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새23.2.28 사51:3 복의 근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세월이 더할수록 위로부터 계속되는 성화의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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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새23.2.28 사51:3 복의 근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세월이 더할수록 위로부터 계속되는 성화의 복

관리1 0 57 02.28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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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8 화새

제목 : 복의 근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세월이 더할수록 위로부터 계속되는 성화의 복

찬송 :

본문 : 이사야 51장 3절 -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모다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움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신앙으로 살아가려면 고난은 기본인 것이라 49장에서 살펴봤습니다. 고난이 있는 듯해도 알고 보면 치료고 그 고장을 수선 수리하는 일이니 알고 보면 반가운 일인데 그 길을 걸어가다 보면 아브라함으로 주신 복이 우물이 붉은색이면 아랫물이 붉은색 되지 파란색 되겠습니까? 아랫물이 붉은 색이라도 윗물이 계속 파란 물을 흘려보내면 결국 윗물 따라갑니다.

우리의 조상이 단군이라, 미신이라 말인데 5천년 미신의 불교의 유교에 찌들어 복이라는 복은 다 도망가고 어디 구경 한 번 할 수도 없었었는데 이런 중에 복음을 주셔서 그리고 이 복음의 조상이 아브라함이라 복의 근원이니 위에서 복에 근원 복을 자꾸 흘려 보내놓으면 미신의 귀신에 저주의 슬픔의 황폐함의 어려움의 민족이라도 뭐 크게 민족 볼 거 없이 우리 여수 바닷가 어렵게 살던 우리 덕산 우리 신풍동네라도 또 우리의 집안 우리의 가족 더 좁혀 내가 걸어온 걸음이라도 복의 근원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 아브라함이고 아브라함의 복을 밑으로 자꾸 흘려 보내놓으면 이미 찌들어져 있던 옛사람 복음을 받기 전에 형성된 내 성깔 잘못 살아온 말투 그로 인하여 집안에 생긴 이런저런 가난 어려움 뭐 그냥 깨져버린 엉망진창의 인격과 경제와 사회성과 모든 것이 엉망인 상태에서 이 나라의 복음이 자꾸 세월을 더해 가니까 경제도 고장이 고쳐지고 사회성도 고쳐지고 인격도 좋아지고 연세 많은 분들은 이런 말씀을 드릴 때 눈에 그림이 좀 나와야 됩니다.

원래 우리 한글에는 사랑합니다 라는 이런 단어가 없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글자는 있고 합니다 라는 단어는 있는데 두 개를 붙여서 사랑합니다. 이 말은 부부 간에도 쓰지 않던 말이고 이건 외국어를 번역한 거지 원래 한글이 아닙니다. 또 부모가 자식을 얘야 너를 사랑한다 이런 말투가 없었습니다. 아이들도 부모님한테 그런 말투 쓰지 않았고 5천년 한반도에 사랑합니다 라는 이런 좋은 말, 듣기는 괜찮은 이런 말 그 말을 하지 않았고 그 말 한다면 이상했고 뭔 고장이 생겼나? 뭔 치료를 하나? 그랬지 쓰지 않던 말인데 지금은 온 나라에 찰랑찰랑 차고 넘쳐서 전부 그 소리 하지 그 소리 안 하는 건 아마 우리 교회밖에 없을 겁니다. 교인들까지도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서 배워오지 학교에서 배워오지 친구들 흉내 내지 그러다 보니까 가정별로는 있을지 몰라도 제가 이 강단에서 우리 교인들을 사랑합니다, 그 표현한 기억이 없습니다. 우리 교인들은 교인들까지도 아마 그런 말 안 할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화가 나면 개나 줘버려라 그러는데 사랑합니다, 그런 표현은 강아지나 줘 가지고 개들이 데리고 놀 그런 장난감이지 한국의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사회성과 우리의 역사에서는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게 좋다, 난리가 날 건데요? 주변에서. 왜 쓰지 않아야 되느냐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사랑하는 눈빛과 말투와 사랑하는 행동이 나오는데 그건 입으로 가지고 표현할 필요가 없는 거라 그렇습니다. 정말 사랑이 있으면 눈빛 보면 알고 말투 보면 알고 행동 보면 다 아는데 그거 다 되고 또 하나를 더 한다? 그런 걸 김희락 선생님 뭐라고 그러지요? 한자로? 글자 쓸데없는 소리 하나 더 해가지고 괜히 손해 보는 거 이런 걸?

벤츠 차에다 대고 제가 페인트로 가지고 그림을 하나 그려주면 벤츠차가 더 좋아 보이겠습니까? 베려 버리겠습니까? 2억짜리 3억짜리 벤츠차를 딱 뽑았으면 그 독일 사람들은 멋진 미적 감각까지 있어서 점 하나 찍을 것도 없이 색깔까지 딱 맞췄는데 그 벤츠 차 뽑은 데다 대고 제가 목사라고 물감을 칠해가지고 벤츠차에다대고 축하라든지 또는 이 차는 고급차입니다, 적어 놓으면 차 버립니다.

하나님이 태어나는 아이들은 다 예쁘게 만들어 놨는데 남자애들은 남자답게 길러 가고 여자애들은 여자답게 예쁘게 하나님이 직접 기르는데 이게 5살 이때는 귀엽죠? 10살 괜찮지요? 이게 한 10대 후반 20이 돼 놓으면 기가 막히게 이게 인물이 나고 예뻐집니다. 여기다 대고 그림물감 가지고 덫 칠을 해놓으면 벤츠차에 제가 덫 칠 하는 것보다 10대 후반 20세에다 대고 얼굴에 덫 칠해 버리면 그건 좋은 작품을 영 버리는 걸로 저는 생각이 그렇습니다. 이런 거는 꺾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눈에다 대고 부채 두개 달아가지고 펄렁거리지 하나님 주신 좋은 눈썹 싹 밀어 버리고 전부 다 막 그려 버리지 머리카락 전부 뽑아가지고 새로 심어 버리지 식목도 산의 식목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안 좋을 건데? 이렇게 많이 칠해놓으면 피부가 못 견딥니다.

서양 사람들하고 가까이 좀 살아봤는데 그 사람들 많이 피부에다대고 발라놓기 때문에 나이가 많아 놓으면 밖에 나왔을 때는 뭘로 가지고 이렇게 견디는데 집에 가서 얼굴 딱 씻고 나면 한 그 사람들 40살 되면 우리나라 한 80살 만큼 그래 보이고 그 사람들 50대 돼 놓으면 송장 장례 치를 때 얼굴보다 더 험합니다. 많이 칠해놓으면 그렇습니다. 이게 이제 100년 전에 저 고종 황제 마지막 궁녀들 기록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얼굴 좋게 하려고 칠한 것은 전부 다 나이 많으면 피부를 안에서 썩여 내려 앉힌다 그럽니다. 나이 따라 그냥 조용하게 이렇게 파져가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연륜이고 경험이고 인생을 살아보고야 아는 지혜고 이게 인생의 어른이고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주신 우두머리라는 직접 표시인데 이걸 스무 살에 생생한 것처럼 해놓으니까 한몫에 무너질 때는 와라락 무너진다 그 말이죠.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이런 것을 그걸 그대로 좀 살려 가면 좋을 건데 이걸 너무 바꿔버리면 그리 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은혜는 말도 못하게 좋은데 사람이 너무 크게 손을 대놓으면 문제가 생긴다 라는 말입니다.

위에서 주는 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조상 아브라함이란 달리 해석을 하면 위에서 내려주는 하늘의 복이다. 우리는 5천 년간 종교로 사회성으로 말투로 생활로 경제로 국가까지 뭐 그냥
엉망이 되었던 그런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인데 지금은 누구든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뭐 뭘 도와드릴까요? 이런 말이 막 그냥 차고 넘쳐 있거든요. 어쨌든 저는 사랑합니다 말만은 하지 않습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말은 뭐 입에 늘 달고 삽니다. 이런 것도 이 나라에 복음이 들어와서 참 몹쓸 말투에다대고 아브라함 조상의 복음에 좋은 말투를 계속 위에서 흘려 놓으니까 이 나라 시골에 나이 많은 분들까지도 이제는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말들이 나오고 심지어 듣기는 거북해도 사랑합니다 라는 말투까지 그냥 이제 한글이 된 것처럼 이렇게 되어져 버렸습니다.

강단에서 참 옮기기 어려운 말투인데 제가 어릴 때부터 늘 듣는 말이 자기 아들한테다 대고 온갖 쌍욕을 풀어놓는데 이게 습관이 돼가지고 그게 험한 말인 줄도 몰라요. 지 뭐, 뭐 광하네 이런 말을 갖다가 자기 아들한테 하는데 세상에 아들한테 그거 할 말입니까? 아들한테 지.. 이런 말을 갖다 쓰는데 또 옮겨 쓰면 생생하게 들리겠는데 그냥 좋아도 그 말하고 뭐 그냥 너도 그러고 나도 그러고 그냥 친구들끼리 좋아도 그렇고 선생님도 애들한테 그러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손주가 예쁘면 그 지랄하는 말을 어떤 말인데 그런 말을 씁니까? 이런 말을 하도 많이 쓰니까 그냥 그게 예사로 그냥 좋은 말인 줄 알고 이렇게 살았었는데 이게 이 나라의 저주스럽고 참 자기가 자기 인격과 가정을 전부 엉망으로 만들고 멀쩡한 애들한테 자꾸 지랄하네,지랄하네 그러고 이게 어떤 아이가 되는 건데 그냥 웃으면서 좋게 하는 말도 그리 나왔습니다. 좋다는 말도.

저주스러운 참 마저 끝장이 나는 이런 말들을 예사로 해대던 이 나라의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좋은 말을 좋은 말을 좋은 말을 좋은 말과 행동을 계속 하니까 이제 선교사를 먼저 접한 사람들이 신사가 되고 말도 조심하고 자꾸 조심하고 자꾸 조심하다 보니까 저도 지금은 말을 좀 많이 조심하는 편이 된 것 같지요. 이것도 아브라함의 믿음의 조상의 복 중에 말투의 복이 계속 흘러가니까 이제 이리 됐습니다.

다른 말까지는 다 좋고 그놈은 사랑합니다라는 그 말까지만 안 했으면 좋겠는데 귀신이 모두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좋은 말을 자꾸 하니까 귀신이 사랑합니다, 말도 하나 넣어가지고 그냥 이제 이 말은 들어오면 다 썩어 내려 앉아버리는 건데 스물 신부의 고운 얼굴에 그냥 살짝 그 모습만 살리면 되는데 이걸 어디 몸 파는 여자처럼 괴상하게 칠해 놓으면 우선은 좋아 보일지 몰라도 뒤에 한꺼번에 내려앉을 때는 감당이 안 됩니다. 서양 분들 옆에서 지켜봐 보면 막 끔찍합니다. 그 서양 그림에 보면 마귀할멈 그리는 그림 봐 보셨습니까? 마귀할멈. 연세 좀 많은 분들 가까이 접해보면 아, 저래서 그림을 저렇게 그리는구나 싶을 만큼 이 골 주름이 얽히는 것이 무섭습니다. 그 사람들. 고기 많이 먹고 많이 빵빵하게 만들어 놨다 한몫에 무너지니까 처참해지는 겁니다. 마귀할멈의 그 그림의 끔찍한 모습이 미국의 서양의 연세 많은 분들 생활 속에 접해보면 실제 그렇습니다.

사랑합니다 라는 그런 말은 단어는 좋은 것 같은데 생활 속에 이런 것은 부부끼리도 좋지 않은 겁니다. 눈빛 보면 사랑이 넘쳐서 엉망인데 거기다 대고 사랑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의심을 받지 요 이게 지금 속에 뭔 작전이 들어가서 이 말로 지금 미끼를 던지나 싶을 거 아닙니까? 이 나라의 말투 이 나라의 행동 미국 처음 가서 이렇게 복도에 이렇게 사람이 서로 미국은 복도도 덩치가 크니까 복도가 넓어요. 나라가 크니까. 큰 복도에 이렇게 사람이 마주쳐도
옆 사람이 이렇게 어깨를 좀 치고 가는 게 제가 습관이었습니다. 그냥 앞으로 간다고 생각하지 옆 사람하고 이렇게 거치고 부딪히는 걸 실례라고 생각을 안 했었는데 복도에 걸어가면 저쪽에서 딱 한쪽에 붙어버려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잘나서 이렇게 착 걸어가고 저 사람들은 못 나서 이렇게 비켜주는 줄 알았지 이게 얼마나 개망나니에 무지하고 무작하고 예절 없고 처음에 이렇게 복도 들어가면 그 사람들은 문짝이 그렇게 무겁습니다. 집을 잘못 만들어서. 또 등치도 크니까. 이제 문짝에 이렇게 가는데 제가 걸어가면 여자 분이 문을 열어서 친절한 가 보다 자기가 열나는 가보다 하고 그냥 지나갔지 아, 뒤에 좀 살아 보니까 세상에 여자가 오면 저 멀리서 와도 미리 열어놓고 막 안내를 하고 이래야 되는데 여자 문 여는데 내가 먼저 그냥 쑥 지나가고 이랬으니 참, 참 이게 행동으로 봐도 배려로 봐도 말투로 봐도 엉망진창이 그런 곳을 거치면서 하기야 사람이 지나가는데 내가 걸어갈 공간이 있고 저 사람이 걸어갈 공간이 있지 시내버스도 한 사람이 타면 기사가 여기 있으면 내가 이쯤 앉는 것이 예절이 되겠다, 배려가 되겠다, 서너 사람이 여기 앉았으면 나는 여기 앉겠다, 이래서 버스를 타도 그 공간을 앉을 자리에 딱 골라 그래 앉습니다. 남한테 부대끼도록 밀어붙이지를 않습니다.

남 눈을 남 눈을 피곤케 만들고 남 어깨를 치고도 생각이 없고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먹고 살기 힘들지 무거운 짐을 졌지 저기까지 걸어가기는 걸어가야지 그 생각만 있고 생존의 생각만 있다 보니까 여유가 없고 생존의 생각만 있다 보니까 내 어깨가 저 사람을 치냐 마냐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겁니다. 특히 저는 노가다를 많이 해 놓으니까. 80kg 짐을 졌지 저기까지 가야 되는데 그것도 어렵지 그런데 옆에 지나가는 사람은 뭐 부딪히고 말고가 어디 있습니까? 그냥 직진하는 거지. 무거운 어깨에 짐을 졌지 소도 무거워서 죽을 지경이지 아이들 기르느라고 그냥 먹고 생존하느라고 애가 터지지 이러다 보니까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했지 부딪히는 대로 그냥 부딪히지 그게 실례가 되냐 마냐 남의 입장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오랜 세월 살다 보니까 교회가 먼저 들어가서 사회가 발전되고 넉넉해지고 눈치가 생긴 서양 교회들이 먼저 그렇게 여유가 있고 받은 복 때문에 여유가 있으니까 말투도 행동도 예절도 생기는 거고 먹고 살기 힘들다 보니까 이게 실례가 되는지 상대방에게 미안한 건지도 모르고 심지어 부부끼리도 날 위해서 수고하는 상대방을 생각해 보면 참 애쓴다, 수고한다, 참 못 도와줘서 이거 미안한데 어떨까 눈빛이 그렇고 말투가 이렇게 돼야 되는데 밥상에 앉은 부부의 말투도 뭔 전쟁이지 부모 자녀도 전쟁이지 습관이 꽉 절여놓으니까 예쁜 애한테 지랄 발광한다는 말을 갖다 세상에 그 말을 할 말입니까? 그게 얼마나 나쁜 줄도 몰랐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이라는 것은 믿고 보니 하늘의 참 하나님을 알게 되어 겸손도 정말 겸손을 알게 되고 자연 만물의 움직임도 하나님이 날 위한 이런 조정이고 배려이기 때문에 이전에는 비가 안 맞고 바람이 안 맞으면 욕부터 했는데 하늘이 구멍이 뚫렸냐, 뭐냐 대 들었는데 이제는 주님이 만물을 움직여 나를 보호하시니 여기 대해서 순응할 줄도 알고 그리고 주신 모든 가족들이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딸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 내게 맡긴 소중한 자녀이니 하나님을 생각해서 하나님이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을 해서 말도 곱게 하고 마음도 곱게 쓰고
또 그러도록 하나님께서 넉넉한 경제를 주시니 여유가 있으면 사람이 모든 것이 다 좋아지게 돼 있는 겁니다.

이렇게 따져보면 여기 아마 80대 되는 분들 저는 겪어보지 않아도 제가 눈으로는 봤는데 제 나이의 말투만 봐도 이거는 뭐 저주스러운 이 나라 뭐 같은 나라가 참 신사의 나라 됐고
배려의 나라 됐고 제가 신풍에서 처음 와가지고 핸들대 잡으면 어떻게 운전했는지 그때는 말을 안 해줘서 그냥 저는 목사니까 점잖게 운전한 줄 알았지 나중에 몇 년 지나니까 뭐 목사님 차에 앉으면 그냥 죽다 살아났다고 다 그래, 엄청 조심을 했는데도 그 정도니 제멋대로 운전했으면 어떡할 뻔 했습니까?

이제 운전이 얼마나 거친지는 부산이나 이쪽 여수 운전할 때는 잘 모릅니다. 제 차를 서울에서 운전을 해보면 간다고 갔는데 보니까 저 움직인 거는 전부 새치기였고 막 급정거였고 한 번은 보니까 차가 몇 백 미터 서 있어서 저 빈자리가 있어서 쭉 가서 넣었지만 알고 보니까 몇 백 대가 지금 거기 들어가려고 줄을 서서 점잖게 있는데 제 차만 쏙 들어간 꼴이 됐습니다. 알고 그랬으면 하라 그래도 안 그랬을 건데 이런 게 이제 생활 속에 있던 뒤에 나오는 3절 넘겨서 그 모든 황폐한 곳이었고 광야 같았고 이게 바로 사막이었던 겁니다. 운전의 면허도 황폐했고 광야 같고 사막 같고 그냥 뭐든지 다 그런 식이었지요.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해도 상대방 불편하지 않을까 나 때문에 상대방이 하나라도 덕을 보지 내가 손해를 보이지 않아야 될 건데 그리고 대화를 하면 배려가 있고 배려가 있으면 말이 부드러워지고 행동이 조심이 되고 상대방을 위해서 열심히 말을 하기는 했는데도 내 말이 너무 볼륨이 높아지면 상대방이 문제가 될까 봐 나이가 많으면 고막에 노화가 오기 때문에 가는 소리를 못 듣지 않습니까? 내가 못 들으니까 상대방이 못 듣는 줄 알고 목소리를 높이니까 나이가 많아지면 소리가 커지는데 젊은 사람은 어린 애들은 제가 말하면 귀가 아파요 그러거든요.
제가 또 말투가 너무 높았구나, 내가 말하는 것은 말을 낮춰도 상대방이 듣는데 날 기준으로 목소리를 높이다 보니까 쾅 쾅 소리가 들리면 이 아이가 센 소음에 익어지면 그다음 떠드는 애가 되고 억센 애가 되는 겁니다.

제 어릴 때의 성장 환경이 철공장이니까 철공장을 쇠 깎는 소리 망치로 치는 소리 가는 소리 끊는 소리 목공소는 옆에 오지를 못합니다. 철공장은. 그 이제 이런 데서 망치를 가져와라 조심해라 그러다 보면 이 목소리가 곱지를 못하고 막 쇠 소리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난무하는 공장 철공장이 성장 환경이 되다 보니까 저하고 가까운 사람들은 부드러운 말투를 해도 되는데 공연히 억세고 강하고 막가는 소리가 꽉 절여 놓은데 놨는데 그런데 조상 아브라함의 복이 위에서 계속 쏟아지며 이제 자꾸 성경 읽고 교인들 상대하고 심방을 해야 되고 첫 교인 만날 때 조심하고 그러다 보면 목소리가 이제 낮아지고 표현도 좀 부드러워지고 위에서 계속 물을 흘려보내면 밑에 물이 단물이라도 위에 쓴물을 계속 흘리면 마지막에는 쓴물 될 거고 밑에가 고약한 물이 흘러도 위에서 부드러운 좋은 물을 계속 흘려버리면 결국은 씻겨 나가고 좋은 물이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식구 중에 이 사람 말투가 억세면 상대방이 목소리를 더 낮춰가지고 조용하게 말하면 또 목소리가 컸구나, 목소리가 컸구나, 이게 이제 1년 5년 한 10년 지나가다 보면 결국은 두 말투 중에 강한 게 이기는 겁니다. 상대방 목소리가 크든 말든 계속해서 점잖게 조용하게 여진 있게 계속 말하면 이제 말투가 이쪽으로 좀 오셔야 되는 겁니다. 영향을 받으니까. 말투도 경제도 얼굴 표정도 교인끼리도 가족끼리도 이렇게 되어 지는 것이 이거는 복음의 직접적인 복은 아니지만 천국의 복음 주님이 직접 주시는 은혜의 복음이 진짜 복음인데 이 복음을 받다 보면 나중에 옷 입는 것도 고와지고 말투도 고와지고 마음씨도 고와지고 말투와 마음씨와 행동이 계속 좋아지면 얼굴도 고와지고 부드러워지고 그래서 잘 믿고 세월이 지나간 분은 사진만 봐도 참 천사 같다 그리 나와야 됩니다. 그렇게 안 했으면 설교야 번질번질했지만 제 마음속은 억세고 강한 게 많으면 그 얼굴 인상이 나중에 말 따라가겠습니까? 제 마음씨 따라가겠습니까?

백 목사님 사시는 5층 서재에 거울이 11개인가 달려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설교는 잘하고 말은 옳은데 사람의 눈매가 얼마나 무서운지 그냥 눈을 못 쳐다보겠더라고 이런 말이 계속 들리니까 그 고신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부딪히는 게 많다 보니까 이제 그렇게 날카로워진 겁니다. 연세 많아지고 나서는 침대에 누워서 이리 봐도 거울이 보이고 저리 봐도 거울이 보이고 들어올 때도 거울이 보이고 나올 때도 거울이 보이도록 거울을 열한 개를 달아가지고 계속 자기가 자기 얼굴을 보면서 전화할 때도 보고 누워서도 보고 쉴 때도 보면서 얼굴을 자꾸 바꾸니까 80이 들어서 그 얼굴은 그 누가 봐도 참 얼굴만 봐도 은혜가 되어서 그냥 이 교회를 다니고 싶다고 이렇게 빨려 들어갈 만큼 설교의 내용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 얼굴만 봐도 그거 40대 50대 연습해 가지고 그리 된 게 아닙니다. 60 넘어 연습해서 80에는 얼굴 모습까지 도인이 되어졌습니다.

여기 새벽에 설교하는 저도 앞자리에 있는 연세 많은 우리 집사님들도 거울을 봐서 자기 얼굴이 호랑이가 되면 어, 인상을 더 그려야 밖에 나가면 절절 매겠지 그래 놓으면 그게 바로 사탄의 자식이 돼버립니다. 이 나이 되도록 기도하고 이 나이 되도록 주님을 상대한 내 얼굴이 집안의 전통은 몰골이 험할지라도 나 살아 온 과거는 생존을 위해서 억셌을지라도 노년에 이제 뭘 더 벌겠다고 싸울 거며 더 이루겠다고 난리를 할 겁니까? 주님 앞에 설날을 생각하며
천국의 주님을 보고 천사 천군 천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만물을 다스릴 하나님의 자녀의 얼굴이 상판때기 이걸 가지고 가서 되겠느냐 쳐다보며 웃는 연습도 하고 말씀하시는 것도 자꾸 부드럽게 해가지고 남학생 여학생 연애질 하려고 말을 갖다 부드럽게 하는 그건 밉상이고 남한테 부담이 되지 않도록 배려가 되도록 연습하는 것은 자꾸 연습이 좀 되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고요히 우리 집안의 말투는 어떠한가, 우리 집안 말투는 어떠한가, 내 얼굴 표정은 어떠한가 내 걸음걸이는 어떠한가, 날 지나치며 날 기억하는 사람이 아이고 뭔 고슴도치 같은 게 하나 무슨 이리 같은 게 하나, 어느 정도 되는 게 좋겠냐? 이것이 성화의 끝이며 그리고 성화의 사실은 출발이 될 수가 있습니다.



1차-k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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