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새23.5.31 마10:22 항상 자기 안에 두 사람, 말씀과 다른 나는 살 수 없는 자신으로 만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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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새23.5.31 마10:22 항상 자기 안에 두 사람, 말씀과 다른 나는 살 수 없는 자신으로 만들 것

관리1 0 69 2023.05.31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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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1 수새

제목 : 항상 자기 안에 두 사람, 말씀과 다른 나는 살 수 없는 자신으로 만들 것

찬송 : 34장(주 예수의 강림이)

본문 : 마태복음 10장 22절 -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주의 이름 예수 이름 구원의 역사를 말합니다. 첫 번째가 사죄의 말씀의 생활입니다. 말씀에 틀린 것을 고치는 마음, 말씀과 다른 행위를 말씀에 맞추는 생활, 이것이 주님의 사죄의 수고로 우리에게 길이 열린 겁니다. 전선이 깔리는 바람에 전기를 쓰는 것처럼 무선, 무선 기지국들이 깔리는 대로 휴대폰이 터지는 것처럼, 수도관이 가는 곳마다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예수님의 대속이라는 것은 이런 가설입니다. 전선 없는 데 전기 아무리 발전소에 차고 넘쳐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아파트 1천 채가 모여 있는데 999채의 전기가 쏟아져도 전선 끊어진 집은 암흑입니다. 그 전선을 개통하고 이어버리고 새로 까는 것이 예수님의 수고입니다. 그거는 사용하는 우리가 깔지를 못하고 업자가 와야 됩니다. 주님의 대속, 주님의 고생 주님의 첫 번째 수고가 그런 수고입니다.

말씀이 귀에 들린다는 것 말씀이야 뭐 여기 천장, 여기 예배당 바닥인데 들리지 않습니까? 소리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말씀으로 들린다면 그건 내 청력이 아니고 내 이해력도 아니고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내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된 겁니다. 스위치를 켰는데 집에 불이 들어왔다는 것은 스위치가 전기가 아니라 발전소와 그 집 사이에 전선이 깔렸다는 말입니다.  또 보수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전선 없이 스위치 켠다고 불 들어오는 거 아닙니다. 스위치를 켰을 때 전기가 들어오면 발전소에서 그 집까지의 전기가 전부 복구가 된 겁니다. 내 귀에 이런 마음을 먹어야 되겠나, 말씀은 이런데 아무래도 말씀으로 살아봐야 되겠다, 들어봐야 되겠다. 말씀을 두고 안 믿는 사람도 들리는 그거 말고 믿는 사람에게 들리는 그 말씀 주님의 대속의 수고입니다. 그게 예수의 이름입니다.

이제 이게 들리면, 들리면 그다음 행동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마음이 괴롭든지 성질난다고 주먹이 나간 사람이 이제 주먹이 자제가 되든지 주님도 매양 새벽마다 한적한 들에 새벽 예배하셨는데 주님도 안식일 더하기 매일에 새벽이 있었는데 내가 새벽에 이래서 되겠나, 마가복음을 읽으며 1장, 2장 마가복음 1장, 2장 읽어 나가다가 주님도 처음부터 새벽 예배를 시작하셨구나, 이게 눈에 들어오면 이게 마음을 흔들면 하루 전날의 일정이 저녁 늦게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다가 일찍 자야 일찍 일어나니까 이제 일정부터 조정이 들어갑니다. 누가 제일 먼저 저항이 생기겠습니까? 새벽 예배 때문에 9시에 자자, 그러면 이제 부부 문제 당장에 생기는 겁니다. 집안 식구들의 일정 조정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다음, 불은 껐는데 잠이 안 오는데 또 이건 어떻게 해결이 됩니까? 이거 맞추느라고 며칠 또는 습관이 될 때까지 가족 투쟁 보이지 않는 내 내면의 그런 어려움들이 생기는 겁니다.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 무신론자 기독교 탄압하는 네로 같은 사람이 미워할 것인가, 그건 당연한 거고 그 모든 사람 중에는 너 속에 들어 있는 말씀과 다른 사람 이게 안 믿는 사람은 못 느끼는데 믿는 사람은 자기 속에 두 사람 믿고 나면 말씀으로 살아봐야 되겠다 라는 사람도 있고 말씀으로 살아봐야 되겠다는 그 사람이 불편해서 못 견디는 사람이 또 하나 더 있는 걸 발견합니다. 리브가 뱃속에 하나가 아니고 둘이 싸운 것처럼, 쌍둥이인데 뭔 쌍둥이한테 있었던 그 사람을 오늘 신약의 살아가는 평생의 자기 내면으로 말을 하느냐 구약은 육체의 이스라엘 신약은 신령한 이스라엘로 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사람 배 안에 쌍둥이 둘이 서로 다투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항상 두 마음입니다. 학교 갈까 말까? 공부할까 말까? 그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둔 두 사람, 말씀이 이랬다면 당연히 그래야지 만약에 그 사람밖에 없다면 속이, 사도바울하고 맞먹을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을 뛰어넘을 사람입니다.

로마서 7장 사도바울도 죽는 날까지 늘 마음속에 말씀을 두고 죄와 의의 두 마음이 부딪혔는데 사도 바울의 한 사람 속에 있는 그 둘을 두 마음이라 그러지 않고 사람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한 사람 속에 두 사람이 들어앉았구나, 그러면 될 건데 한 사람 마음속에 그러면 인간이 둘이 있다면 인격이 둘이란 말인데 그러면 다중인격이란 말인데 그게 말이 되느냐 ?야 인간아 네 말이 말이 안 되지 뭐 그 말이 말이 되느냐?

로마서 7장 한번 살펴볼까요? 248페이지입니다. 19절입니다.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마음속에 말씀으로 살아야 되겠다는 마음, 내 멋대로 살아야 되겠다는 마음 두 자기가 충돌하는데 20절입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이를 행하는 녀석이, “이를 행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도 있고” 22절입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한 사람 안에 두 자기 두 사람 둘이 부딪혀 싸우는 거 성경 없다고 못 느끼겠습니까? 인간이면 다 느끼지. 믿는 사람이면 신앙의 마음 그리고 그 마음에 반대하는 마음 두 자기, 두 인간이 부딪히는 걸 본능적으로 다 알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한 인격이 아닙니다. 계속 반복하는 게 뭐 거의 전부 제가 읽은 교리서 전부는 인간은 다중 인격이 아니라 그러는데 정신과 병원을 가보십시오. 다중 인격이 다 교과서 있고 다 있는 겁니다. 정신과에 가기 전에.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려워 떠는 아브라함이 있었고 아브라함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을 농으로 여기고 비웃는 아브라함도 있었습니다. 점점 말씀을 좋아하는 아브라함이 말씀을 싫어하는 아브라함을 눌러 마지막에는 말씀을 좋아하는 아브라함만 있는 듯 보였으나 처음부터 그런 거 아닙니다. 가나안을 주실 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 했는데도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가정 파탄 나고 자기도 죽을 뻔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게 말씀으로 살 때도 있고 못 살 때도 있고 두 자기가 있는 겁니다.

말씀으로 살아보려면 내 속의 투쟁이 항상 있는 것이라 그럴 때 바로 살아보려고 자기 속에 나쁜 자기, 잘못된 자기, 게으른 자기, 못된 자기, 부끄러운 자기를 틀어쥐고 좀 ‘인간이 되자’라는 교육이 예전에는 많았습니다. 지금은 못된 자기한테 마구 못되게 굴라고 밀어주라 그게 자유를 얻어야 된다 이게 현대판 교육이니 선생님이 아니라 교육 체계와 교육 내용이 미운 겁니다. 참 못된 것들.

대학 졸업 16년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는 시대가 됐습니다. 16년 대학 공부까지 하고 그 공부를 가지고 그게 돈벌이로 바뀌는 사람, 다른 데 다 두고 우리 주변에 보셨습니까? 열 명에 뭐 하나 있을까 없을까 그렇습니다. 열에 아홉이 대학 16년 공부해봐야 뻔히 못 써먹는 줄 알면서 그런데도 가야 되겠다고 밀어붙이니 그렇게 시간이 많고 그렇게 돈이 많은가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되었는가, 전국과 세계에 있는 교사들이 교수들이 교육학 하는 이 인간들이 인간은 배워야 된다, 이렇게 거짓말을 해서 전부 만들어 놓은 시대의 사기꾼들이 있지, 아닙니까? 예전에야 뭐 돈이 없어서라도 100명 중에 99명이 공부를 못 했습니다. 그때 세상은 제대로 굴러갔습니다. 공부하는 사람 학교 다니는 사람 학교 다니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인간은 생지옥이 되었습니다. 그 생지옥 된 게 어느 정도냐? 세상이 저절로 불에 타서 죽을 만큼까지 생지옥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생지옥이 되놓으니까 귀신은 발전이 됐다고 좋아하는데 귀신 눈에 보니까 그게 좋지 인간다운 인간이 보면 이거는 안 믿어도 이거는 이상한 세상이 됐고 말씀으로 보는 우리의 눈으로 보면 영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있다” 그러더만 그 악한 자 안에 있는 것이 맞기는 맞다 맡기는 맞는 때가 돼버렸습니다.

조선 500년의 서당 공부는 구원의 예수님은 몰라서 못 가르쳐도 애들 앉혀 놓고 인간이 되라, 그 말만 가르쳤습니다. 인간이 되는 글자 가르쳤고 인간이 되는 자세를 가르쳤고 말뿐이 아니라 선생도 앉아 있는 애들도 요즘 예배당 예배보다 더 조심하고 더 경건하고 더 인간되기를 노력했습니다. 욕심을 꺾어야 되겠구나, 말을 조심해야 되겠구나, 약속은 지켜야 되겠구나, 어려운 사람 볼 때 그거 잘해야 되겠구나, 아니면 천벌을 받는구나 서당 공부 내용이 그거밖에 없습니다. 수학 서당에서 그런 거 안 가르쳤습니다. 생물 물리 화학? 그 딴 거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건 안 가르쳐도 자연 속에 살며 필요한 만큼 눈이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연과 과학과 이공계의 기술을 틀어쥐고 쓸 수 있는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과학기술은 유치해도 과학기술을 쓰는 인간이 틀어쥐고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차 운전해서 안 될 인간이 좋은 차 뽑아서 마구 휘젓고 돌아다니고 앉았습니다. 그러니 사고 나지 사고 안 나는 기능 기술까지 있는데 그러니 안 갈 때를 더 잘 가서 인간은 다 붕괴돼 버렸지. 그러니 가정이 실종되었지. 가정다운 가정 보셨습니까? 가정 비슷한 가정은 혹시 보셨습니까?  뭐든지 하나를 깊이 분석해 들어가면 뭐 주변 전부와 부딪히게 돼 있는데 악령이 만인을 전부 제멋대로 살도록 만들어 놨으니 만인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벌어졌으니 이거는 세계 1차 대전 2차 대전보다 그 전쟁 끝난 뒤에 전쟁이 더 심한 전쟁인데 세상이 좋아졌다고 이렇게 말을 하니까 이런 게 가치 충돌입니다.

어쨌든 말씀이란 말씀으로 말씀은 어둠 속의 빛인데 알려주는 건데 내 속의 지식과 사상 가치관부터 샅샅이 살펴 내가 사는 내 집 안에 쥐 소굴이 있는지, 뱀 소굴이 있는지 아니면 뭔 더러운 것이 있어서 냄새가 있는지 내가 사는 내 집안은 후레쉬로 가지고 샅샅이 살펴서 알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내 속에 들어앉아 있는 교육에 대한 지식, 인생 가치관에 대한 지식, 인간 40대의 지식, 50대의 지식, 청소년에 대한 지식, 노년의 지식 어떤 것이 들어앉아 있는지 말씀으로 자기 속에 있는 지식의 종류, 지식의 방들을 일일이 열어보고 들여다봐야 됩니다. 죽은 고양이라도 하나 골방에 들어앉았으면 온 집에 냄새고 벌레고 감당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은 냄새가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잘 못 느낍니다. 손님이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아이쿠 이게 뭐야? 손님의 그 냄새가 지금 맡는 겁니다. 그런데 손님 그 인간도 자기 집도 그렇지 온 골목도 그렇지 천하가 다른 냄새니 지금 냄새를 못 맡는 겁니다.

말씀으로 후각을 시각을, 청각을 말씀으로 나의 촉각과 미각을 전부 다 바꾸어 말씀과 다른 게 보이면, 다른 게 들리면, 다른 게 번져 들어오면 아이고 썩은 송장 냄새, 참 견디기가 어려우나 이렇게 되어 지는 자기를 만들어야 해결이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말씀으로 듣고, 말씀으로 보고, 말씀으로 생각하고, 말씀으로 판단하고 가치도 행복도 하루의 일정도 만사 모든 것도 늘 노력해야 됩니다.



1차-k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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