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후23.5.28 마10:22 최후 성공이 성공, 그 결과에 맞춘 오늘의 인내와 변동의 모든 선택 계산과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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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23.5.28 마10:22 최후 성공이 성공, 그 결과에 맞춘 오늘의 인내와 변동의 모든 선택 계산과 판단

관리1 0 82 2023.05.28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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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8 주후

제목: 최후 성공이 성공, 그 결과에 맞춘 오늘의 인내와 변동의 모든 선택 계산과 판단

사회: 김 희락
찬송: 59장(피난처 있으니), 103장(저 높은 곳을 향하여) / 158장(내 주의 지신 십자가)

본문: 마태복음 10장 22절 -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다 같이 묵도 드림으로 예배 시작하겠습니다.

(기도)
내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리 가운데 있는 양과 같이 우리를 일부러 연약하게 만들어 주님만 바라보게 만드신 주님. 시시각각 험악해지는 세상 가운데 저희의 마음이 주님과 멀어지지 아니하도록, 오전에 이어 오후에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뜻이 몰랐던 것은 알게 하여 주옵시고 잘못 안 것은 바로 알게 하사, 오해되고 삐뚤어진 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과 나를 향한 주의 뜻에 굳건히 서서 이 말씀으로 이제 실행을 할 때에, 교만이나 낙망으로 앞이 보이지 않고, 주변과 다르다고 하여 이 믿음이 중간에 난파되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며 이 험악한 세상을 구원으로 이루어 나갈 수 있는 저희가 되도록, 이 시간에도 성령과 진리의 역사로 진이 동행하여 주옵소서. 세우신 주의 종 영육의 강건함으로 붙드시오며 이 노선을 지키는 모든 강단 위에 특별한 은혜로 동행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그 뒤에 23절에 봐보면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이 동네는 현실입니다. 현재 또 저 동네로 피하라. 여기서 어려우면 도망을 가거라. 그럼 현실 도피가 되는데 신앙이란 기본적으로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22절 뒤에 보면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신앙은 계속이고 신앙은 끝에 마지막에 성공이 성공입니다. 근데 22절에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라고 해놓고 23절에서는, 지금 동네에서 핍박하거든 그 다음 동네 그 다음으로 얼른 옮겨버려라. 피난을 말하는데 이렇게 피난을 할 바에는 어려운 게 있겠습니까? 직업도 바꾸고 가정도 바꾸고 시대도 바꾸고 주변 따라 그냥 피하고 도망갈 것 같으면 별 문제가 없는데, 앞에는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절 근데 왜 현재 동네 현실에서 핍박하고 못 견디면 피하라고 그랬는가? 이 동네에 전할 걸 다 전하고 이 현실에서 고칠 걸 다 고쳐보고, 그다음에 더 이상 전할 것이 없거든 그 다음 동네로 또 옮겨 또 자라가라 하는 말씀입니다. 초등 6년 공부를 다 하면 초등학교 버텨야 되고 죽는 날까지 초등학교 6년 공부를 해야 되겠습니까? 중학교로 진학을 해야 되겠습니까? 학교에 왕따가 있어 다른 학교로 옮기는 것은 현실 도피입니다. 도피될 수 있습니다. 초등 6년을 공부하고 중학교로 올라가는 것은 도피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자라서 그거는 성장을 하기 때문에 그다음 단계라고 그럽니다. 주신 현실 하나하나 살피고 고치고 배우다 보면 인생 전체적으로 어릴 때 또 자랄 때, 어른이 되어 또 마지막에 죽을 때까지 단계별로 할 일도 있는 법이고, 한 주간을 두고 주일과 평일도 있는 법이고 또 하루를 두고 봐도 가정생활로 출발하고 사회 생활하다가 또다시 가정으로 돌아오고, 하나님이 주시는 현실을 따라 단계별로 가는 것이지 그거는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22절을 먼저 살펴보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여기 너희는 1절에 열두 제자입니다. 믿는 사람. 자기 속을 들여다보면 12가지 제자들이 다 들어 있다고 지난번에 살펴봤습니다. 자기가 자기 속을 들여다볼 때 베드로처럼 그런 장점 그런 단점도 있는 것이고, 우리가 우리 교회 내부를 봐도 가룟 유다 노릇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근데 가룟 유다가 나중에 또 베드로가 되기도 하고 그럽니다. 원래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제자들대로 그 인생을 걸어갔으나, 오늘 우리는 내속에 베드로 같은 장점 내속에 가룟 유다 같은 요소 다 섞여 있습니다. 어떤 성자라도 그 사람 속에는 천사만 들어 있느냐. 동방의 의인 욥을 들여다보니 처음에는 천사만 들어 있는 줄 알았는데, 욥 속을 심하게 뒤흔들어 보니까 드디어 욥 속에 원망이 툭 튀어나오는데 보니까, 욥 속에도 가룟유다 같고 귀신같은 게 들어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잘 몰랐지. 동방의 의인 욥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생에도 보면 그 중간 중간에, 더러운 귀신도 있고 병도 있고 약한 부분도 다 있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오늘 이 오후에 내속에는 열두 제자와 같은 요소가 고루고루 다 있다 생각하고 눈 뜨고 쳐다보면, 가룟유다 정도 되는 나는 내 손으로 눌러 미리 막을 수가 있습니다. 또 내속에는 아무리 신앙이 없어도 베드로 같은 장점도 있는데, 이 베드로의 장점은 가다가 일을 잘 냅니다. 급하다 보니까. 베드로의 장점에 실수하는 그 부분만 쏙 빼버리면 이게 바로 굉장한 복이 됩니다. 1절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 자격, 실력을 주셨더라.

의사가 남을 치료하는 기술이 익혀지면, 자기 속부터 얼른 살펴 자기가 건강해야 환자를 어떻게 할 거 아니겠습니까? 남 고치다가 자기 못 고치는 불행 없도록 열두 제자에게 주신 권능은 자신을 고쳐보고, 자신을 고쳐보고 남을 보니까 잘 보이고 또 남을 고치다 보니 이런 것이 내 속에도 있겠구나. 해서 내 속에 숨어 있는 또 다른 것을 발견하고. 이게 신약의 복음입니다. 그래가지고 16절까지 가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으로 내속을 고쳐보려고 하면, 내속에 온갖 마음이 들고 일어나서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하고 내속에도 저항이 일어납니다. 학생이 공부하려고 1월 1일 날 결심하면 연휴는 쉬고 1월 3일부터 하자 이 마음이 먼저 생깁니다. 이게 원수인데 1월 1일 날 공부하겠다고 각오한 고3 아이에게 연휴 이틀은 푹 쉬고 이제 3일부터 하자. 3일이 되면 이틀 쉬었으니 3일부터 시작을 해야 되는데, 아직까지 안 간 손님이 있고 아직까지 못 만난 친구가 있으니 마지막으로 만나서 이별하고 그리고 공부하자. 또 3일은 놀아야 될 것 공부 안 할 여러 가지 시험이 또 들어옵니다. 공부를 해보려고 결심한 사람, 뭐든지 각오해 본 사람, 뭐든지 옳은 일을 해보려고 마음먹으면, 남이 아니라 내속에 가지가지 원수들이 별의 별 소리를 다 하게 돼 있습니다. 이게 바로 내속에 있는 이리입니다. 이리.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 나는 양이고 내 주변은 다 이리다 그러지 마시고 내가 내 속에 있는 이리가 몇 마리인지, 어떤 것이 무슨 이리 노릇을 하는지 내속의 원수를 먼저 찾아내서, 이걸 이길 줄 알아야 몸 밖의 이리를 발견하고 이길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성공도 그렇고 공부도 그렇고 자기 건강도 그렇고, 그거야 잘하나 못 하나 하루 살고 가는 건데 신앙의 원리도 같습니다.

모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실력, 권능, 자격을 받았으면 나부터 고치자. 내가 나를 고쳐보려면 내 속에 별별 마음이 들고 일어나서 꼭 그렇게까지 해야 되느냐고 그럴 때, 내 속에 반대를 내가 꺾지 못하면 내 밖에서 오는 원수 이기는 것은 포기하시는 게 낫습니다. 내가 내 속에 있는 원수와 싸울 때 첫 번째 뱀같이 지혜로워라. 고3 1월 1일 공부하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연휴니 쉬자 라는 마음이 딱 들어올 때, 지난 18년을 놀았으니 연휴는 충분하다 고2까지 18년을 놀았으니 당겨서 미리 놀았으니 됐고 1월 1일 오늘부터라도 해야 늦지 않다. 이게 뱀의 유혹 간사를 넘어가는 지혜입니다. 지혜. “뱀같이 지혜롭고” 내가 말씀 생활하지 못하도록 내 마음에 게으른 마음 이런 생각처럼 별별 마음이 생길 때, 이게 뭔 뜻인지 어떻게 나를 말씀 생활 못하게 지금 꿰는지를 알아야 그다음 넘어갑니다.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 하라. 성경에 비둘기는 성령의 역사 성령의 운동을 말합니다. 나를 말씀 생활 못하게 별별 생각이 다 들 때 그것도 막아서야 되고, 한편으로는 내가 가야 될 길을 신앙의 양심에 귀를 기울여 보면, 많은 말씀 중에 이 말씀은 꼭 내가 붙들고 가야 되겠다. 이건 성령만 가르치지 남이 가르치지를 못합니다. 평소에 말씀 평소에 기억하는 많은 말씀 중에 오늘은 이런 때는 이런 일을 닥쳤을 때는, 현실이 이렇게 될 때는 많은 말씀 중에 어느 말씀이 내게 가장 필요한가. 이건 신앙 양심 속에 성령이 마음을 열고 가르쳐주는 인도가 있습니다. 그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 비둘기같이 순결하게 걸어가는 겁니다. 1절에 믿는 사람은 열두 제자와 같다. 16절 더러운 내속에 잘못된 걸 씻어버리고 고장 난 걸 고쳐버리고, 내 속에 약화되고 힘없는 것은 해야 할 일을 하나 둘 실행하다 보면 힘은 생깁니다. 그렇게 막상 하려다 보면 내 속에서 그러지 말자는 별의별 마음이 다 생기는데, 주로 게으른 마음 아니면 성깔 같은 게 내속에서 말리는데 이걸 눌러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가면 그게 16절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나아가려고 들면 22절에 예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 지난번에 네 번 네 가지 말했습니다. 오늘 오전에도 네 가지를 살폈습니다. 예수 이름, 말씀 생활 그게 예수 이름입니다. 예수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인데 구원이란 말씀 생활이 구원입니다. 말씀 안에 나에 대한 주의 뜻, 주 뜻이 그게 예수 이름입니다. 말씀 속에 내가 붙들고 가야 되는 나에 대한 주님의 소원, 주의 뜻 그 뜻을 붙들고 가는 것이 주님과 동행입니다. 그게 이어지며 내 생활에 펼쳐지면 죽기 전 오늘부터 천국을 조금씩 만나게 되고 넓혀가게 되어 집니다.

22절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주의 말씀 생활하려고 노력해 보거라. 말씀 속에 나에 대한 주님의 뜻을 찾아 보거라. 내 마음이 주님과 하나 되어 하늘나라 천국의 생활을 정말로 하려고 해 보거라. 그리 되면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 내 마음 속에 그리 살면 분해서 되겠냐. 이런 모독의 소리를 이런 화나는 소리를 듣고 내가 참을 수 있느냐. 내속에 자존심이 들고 일어나서 손을 한번 보고 나서 그다음 믿지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어떨 때는 오기, 자존심, 집안의 내력, 그동안 살아온 자기의 경력, 게으른 나태심, 내 속에 별의별 생각, 별의별 행동, 별의별 나의 지난날에 악습, 악성이 들어서 말씀이 맞기는 맞지만은 이 말씀대로 살다가는 분해서 안 되겠다. 돈 손해 봐서 안 되겠다. 또는 그 말씀이 맞기는 맞지만은 그 말씀대로 실행을 하자니 귀찮아 안 되겠다. 별별 마음이 다 들고 일어나면서 거세게 저항을 합니다. 이게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옆집 가족 이웃의 미움을 받기 전에 말씀으로 살아보려면 내속에 옛 사람부터 들고 나섭니다. 어제의 나, 작년에 나, 학교 다닐 때 교과서를 배운 교과서의 내 지식, 미래에 대한 염려 이거 전부 나 아닌 나 속의 여러 가지 종류의 나입니다. 사람은 겉으로 하나나 속을 들여다보면 하나가 아닙니다. 베드로 속에도 보면 예수는 돈 안 된다고 버리고 세 번이나 도망갔습니다. 베드로 속에도 예수님은 돈 되지 않는다고 내버리고 도망간 요소가 세 번이나 들어앉았습니다. 죽는 날까지 베드로를 노리고 있다가 기록에는 없고 그게 주후 64년인가 68년, 네로 황제가 로마 바닥을 불바다를 만들 때 베드로 찾아서 난리인데, 이미 베드로는 평생을 주를 위해서 목숨 걸고 전도했고 주님보다 더 큰 많은 기적을 베풀었던 능력에 베드로인데, 이제 죽어도 되는 나이인데 네로 황제가 저 예수 두목 베드로 잡아 죽이라고 생난리를 하니까, 베드로가 주를 위해 죽는 것은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런데 아직도 교회 안에는 어린 교인들이 있어서 어린 주일학생 어린교인 이제 막 믿은 사람이 잘 믿도록 가르쳐야 되니, 나는 죽을 준비가 돼 있고 오래 살았으니 죽어도 되지만은, 어린 교인을 위해서 잠깐 피한다고 베드로 차는 로마에서 빠져나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성경에 없습니다. 교회사 기록입니다.

로마 언덕을 막 넘어가려는데 저 앞에 사람이 오더라. 저 앞에 사람이 오더라. 가까이 오는데 보니까 주님이시더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네 놈이 메기 싫은 십자가 내가 지러간다. 라는 그런 환상을 봤다. 그럽니다. 제가 가야지 뭔 소리입니까 그러고 돌아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더라. 성경에는 없고 교회에는 역사에 남아 있는 기록입니다. 그랬을 겁니다. 믿어보면 그런 것은 아는 겁니다. 뭐 내가 뭐 돈 때문에 돈한테 매여? 좀 믿어보고 은혜 받아본 사람은 나는 돈은 초월했다. 돈 까짓 것은 초월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나이 많아 이 돈 없어 다른 사람한테 불편을 끼칠까 봐 그래서 뭐 돈 좀 모으는 거지. 돈 모으는 게 죄입니까? 모아야 주님이 기뻐하시지. 그러다 보면 이제 십일조도 좀 모아놓고 해야 될 연보도 모아놓고 그러면서 이제 주님은 나를 다 아시겠지. 내 마음을. 오늘 십일조 하나 나중에 마지막 죽을 때는 다 할 건데. 손대서 안 되는 걸 딱 손대면 그게 바로 이방인의 길로 가는 겁니다. 애매하면 그게 사마리아인의 고을에 들어가 앉는 겁니다. 이렇게 저렇게 꼬시면서 죄를 짓게 하는 게 귀신이 뱀처럼 밀었다 당겼다, 더 했다 뺐다, 이 말했다 저 말했다, 변덕스럽게 사람을 홀리는 게 이게 귀신에 죄짓게 하는 수법이고, 이걸 성경은 간사라 간교라 그러고 동물로 말하면 그걸 여기 뱀이라고 그랬습니다. 이게 인간의 본능인데 그래서 내 마음속에 별별 마음이 다 일어나면서, 어쨌든지 말씀 떠나게 하려고 내 속에 이런 생각 저런 마음이 들어올 때, 예수의 이름 인하여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말씀과 말씀 속에 있는 주의 뜻과 주님과 동행과 천국 생활에 집중을 하다 보니 안 되겠다 하고 그냥, 제쳐버리고 나아가면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쌍둥이 형제가 엄마 뱃속에서부터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복에 계통에 서고 싶으니 에서가 뱃속에서부터 경쟁자가 되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그랬고 자자손손 또 그렇게 내려옵니다. 쌍둥이까지도 그렇습니다. 쌍둥이는커녕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면 어떨 때 이럴까 저럴까 흔들리는 마음은 생기는 법입니다.

그럴 때는 성경의 말씀의 원리와 그 말씀 속에 주님이 원하는 뜻을 살피고, 그리고 주님은 지금 십자가를 메러 로마 시내로 들어가느냐, 아니면 다음 주일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서 일시 이 동네에서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23절 베드로가 로마에서 빠져나올 때는 죽기 싫어 도망간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10장 23절이 기억이 난 겁니다. 이 동네에 로마 시내에서 박해를 하거든 또 로마를 떠나 다른데 가서 전도하고 가르칠 때가 많으니, 얼마나 가르칠 때가 많은데 베드로 선생님이 죽어서야 어떻게 다음 세대를 교육을 시키겠냐. 다 피난 갈 때는 그런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주님도 피할 때는 피했습니다. 사도바울도 피할 때는 피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3절 이 동네에서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성경입니다. 근데 말씀은 그런데 근데 그 말씀 핑계로 너 살고 싶어 가는 거냐. 정말로 전해야 되는 사명이 있어 그다음 가는 거냐 이거는 주님이 물어보실 겁니다. 우리 공회교회들은 부산 여기 순천 여러 곳에 있다 보니까, 중매를 서다보면 이제 결혼해서 이리도 가고 저리도 옵니다. 결혼할 형편이 부산으로 가야 되기 때문에 가는 사람, 결혼할 형편이 신풍으로 와야 되기 때문에 오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근데 그 중에는 말은 그런데 집을 한번 떠나 타향살이도 하고 싶은데 이거 그냥 가면 가출이 되는 거고, 결혼 같은 걸로 한번 그냥 옮겨버리면 합법적으로 남보기 보기 좋게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건 남의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정말 목회가 소원이 되어 세상을 버리고 목회를 나가는지, 세상에 돈 벌 자리가 없으니까 밥벌이 하러 목회 핑계 대고 나가는지, 해외여행 간다고 선교 가는 건지 사도바울처럼 정말로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다 보니까 선교를 간 건지. 그 말씀 속에 무엇이 들어앉았는지 그거는 남이 알기가 어렵습니다.

나도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 좀 가보고 싶은데 따로 갈 돈도 없고 기회가 없다가 선교사 모집한다니까, 이참에 해외여행도 가고 겉으로는 선교사라고 이렇게 간판 걸면 참 보기도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가는 분들도 없지는 않을 겁니다. 보통은 없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는데 저는 거의 다 그렇습니다. 그래 보는 사람입니다. 정말로 공부를 하다보니까 집을 떠나 유학을 할 수밖에 없어 다른 곳으로 가고 해외로 간 건가. 이제 부모는 돈 붙여줄 테니까 맨날 보던 부모 얼굴 좀 안 볼 기회가 돼서 일부러 좀 멀리 가버렸는가. 목회도 그럴 수 있고 선교도 그럴 수 있고 결혼도 그럴 수 있고, 직장도 까다롭지만은 그 과장 그 부장 밑에 월급 받는 것이 양심적으로는 맞기는 맞는데 직장생활 10년 했지 과장 부장 까다롭지, 근데 친구가 다니는 저 회사는 연봉 더 준다고 그러지 출장도 많다 그러지. 다니는 직장에 다니는 것이 맞지만 호기심도 있고 가출 심리도 있고, 저 인간 보기도 싫고 그러던 차에 제의가 오니까 말로는 뭐 이렇고 저렇고 말을 하는데 결국은 그 속에 깊이 들어앉아 있는 너의 중심은 뭐냐. 하나님은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사람은, 사람은 뭘 본다고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느니라. 인간은 다 속여도 나는 네 소가지를 본다. 너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이 뭐냐. 종교라는 것은 그 중에 교회를 다니는 신앙이라는 것은 주님이 내 속을 정말 들여다보고 계시니, 인간은 다 속여도 내 중심을 들여다보는 주님은 속일 수 없다. 이걸로 가지고 자기가 자기 속을 들여다봐야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 술자리 가서 술 한 잔 하고 술 안 먹는 데 가서 술 안 먹고 그냥 공부할 때 공부하고 노는 친구 만나 놀고, 뭐가 뭐 세상 살아가는 데 문제 생기겠습니까? 고3이 노는 시간에도 공부하고 공부하는 시간에도 공부하고 몸이 아파도 공부하고 좋을 때도 공부하고, 그래야 그게 고3이지. 그런 고난을 겪고야 그다음 한 단계 발전을 하는 거지. 뭔 놈의 놀 때 다 놀고 성질나면 다 뒤엎어 버리고 자기 좋을 때만 헤실헤실 웃으면서 다 되는 성공이란 이 땅 위에 그런 거 없습니다. 도둑놈도 그러고는 성공 못합니다. 비가 와서 석 달 가뭄에 내일 설날이라고 어둡지 다 놀지 다 방심할 때, 그때 한 탕 해야 1년 벌 것을 벌지. 도둑놈도 성공하는 도둑놈들은 남다르게 뭔가 다 하는 겁니다. 죄악의 낙을 누려도 그런데 세상 성공도 그런데 주님은, 내 이름 붙들고 끝까지 견디는 자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성공한다. 승리한다. 천국 생활한다. 구원을 얻으리라. 신앙이라는 거는 좀 꾸준하게 계속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때 누가 제일 못 견뎌서 반대하고 들고 나오느냐. 부부의 상대방보다 가족보다 이웃보다 옆에 교인보다 내속에 인내심 없는 성깔 그 변덕이 내속에 있는 변덕이, 작심 3일이 못가도록 나를 뒤흔들어 3일을 못 가게 하는 그 원수는, 내 밖이 아니라 내 속에 들어있는 그런 날랜 재주 많은 변덕스러운, 내 속에 영악하고 내 속에 장점이 보통 인내를 못 가지게 합니다. 좀 등신은 모르니까 우직하게 좀 가는데 머리 좋은 사람, 재주 좋은 사람, 사교성 좋은 사람, 날랜 사람, 민첩한 사람, 남들이 우수하다는 사람의 특징은 끈덕지게 쭉 계속하는 게 보통 없습니다. 이게 함정이 있습니다.

아이큐 좋은 순서로 인내가 없다 그리 보면 아마 거의 맞을 겁니다. 아이큐가 좋을수록 인내는 드물 것이다 그리 보면 거의 맞을 겁니다. 아이큐 좋은 사람이 인내까지 같이 겸비를 하면 호랑이가 날개를 달았고 이건 호랑이가 날개를 단 정도고, 바다의 상어가 곰처럼 돌아 댕기는 이런 허파를 가졌단 말인데 하나님은 세상을 그렇게 운영하지 않으십니다. 하나 주면 하나 빼버리고 장점 주면 단점 주고, 한 사람이 너무 위대한 성자가 되면 가족을 좀 빼버리고 뭔가 남자도 여자도 어떤 사람이든 하나 장점 주면 단점을 같이 끼워주십니다. 머리 좋을수록, 민첩할수록, 사교성이 있을수록, 눈치가 있어 투자 잘할수록, 말 잘할수록, 날래고 민첩하고 앞서고 모든 일의 경쟁에 앞서가는 사람 일반적으로 보면 꾸준하게 그냥 한 길을 끝까지 붙들고 가는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게 마지막인데 이게 승리인데 이게 최종 하나님의 목적인데 여기서 다 실패해버립니다. 그래서 불신자들도 초등학교 1학년짜리 그림 동화에다 대고 토끼와 거북이라는 놈이 있었다. 토끼는 날래서 뛰면 그냥 산꼭대기까지 간다. 거북이는 석 달 열흘 가도 못 간다. 둘이 달리기를 하니까 토끼가 이겼겠냐? 거북이가 이겼겠냐? 나이가 어릴수록 토끼가 어립니다. 그럽니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토끼 그놈이 이길듯한데 마지막에 보면 대개는 거북이가 이기더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 좀 거북이 비슷한 사람을 소개할 때는 제가 참 사람이 괜찮습니다. 하고 이렇게 소개를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목사가 말만 잘해가지고 그냥 막 포장을 저렇게 한다. 저렇게 꼬셔야 결혼이 되겠지 그러는데, 설마 목사 직업을 가지고 시골 한 교회에서 35년 목회하면서 장돌뱅이처럼 물건만 팔면 된다고 도망 갈 사람이겠습니까? 제가 하는 말 쉽게 들으면 곤란하십니다.

우수한 게 좋기는 좋지만은 마지막까지 우수해야 그게 좋지. 우선 우수하고 뒤에 보면 밤눈 밝은 괭이 전부 다 실패한다고 그 꼴 되면 곤란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도 총기가 있고 재주가 있고 날래면, 주여 이거 토끼를 주셨는데 이 토끼를 어떻게 해야 거북이를 만들겠습니까? 이게 믿는 사람의 기도고 엄마들의 소원이라야 됩니다. 좀 느려도 토끼가 아니라 거북이 같이 든든한 걸 맡기면 갠 느리지만 잘 관리만 하면 되겠구나. 이렇게 복인 줄 알아야 되는데 거북이 같은 걸 줘 놓으면 이걸 갖다가, 온 가족이 뒤흔들어 가지고 토끼를 만들고 그냥 생쥐를 만들고 족제비를 만들어 버립니다. 우선 데리고 놀기에는 족제비가 낫겠지. 3일 데리고 놀고 3년 데리고 놀고 우선 보면 족제비 같고 생쥐 같은 게 날래서 좋지만은, 결혼이 100m 달리기입니까? 마라톤인데 직장을 갖다가 100m 달리기처럼 이리저리 자꾸 바꾸는 사람보다, 한 번 들어가면 그냥 죽는 날까지 내 손으로 안 바꾼다. 이러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그 좀 인내라는 게 있어야 되는 세상인데, 세상도 그런 말 없고 살아본 어른들이 가정에서라도 그런 말을 좀 해야 설교 시간에 이런 말을 줄이겠는데, 요즘 어른들은 어른들도 어른이 되지 못해서 그런 말 하는 사람 없고,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최종의 신앙의 승리의 구원도 나중까지 견뎌야 인내가 있어야 되는 것이고, 신앙은 인내로 가지지만은 세상은 끝까지 가서 안 되고 날래야 되느냐. 세상도 괜찮은 세상은 그렇게 날래면 곤란합니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저인간은 소속을 몇 번 바꿨는지 자기 하는 말을 몇 번을 바꿨는지 많이 바꿀수록 박쥐라 그러는데, 안 믿는 세상도 박쥐는 좀 징그럽고 싫어해야 그게 정상입니다. 박쥐가 좋아서 전부 박쥐같은 인생 되라고 박수 치면 세상 그 세상 오래 못 갑니다. 이게 세상의 마지막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좋아하는 세상의 변혁은 좋은 쪽으로 간다는데, 그렇게 변혁, 변혁 가다가 낭떠러지서 한 번 대개 깨질 겁니다. 믿음이란 신앙이란 주일이란 주일의 예배란, 주님이 마태복음 10장 22절에 주의 이름 인하여 네 속에 옛 사람부터 네 속에 너라는 사람부터, 말씀은 그게 맞지만은 그 말씀 믿고 어느 세월에 어느 세월에, 네 속에서부터 울화통이 생겨 기다리지 못하겠다. 그럴 거다 그럴 때 좀 눌러 놓거라. 이러자 저러자 할 때 그 좀 뿌리치고 중심을 딱 잡고 좀 버티거라. 주의 이름 때문에는 개나대나 하나 붙들면 무조건 끝까지 가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 내 이름은 예수의 이름입니다. 말씀 생활을 위해서는. 말씀 속에 주님이 내게 무얼 원하는지 주의 뜻을 살피는 이 문제만을 두고는 둘. 이렇게 되면 주님과 내가 한 편이 되겠구나. 주와 동행. 주와 동행을 두고는 이거는 양보하지 말고 변하지 말고 끝까지 이것은 버텨 버리거라. 예배당 간판을 하루에 12 번 바꾸는 것을 주님이 참 기뻐하겠다.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면 하루에 12번도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다. 성경에 이렇게까지 기록을 했는데 교회마다 자기 교회 이름을 3번 4번 5번 바꿔 저 애양원 분들 자기 교회 이름이 뭔지도 모릅니다. 애양원 교회 이름이 몇 번 바뀌었는지 그분들도 모릅니다. 한 20년 넘게 거의 20년 넘게 7833이 신풍교회 전화인데, 7833에 전화가 와가지고 애양원 교회지요 꼭 그래 묻습니다. 여기는 신풍교회지 애양원 교회가 아닙니다. 한 20년제가 안내를 그리했습니다. 뭐 그 정도면 말 다 했죠. 애양원 교회다 됐고 애양원 교회라고 이렇게 안내가 들어가면 신풍 교회로 자꾸 오니까, 그쪽에서 좀 애양원 교회라고 표시를 하시라고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남의 교회 한 번 두 번 얘기해야지 그거 10번 20번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름을 많이 바꾸다 보니까 그 교회를 다니면서 자기 교회 이름이 노회에 뭘로 돼 있는지 총회에 뭘로 돼 있는지 전화국에 뭘로 돼 있는지, 세상에 뭘로 올라갔는지 그렇게 자꾸 자꾸 자꾸 바꾸면 뭐 얻어먹는 것도 있겠지마는, 사람의 이름을 뭔 장사도 아니고 교회 이름까지야 그래서 되겠나. 기도 잘 해보시고 우리 교회도 교회이름을 자꾸 바꾸는 것이 정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죽는 날 후회하지 않고 바꾼 걸 잘못했다 하지 않으려면, 얼마든지 바꾸시면 됩니다. 근데 성경은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고는 분명히 했습니다. 그 말씀 앞에 정말 미안하지 않으려거든 뭐든지 이런 식입니다. 이게 예수 이름입니다. 예수 이름이란 말씀 앞에 죄송한 일 없도록 말씀 속을 들여다보니 주님이 내게 대해서는 이런 뜻이겠다. 여기에 미안하지 않도록 이게 예수 이름입니다. 정말로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정말로 나하고 동행을 하겠냐. 정말로, 정말로 이게 하나님 동행이냐. 지금은 하나님 동행이라고 큰소리치고 남들한테는 설득을 해놓고 훗날 되돌아보며 그때는 깜빡 실수했습니다. 이런 일은 없어야 됩니다. 무식한 거 하나님 용서하시고 미련한 거 하나님 기다려 주십니다. 근데 알면서 간교하게 뒤바꾼 것은 하나님께서 괘씸하게 생각하십니다. 고범 죄라고 그거는 회개도 안 받아줘 버립니다. 너 알고 죄 지었지 않냐? 너 알면서 뻔히 속을 다 읽으면서 죄 짓지 않았느냐? 그건 성령훼방 죄 다른 말로 고범 죄는 사하심이 없다 이렇게까지 적어놨습니다. 사하심이 없으면 그 죄 때문에 지옥까지 갑니까? 천국 가는데 문제 되는 죄는 기본적으로 다 해결을 했습니다. 두 번째 신앙의 생활에 회개할 죄는 고하기만 하고 기도만 하면 없어지는 것이 정식인데, 성령훼방 죄에 알고 작정하고 고의로 지은 죄는 실행으로 바꿔야 바뀝니다. 안 바꾸고 그건 말로는 안 됩니다. 다른 죄는 말만 하면 다 해결해 주십니다. 성령훼방 죄의 고범 죄는 바꿔야 비로소 해결이 되어 집니다. 가정으로 예를 들어 아무리 비싼 물건을 깨뜨려도 세 살짜리가 밀어 깨뜨렸으면 세 살짜리가 뭘 압니까? 아깝지만은 100만 원짜리 도자기를 깼든지 1천만 원짜리 그림을 찢었든지, 세 살짜리가 죄를 저질렀으니 이거는 모르고 한 겁니다. 그림을 치워야지 도자기를 치워야지. 그 아이한테 이게 국보다 이게 천만 원짜리다 설명이 되겠습니까? 세 살짜리한테. 동생이 용서받는 걸 보고 30살짜리 이모가 막내 삼촌이, 천만 원 10억짜리를 찢어도 용서해 주네 그러고 저게 얼마짜리인지 알면서 찢고 그런 것은 그말로 용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것은 그다음에 그런 죄를 지을 기회가 또 왔을 때 세 살 아이는 몰라서 그랬으니 그러지 말아라. 그리고 해결했으나 알고 지은 나는 그런 일이 또 닥쳤을 때 행동으로 돌아서야 회개가 된다. 굉장히 이게 논리적이고 교리적이며 이게 무서운 말입니다.

예수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놨습니다. 나 예수 이름으로 다녀도 나는 말씀 생활에도 주변에서 모두 들 박수 치고 그러던데 왜 그렇게까지 말을 하는고? 그런 분이 계신다면 예수 이름을 잘못 알아 그렇습니다. 예수 이름을 더 연구해 보셔야 됩니다. 그리고 정말 예수 이름으로 한번 살아보셔야 이거 내 속에서부터 이거 뭐 예수 이름 들어가니까 난리가 나는구나. 내 속에 사상 전쟁이 먼저 생기는구나. 내 속에 감성이 내 속에 습관이 내 속에 어제의 내가, 내가 그동안 쌓아놓은 인맥이 내 속에 있는 별의별게 다 들고 일어나가지고 난리를 하는구나. 자기 내면에 얼마나 많은 원수가 있다는 걸 발견하면 그 바른 예수를 잡은 겁니다. 예수 이름 말씀 생활하는데 별로 어려움을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예수 이름을 잘 모르시는군요. 주의 뜻대로 정말 살아보려고 해도 별로 어려움을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신앙 근처도 안 가본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왜 세상이 이렇게까지 예수 이름이 싫게 되었는가. 선악과 먹고 타락한 세상은 공중의 권세를 소리 없는 권세를 악령이 딱 틀어쥐고 있기 때문에, 좋아 보여도 싫어 보여도 이러든 저러든 이 나라든 저 나라든 그 누구 속에든, 이 땅 위에서는 악령이 제 마음대로 죄짓게 만듭니다. 정말 예수 이름 그대로 지키는 사람은 그냥 곱게 두고 보지는 않습니다. 역사 이후에 기술의 발달이란 신앙 생활하는데 도움이 되었지 손해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습니다. 군불 때던 시절에 온 가족은 안 믿는데 며느리 하나 교회를 다니는데 교회 와서 철야하다가 군불 안 때면 시댁이 난리가 납니다. 그래서 군불 때러 왔다갔다하다보니 예배 시간에도 밖에 가서 집에 가서 아궁이 불 때고 와야 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보일러니까 그런 문제없지요? 70년대 천국이 연탄 부엌이 되다 보니까 연탄 하루에 적어도 두 분은 갈아줘야 되는데, 새벽 예배 마치면 가서 연탄을 바꿔줘야 되는데 연탄 바꾸지 않으면 아침에 밥 끓여서 못 먹고 가족들 출근 못하고 안 믿는 가정 난리가 납니다. 그래서 새벽 예배 마치고 연탄 가는 것 때문에 기도를 더하고 싶은데, 할 수 없이 그냥 기도를 못하고 연탄 갈러 가는 분들이 그렇게 참 많았습니다. 지금은 보일러가 자동으로 돌아갑니다. 지금은 보일러가 좋으니까 아예 나오지도 않지 보일러가 좋으니까. 모든 원리가 다 그렇습니다.

역사 이후의 기술은 예수 믿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최근에 기술은 이제 이게 예수 믿는데 도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인간을 전부 다 괴물로 만들어 버리고 인간의 인격을 다 붕괴를 시키고 있는 기술이 되어 버렸습니다. 놀면 굶어야 되고 놀면 굶으니 굶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을 했는데, 지금은 놀아도 밥이 저절로 들어오는 세상입니다. 놀아도 밥이 저절로 들어오는데 어느 인간이 본능적으로 일을 하려고 그러겠습니까? 일 해도 먹고 산다 일 안 해도 먹고 산다. 두 길이 앞에 있으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일 욕이 있어서 일 덜하고 일 안 하고 먹는 쪽으로 바뀝니다. 근데 일을 안 하고 먹으면 그걸로 끝이 납니까? 안 움직이면 몸이 잘못됩니다. 먹고 살려고 머리를 돌리지 않으면 머리가 나빠집니다. 죄 짓는 머리는 발달을 하고 인간 되는 머리는 퇴화를 합니다. 몸도 그렇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몸 관리를 해가지고 예전 사람과 몸을 봐보면 뭐 아주 그냥 운동선수처럼 대개 그리 만들지요. 돈벌이 하는 곡괭이를 줘보면 전부 등신들입니다. 옛날 분들의 몸은 미개하게 보이지만은 곡괭이 들고 땅 파고 돈 벌어 먹고 사는 데는 그 몸은 평생에도 견디는 몸입니다. 몸은 똑같은데 몸의 종류가 다릅니다. 이건 주색잡기 하는데 좋은 몸, 주색잡기 하는데 좋은 몸. 도시교회라 알아듣는데 젊은 사람들은 대충 알아들으시나요? 헬스클럽이라고. 하루에 2시간 가서 쇳덩이를 들고 앉았다 일어섰다 앉았다 일어섰다 해가지고 몸을 만들어 놓으면 몸이 그냥 조각처럼 예뻐진답니다. 그거 아무리 많이 한 사람 곡괭이 들면 벌어 먹고사는 데는 그 몸이 움직이지 못합니다. 요상하게. 아이들 머리도 그렇습니다. 죄 짓는 데는 말도 잘하고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데, 인간다운 말을 하고 인간다운 생각을 하라 그러면 이거 뭐 천치백치 바보도 이런 바보들이 없습니다. 이걸 우수하게 보면 우수하니까 그렇게 발전을 해야 되겠지요? 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몸을 주색잡기 놀고먹는데 적합하게 만들고, 그 속의 인격은 인간이 인간 포기하는 쪽으로 가버렸고 배가 고플 때는 온몸이 일을 해서 벌어먹고 사는 몸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머릿속에 철학이 들어가고 머릿속에 종교라는 것이 들어갔습니다.

전 인류가 따라 댕긴다 하는 정도의 종교는 유교 불교 정도인데, 유교 불교는 생긴 지가 3천 년이 넘습니다. 3천 년 전에 만든 유교 불교라는 미개한 종교는 인류가 따라 다닌 종교입니다. 3천 년 전보다 지금은 인간의 과학과 문학과 학습력이 천 배 만 배 발달을 했는데 지금은 종교가 안 나옵니다. 나오면 사이비가 나오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인간 잡아먹는 사이비가 나오지. 모든 사람들이 맞다 사람이란 그렇겠다 이거 좀 정신 좀 차려야 되겠다. 인간이 이것도 있지만 저것도 있겠구나. 인간에게 숙제를 주고 인간에게 생각을 주고 인간에게 좀 윤리를 주고 인간에게 좀 인간다워지라. 이런 종교가 이 땅 위에 나온 것은 3천 년 전입니다. 뭐 이슬람 같은 거는 종교인지 만지 종교라 하기도 어렵지만 그게 나온 지가 한 800년인가요? 천년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래도 종교 이름이 붙은 것은 천년 소리에 수천 년이 되었고, 그 이후에는 종교가 안 나오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인간이 머리가 밝아져서 종교 같은 가짜배기를 안 만든다가 아니라, 기술이 발달되니까 인간이 전부 다 거꾸로 퇴화가 돼 버린 겁니다. 지금은 그 마지막 낭떠러지 끝에 서 있습니다. 이건 그냥 둬도 사회도 인륜도 인간도 저절로 이거는 내려앉지 이대로 온전하게 계속 나가지는 못합니다. 물질계 타락한 세상이 영원무궁 부풀어 올라 발전만 할 수 있겠습니까? 좋아지면 그다음 망하는 때가 있는 거지. 그래서 오전에 말씀처럼 모두가 안심하고 좋다, 좋다 할 때 신앙이란 좋은 것이 항상 좋을 수는 없을 터인데, 이렇게 좋은 것이 좋을 때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칠 때를 생각하고 좀 조심하자. 만사 좋은 겁니다. 예수 이름을 정말로 붙들고 실행해서 약한 나를 일으켜 세우고 틀린 나를 고치고 어지러운 나를 바르게 만들면, 이게 지상낙원이 되어버리는 건데 그렇게 되려면 내속에서부터 저항이 많을 것이라. 내 속에 일어나는 저항은 내 손으로 이기지 남을 빌려서 이기지는 못합니다. 그렇게 끝까지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모든 면으로 참 믿고 보니 건강에 좋고 가정에 좋고 세상에 좋고 나한테 좋고 남한테 좋고 남들이 들어서 좋고, 뭐 하늘나라와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정말로, 정말로 이렇게 좋구나. 100점짜리로 좋기 때문에 오후에 또 한 번 소개하는 겁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중간까지 가는 사람은 많습니다. 첫날에야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잘하지. 나중까지 견디는 자 그러고 보니까 이게 어렵습니다. 근데 한 걸음씩 걸어가면 어렵지 않습니다.

(기도)
자기를 위해 살기 좋은 세상 세상을 위해 살기 좋은 세상 역사에 없는 환경이 차고 넘치는데, 우리는 세상을 거스려 볼 수 없는 하늘을 마음의 소원으로 삼고, 오늘 땅 위에서 미리 천국의 생활을 해볼 수 있도록 말씀생활 말씀 속에 나에 대한 주의 뜻을 찾는 생활, 주님이 내 중심을 보며 함께 할 수 있는 주와 동행의 생활. 이 생활을 하려 할 때 내속에 있는 나 중심, 내 감정, 내 지식, 나의 안일욕 부터 반대하고 나설 것이니, 이기기 어려우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으니 내 내면, 내 마음, 나의 인성 속에 말씀으로 살 때 일어나는 모든 내면의 반발을 잘 다스려, 말씀이 나를 먹고 말씀이 나를 끌고 갈 수 있도록 오늘과 한 주간 자기 내면 투쟁에 애쓰는 종들이 되어, 나부터 말씀으로 붙들어 볼 때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도록, 보이는 면까지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1차: K.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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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안)


23.5.28주전          마10:22          인내의 구원    총공신풍


■ 시대의 어려움
1. 오늘의 우리 환경
① 말세 : (세상)의 마지막 말세는 말세라, 세상도
② 죽음 : (개인)의 마지막 자기의 마지막 기회, 죽음
③ 변혁 : (시대)의 마지막            구한말 일제말 천지개벽 가속

2. 신앙의 어려움          비> 숲> 동물> 인간 = 인격> 사상> 종교> 진리
① 세상 : 기술 (발달), 인간 (퇴화)        인간 노력이 인간 노력을 축소
② 종교 : (빛)을 찾는 노력, (멸종)    육체뿐 아니라 인격 생각까지
③ 진리 : (박해) 역사, (방종) 말세          당겨만 오다, 갑자기 풀어버림

■ 인내의 구원
1. 예수의 이름
① 예수 : 구원
 - 사죄 : (말씀) 생활 - 칭의 : (주뜻) 생활
 - 화친 : (주와) 동행 - 소망 : (천국) 생활
② 이름 : 역사
 - 중생 : 처음 믿는 (순간)
 - 성화 : 믿은 이후 (평생)

2. 주변의 미움
① 주변
 - 자기 (내면)
 - 자기 (가족)
 - 주변 (사회)
 - 세상 (문화)
② 미움
 - (다르)니
 - (나으)니
 - (빛)이니
 - (어려움)

3. 나중까지
① 끝까지
 - 성공은 (최종)이 결정
 - 중간의 실패는 (전패)
 - 끝을 (계산)할 것
② 매일을
 - 사다리로 보인 (천국)
 - 하루를 (이어) 갈 것
 - (경력)을 만들어 갈 것
 ③ 지금을
 - 내일 일은 (내일) 염려
 - 내일은 (오늘)처럼
 - 오늘에 (전부)를
 ④ 힘들 때
 - 상대도 (힘들)고
 - 고비가 (성패)
 - 성패가 (승패)

4. 견디는 자
① 인내
 - (이어) 가는 자          출25장의 ‘실’
 - 인내가 (비결)            우리가 약하니 충성만 요구
 - (감당) 할 시험뿐        주권자를 믿고 따를 뿐
② 목적 달성
 - (구원)을 얻으리라
 - 주님만 아는 (계획)
 - 소망 중 (순종)만
* 참고 성구
마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눅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계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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