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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5 토새
제목 : 눈물의 탄식, 그러나 자기 속이 바뀌는 근본 해결이 되지 않으면
찬송 : 132장(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본문 : 사사기 2장 4절 -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제사를 드렸더라.” 신약으로 말하면 예배를 드렸더라. 구약이던 신약이던 제사와 예배는 헌신을 말합니다. 구약의 제사는 짐승을 잡아 죽여 드리는 것이 제사의 기본입니다. 잡기는 짐승을 잡으나 속으로는 자기를 잡은 것입니다. 속으로 자기를 아무리 잡는다 해도 산짐승을 죽여 피를 흘려야만 구약의 제사가 되어집니다. 짐승 잡는 제사가 구약의 기본이고 그 짐승을 잡으며 주변에 가루를 드린다든지 또는 여러 가지 예물을 드릴 수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짐승 잡는 것을 구약의 제사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신약의 예배가 되면 산제사를 드려라. 구약은 짐승을 잡아 죽이고 제사를 드리고, 신약은 사람은 살아있어라. 그래서 산제사라고 그럽니다. 죽지는 말고 죽어라. 잘못된 인격을 잡아라. 잘못된 행위를 잡아라. 또 주님 앞에 복음으로 바른 일을 하고 나가려다 보면 마땅히 옳은 일을 위해서 자기의 시간 자기의 가진 것을 포기해야 되고 소비를 해야 되고 투자를 해야 된다면 이게 바로 신약의 예배입니다.
그러면 구약의 제사는 실제 살아있는 짐승을 잡았고, 신약은 짐승을 잡아 이렇게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 말씀을 읽으며 찬송과 기도를 통해 나는 내 속에 어떤 면을 죽이는 것이 옳을까. 나는 내 속에 어떤 인생을 살기 위해서 헌신을 해야 될까. 말씀으로 자기 속에 죽일 요소를 찾아보고 말씀으로 자기 속에 다 바쳐 살아야 되는 그 대상과 자기 결심과 자기 깨달음을 가지는 것이 신약의 예배가 되어집니다. 발전된 제사가 예배입니다. 발전된 예배를 어린 구약에 가르쳐 준 것이 그게 구약의 제사입니다.
수학을 처음 가르칠 때 공깃돌을 들고 사탕을 들고 한 개 더 하고 한 개 더 하면 두 개가 된다. 이렇게 맛있는 것으로 관심 있는 것으로 당장에 입에 들어가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이 어린 아이의 기초라면,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 이제 구구단을 통해 더하고 빼고 뭐 마구 그냥 발전이 되어져야 수학의 제대로 된 세계를 알게 되는 것처럼, 구약은 살아있는 짐승을 끌어다가 머리에 안수하고 그 말은 이게 이 짐승이 바로 저입니다. 제가 죽을 죄인입니다. 제가 이렇게 죽기까지 충성하겠습니다. 그 뜻으로 살아있는 짐승을 끌고 와서 안수를 한 다음 잡아버립니다. 그리고 단 위에 올려 제사의 종류에 따라 정리를 하고 태워버립니다. 그리고 그 단 밑에 잡은 짐승의 피를 다 흘려버립니다. 그리고 주님이 어린 양 되셔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 위하여 당신이 피 흘려 그리고 당신의 몸을 바쳐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신약의 예배는 주님이 대신 실제 죽어버렸으니 이제는 살아 생전 대신 죽은 주님으로 살아 죄에 대한 너 내면을 죽여 버리고 살아야 될 의로 살아가라. 이게 신약의 예배이고 구약의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젖과 꿀이 흐르는 이 좋은 가나안을 받은 지가 언제인데 지금 바로 이렇게 하고 있다니 이거 믿는 사람의 자세가 잘못된 것이라. 이런 말을 듣고 그 다음 4절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그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해놓고 보김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눈물은 자기가 자기를 들여다 볼 때 탄식할 일은 그냥 말로 눈물로 그냥 그쳐 될 일이 아닙니다. “제사를 드렸더라” 잘못된 자기 속에 원인을 잡아버렸더라. 그리고 주님 앞에 바칠 헌신으로 출발을 했더라. 감정에서 끝나면 자기는 스스로 의인이 된 것 같고 회개를 한 것 같고 자기 속은 시원한데 남는 게 없습니다. 자기 속을 고쳐야 자기 속을 다시 조립해서 새로 맞춰 충성의 걸음을 걸어야 그게 신앙의 효력이 되는 것입니다. 시험지를 받아들고 이렇게 많이 틀렸구나, 아이 좀 공부를 할 걸. 아무리 통곡을 해도 그걸로 끝내고 또 이 전에 시험 날을 받아 놓고 놀듯이 그 행동 또 하게 되면, 자기는 늘 회개한 것 같고 일흔 번씩 일곱 번도 다시 출발한 것 같고 다람쥐 쳇바퀴 돌고 앉았으니 발전은 없고, 회개도 발전 때문에 하라는 거고. 여기 보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물도 이제는 그러지 말라는 그 뜻입니다.
“보김에서는 제사를 드렸더라” 세상을 담고 세상을 따라 세상으로 우뚝 서기 위해 모두 정신없이 걸어가다 하나님은 옆으로 치워버렸고 말씀은 잊어버렸고 믿는 사람의 신앙의 생활은 언제 분실을 했는지 없어졌고, 가나안에 좋은 땅 받아 살다 보니 없애라 했던 가나안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가나안 사람들의 족보가 잘못 되어가지고 없애라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윗대로 올라가면 노아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도 된다는 그 생각이 문제이고 세상 따라 대충 살면 되고 세상이 전부지 뭔 천국 노래를 부르느냐는 그 사상 그 행위 그 생애가 잘못 되는데 이거 씻어 쓸 일이 아니라 아예 이거는 차단을 해야 될 만큼 짙어졌고 패괴가 되어 그래서 가나안을 줄 때 싹 쓸어버리고 들어가게 했습니다. 아주 싹 쓸어버리고. 본받을까 봐. 그 땅 백성들의 악행을 본받지 말아라. 사람 잡는 게 하나님의 뭔 백정 같은 도살 같은 취향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들이 본 받을까봐 물이 들까봐 물 들지 않을 수가 없어 깨끗하게 청소하고 들어가라 했으니, 힘 있는 대로 청소해야 맞는 것이고 받은 힘이 없어 정리를 못 한다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능력을 주시라 해야 되고 또 그럴 힘이 없으면 자기가 조심하여 그런 이들과 접촉을 말아야 되는데, 안 믿는 주변 쳐다보고 담고 베끼고 어울려 하나 되고. 저들은 하나님 대신에 뭘 믿어 저렇게 덩치가 클까. 저들은 무엇이 취미이며 무엇으로 자랑스러워 하는가. 기준도 사상도 노력도 전부 다 뒤집어 써서 이거 시작하는 싹수가 보니까 이 땅 위에 없애라 했던 세상으로 진뜩 준비하고 차려버렸으니, 이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제사를 드렸더라.” 이 제사가 매일 제사도 있고 한 주간 제사도 있고 한 달 제사도 있고 연중 3대 절기의 제사도 있습니다. 이렇게 이어지면 저절로 세상 물은 빠져버리고 이 땅 위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 위에서 내리는 모든 은혜와 복은 다른 데 보내 놔도 마지막에 돌고 돌아 이들에게 쌓일 건데, 이게 바뀌지 않으면 위에서 어떤 은혜를 내려도 남 좋은 일이 되고 자기들은 그 은혜에서 벗어납니다.
구약의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나안 그때 가나안보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더 좋은 가나안입니다. 창조 이후 오늘 우리처럼 좋은 세상을 가진 때는 없었습니다. 옛날 임금님도 77을 사셨다면 어제 가신 어른이 77이시던데, 조선 임금도 77 넘게 산 사람이 아마 영조가 영조가 80을 찍었던가 아마 한 사람밖에 없을 걸요. 아마. 조선의 왕도 팔순을 넘긴 사람이 아마 많아봐야 한 둘일 걸요. 77 산 왕이 거의 없습니다. 천하 좋은 거 다 먹고 천하 좋은 의사 옆에 느려놓고 살았던 임금님보다 더 오래 사는 데도 77이라 한 십 년은 더 사셨더라면 이 아쉬운 마음을 못내 떨칠 수가 없는데 이만하면 무병장수의 때가 되진 것 아닙니까. 예로부터 인간의 다섯 가지 복을 추리며 제1번이 오래 사는 장수였습니다. 오래 사는 장수. 90 전에 가시면 아쉬운 때입니다. 90도 90에 가면 그 뭔가 섭섭합니다. 95, 90 얼마는 되어야 좀 사셨구나 그러지. 이게 나이가 이렇게까지 된다는 말은 방어가 되고 안전이 되고 역량이 되고 마음의 행복이 따라갔다 그 뜻입니다. 아무리 음식이 좋고 안전해도 마음이 괴로우면 인간은 그렇게 오래 버티지를 못합니다. 만사 만고에 다 좋다는 그 말인데.
이만하면 에덴동산 이후에 가장 좋은 환경은 받았습니다. 환경을 좋게 하는데 그 환경 둘러보며 그 환경에 취해버리고 그 환경에 묻혀버리면 그 다음, 하나님은 도무지 그냥 뒀다가는 세상 사람이 되어 아주 못 쓰겠구나 뒤흔들어 버립니다. 놀 것 많고 잘 살 수 있는 환경이 들어 노느라고 공부를 안 하면 목표가 있는 부모는 좋은 환경을 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장난감이 많아서 그 놈의 장난감 다 가지고 노느라고 공부하지 않으면 장난감을 없애버리겠습니까? 더 주겠습니까? 어떻게 하겠습니까? 친부모가 계산이 있고 지성인이라면. 공부를 하다 한 번씩 노느라고 장난감으로 스트레스 해소하고 또 즐겁게 웃다가 또 공부하고 공부에 필요한 장난감이 되면 더 좋은 것 사주겠지. 공부할 시간을 뺏어 버리고 주색잡기에 인격을 버리고 해야 할 일을 놓쳐버리면 그 다음은 제거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좋은 환경 환경이 이렇게 좋으니 안심하고 마구 믿음에 전력해도 되겠구나 이렇게 가지 않고 움직이는 대로 돈이 벌리네, 지금 저금 액이 쌓여가네, 여기에 우리의 관심과 중심이 움직일 때 하나님은 저 돈을 언제쯤 쑥 빼가지고 주저앉히지. 하나님의 방향은 그쪽으로 갑니다. 나는 쌓고 하나님은 빼내고 누가 이기겠습니까? 내가 쌓아 놓은 돈을 하나님이 빼 가실 때는 그냥 도둑 맞는 것이 가장 덜 상하고 몸이 아프고 약값으로 나가는 것이 똑같은 돈이 없어져도 고통이고, 쌓아놓은 돈을 하나님이 빼 나갈 때 아이들을 그 돈 때문에 사람을 버려서 그 아이들이 나쁜 데 그 돈을 써버리고 공부하는 데 헛일 학비 들어갔다그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나가는 게 그다음 가슴 아플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나를 주저앉히는데 그 돈이 나가는 게 가장 큰 불행이 되어 집니다. 아예 주님 기뻐하는 대로 주님이 주시는 대로 챙겨 나가는 것이 돈벌이 하는 데도 좋고,
연세 많은 분들, 성경 읽고 기도하고 또 건강을 위해서 하루에 몇 시간은 움직여야 되는데 연세 많은 분들 움직이면 돈 준다고 그러면 겉으로는 움직이며 운동하고 또 속으로는 돈 챙기고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못 벌어 본 돈 버는 재미에 도둑이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르고 주서 담다가 딱 그 모양 됩니다. 창고 속에 먹을 것이 있어서 여우가 발버둥을 치고 굴을 파고 들어갔다가 실컷 먹고 그 구멍으로 나오려다 보니까 몸이 덩치가 커져서 못 나오니까 그런데 주인이 이제 올 때가 됐으니까 필사적으로 도망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다 보니까 창고 안에서 먹었던 것 쏙 다 빼놓고 내나 홀쭉해 져야 나오니까. 인간 살아가는 평생이 알고 보면 늘 하는 일이 그렇다. 그래서 이걸 다람쥐 쳇바퀴 돈다 그러기도 하고, 먹을 것 찾아 들어간 여우가 들어가서 실컷 먹고 나올 때는 먹은 것 다 놔두고 살 빼고 나오더라. 그럼 뭐 하려고 구멍 파고 들어갔을까. 세상에 그런 비유가 그냥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 사는 이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좋은 환경을 줬으면 그 좋은 환경을 살며 주님이 왜 이렇게 쌓아주고 좋게 만들었는지, 눈치 없으면 큰 불행이 밀고 들어옵니다. 하나 둘 알리다가 안 되면 결국은 눈치 주고 야단치다가 안 되면 회초리 드는 것이고 회초리에 버티면 그다음에는 못 버티는 더 큰 것이 오는 것이 하나님의 단계입니다. 좋을 때 별일 없을 때, 알아서 조심하며 큰 복을 향하는 우리 되도록 하십시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상가는 성가롤로 병원 장례식장입니다. 교회는 내일 오후 예배 마치고 심방 예배 갑니다.
1차-L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