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새23.5.12 대하13:10 과거 영광에 초라한 현실, 다시 생명을 붙들고 주님 앞에 오늘을 감당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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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새23.5.12 대하13:10 과거 영광에 초라한 현실, 다시 생명을 붙들고 주님 앞에 오늘을 감당하는 것

관리1 0 57 2023.05.12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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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2 금새

제목 : 과거 영광에 초라한 현실, 다시 생명을 붙들고 주님 앞에 오늘을 감당하는 것

찬송 : 71장(낙심마라)

본문 : 역대하 13장 10절 -

우리에게는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니 그를 우리가 배반치 아니하였고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있으니 아론의 자손이요 또 레위 사람이 수종을 들어 조석으로 여호와 앞에 번제를 드리며 분향하며 또 깨끗한 상에 진설병을 놓고 또 금 등대가 있어 그 등에 저녁마다 불을 켜나니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나 너희는 그를 배반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의 역사가 흘러가며 다윗, 솔로몬 하나로 내려오던 나라가 3대 르호보암 때 나뉘어집니다. 나뉠 때는 당연히 나간 쪽이 훨씬 많습니다. 오늘도 신앙의 한 길을 걸어가고자 하면, 첫 은혜 받았을 때는 내 마음이 똘똘 뭉쳐 바로 믿으려 노력하고 빈틈이 없어 보이나 세월이 좀 지나가고 보면 그러면 속에 있는 나의 신앙의 요소들이 단일인지 아니면 나눠지는지 표시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젖 먹을 때 엄마 좋아하지 않는 아이가 어디 있습니까? 세월이 지나가며 세상 환경이 펼쳐지며, 이런 요소가 강한 사람은 그 요소가 이 사람의 생애를 붙들고 저리 가고 또 저 요소가 강하면 또 저쪽으로 흔들어 버리고, 주변도 그렇고 내 속도 균일하지 않기 때문에, 내적 내성에 따라서도 흔들어지고 또 밖에서도 뒤흔들며 사방에서 끌고 있기 때문에 자라가는 과정에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별별 방향을 잡게 됩니다. 생명을 가진 교회도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이것이 세월 속에 작은 것이 커지며 또는 외부에서 흔들며 분화가 되고 항상 두 길이 앞에 놓이는데, 타락 전 에덴동산이 좋은 것은 죄 짓기가 쉽지 아니합니다. 반대로 한번 죄 짓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죄 짓는 것은 뭐 이것은 자동이고 안 지을 수가 없고, 죄를 이기려 든다면 이것은 알고 보면 천하와 맞서야 되는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시대마다 한 번씩 다윗과 같은 솔로몬과 같은 그런 때를 잠깐이든 좀 오랜 기간이든 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 전체적으로 보면 그런 때는 아주 가끔 잠깐씩이고, 대개는 세월 속에 그냥 복음이란 사라졌나 싶을 만큼 그렇게 되어집니다. 구약도 다윗과 솔로몬 때가 좋았고 그 이후에 보면 그냥 겨우겨우 이어간다 싶을 만큼, 다윗과 그 자손에게 등불을 끄지 아니하겠다. 그래서 성막 성전 안에 늘 어두워지는 밤이 되면 등을 켜고 그리고 그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제사장들이 늘 지켜보며 간검하며 간수하며 그렇게 이어진 것이 여기 아사 때가 되면 아비야 때가 되면 아버지 르호보암이 엉망을 만들어 파탄 낸 하나님의 나라인데, 10절에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치 아니하였다. 그거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또 그런데 자랑할 일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으로 내려오고 특히 다윗 때 준비한 성전을 솔로몬 때 잘 지어놓았으니, 12지파가 총력을 기울여 만들어 놓은 이 성전은 12지파가 돌아가며 당번을 맡고 분담을 하면서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었는데, 그 중에 10지파가 나가버렸으니 12지파 중에 10지파는 예루살렘 성전에 오지도 않으니 그냥 결석 정도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 재단만 단인데 아예 북쪽의 다른 단을 두 개나 만들어 놓고 편리하게 눈에 보기에도 더 좋은 금송아지까지 만들어 놓고, 편하게 좋게 다른 단을 섬겨버렸습니다. 종교를 바꿔버렸습니다. 교회를 덜 오는 정도가 아니라 절로 가고 이상한 데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남은 2지파만 원래의 신앙, 원래의 노선, 원래의 정한 시간 정한 장소를 지켜내고 있었습니다. 남쪽에 남은 두 지파는 하나님을 배반치 아니하였다. 나머지 10지파 르호보암, 여기 아비야의 아버지 르호보암이 떠밀어 쫓아버린 꼴이 되었습니다. 나아간 여로보암은 딴 욕심으로 쪼개어 나갔지만, 작정하고 나간 여로보암이 나가도록 밀어주고 기회를 열어놓은 것은 또 르호보암입니다. 그 아들이 아비야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때의 신앙을 기준으로 보면, 힘이 빠졌고 탈선했고 망쳤고, 12지파 중에 10지파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낭떠러지로 밀어 던진 것이 아버지 르호보암이고 그것을 잇는 것이 아비야입니다. 땅을 치고 회개하고 부족함을 느껴야 됩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것마저 뿌리를 뽑으러 오는 이 북쪽의 여로보암 군대를 맞아 남은 둘 뿌리까지 생명의 씨앗까지 없어지는 또 이 면을 보니, 아비야로서는 이미 파탄 난 하나님 나라에 한 조각이라도 붙들고 지켜야 되는 이것이 시대의 사명이었습니다. 오는 적은 강하고 자기들은 약하고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께 부르짖을 이 문제밖에 없습니다. 비록 적지만 우리는 아직도 이 길을 지키고 있지 않느냐? 북쪽 이스라엘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처럼 믿으라. 이스라엘 나라 전체 중에 예루살렘의 성전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했는데, 북쪽 이스라엘은 아 편하게 그냥 벧엘과 단 두 군데나 더 단을 만들어 굳이 예배당까지 갈려고 그래? 실시간도 있는데 뭐. 아니 뭐 실시간 켜기는 뭐 하려고 켜? 주님 내 마음속에 있고 너희가 신약에는 성전이라 그랬는데. 나를 보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셨는데, 굳이 예배당까지 가? 방송을 틀어 그냥. 내 속에도 중생이 있고 주님은 내 속에도 들어와서 함께 하시는데, 두세 사람 모이면 되니, 가정교회에 적어도 부부 둘은 있을 것이고 굳이 모일 것도 없고, 이렇게 예루살렘 성전 하나에 모아놓은 것을 밑에서 이 단 빼버리고 저 돌 빼버리고 천지만엽으로 나뉘고 흐트러지는 상황에, 비록 하나나 비록 적으나 비록 앞날이 보이지 않으나 오늘은 우리 길 간다. 나와 유다는 여호와를 아직까지 배반치 않았다. 이게 시대적으로도 어려우나 이게 중요한 것이 뿌리를 뽑힐 상황의 생명을 지켜낸 것,  그러면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내려갑니다. 봄, 여름, 가을을 생각하면 이 무성하고 번창한 이런 식물의 세계 사방인데, 가을이 오고 늦가을이 되고 겨울이 깊어 가면 잎 다 떨어지고 나무냐고 그 남은 것은 말라빠진 땔감처럼 보이고. 이게 또 다시 기회가 있을까 싶습니다. 가을 나무를 보면 희망이 없고 겨울나무를 보면 이미 죽어버렸습니다. 나무 가지 어디를 꺾어 봐도 안에 물이 없습니다. 나무가 물이 없으면 죽은 건데, 그런데도 땅 밑에 뿌리 안에 생명이 버티고 있으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또다시 봄을 줄 때 예전처럼 활짝 피어나지만, 겨울 환경에 삭막하다고 후퇴했다고 이파리 다 떨어지고 물 말랐다고 뿌리까지 남은 그 생명을 포기해버리면 이것도 손해지만은, 내년에 다시 주시는 그 기회에 천지만엽의 번창하고 꽃이 피고 또 열매를 맺어야 되는 그 모든 열매를 겨울에 생명을 맡은 이쪽에서 그냥 끝내버린 것입니다. 아니 뭐 나 하나마저 뭐 주저앉았는데 나 하나만 남았나이다. 나만 남았나이다. 나만 남았는데 이 나가 그냥 하나이기도 하지만은, 내년에 무성하고 풍성하고 마구 돋아 날 모든 새싹과 수많은 꽃과 그 다음 내년에 맺혀질 열매와 그 열매가 퍼트려질 모든 것을 감싸 안고 있는 나 하나입니다. 날 위해서라도 나만은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되겠고 나 하나만을 위해서라도, 지켜내는 이 하나를 붙들고 또 다음에 펼치는 모든 역사가 있기 때문에 신약에 오시는 주님을 기록하며 아브라함으로 출발했고 다윗의 계통이었다. 이렇게 짚고 계시면서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를 하나하나 주님의 이름 위에 기록을 했습니다. 그 말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이러하니라“ 뭐 다윗과 솔로몬은 안 적어도 우리가 잘 알고, 르호보암 이 인간은 파탄 낸 인간인데 그래도 예수님이 오시는 데는 르호보암을 밟고 찍고 내려오셨지 르호보암 빼놓고 내려오지는 않았습니다. 아비야, 아사 일일이 전부 다 짚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을 놓고 비교하면 참 부족하여 고개 들 수가 없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르호보암 그 아들 아비야 그 아들 아사를 붙들고 그 줄로 그 계통으로, 이것을 신앙에 앞선 수고로 붙들고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모시고 출발을 시켰습니다. 다윗만은 못하고 솔로몬과 비교하면 한없이 약하고 부끄럽지만, 전부 다 나가버리고 전부 다 엎어버리는 세상에 자기는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붙든 것이 장하고 못 나도 그것은 좋은 것이고, 이어지는 다음을 붙들었다는 것이 큽니다. 사고 나서 응급실 중환자실에 숨을 겨우 몰아쉬는 그 사람들, 생명의 신호가 있기는 있으나 이거 뭐 숨을 쉬는지 마는지 참 애매하게 아슬아슬하게 그러다가 그대로 살짝 꺼져버려도 이미 그 정도가 되었으니, 바로 뭐 그냥 장례처리를 해도 되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연약한 호흡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건장한 청년이 응급실 중환자실에 누워 그냥 가는 숨이 이어지는 그 가는 숨이 중요한 것은, 이게 그 고비를 넘으면 또다시 이전처럼 건강하게 이전보다 더 나은 앞날을 감당하는 그런 때가 되기 때문에, 나중에 아예 남쪽에 성전까지 다 뺏겨버리고 불살라 버리고 없애버리고 바벨론 머나먼 나라로 70년을 가서 이 나라는 잊혀졌고 성전은 없어졌으나 돌아온 에스라, 돌아온 에스라가 다시 성전을 건축할 때, 지어놓은 그거 너무 적어 이전을 기억하는 분들이 울고 통곡을 했으나, 이 전의 이후 영광이 그 작게 다시 생명을 붙들고 오늘을 이어간 이 수고가 이 전의 이후 영광이 솔로몬 그 영광보다 더 크리라. 이 소망 때문에 움츠려 들고 파탄 나는 그 순간을 실망하지 말아야 됩니다. 늘 다윗이 준비하고 솔로몬이 지은 것이 원형입니다. 사모하고 늘 그때를 목표로 달리나 내게 준 분담은 연약하여 보잘 것이 없을 때, 전체 공회를 두고 말하면 80년대를 기준으로 말하면 우리가 참 뭐 겨우 그냥 숨 유지하는 정도일 뿐입니다. 어디 비교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유지하는 이번 집회 한 번이 또 이 새벽에 한 번이 그래도 이 노선의 지켜야 될 그 최소한을 붙들고 나아가는

11절, “조석으로 여호와 앞에 번제를 드리며” 우리는 새벽 예배 우리는 저녁 예배, 정한 시간 정한 때 정한 장소에서 “조석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며 분향하며” 구약은 제사 신약은 오늘도 몇 되지 않아도 이 예배를 이어가며. 또 지켜가야 한다면 몇 명 앉아서라도 집회를 지켜내며. “깨끗한 상에 진설병을 놓고” 이렇게까지 움츠려 들고 적어지면 뭔가 좀 획기적으로 사람들 눈에 띌 만한 그런 프로그램을 시설을 다양한 그런 좀 구경거리를 펼쳐 놓아야 손님이 오지 않겠냐? 그것은 북쪽 이스라엘로 따라가는 그 길이라 그것은 갈 수 없고. “깨끗한 상에” 말씀의 양식을 붙들고 “저녁마다 불을 켜나니” 이 밤도 어두워지면 어둠 속에 성전 안 성소에라도 “불을 켜나니” 비록 적지만 보잘 것 없지만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을 지켜내고 있다. 아이 뭐 그나마나 그것, 쪼만한 것 그것 뭐, 약한 것 뭐, 별 것 없는 것. 누가 볼 때는 별 것이 없어도 생명이란 커서 생명이 아니라 연결이 생명입니다. 누가복음 17장, 겨자씨 비유. 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13장, 17장 겨자씨 비유.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거든” 겨자씨 믿음이라니? 아무리 작아도 믿음이란 교회란 신앙의 소속과 계통이란 적고 크고가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려 있느냐? 중심이 누구냐? 어떤 길이냐? 하나님 붙들고 그 연결을 지켜내면 때가 되면 또 마구 퍼뜨려 나가는 것은 주님이 정한 때와 장소가 따로 있습니다. 우리는 봄을 주면 새순을 내는 것이고, 여름을 주면 무성한 이파리를 통해 열심히 준비하는 것이고, 가을을 주면 마음껏 열매를 맺히는 것이고, 또 겨울을 주시면 또 생명을 지켜내며 다음 기회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국 어디든 누구든 어떤 기회든 이런 면 때문에, 어디 또 하나님과의 연결에 함께 갈 그런 곳이 있는가? 찾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찾는 것이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한 가정의 하나님의 역사도 뭐 믿는다는 이름만 있고, 우리 가정의 부모님은 할아버지는 엄청 잘 믿었는데, 뭐 우리야 그냥 대충 믿는 사람 이름이나 걸고 있는데, 그런데 그 이름 걸고 있는 것을 끝이지 않고 놓지 않고 붙들고 있으면 또다시 하나님께서 여호사밧처럼 또는 히스기야처럼, 또는 돌아온 두 번째 성전을 짓는 에스라 시대를 통해 보잘 것이 없지? 보잘 것이 없는 이 속에 오시는 주님을 맞는 마지막 준비가 된다. 이렇게까지 사명을 주고 계시기 때문에 어쨌든지 내 생각, 내 중심, 내 판단은 제쳐놓고 주님 앞에 오늘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1차-L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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