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후23.2.26 사51:2 못나도 신앙 혈통은 아브라함, 혈혈단신의 순종에 오늘도 약속된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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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23.2.26 사51:2 못나도 신앙 혈통은 아브라함, 혈혈단신의 순종에 오늘도 약속된 소망

관리1 0 75 02.2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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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6 주후

제목 : 못나도 신앙 혈통은 아브라함, 혈혈단신의 순종에 오늘도 약속된 소망

사회: 김 희락
찬송: 165장(내 영혼이 은총 입어), 195장(너 시험을 당해)/ 158장(내 주의 지신 십자가)

본문: 이사야 51장 2절 -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

다 같이 묵도 드림으로 예배 시작하겠습니다.

(기도)
생각 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말씀대로 살려다가 당하는 작은 환란 피할 수는 없으나, 잠시 잠깐 당하는 이 어려움 속에 우리를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년같이 하늘에서 지켜보시며, 간절하게 지지 않고 이기기를 소원함으로 항상 말할 수 없는 단식으로 친히 간구하시는 주님. 그러나 저희의 마음은 어둡고 더러워서 스스로 주님과 말씀을 떠나 절망하기 쉬운 그러한 어리석고 연약한 존재이오니, 이 시간도 말씀으로 각인의 마음을 열어 인생의 최종의 결과, 더는 세상에게 속지 않는 바른 깨달음의 빛을 비추어 주옵시고. 나를 향한 주님의 뜻과 소원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깨달아 느끼게 하사, 이 깨달음 받아 가진 깨달음과 은혜로 인하여 나를 향한 변하지 않는 주님의 뜻과 소원을, 기필코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새 각오와 소망의 자세로, 다시 펼쳐질 새로운 현실 속에 어떠한 형편이 펼쳐지더라도, 주님 한 분 모시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세상을 이기고 구원을 이루어 가는, 귀하고 복된 우리 교인들이 될 수 있도록 이 시간도 친히 동행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첫 달에 요한복음 15장 둘째 달에 요한복음 49장을 계속 살피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살다 보면 어려움은 그건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오히려 환영하며 당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운전 모르던 사람이 운전 배우는 잠깐의 연습을 통해 천하를 날아다니게 되는데, 돈 주고도 배우고 그런 교회를 자부심을 가지지 뭔 자동차 학원에 돈 준다고 울고, 하루 배우고 와가지고 다리가 떨린다고 울고 그런 사람 보셨습니까. 얼마나 자랑스러운데. 한 몇 달 익혀놓으면 걸어 열흘 걸리던 서울을 뭐 그냥 서너 시간이면 날아가는데, 사람이 토끼보다 치타보다 독수리보다 더 빨리 달리는 그 소망에 돈 주고 배우는 겁니다. 우리교회 지금 이쪽 북쪽의 고흥에 백 목사님 바로 밑에 여동생 백계순 집사님의 외동 손주가, 경항공기라고 한두 명 타는 비행기 만드는 공장을 10년 전에 허가내서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다고 했었습니다. 한두 명 타는 그 비행기 그거 타고 떨어지면 바로 갑니다. 그 위험하고 돈 드는 걸 누가 할까 농사짓는 우리는 그리 보지만은, 차는 벌써 생활화됐고 해외여행 벌써 많이 다녔고 그 이상을 추구하는 지성인 돈 많은 사람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그러면서 비싼 돈 들여 몇 년 배워서 요 위에 뺑 소리 나고 돌아가는 그 자가용 비행기 그거 타고 댕깁니다. 그거 참 위험합니다. 그거 배운다고 나는 이렇게 고생하니 슬프니 마니 그런 사람 없습니다. 자부심이 있지. 너희들은 차지 너희들은 해외여행이지 난 조종기 들고 내 마음대로 돌아다닌다고 그럽니다. 인식 차이입니다. 신풍 농사짓는 사람들은 마한 놈 밥 먹고 할 짓이 없어 저런 위험한 짓을 해. 그러고 그 위에서 내려 보는 그 사람은 멍청한 것들 이 벌레 같은 것들 신풍 땅이나 뒤지고 앉아 있는 것들, 그 짐승이나 사람이나 비슷하게 보고 자기만 훌륭한 줄 압니다. 이건 어느 쪽이 맞는지 쉽게 말 못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잘 날수록 그 짓합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하나님이 주신 조상 아브라함 이 이름에 묻었고 이 이름에 흘러나오는 이 복이, 구약의 육체의 복을 이어온 사람은 지금 세계를 휘어잡았고 신약의 신령한 아브라함으로 읽는 우리는, 신앙으로 신령한 천국의 영생을 다 딱 틀어쥐고 있는데, 그 위험한 거 아니냐. 가짜 아니냐. 눈으로 봤냐. 이렇게 주변 사방에서 흔드니까 내가 걸어간 게 잡기는 바로 잡아갔는지 착각은 아닌지, 어리면 헷갈리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근데 세월이 지나고 비교해보며 겪어보고 긴지 짧은지 비교해보고 부딪혀 보면서, 귀한 거구나 알면 그때서야 이제 나이 들어 철들어 참 귀합니다. 그러지만은 자기처럼 어릴 때 젊을 때를 거치는 자기 후배들은 그 착각하는 거 아니냐? 라고 또 그러는 겁니다. 먼저 걸어간 사람은 애 터지고 뒤에 걸어가는 사람은 불안하고, 하나님이 일부러 이렇게 만들어 구약과 신약을 비교시키고, 어린 때와 젊은 때와 나이 많아 이렇게 알아가는 것을 주기 때문에 어릴 때 어린 소리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어릴 때 젊은이의 눈을 가지면 대단한 겁니다. 만약에 어린 사람이 나이 많아서 가지는 이런 안목을 가진다면, 이건 뭐 횡재한 것이고 여기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겁니다. 이사야 시대는 어려운 시대 전부 희망 없는 절망의 낭떠러지 딱 끝에 밀렸는데, 이사야 한 사람의 외침으로 다시 기회가 주어진 때입니다. 그리고 49장에 오면 고난 중에 소망을 가지게 해 주셨고 여기 51장 이번 주부터. 2절에 너희 조상 아브라함 오전에, 너 조상이 아브라함이다. 조상이 말이면 망아지 되지 송아지 되지는 못합니다. 조상이 왕이면 왕자 되지 신하되지는 못합니다. 너 부모 조상이 새면 너는 참새 되지 사람 되지는 못합니다. 사람 중에 우리에게 네 조상 너의 혈통은 아브라함이다. 우리가 유대인입니까? 우리가 이스라엘에 삽니까? 육체의 이스라엘의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주면서 오늘 우리에게는 신령한 신앙의 조상이 아브라함이다. 그리고 창세기 12장부터 아브라함을 연구해 보면 세상에 이 복을 이복을, 이복을 세상을 다 만들어 병풍으로 삼아놓고 아브라함 하나를 쏙 빼서 하나님이 직접 붙들어 걸어가신 그 걸음걸음을, 2절에 따라 하십시다. 혈혈단신으로(혈혈단신으로).

아브라함은 혼자 간 게 아니라 조카와 함께 식구들과 함께 갔습니다. 그러나 성격 걸어가는 길은 아브라함의 길 한 길입니다. 열 명이 가도 한 길 혼자 가도 한 길. 아브라함에게만 준 신앙의 복에 이 신령한 길 하나님은 이것은 천국에 쓰는 거다. 그러면서 복음을 주셨는데 천국을 향하는 이 복음을 받아가지고 이거 얼마짜리입니까. 가게에 가서 물어보면 10원도 쳐주지 않을 겁니다. 이런 육체적인 이런 눈에 보이는 것을 잠깐 좀 제쳐 놓고 너희 조상은 아브라함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라함 오늘 우리의 조상은 신앙의 출발에 혼자 걸어간 그 걸음이 우리의 앞선 걸음이니, 우리는 뒤따라가며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겁니다. 세상은 유대인들에게 천국은 우리에게. 유대인들 화나면 무서운데 이 말은 해도 웃지 뭐 그렇게 화낼 일이 아닙니다. 세상 다 가져가라니까 왜 싫어하겠습니까. 세상 다 가져 가라는 말은 천국은 내 거다 그 말인데 그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세상은 다 가져가시고 신령한 천국은 제가 다 챙기겠습니다. 세상 좋아하는 사람은 천국 너하고 세상 나한다. 그래서 좋아하고 천국을 소망하는 우리는 불편한 세상은 다 떠넘기고 천국만 가지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깨닫고 요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이사야 51장 2절을 주신 겁니다. 너희는 조상이 아브라함이다. 이 말씀 때문에 조상이 아브라함 아닌 사람 조상 아브라함 하기 싫은 사람은, 그냥 교회 욕하고 나가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붙들고 싶은 사람은 아브라함도 혈혈단신으로 걸어갔으니 나도 이 깨달음으로 2023년 2월 26일을 걸어갈 때, 그 나 주변의 사람은 많지 못하겠다. 이렇게 홀로 걸어갈 줄 알았는데 만약에 몇 명이라도 식구가 함께 간다면 굉장한 겁니다. 만약에 이렇게 오후에 한 100여 명이 함께 앉았다면 이거 뭐 그냥 참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너무 많아서 탈이지. 제대로 된 한 명은 어설픈 백 명 천명 만 명을 이깁니다. 오후예배 100명 130명이 만약에 제대로 됐으면 천하를 감당하고도 남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앉아 있는 오후 예배 우리 중에 하나나 둘이라도 좋고 만약에 10명 정도 된다면, 마음먹고 앉아 있는 분이 10명 된다면 소돔을 멸망해서 막아내는 정도입니다. 굉장하죠.

아브라함 당대에 아브라함이 소돔을 막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여기 열 명이 만약에 마음먹고 아브라함의 자손임이 틀림이 없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소돔보다 더한 오늘을 감당할 수 있는 겁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종자는 씨앗은 핏줄은 아브라함인데. 말이 낳아 놓으면 김지윤 김 김정윤. 말이 낳으면 강아지예요. 망아지예요? 망아지예요? 또 옆에 뒤에 여솔이 나요? 소가 낳으면 송아지인가요? 망아지인가요? 송아지라 그래요 소가 낳았는데 망아지 나오는 수는 절대 없습니다. 소가 낳았으면 큰 소냐. 작은 소냐. 그 차이는 있어도 송아지는 송아지입니다. 조상이 아브라함이면 반 거치라도 우리는 이삭이고 야곱이 됩니다. 못나도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게 돈보다 낮고 이게 천하를 쥔 것 보다는 나은데, 우리의 눈이 좁으니 어린 아이에게는 초콜릿 하나 주면 금반지도 빼줄 버립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초콜릿 하나라면 옛날에는 엿 하나라 그랬습니다. 엿 한 토막 주면 엄마 빨래하느라고 벗어놓은 금반지 가져와서 줘버립니다. 3살이니까. 다섯 살이니까. 압니까? 부모라도 팔아먹을 건데. 모르면 이렇게 됩니다. 알면 아는 것을 가집니다. 그리 되지요. 아브라함은 비싼 거다 좋은 거다. 굉장한 거다 굉장한 겁니다. 말도 좋은 말은 말 한 마리 종마에 뭐 50억 100억도 한답니다. 그거 잡아먹으면 뭐 100만 원도 안 할 것 같은데. 이게 낳아놓으면 달리기만 하면 1등을 하는 그런 말이 있답니다. 서로 그냥 한 번 빌리려고 난리가 난답니다. 아브라함은 누구보다 나을까 참 굉장한 인물인데. 알아보면 아브라함이 조상이고 나는 아브라함의 신앙에 계통에 있다는 걸 자랑스러워 할 터인데. 모르면 뭔 아브라함 같은 걸 갖다가? 몰라보는 사람은 이 아브라함의 이름을 몰라봅니다.

너희는 조상이 아브라함이다 바꾸면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불러 2절에 아브라함과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혈혈단신 혼자 걸어갈 때, 하나님이 불렀고 그에게 복을 주어 아브라함 밖에는 복을 준 일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 아닌 애굽이나 아브라함 아닌 앗수르나 아브라함이 아닌 로마나 다른 나라가 가진 복은 얼른 보면 복 같은데 그 복을 뒤집어 보면 망할 복이었습니다. 망할 복. 망하지 않을 수 없는 저주, 겉은 좋고 속은 망할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준 것은 겉은 별 것이 없는 것 같은데 그 속에는 제대로 된 복이 들어 있었는데 이 복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 하나님이 주신 복은 따라 하시지요. 완전(완전), 영원불변(영원불변). 좋기는 좋은데 내일 되면 바뀌면 이것도 기가 찹니다. 오늘도 완전 내일도 완전 영원불변. 하나님이 주는 것은 뭐든지 영원불변의 완전의 복입니다. 근데 애들 눈에 보면 초콜릿이 낫지 뭔 금반지라. 옛날 어른들에게 금반지 주고 다이아반지 주고 둘 중에 하나 잡으라면 전부 금반지 잡고 웃을 겁니다. 요즘 젊은 사람은 금반지 이만큼 줘도 다이아반지 잡을 겁니다. 가치를 아니까 이리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 그거 어디 쓰는데? 대학병원 의사도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뭐 국회의원도 못하고 간 사람입니다. 밀려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그 좁은 땅 가나안도 받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죽을 때쯤 아브라함이 보이는 가나안 땅 위에 평안이 아니라, 저 나라를 주신다는 말인데 내가 몰랐구나. 그리고 아브라함이 갔고 이삭도 갔고 야곱도 그리 갔었습니다.

그들이 가지지 못한 천국의 복을 껍데기 세상을 딱 치워버리고, 알맹이 쏙 뽑아다가 신약에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우리에게는 직접 제사 대신 예배, 모든 제사의 제도에 보이는 거 다 제쳐놓고 말씀 읽고 말씀 속에 뜻을 찾으면, 내속에 주님이 직접 오셔서 아브라함이 걸어간 걸음이 이 걸음인데, 넌 오늘 신앙의 걸음을 홀로 걸어가려면 이런 어려움 외로움 또는 고통이 있겠지만 그건 기본이다. 좋은 거다. 뭔 의대 댕기는 사람들이 공부한다고 죽겠다고 엄살은 부리지만은 몇 년 후에 보자 그러지 않습니까. 몇 년 후에 보자. 의대 댕기는 사람은 창피해서 뒷골목에 숨어 다닙니까.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까. 난 앞으로 희망이 있다 이 뜻입니다. 암행어사 마패가지고 설치고 다니면 도둑들 다 튀 버립니다. 거지처럼 댕겨야 걸려들지. 걸려들 때 내가 암행어사다 여기 임금이다. 이럴 때 이제 빛을 보는 거지. 아브라함은 세상에 쓰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이거 선거할 때 쓰는 것도 아니고 사업할 때 쓰는 것 아니고 선거운동 사업하는데 아브라함 쓰면 돈도 안 되고 표도 못 모읍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천국 용도로만 주신 겁니다. 이걸 땅에서 풀면 하늘이 열려버립니다. 땅에서 닫아버리고 안 열면 그 하늘은 닫혀 있습니다. 이런 보배를 우리 손에 무료로 주셨으니 이것도 그냥 준 것이 아니라 조상이 아브라함이니 내 손에는 아브라함 요소가 다 들어와 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준 게 복이 있고 복이라는 복이 정말 복이면 아브라함이 가진 것만 복이지 남이 가진 것은 복이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가지지 않은 신무기를 북쪽이나 일본에서 가지면 우리는 떨어야 됩니다. 그건 좋은 게 아니라 어느 날 이쪽을 향하면 우리는 노예 됩니다. 그 복이라는 복은 아브라함에게 준 것만 복입니다. 아브라함 외에 복을 준적은 없습니다. 인간끼리 이게 복이니 뭐니 자기들끼리 그러는 거지. 그런 거는 옆으로 제쳐놓고 틀림없이 복된 사람은 되었고, 먼저 구약의 아브라함을 혈혈단신 혼자 걸어갈 때 부르시고 복을 주시고 마구 번창 시켜 놓고 오늘 우리들에게, 아브라함에 걸어간 외로운 길 중간에 길 그리고 뒤에 복 받은 길 뒤에 잘 된 길을 딱 보며, 너의 천국과 너의 신앙의 앞날은 틀림없이 이렇게 영원불변으로 줄 터이니 곁눈 옆 눈 뜨지 말아라. 곁눈 옆 눈 뜨지 말아라 그럽니다. 우리 교인들 정부에서 받은 한 2천 몇 백만 원 짜리 비싼 차들 더러 있지요. 그 차 이름에 보면 마사회 기정이라고 찍힌 그 마사회가 말 달리기 시키고 도박해서 번 돈입니다. 그 말 달리기 할 때 보면 요 눈이 말 눈 옆에다 대고 이렇게 가리개를 해놓습니다. 마구 달려가는데 옆에 뭐가 보이면 튀어버리니까 오로지 앞만 보라고. 앞만 보면 달려 1등 하는데 말이 곁눈질하고 뒷눈질하고 이러면 달리지를 못합니다. 천국만을 바라보라 혈혈단신 아브라함을 뒤따라 천국만 계산해라 천국 계산하고 오늘이 좋으면 오늘 좋은 거고, 오늘의 금 방석을 주더라도 천국에 싫으면 옆집에 돌려줘 버리고 딱 앞만을 향해 가라. 요한계시록 6장 네 말 중에 첫 번째 말이 추이솔 무슨 색깔이요? 검은색? 청황색? 붉은색? 흰색? 문제를 드렸으니까 거꾸로 드렸겠지? 백마입니다. 백마 운동. 왜 복음을 백마 운동이라고 그랬느냐. 하늘을 향한 말씀으로 살아가는 거룩의 이 길에 옆 돌아보지 말아라. 뒤돌아보지 말아라. 옆에서 뭐라 해도 놀라지 말고 앞을 향해서 질주해 버려라. 옆에서 뒤에서 뭐가 날아오면 어떡하죠? 주님께 맡겨버려라 그리고 가는 겁니다. 도박하는 사람이 인생 두 번 사냐. 그러고 벌어놓은 거 한 판에 다 바쳐 버립니다. 그리고 노숙자 하고 군대는 한 번 죽냐 두 번 죽냐 한 번 죽지. 그러고 달려가다가 피해 가면 영웅 되고 죽으면 무명용사 됩니다. 안 믿는 사람이 길이 있습니까. 그 길밖에 없지.

믿는 사람은 주님이 걸어가라 했으니 걸어가고 옆이고 뒤 문제는 주님이 책임진다니까 다 맡겨버리면 내가 내 문제 맞는 것보다는 주님이 내 문제를 맞는 게 그래도 낫지 않겠습니까? 계산을 해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학생이 자기의 앞날 자기가 연구하는 것보다야 선생 말 듣는 게 나을 거고, 선생 말도 무책임한 이 주변의 선생 말이 아니라, 대입 수능 시험 출제위원이 이 책에 이 부분 잘 봐야 됩니다. 그러면 그거 믿을 만하지 않습니까? 친구가 금융감독원이 있는데 앞으로 이게 뜬다. 저게 뜬다. 만약에 한마디 알려주면 대박 치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그거 법에 위반도 안 됐습니다. 그런 그냥 말해주지. 요즘은 비밀 누설이라고 막 잡아들입니다. 이제 뭔지 알아봐버렸거든요. 우리 하나님은 그런 거 가리고 뭐 그럴 것 없습니다. 성경에 다 적어놓고 아브라함 자손 신앙의 사람의 앞길은 아브라함의 복이 뒤를 따라간다. 하나님이 준 복은 뺏어가기도 없다. 바꿔치기도 없다. 그 복의 뒤는 번창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지금 번창이라 그럽니다. 성경은 이사야 51장 2절에 번창을 뭐라고 적었다고요? 다 같이. 창성이라 적었습니다. 같은 말입니다. 번창하고 번성한다. 번성 번창 두 말을 여기 창성이라 한 마디로 줄였습니다. 한 주간 우리가 스스로 살펴볼 일입니다. 51장 1절로 돌아와서 “의를 좇으며” 겉으로는 말씀을 따르고 속으로는 말씀 속에 넣어둔 뜻이 뭘까 수요일 금요일 살폈습니다.

부모가 학교 가라 학교 가서 딱지 따먹기 하란 말인가? 학교 가서 놀다 오란 말인가? 공부하란 말인가. 학교 가라는 말은 부모의 말씀인데 그 속에 들어 있는 뜻은 공부해라 그 말입니다. 학교 가라 해서 개근상 12장 받아 왔으니까 됐네? 야 인간아 12장 개근상이 문제가 아니라 공부하러 가라 그랬지 학교 구경하러 가라 그랬냐. 학교 가라말은 말씀입니다. 그 말씀 속에 들어있는 게 뭐냐 이게 뜻입니다. 아니 그러면 뜻을 적어주지 왜 말씀을 적어주셨습니까? 천 명 만 명 믿는 사람 한 사람 사람에 대한 뜻이 다 틀리기 때문에, 한 사람 사람에게 해당되는 걸 다 적으려면 성경은 천하에 쌓아둘 데가 없습니다. 읽고 싶어도 못 읽습니다. 그래서 모든 믿는 사람에게 똑같이 해당된 한 말씀을 적어놓고, 이 말씀을 읽을 때 너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이라고 읽었냐. 남반에게 주신 뜻이 다르고 여반에게 주신 뜻이 다르고 제게 준 뜻이 다르고 한 사람 사람에게 주신 뜻이 다 다릅니다. 안식일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온 가정에 나만 믿고 식구들이 안 믿으면, 안 믿는 식구들의 안 믿을 권리를 생각해가면서 내 신앙 유지하려면 고생 많이 해야 됩니다. 우리 식구는 전부가 다 주일을 잘 아는 식구의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은 일 안 하면 된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말씀은 하는데 이 말씀이 가는 가정마다 사람마다 신앙에 따라 오늘 내일에 따라, 말씀 안에 들어 있는 뜻은 사람사람이 다 다르기 때문에 겉으로는 한 말씀이고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은 양심의 귀에 귀를 기울여 봐야 됩니다. 제가 주일날 삽 들고 망치 들고 일 안 하면서 주일 지켰다 그러면 너 월급 어떻게 받냐? 이러겠지요. 교인들이야 일터로 일하러 나가지 않으면 안식이지만은, 목사 너는 주일날 남들 일주일 일하는 노력으로 진땀을 흘려야지. 똑같은 안식일과 똑같은 말씀은 하나인데 그 속에 있는 뜻은, 전 주일날 한 주간에 제일 일을 많이 해야 되고, 여러분들은 어떤 돈이 있더라도 그냥 덮어놓으면 좋은 겁니다. 말씀은 하는데 그 속에 있는 뜻이 누구를 향하느냐 따라서 다 다르지 않습니까?

오늘도 전대병원 입원하고 계신 우리 집사님 같은 분들은 병실에 오고 가는 사람들 오고 가지만은, 아픈 척하고 그냥 누워서 기도하면 굉장히 주일을 잘 지키는 겁니다. 그 복잡한 병실에서 그냥 이 병실 저 병실 서로 주고받고 대화도 하고 뭐 먹을 것도 그러고 그러면서 하루를 보내는데, 믿는 사람은 또 집사님 정도 되면 입원실에서 딱 듣고 아픈 척 하면서 속으로 기도하면, 그냥 깊은 산 속 기도원 가는 거나 병실 속에 하루 늘 마음속에, 이 참 건강이 소중한데 이렇게 소중한 줄도 몰랐구나. 하나님은 귀한 건강을 주셨는데 멋모르고 살아 이거 귀한 줄 알라고 이렇게 병원에 입원을 시켜놨으니, 다른 사람들은 재수가 있니 없니 뭐 병원에 하루 입원하는데 보험이 얼마 나오니, 다른 사람은 이것만 연구하고 믿는 사람은 주일날 이렇게 건강하게 주셨는데 멋모르고 다니다가 부러지고 나니까 이게 얼마나 귀하구나. 주님은 큰 걸 주셨는데 내가 몰랐구나. 그러면서 지난날을 연구해보고 이리 생각해보고 저리 생각해보면 병실 속에서 혼자 산 속에 기도하는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을, 병실에 앉아가지고 예배도 안 보면서 은혜 받을 수도 있고, 이게 말씀은 하나인데 그 속에 있는 뜻은 시간마다 현실마다 사람마다 가정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 “의를 좇으며” 말씀은 하나인데 너에 대한 주님의 뜻은 뭔지 좀 생각 좀 해봐라. 그 길을 따라가면 계약의 하나님 여호와의 복이 뒤를 따라갈 거다. 그러기 위해서 너희를 떠낸 반석과 원래 너희들이 애굽에 붙어살았는데, 애굽에 붙어사는 거 이거 떼 내느라고 10가지 재앙으로 온 애굽을 막 그냥 뒤집고 이거 겨우 꺼낸 겁니다.

5천년 유교니 불교니 별별 미신의 가나안의 나라가 엉망이 돼가지고 그냥 들어붙어 있는 이 속에, 우리 하나를 떼 내려고 중국이 쥐 박았다. 일본이 집어먹었다. 미국이 핵까지 떨구면서 일본을 해방시켰다. 별별 세계 전쟁의 난리에 몇 천만 명이 죽으면서 마지막에 까보니까 열어보니까, 이 못난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서 이제 신앙의 자유라는 것이 하나 툭 떨어졌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 하나 믿게 하려고 역사 6천 년과 2차 세계대전 등등의 많은 나라가 별별 전쟁도 하고 별별 고통 다 겪었습니다. 일본 애들은 핵폭탄 두 개나 맞았고 그들은 큰 애들한테 대들다가 두 개 맞았다. 이렇게 기억하지만은 한국에 있는 우리 교인들은 이 나라 유교 불교의 이 거대한 바위가 틀어쥐고 있는데, 곱게 말해가지고는 영 믿지를 않으니까, 원자탄 두 개로 그냥 두드려가지고 겨우 떼 내서 신앙 자유 이렇게 안겨준 겁니다. 우리의 오늘의 이 날을 위하여 역사와 많은 불신자들이 얼마나 고초를 많이 겪은 줄 알면 한국 교회에 난리가 날 겁니다. 청구하려고. 너희들 늦게 믿는 바람에 우리가 이렇게 난리 났다고. 애굽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곱게 나왔으면 애굽의 장자 재앙이나 이런 소동은 없을 뻔 했으나, 바로 왕이 강퍅해서 끝까지 틀어쥐지 하나님은 떠내야 되지. 결국은 하나님이 이기는 바람에 열 재앙에 죽어 나간 백성들이 한도 없었습니다. 마지막 바로의 신하들이 왕에게 왕이여 온 애굽이 다 죽어 나갑니다. 그런데도 바로가 한 번 더 버티는 바람에 왕궁의 장자도 하나 불러 가고야 얼른 나가라 그리 된 겁니다. 하늘을 향하여 가야 될 우리는 우리의 길 가지만은 우리가 멈칫 멈칫하면서 여기저기 기웃기웃 하면, 사방천지 하나님이 다 요절을 냅니다. 존귀한 자이기 때문에.

이사야 49장 문유정 몇 절? 여호와 보시기에 나는 존귀한자라 이사야 49장 5절이던가요? 이사야 49장 8절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너를, 은혜의 때 은혜의 때 네가 내게,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이사야 49장 8절이었습니다. 그다음 5절은 “여호와 보시기에 나는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그러니 사로잡혔고 흑암에 있는 자들아 나오라 드러나라 그 자리는 네 자리가 아니다. 애굽 바로 왕 옆에 고기 가마 끓이다가 고기 한 점 얻어먹는 것은 애굽의 강아지들이 하는 일이지, 하나님의 백성 존귀한 자들은 그 애굽 땅에 가마솥 옆에서 얻어먹고 그거 아니다. 애굽의 가마솥 옆에 고기 한 점 얻어먹으며 나는 두 점 얻어먹었다. 자랑. 나는 한 점 얻어먹었다. 자랑. 나는 가마솥에 들어가기 전에 생고기 한 개 들어냈다. 자랑. 이게 세상 월급 자랑입니다. 나는 애굽에 우리 백성들 노예 생활할 때 나는 10부장 10명 감독하는 패장이었다. 나는 그 위에 감독이었다. 그거 자랑 아닙니다. 일제 때 나는 면장 했다. 그 말은 일제 때 나는 면장하면서 몇 천 명 우리 동족 조선인들을 억압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때는 좋았지. 해방 뒤에 되니까 그냥 친일파 후손이라고 이름이 붙어가지고 지금도 도망 다니고 그럽니다. 그때는 그게 좋은 줄 알았지. 애굽 나라 안에 패장한 사람 감독 한 사람 간부 한 사람 출애굽을 하고 보니, 자기 민족 자기 동족을 착취한 부끄러운 자리였는데 깨닫지 못하면 그 자리가 탐이 나고 그리워서, 그 시절은 고기 한 점 얻어먹었는데 그 시절 고기 얻어먹었으면 나쁜 짓을 더했겠지요. 자기 동족 밑에 사람 짓밟았겠지요. 예수님 오셨을 때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이 세리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세금을 바치는데 자기 민족 세금을 착취를 많이 해야 자기가 남겨 먹고 위로 상납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세리는 죄인 중의 괴수 죄인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떠날지라도 세상 어디 가도 나는 이 정도 된다. 저 정도 된다. 말씀은 옆에 제쳐 놓고 이 정도 번다. 이런 과장됐다 부장됐다 그러고 앉았으면 주님은 애굽나라 패장 되어서 애굽나라 감독되어서 네 민족 네 신앙 다 어떻게 했냐. 이걸 물어봅니다. 연봉이 1억인데? 애굽사람 가마솥 옆에 너는 고깃덩이 얻어먹을 때, 두덩어리가 아니라 한 열 덩어리 얻어먹었냐? 주님은 이리 보시는데 모르면 이게 다 거꾸로 가는 겁니다.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계속 생각입니다. 1절에 51장 1절에 “나를 들을지어다.” 들어봐라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생각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생각입니다. 생각하라, 생각하라, 생각하라 넌 누구냐 어디에 있었냐. 너 하나 꺼내려고 애굽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떠내려니 애굽이라는 고대 사회 최고의 반석을 그냥 둘 수는 없어 요절을 내버렸습니다. 잡혀간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떠내자 하니 바벨론을 매대 바사나라에 넘겨서 엉망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세상이 곱게 내줍니까? 5천 년 한국의 미신의 불교의 유교가 근본적으로 딱 틀어쥐고 있으면서 그 속에 또 양반이 있고 쌍놈이 있어가지고, 영 교회 나가지를 못하도록 눈치를 주지 붙들고 앉았으니까 양반 집에 저 며느리를 불러내야 되겠는데, 양반이라고 온갖 동네가 전부 붙들고 있으니 그 양반 집안을 풍지파산을 내어 가지고, 그래도 안 내놓을래? 겁 많은 사람은 집안에 재앙이 하나 둘 들어오면 그냥, 며눌 아가야 얼른 교회 가 버려라 아무래도 너 붙들다가 망하겠다. 이럴 건데 조선 양반 대세라고 끝까지 버티고 앉아있는 집안은 애굽나라 요절내고 나오듯이, 결국 그 집안 전부 다 눌러놓고 그다음 하나라도 빼내시는 겁니다. 이렇게 빼낼 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존귀하게 보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우리야 별거 있습니까. 아이큐도 그렇고 건강도 그렇고 도 그렇고 뭐도 그렇다 보니까 여기 사는 거지. 그런데 여호와 보시기에는 존귀한 자라. 하나님이 예쁘게 봐 놨고 하나님이 총애를 하시고 하나님이 전부를 걸어놨으니, 이걸 하나님 따라가는 일에 못 가도록 거머쥐면 손목대기가 날아가지 하나님이 뺏기고 지지는 아니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대상입니다.

믿는 사람이 세상이 좀 불편하고 마찰이 되어도 양해 구하고 제쳐내고, 갈 길을 가버리면 나도 좋고 뒤에 다 좋고 이래 되는데, 옆에서 끈다고 여기 따라가고 저기 따라가고 휘청휘청 두 마음을 품어 망설이다가, 앉을 자리 아닌 자리에 앉고 안 갈 길을 가고 그러면 그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께서 따라다니면서, 우리를 빼내기 위해서 이것도 막고 저것도 막고 옆도 깨고 그럽니다. 신사 참배 마지막에 평양 교도소 1945년까지 몰려 있던 분들은, 일제로 볼 때는 제일 원수들이고 일본은 다 이긴다고 믿을 때 그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이만큼 뚜드려대면 일본 제국 자체가 하나님께 한번 크게 두드려 맞지? 손 목사님 같은 분은 검사하고 그 조사 받을 때 내용이 그렇습니다. 일본 제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일본 제국이 대단한데 일본 제국이 하나님을 칭하는 교회를 치는 거는 바위를, 사기그릇이라 그러지요. 사기그릇 바위를 사기그릇으로 때리는 겁니다. 그러면 사기그릇이 깨지지 바위가 꿈쩍합니까. 그런데 바위가 사기 그릇 위에 올라가버리면 박살이 납니다. 그 믿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저야 쉽게 말하지만은 이게 환란 때에게 쉽게 나올 말입니까. 그럴 때 그 말을 하는 사람은 믿는 사람이고 나머지는 그동안 헛 믿은 겁니다. 이런 평화 시의 마음이 흔들린다는 건 안 믿는다는 말은 아니고, 이 내 신앙이 너무 여리니까 너무 어리니까 그런 겁니다. 어리고 여리면 어떡하면 되죠? 물주고 거름 주고 기르면 됩니다. 길러가지고 바람이 쳐도 꺾이지 않도록 만들어 가는 것이 이사야 51장 1절의 말씀입니다. 잘 들어봐라 구덩이를 생각해보라 네가 어떤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는지 주님이 어느 구덩이에서 너를 끌어냈는지, 너를 세상 어느 구덩이에서 뽑아내기 위해 너 가정과 너의 인생에 이런 사건도 주고 저런 일들이 다 있게 헸는지. 그러고 나서 오늘 오후도 우리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신앙의 길은 2절에 혈혈단신이다. 왜 혈혈단신인가. 소나타 차는 현대자동차가 1년에 300만 대 500만 대도 뽑아냅니다. 그건 기계니까. 붕어빵에서 막 기계에서 붕어빵 뽑아내듯이 무생물, 노예, 기계 부속 같은 것은 그냥 뽑아내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생명의 자녀라는 것은 부부가 함께 고생해서 하나 겨우 생산합니다. 그건 내 마음대로 이렇게 만들고 저렇게 만들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내 속에 내 신앙 낳아 맡길 그런 역할 내게 필요한 위치 내게 줄 사명은, 나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와 따로 가는 겁니다. 이 한 몸에 눈은 보는 역할을 맡길 것이기 때문에 뇌하고 눈하고 사이는 보는 거 하나만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심장은 뛰는 걸로만 연결이 됩니다. 심장은 뛰기만 하면 온몸을 위한 엔진이 됩니다. 눈 은 보기만 보면 되지 심장처럼 뛸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한 몸은 한 몸인데 한 몸 안에 부분 부분이 자기 앉는 자리가 틀리고 자기 사명이 다 다르기 때문에, 주의 인도가 다른 법입니다. 한 몸이니 말씀은 하는데 그 말씀 속에 내가 할 일 식구 중에 저 사람이 할 일 오늘 할 일 내일 할 일이 다 다르니, 그래서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있을 때 많이 있어도 혈혈단신이고 혼자 있어도 혼자입니다. 신앙은 단일성입니다. 천 명 만 명이라도 하나입니다. 이럴 때는 단일성인데 천 명 만 명이 단일이라도 그 속에 들어가 한 사람 사람의 역할을 보면 개별성입니다. 개별이나 단일이나 같은 말이 아닌가요? 같은 말 같은데 완전히 다릅니다. 천 명만 명이라도 한 몸이다. 이게 단일성입니다.

한 몸 속을 다시 들여다보면 전부가 하는 일은 다 다르다. 개별성. 그래서 아브라함을 혈혈단신으로 있을 때 주님이 불렀다.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 불렀습니까? 가나안으로 오기 전에 하란 땅에 있을 때 부모 본토 친척 아비 집에 많은 사람들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혼자냐? 아브라함 하나를 뽑아다가 할 일이 있으니. 이번 한 주간 우리에게 똑같이 주어졌습니다. 이번 한 주간 학교 갈사람 도서관 갈사람 시험 준비할 사람 직장 갈사람 살림 살 사람. 월요일 직장 가면서는 요절 기억하고 화요일 직장 가면서는 외운 요절 잊어 먹었는가 한 번 더 반복해야 되는 사람, 어떤 사람은 월요일 직장 가며 옆에 탄 사람한테 요절 읽어라 하고 나는 안전 운전하면서 같이 외워야 될 사람 다 다릅니다. 아이 가진 엄마는 성경을 읽으면 아이가 옆에서 같이 듣습니다. 엄마가 성경을 읽을 때 소리 내서 읽으면 아이가 성경을 같이 읽는다고 보고를 해달라고 그러면, 교회 성경 읽기 성적 올리려고 그냥 과잉 경쟁하는 거 아니냐. 엄마가 1년 동안 한 말을 아이가 1년 동안 들었다가 엄마 한마디 합니다. 엄마한테 안 듣고 태어나면서 가져 나오는 거 아닙니다. 그 아이 미국에 보내놓으면 태어나면서 첫마디 1년 뒤에 할 때 영어로 하지 한글로 안 합니다. 머릿속에 있으면 어느 나라에 있든지 제멋대로 말하겠죠. 한국의 아이는 우리말로 첫마디 미국의 아이는 영어로 첫마디를 하는 걸 보니까 1년간 이 아이가 들은 것은 헛들은 게 아니었던 겁니다. 그리고 한 마디 나가면 그 다음 두 마디 세 마디 쭉 나가버립니다. 뒤따라서. 같은 원리로 아이 가진 엄마가 성경을 읽으면 뱃속에서는 소리 안 내도 같이 읽는 것이고, 이게 품안의 아이들은 엄마가 성경을 읽을 때 이왕이면 소리 내서 읽으면, 얘는 놀아가며 들어가며 뒹굴러가며 자 가며 그거 다 듣습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냥 설득 같습니까? 실제 그럴 것 같습니까? 요 며칠 전에 저 김영자 사모님하고 대화를 하면서, 초등학교 3학년 때 사모님이 1년간 성경을 또박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또박 또박 가르쳤는데, 그때 저는 예배도 안 드리고 그냥 막 엉망을 했던 때입니다. 근데 지금 나이에 그때 것이 다 기억이 있습니다. 웬일이죠? 이게 아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이기 때문에. 참 지금도 반복하기 민망한 건데 오후 예배 아이들이 한 20~30명 앉는데, 사모님이 주일 오후 수요일 오후에 찬송 인도를 하면 제가 신호를 해가지고 신호 딱 가면, 찬송을 하다가 20~30명이 찬송 소리가 갑자기 딱 그쳐버립니다. 뚝. 이런 놈이 나한테 걸렸으면 그 자리에서 그냥 쥐 박아서 그냥 난리가 날 건데, 목사님 사모님이 중심 교인 집사 아들을 쥐 박아 났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속은 끓어도 참으셨겠지. 그분 평생에 그놈도 예수 믿었겠는가. 예수를 믿었으면 뒤에 믿었지 그때 가르친 걸 기억했을까. 아마 그분은 뭐 그랬을 겁니다. 하도 그래 놨으니. 그런데 그때 그렇게 한 말씀 한 말씀 한 거 지금도 성경 읽으면, 그분이 창세기 말씀한 게 그대로 기억나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아 그때 그분이 이 말씀하셨는데 딱 성경 그대로 가르쳤구나. 성경 그대로 가르쳤구나. 시청각으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분 율동으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노랫말로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이야기 성경으로 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처럼 그분은 그때도 주일 학생들 알아듣든지 못 알아듣든지 장난을 치든지 뒹굴든지 말든지, 성경 말씀 이대로만 또박 또박또박 했는데 그 철없이 한 번도 들어본 기억이 없는데 성경을 읽다 보면 그때 말씀이 다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지금도 아이들 청년들은 기가 막히든 말든 지금 말씀 그대로만 전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말씀은 말씀 자체가 살았고 히브리서 4장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어떤 거든지 깨서 부숴서 다 헤져 버립니다.

세상 지식은 안 듣겠다고 버티면 막히지만은 하수 낮은 수의 지식을 고수가 막으면 막히지만은, 성경은 어느 인간이 뭐라고 막든 말든 이건 뚫고 들어가 버립니다. 전능의 말씀이라. 이걸 알아듣기 쉽게 설교한다고 율동을 하고 이야기를 하고 막 그냥, 뭔 재미있는 시청각을 풀어놓으면 성경 말씀에 물 타기를 해 보면 이건 성경이 아닙니다. 거짓말이지. 이야기가 남지 말씀은 못 들어갑니다. 말씀이 말씀으로 제대로 읽히고 던져지면 그 말씀은 들어가서 그 사람과 둘이 해결을 합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들이 옆에 있을 때는 아이를 위해서 그냥 소리 내서 성경 읽으시면 됩니다. 성경 읽으니까 조용히 하라 그런 소리 하지 마시고 또 떠들으라 하지도 마시고, 우리 교회 목사 그놈도 초등학교 3학년 때 엉망이었단다. 그리고 목사 됐단다. 너도 떠들어라. 그러지는 마시고. 곱게 들으면 더 좋은 거고 뭐 어린 걸 갖다가 이래라 저래라 어른 성경 보는데 어떻게 그걸 가정교육 하겠습니까. 그냥 너는 아이답게 놀고 나는 신앙의 어머니니까 널 위해서 성경 읽고, 또 오후 예배 한 번 더 데리고 와서 앉혀놓고 자든지 기가 막혀서 저 천장을 쳐다보던지, 안 오겠다는 걸 끌어오지는 못하지만은 슬쩍 밀어서 따라오는 거는 앉혀놓고 그냥 남 예배 보는 거 방에만 안 되면 그냥 놔두시면 됩니다. 뒤로 듣던 알아서 듣던 결국은 베어 들어갑니다. 가랑비에 옷 젖지 지가 가랑비에 옷 안 젖는 수가 있습니까? 습기로 들어가면 더 무서운 겁니다. 폭우는 우비로 잠깐 피할 수 있는데 습기가 많으면 이건 우비로도 못 피합니다. 그래서 교회와 예배당 주변의 생활과 믿는 부모의 평소의 신앙생활이, 얼른 돈 되지 않고 빨리빨리 신앙의 계단으로 올라가는 그런 교육의 단계별로 보면 더딘 것 같아도, 공회의 주일 학교나 이런 예배의 방식은 소리 없이 무서운 겁니다.

오전 오후. 내 조상은 누구라고요? 신앙으로 아브라함입니다. 난 신앙으로 복 받게 돼 있습니다. 못 피합니다. 말이 낳았으면 망아지지 망아지가 아무리 못 뛴 들 송아지만큼 못 뛰겠습니까. 송아지가 아무리 게으르고 발을 절어도 개만큼 밭일 할 때 못 하겠습니다. 아브라함 자손이 뭔 삐쳐 나가봤자 어디까지 삐쳐 나가겠습니까. 많이 나가면 하나님께서 때려서라도 데리고 오는데. 너무 강제로 너무 무리하게는 하지 마시고 그냥 나아갈 길 꿋꿋하게 가면서 안 되는 것은 간곡하게 기도해 놓으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모아가며 알아서 하십니다. 해야 될 일은 충성으로 하시고 내가 할 수 없는 선 밖의 일은, 간곡한 마음으로 애 타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직접 하시고. 요한복음 14장 몇 절이요? 26절 “성령 그가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가르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주님이 오셔서 한 인간도 못 가르치고 갔습니다. 열두 제자조차도 다 배신했습니다. 그런데 주님 가고 나니까 성령이 오셔서 주님 가르친 걸 전부 다 심어서 다 순교자를 만들고, 오늘까지 복음이 내려오듯이 내속의 신앙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기 때문에, 해야 될 일은 하시고 해도 안 되는 선부터는 아예 성령이 직접 하겠으니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기회를 주지 않는데 이걸 가지고 오려니까 죽을 지경이지. 여름에 눈 구경을 하려니까 생 호들갑이지. 겨울 되면 눈 구경은 합니다. 여름 되면 물놀이 합니다. 그리고 우리 할 일을 꿋꿋하게 복되게 걸어가십시다.

(기도)
존귀하게 만드시고 불러주신 주님. 오후 예배 다시 불러 더욱 존귀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 앞으로가 아니라 이미 주신 복이 한량없이 많은데 잊어버리므로, 다시 받으면 또 잊어버리고 반복하다 보면 강퍅해 질 수밖에 없으므로, 한 번씩 멈추시며 지난날에 받은 복을 먼저 계산해보도록 올해 1월 첫 말씀, 주님 우리 위하여 살 찢고 피 흘렸으니 이보다 존귀할 수 없고 이보다 큰 복은 없는데, 성령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다 알려주신다니 존귀함을 깨닫고 받은 복을 헤아려보는 저희들이 되어, 이미 받아 가진 복을 감사 할 때 이후로 추가 복을 줄 수 있는 우리가 되고, 주님은 주실 수 있고 우리는 받을 수 있고 우리가 받으므로 하늘의 천사도 만물도 함께 하나님께 찬송할 수 있도록, 주변과 사방이 아니라 자기 속을 들여다보며 감사하며 한 주간 주님 앞에 복되게 살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1차: K.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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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안)



23.2.26주전          사51:3                              예장총공 신풍교회


■ 믿는 사람은
1. 말씀으로 살면 세상에 고난
  세상 (전부)와 마찰
  주변 (환경)에 마찰 
  자기 (마음)도 불편
  사49장 (순종) 결과
* 요일3: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2. 말씀 떠나면 하나님께 고난
  (신령)한 복을 끊고
  (진리)의 혜택 차단
  주님의 (은혜) 중단
  사51장 (회개) 결과 
* 호2:6, 내가 (가시)로 그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 고난과 연단이 지나가면
1. 말씀 떠난 생활
  황폐 : 있는 것 (없어)지고
  광야 : 생명이 (살) 수 없고
  사막 : 사망의 (음침)한 곳
* 암8:11-12
주 Y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Y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Y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2. 주님의 은혜 역사
  위로 : (깨닫)고 감사하게 만들고
  에덴 : 하늘의 (시작), 모든 준비
  여호와의 동산 : (하나님)의 세계
* 신28:12, Y께서 너를 위하여 h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손으로하는 R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찌라도 너는꾸지 아니할것이요

■ 말씀으로 세상을 살면
1. 기뻐함
  교차하는 (순간)
  (비교)가 되면서
  솟아나는 (감탄)
*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2. 즐거움
  알고 (느끼)면서
  (이어) 가게하며
  기쁨을 (누리)는
* 시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감사함
  (존귀)하게 불러
  베푸신 (은혜)로
  (만족)하고 사니 
*사49:5, 나는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자라 나의하나님이 나의힘이 되셨도다

4. 창화함
  밖으로 (터치)며
  (찬송)이 나오고
  (영원)히 이어짐* 시150, 할렐루야, (찬양)할찌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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