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새23.5.20 마10;1 제자의 범주, 참 주님 제자에 합당한 자기 속성의 구별과 바로 잡으려는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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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새23.5.20 마10;1 제자의 범주, 참 주님 제자에 합당한 자기 속성의 구별과 바로 잡으려는 노력

관리1 0 58 2023.05.2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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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토새

제목 : 제자의 범주, 참 주님 제자에 합당한 자기 속성의 구별과 바로 잡으려는 노력

찬송 : 57장(죄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본문 : 마태복음 10장 1절 -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열두 제자를 불렀더라, 주님의 모든 제자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제자의 범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른데 일반적으로 학교를 가든 안 가든 배우려는 모든 사람을 학생이라고 한다면 좀 범위를 줄여서 학교에 등록을 하고 학교 가는 사람을 학생이라 한다면 숫자가 줄어듭니다. 학교를 다니며 정말 배워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학생이라고 한다면 숫자는 더욱 줄어들어 버립니다.

이렇게 범위에 따라 다른 것처럼 주님을 따르기만 따르면 전부 제자들인가? 오병이어 때는 장정만 5천이었으니까 한 2만여 명이 된단 말인데 주님의 제자가 2만 명 되면 좋지 나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그 제자들을 적기를 “썪는 양식을 위해 따라 다녔더라” 육의 양식만 알고 신앙의 양식은 몰랐더라, 이렇게 적었습니다. 예수님이 병 치료하는 것 구경 다니고 먹여주니 먹고 또 이 말 저 말 하니 귀만 즐겁게 그거 참 말 잘한다, 말은 맞다, 여기까지가 그냥 몇 천 명이 기본이고 많을 때는 몇 만 명이 따라다녔으니 이들을 주님의 제자라고 해야 되겠는가? 아예 주님 쳐다도 보지 않는 사람에 비교를 하면 훨씬 낫습니다. 주님 이야기는 들었고 주님을 따라는 다녔으니까. 왜 따라 다녔냐? 구경났으니. 왜 따라다녔냐? 남이 가니. 주님이 왔다는데 가보지도 않는 사람, 관심도 없는 사람 그 사람보다는 나은데 구경만 다니는 사람, 또 구경만 하는 사람, 끝까지 구경만 하는 사람, 마지막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니까 그것까지 구경하러 간사람, 이렇게 되면 그때는 큰일 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두뇌, 학습, 환경, 성격 여러 가지에 따라 일찍 배우는 사람도 있고 늦게 틔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운전을 좀 늦게 배우나 안전한 사람이 있고 빨리 배워 사고 난 사람도 있고 별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을 비교할 때는 넓게 좁게 양면으로 비교하며 좀 지켜보기는 해야 됩니다만 주님이 처음 갈릴리에 전도하고 요단까지 내려오고 예루살렘까지 전국을 이렇게 운영 움직이실 때 예수라는 분이 오셨다, 구세주라 하더라, 한번 듣고 따라가 보고 구경거리 따라가 보고 한 번으로 딱 잘라서 구경 온 사람은 나쁜 사람, 처음부터 작정하고 다니는 사람은 좋은 사람 이렇게 딱 잘라버리기는 어려운데 오병이어를 구경하고도 또 그다음에 칠병이어 구경하고 또 구경하고 그래도 안 따르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냐 그 소리 하다가 예수님 처형할 때 그때도 멀뚱멀뚱하게 아, 그냥 저래 죽는구나, 저분이 진짜였으면 천사를 동원해서 자기가 죽지 않을 건데, 이제 이렇게까지 가면 그다음에는 죽고 나서 부활하신 주님도 또 구경거리로 또 따라다닙니다. 나는 마음이 착했다, 뭐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래도 주님을 구경이라도 다녔으니 낫지 않냐 자기변호를 위해서 이 말 저 말 계속 하면 한 번밖에 없는 기회는 지나가고 죽는 주님을 그냥 구경만 하면 그때는 해당되는 말씀이 “모이지 않는 자는 해치는 자니라” 죽인 사람, 죽이라고 뒤에 부추긴 사람, 그리고 구경한 그 사람까지 다 묶어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무리에 들어가 버리는 겁니다.

어릴 때 시작할 때는 난 이편도 아니고 저 편도 아니다, 그런 제3의 길이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가면 이 편이든 저 편이든 둘 중에 하나지 제3의 길은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주님을 따르지 않은 자 전부 다 주님을 못 박은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준 이 허구 많은 세월을 아무리 부족해도 자라가는 데 사용하면 누구든지 다 다윗이 될 수 있고 이걸 딱 못 박아서 성경은 다윗이라 그러지 않고 다윗의 열쇠라 그랬습니다. 다윗이 다윗 된 비결이 문제지 그냥 다윗이 다윗만인 그 인체만 가지고 말한다면 누가 그 두 번째 다윗이 되겠습니까? 다윗이 다윗인 비결, 못났지만 구별하고 옳은 걸 잡았을 때는 놓지 않더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다윗은 다윗이 문제가 아니라 다윗의 비결, 다윗의 비법, 다윗의 열쇠가 문제였습니다. 못 났지만은 못 났으므로 주님만 순종하더라, 이것만 딱 붙들면 다윗 간 길은 오늘도 그대로 다 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앞에 글자가 붙은 것은 딱 찍은 겁니다. 요즘 이런 걸 특정이라고 그러지요. 아무 열둘이나 열둘만 모으면 되는 그 열둘이 아니라 주님이 2절로부터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이렇게 헤아리는 그 열둘입니다. 그냥 따라다니는 제자들, 배우는 사람들 그중에는 구경꾼이 많고 뭔일인고 남 따라 다니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삭개오처럼 구름떼처럼 몰려 따라다녀도 난 내 두 눈으로 예수님을 직접 봐야지 남에게 전해 들은 또는 남이 가니 남의 뒷꼭지만 보고 따라가는 나 그런 못난이 되지 않겠다, 난 내 눈으로 내가 보고 내가 주님을 따르든 말든 한다, 그 방법이 뽕나무 위로 올라가서 지나가는 주님을 다른 사람 때문에 전해 듣고 전해 듣는 것이 아니라 직접 봤습니다. 어떻게 생겼는고, 아 사죄구나, 나무 위에서 보니까 주님의 얼굴이 직접 보였습니다. 사죄구나, 말씀을 어긴 나의 모든 죄를 해결하러 오셨구나 저만하면 붙들어야 되겠다, 세무서 소장이 세리인데 성경시대의 세리란 자기 민족을 착취해서 그다음 점령자 로마 정부에 돈을 건네주며 그 사이에 자기 이익을 챙기기 때문에 동족 민족 형제를 짜 먹는 살인마로 보는 것이 당대 세리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세리와 죄인 둘은 묶여 취급을 받았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자기 민족 자기 형제를 짜 먹는 나쁜 죄인 이게 세리입니다. 나무 위에서 지나가는 주님을 직접 보며 주님이 저리 생기셨구나, 이제 주님을 알아본 겁니다. 주님을 알아봤다면 무엇을 알아봐야 주님을 알아본 건가요? 피부가 이렇더라 키는 이 정도더라 머리는 이 정도더라 그걸 알아본 걸 적으려고 뽕나무에 올라갔다, 그래서 주님이 삭개오야 내려오라 그랬다, 그 많은 말씀을 적었을까? 아니지요. 죄지어 지옥 갈 나를 해결하기 위해 사죄로 오셨구나, 사죄를 받고. 힘없는 내가 말씀으로 실행하지 못하는데 대신 전부 실행을 해주시는 칭의로 오셨구나 주님의 모습에서 사죄를 봤고 칭의를 봤고 화친을 받고 소망을 봤습니다.

얼굴 보면 보입니까? 다시 한 번 더 여쭤보지요. 아이들끼리는 모릅니다마는 어른이 되어 학교 가는 초등학교 학생 얼굴을 보면 뒷꼭지를 보면 저는 공부하러 가는 놈이다 저건 놀러 가는 놈이다,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초등학교 교사들은 수업시간에 앉아 있는 아이들 얼굴만 딱 봐도 이건 학생, 이거는 떠밀려온 녀석, 이건 그냥 이렇게 아마 보일 겁니다. 그거 보여야 됩니다. 형사 눈에는 그냥 증거가 없어 그냥 지켜보지 도둑놈. 안 도둑놈 그거 안 보일 리가 없는 겁니다. 시내버스에 차장, 시내버스에 차장 탄 걸 김희락 선생님 보셨나요? 못 보셨어요? 추정욱 선생님은 보셨습니까? 아, 40대까지는 못 보고 50대부터는 본 모양입니다. 모든 시외버스, 시외버스는 말할 것도 없고 시내버스도 차장이 요금을 직접 이렇게 받던 시절이 있습니다. 출근길에 미어터지도록 마구 그냥 들어오면 들어올 때 못 받습니다. 일단 태워놓고 그다음 정거장 갈 때까지 차비 다 받아냅니다. 안에 움직여도 그거 희비지고 다 압니다. 그런 사람들 보면 저렇게 기억력이 좋으면 장학금을 받고 그냥 공부를 하지 차장을 할까, 여수에서 순천까지 시외버스가 가면 구간별로 요금이 다 틀리는데 장날이 되면 마구 밀려들어가도 일단 태워놓고 그 다음 이 사람 어디서 타서 어디까지 어디서 타서 어디까지 그거 알고 다른 요금을 전부 다 받아냅니다. 그 시내버스 차장이 그래요. 요금 받는 건 그건 모든 차장이 기본이고 차장을 좀 해본 사람은 얼굴 딱 보면 회사원 공무원 학생 직업까지 거의 다 알아버린다고 한 번 보고 열 번 보고 많은 사람을 많이 보다 보니까 특히 대학생들하고 대학을 몇 명 못 갈 때 대학생들하고 대학생 나이에 회사 가는 사람 놀러 가는 사람 별의별 사람이 있는데 대학생들은 요금이 그때 절반이었습니다. 그냥 딱 얼굴 보면 학생인지 아닌지 알아본다고.

주님 가는데 따라만 가면 교인인가, 오늘 아침에도 새벽까지 교회를 왔으니 이만하면 교인인가, 잘 믿는 교인인가, 주님은 뭐라고 하실까?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내 마음 속에 내 생활 속에 이건 내 거 맞다, 이 자세는 내 거 아니다, 딱 딱 구별을 하십니다. 당시에 수만 명 주님을 배우고 따르는 사람 중에 열둘을 쏙 뽑아낸 게 베드로부터 열두 제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내 마음속에 일주일 중에 이 시간은 내가 예수님의 제자 맞다, 나머지는 모르겠다, 주일 오전 한 번은 내가 예수님의 제자가 맞다, 나머지 6일은 모르겠다, 평일이라도 예배 시간에는 내가 교인이 맞다, 그 외에는 내가 교인인지 모르겠다, 자기의 일정, 자기의 시간도 토막을 내가지고 제자와 제자 아닌 걸 좀 찾아보셔야 성경의 해석이 되어 집니다.

시내 동창회 모여 놓으면 결혼한 친구, 결혼 안 한 친구, 동창 친구들이야 다 같이 모일 수 있는데 결혼한 친구는 시간이 늦어지면 이 남자 때문에 가봐야 되겠다, 그러면 이건 결혼한 여자가 맞습니다. 결혼식을 했던 말았던 친구들하고 동창회를 하는데 남자 7시 퇴근할 건데 9시, 10시, 11시까지 계속 있으면 이것도 결혼했다고 칠 수가 있겠는가? 이제 그 다음 아이가 있으면 만나자 말자 유치원에서 오는 시간인데 안절부절하고 이거 도망가면 그건 엄마가 되는 거고 아이가 하나든 둘이든 뭐 그냥 친구들 만나 모처럼 밤이 새고 2차 3차를 가도 친구들과 재미가 있어 집에 젖먹이가 있든 우는 애가 있든 상관이 없으면 아이가 있으니 엄만가 이 정도 되면 이거 엄마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뭐 그렇게까지 따질까? 엄마 없이 크면 성장 과정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오늘 아이들을 보면 엄마 밑에 큰 아이들 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저 집도 엄마 없이 혼자 컸고, 저 집도 엄마 없이 혼자 컸고 저도 엄마 없이 혼자 큰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정도입니다. 맨 날 예배당에 가 앉았으니까, 아버지는 맨 날 공장가서 돈 번다고 부부가 늘 하나는 교회, 하나는 공장에 가 있어서 부모가 없으니 뭐 호적에 있든 없든 부모 없으면 어떻게 클 것 같습니까? 강아지는 강아지답게 크고 망아지는 망아지답게 크겠지.

아버지라는 사람이 돈 버느라고 들어올 시간이 없어도 버는 그 돈 가지고 사람을 시켜서라도 또는 몸은 공장에 있어도 마음이 집에 있는 이 녀석들 첫째가 어떻고 둘째가 어떻고 이렇게 돌아가면 마음이 따라가면 그게 많이 따라가 집니다. 마음까지 돈 버는 데 가치가 있으면. 부모는 있는데 부모 없이 큰 사람이 되어 집니다. 이거 부모 없이 차라리 고아원에 가면 되는 수가 있는데 부모 있는데 부모 없이 크면 이거 완벽하게 문제 생깁니다. 집집마다 부모가 있고 저렇게 컸을까? 이렇게까지는 되지 말아야 됩니다. 부모가 있는데 저렇게까지 되었을까? 부모가 있는데 저 지경까지 되도록, 사람이라는 것은 순간순간 이어지며 크기 때문에 한 달 안 본다고 그렇게까지 되지 않고 며칠 안 본다고 그리 되는 거 아닙니다. 그런데 꾸준하게 그냥 놔두면 결국은 방향을 틀고 어디까지 변형될지 모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마음속에 내 속에 내 마음이 이렇게까지 되었나, 그렇게까지는 나가지 못하도록 자기 속을 붙들어 주님의 제자 되도록 노력하십시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기억하십시다.



1차-k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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