어 우리 교회의 기둥이 됐다 우리 가정을 이렇게까지 내가 일으켜 세웠다, 주님이 널 붙들고 앞에 세운 거다 인간아, 잘못되었을 때는 주님이 나를 세우려고 이렇게 힘 있게 능력을 동원했으나 내가 강팍하여 내가 내 신앙과 내 가정과 모든 걸 이렇게 만들어 만든 겁니다. 알아야 회개라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르는 죄는 회개도 못 합니다. 이게 애통 중의 애통입니다. 인간이라 죄 짓지 않을 수는 없는데 알면 돌아설 수는 있는데 알지 못하면 돌아설 수도 없습니다. 첫째는 알아야 되고 둘째는 아니 나 있는 힘을 가지고 생존을 위해 발버둥을 쳐야 되는데 이 나이에 뭐 이만큼 이렇게 됐는데 뭐 이런 데, 저런 데 하고 나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해결할 길을 주지 않았구나, 이리 됩니다.
소돔과 아브라함이 간 가나안 땅은 그리 먼 곳은 아닙니다. 가면 가는 곳이지. 소돔을 심판하러 간 천사들이 저물 때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기회는 다 간 겁니다. 기름 준비할 기회. 그런데 롯에게는 신앙의 양심이 있어 그 성중 안에 휘청거리지 아니하고 또는 가정에 따뜻하게 일찍 발 뻗고 자지도 못하고 성 입구에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가기는 소돔에 갔는데 소돔의 단물은 온 가족과 함께 빨아 먹었는데 돌이켜보니 영 쓴맛입니다. 입맛이 영 아닙니다. 뭔가 불안합니다. 그래서 소돔에 들어간 인간이 소돔 한가운데 그들과 어울려 뒹굴지 못하고 할 짓은 다 해놓고 해 걸음판에 성문에서 홀로의 외로이 뭔가 불안하여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겁니다. 아브라함 때문에 소돔에서 빼낸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그리고 모압과 암몬 족속이라는 기막힌 역사의 이 두 열매를 롯의 이름으로 하나님은 새겨놓았습니다.
성전을 두고, 두 기둥이 되려고 싸우는 것이 오늘의 우리의 행복이며 소망입니다. 저렇게 위대한 기둥이 내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외면하는 순간 네가 겸손하고 약해서가 아니라 죄악의 낙에 마구 빠져 들어가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그렇다면 그러든지. 둘 사이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두 기둥을 본당 앞에 우뚝 그리고 또렷하게 무늬를 박아놓은 뜻을 새겨보십시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토요일까지 주셨으니 주일은 참 완전하다 할 만큼 지켜야 옳은 겁니다. 주일날 역시 바빠서 토요일 저녁에 뭐 했더냐? 예전처럼 토요일 저녁까지 돈 벌었더냐? 토요일 잔뜩 놀고 피곤한 몸으로 끌고 오려니 어려웠습니다. 넌 주일을 어기려고 작정을 했구나, 토요일을 아주 작정을 했구나, 주일을 주일답게 지키지 못한다고 6천년 울어 싸서 6천년 마지막에 토요일까지 하루 종일 기회를 줬건만 어디다 대고 주일 핑계를 댈 겁니까!
1차-kh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