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새23.2.11 사49:6 잃어버리고 망각한 존귀의 자의식, 원래의 자기 위치 자기 사명을 되찾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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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새23.2.11 사49:6 잃어버리고 망각한 존귀의 자의식, 원래의 자기 위치 자기 사명을 되찾을 것

관리1 0 45 2023.02.11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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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1토새

제목 : 잃어버리고 망각한 존귀의 자의식, 원래의 자기 위치 자기 사명을 되찾을 것

찬송 : 143장(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본문 : 이사야 49장 6절 -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존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사야 시기에 오랜 세월 하나님을 벗어나고 주로 우상의 죄가 문제가 되어 집니다. 죄는 하나 지으면 하나로 그치지 않고 가지를 퍼뜨리며 많은 죄로 드러나지만은 주로 우상의 죄가 문제가 됩니다. 우상의 죄라는 것은 당장에 먹고 살며 생활할 때 생사화복을 누가 주관하느냐 죽고 살고 잘 되고 못 되는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결정 합니다 이게 신앙인데 생사화복이 어디에 달렸는가 이게 하나님 아닌 쪽으로 움직여 버리면 그게 바로 우상이 되어 집니다.

하나님 자체를 잊어버린 적은 없습니다. 습관이든 뭐든 하나님은 하나님 해놓고 그런데 복은 해다 복은 달이다 복은 이런 목상이다 저런 금불상이다 다른 쪽으로 흔들어져 버리면 그걸 우상이라 그럽니다. 이게 수많은 세월에 계속되니까 처음에는 안에서 문제 안 되니까 밖에서 오는 문제 안 되니까 죽이고 잡아가고 결국은 전부 다 흩트려버렸는데 붙들려가고 잡혀간 많은 사람들 또 아직까지 붙들려 가지 아니해도 이미 마음과 모든 기회는 정신이 없는 그런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이사야 네가 하나님의 종이 되어 온 이스라엘이 전부 우상에 정신없고 사방천지 포로 되어 가고 엉망이 되어질찌라도 이사야 선지자 하나가 살아 외친다면 그 하나가 하나가 아니라 그 하나로 소망이 생겨집니다. 큰 고목나무가 다 죽은 듯해도 그 큰 고목나무에 어디라도 움이 하나 돋는다면 이 나무 전체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안 되는 가지는 안 되지마는.

이사야 하나를 하나님이 붙들었다는 것은 한 명에서 그치지 아니합니다. 이사야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 되어 하나님 원하시는 대로 전한다는 것은 이사야 하나가 살고 죽는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 소망이 생깁니다. 이사야가 “나의 종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하나님께 붙들리는 사람이 하나가 생겼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뜻만 찾아 백성이 이리 생각하던 저리 생각하던 이사야는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 이게 맞다 이게 생명이다, 이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다, 이사야 한 명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가정에 사회에 국가에 시대에 전했고 이사야 하나 떠들어봐야 선지자는 있다가도 없고 뭐 하나 있을 때도 있고 아예 없을 때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게 선지자입니다. 또 왕은 나라가 무너지면 없어집니다.

그런데 제사장이라는 것은 이거는 아론 때로부터 내려오며 지금도 이스라엘에는 아론의 직계 자손들이 있습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도 선지자는 있다 없다 왕도 있다가 없다가 그랬지만 그 헤롯왕은 이방의 왕입니다. 로마가 파송한. 주님 오실 때까지 한 400여 년 이스라엘에는 왕도 없었습니다. 출애굽 후 사사기 400여 년 동안도 왕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왕이 있었던 때보다는 왕이 없었을 때가 더 많았습니다. 왕다운 왕은 몇 명 없고 왕이 있을 때도 그게 왕인가 선지자와 왕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고 그렇지만 제사장이란 항상 있었고 이거는 숫자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이 완전히 없어질 만한 이런 위기에 하나님께 붙들려 제대로 말하는 선지자는 이사야 하나였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누가 뭐라든지 하나님 시키는 대로만 합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종이면 하나님 원하는 뜻을 말로 전해버립니다. 그런데 이 여파가 어떻게 되느냐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어제 저녁 야곱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보존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야곱을 일으키고 야곱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지파를 일으키며” 야곱의 지파들은 열두 지파들입니다. 혈통적으로 하나님의 것 날 때부터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것으로 기회를 준 그것이 야곱입니다. 그 기회를 받아 말씀으로 살고 신앙으로 산 면을 이스라엘이라 그럽니다.

야곱은 혈통, 이스라엘은 신앙의 출발 택자는 다 야곱입니다. 중생도 야곱입니다. 주일도 말씀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기회도 야곱적인 겁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주어진 겁니다. 그런 모든 주어진 기회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 그런 기회가 주어지고 이스라엘 중에 보존된 자를 시대가 뒤흔들어 놓으면 교회가 교회답게 걸어온, 교회가 교회답게 지켜온 것까지 내버려버리고 포기해 버리고 묻어버리고 잊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운 것 교회가 교회의 기능도 잊어버렸고 교회가 교회가 뭔지도 잊어버렸고 이걸 정신 차리게 하고 돌아서게 한다는 말입니다.

원래 교회, 교회 다운 교회도 일으키고 또 불러 모으고 그 교회가 옳고 바르게 걸어온 것도 또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할 것은 쉽게 우리 공회로 말하면 공회는 역사적인 교회다, 역사적인 교회나마나 다른 데하고 뭐 다른 게 있나? 꼭 같은데. 이거는 야곱을 잃어버렸고 야곱을 놓쳐버렸고 야곱이 없어져버린 겁니다.

신풍교회는 손양원 목사님의 그 고난 그 신앙을 잊지 말자, 이게 신풍교회의 출발입니다. 그걸 잊어버리고 요즘은 어떻게 믿더라? 두리번거리면 이게 야곱적인 것 야곱의 기회를 버린 겁니다. 넌 김 씨 아니냐? 넌 사업가의 아들 아니냐? 넌 왕의 아들 아니냐? 너는 집안적으로 태어나면서부터 공부를 하기에 적합한 학자의 집안 아니냐? 그런데 공부를 안 하고 뭘 하느냐? 이건 출생 이거는 혈통적인 겁니다. 출생적이고 혈통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 내가 이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닌데 신풍 교회라는 곳을 우연히 오게 되었는데 와서 보니 이 교회는 이런 교회구나 저런 교회구나 이건 혈통적이며 이거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적인 은혜입니다.

잊지 말자. 우리 교회의 설립의 목적을 잊지 말자. 그러다가 우리 교회가 공회 소속이 되었으니 노선이라는 거 잊지 말자. 노선적으로 노선에 주는 은혜가 이게 보통 큰 게 아닙니다. 이걸 챙기는 것이 “야곱의 지파를 일으킨다” 왜 야곱의 지파들입니까? 역사적인 면도 있고 사명적인 면도 있고 뭐 여러 가지 면들이 다 있으니까.

그 다음 두 번째로는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출발이야 좋은 정신으로 했는데 가다 보니까 잊어버렸다면 가다 보니까 묻어버렸다면 과거를 다시 살펴 지나온 날 우리 교회는 어떤 면이 좋았던가? 정말 교회답게 운영되었던 면이 있는가? 우리는 늘 저녁마다 철야하는 분들이 계셨다, 철야하다가 주무실지라도 교회에서 엎드려 주무셨다, 뭔 교회를 그렇게까지 다니는 곳이 있느냐? 그렇게까지 다니는 것이 정상이다. 오히려 부족하다. 이걸 다시 시작한다면 이스라엘에 아직도 보존된 자를 모으는 일이 되어 집니다.

아이들 자체가 없는데 뭔 주일 학교를 지금도 유지하고 있냐? 우리의 주일 학교는 기회만 주시면 얼마 전처럼 200도 300도 모아 놓을 수 있다. 주지 않으니 하나라도 모시는 것이고 하나라도 없으면 뭐 낳아서라도 채우는 거고 하나님이 기회 주면 있는 힘 다하고 기회 주지 않으면 소망이라도 한다. 중간반은 예배도 따로 보지 않는데 없어진 것 아니냐? 중간반만 예배를 보다가 작년 반에 함께 예배를 드리니까 더 발전된 중간반이지. 한 명이라도 열 명이라도 그때를 기억하며 잊지 아니하겠다.

출생으로부터 주신 기회, 내가 알지 못할 때 주신 기회는 야곱적인 것이고 내가 정신 차리고 내가 이루어 놓은 것은 이스라엘적인 겁니다. 야곱의 이름은 태어날 때부터 주신 이름입니다.
이건 복 받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흐려 인간적으로 설친 것이 야곱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만 정말로 바라보고 걸어가겠다. 얍복강에서 마음을 돌려 과거와는 다른 야곱이 되었을 때 그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이렇게 붙였습니다. 이스라엘이라.

출생으로부터 마련된 기회 그다음 지난날에 내가 정말 신앙으로 은혜 받고 바로 걸어갔던 그런 자기의 신앙의 좋았던 때 나도 옛날에는 이랬다, 그건 스스로 좌절이며 스스로 애굽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애굽에서 출애굽을 했으니 난 가나안을 향하여 간다. 누가 뭐래도 나는 간다. 함께 가면 좋고 안 되면 나 혼자라도 간다. 이게 늘 신앙입니다.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다” 이건 시작이다. 내 속에 하나님이 미리 예정되고 미리 주신 기회 다시 되찾고 은혜 받아 능력으로 걸어갔던 그 신앙을 이어가고 둘, 그리고 나니까 이렇게 회개하고 주님을 되찾은 나를 주님이 붙들고 안 믿는 이방들에게 이 이스라엘을 보라, 이 이사야 선지와 이사야 선지로 다시 출발하는 이 신앙의 교회를 보라, 강단의 외침을 함께 들어 다시 옛날의 신앙과 하나님이 맡겨 놓은 기회를 새삼스럽게 각오하고 출발하는 이 사람을 보라, 이 가정을 보라, 이런 일을 보라 이방이 안 믿는 사람들이 요즘 시대도 저런 분들이 계시는구나, 아직도 저런 길이 있구나, 종교답다, 양심적이다, 이거는 그냥 종교 중에 미신 정도가 아니라 이건 들여다봐야 되겠다, 여기에 빛이 있지 않겠느냐?

이방의 빛을 삼아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그들을 보니 그의 사업을 보니 그의 걸음을 보니 그런 또래의 가치 판단을 보니 그 걸어가는 걸음걸음을 보니 하늘의 하나님이 헛말이 아니라 정말 계시는구나 그리고 역사를 하시는구나 그 역사는 인간이 땅 위에 혼자 발을 부둥치는 생존과 경쟁력보다 훨씬 낫구나 이리 될 때 이방의 빛이 되어 집니다.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나님께 붙들려 걸어가는 그 걸음 굉장하구나, 여기서 그치면 이방의 빛까지로 그칩니다. 그 빛을 보며 불교도 유교도 미신도 무신론도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내 가족 따뜻하게 살면 전부라는 그 소시민적인 자기 행복의 이 구석 저 구멍도 영원불변 완전의 세계 저 빛이 비치는 것은 저 빛을 향하여 오라고 하늘이 부르는 소리구나 누가 했던 말이죠? 동방의 박사들입니다. 하늘에서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이게 이방을 비추는 빛이 되어 집니다.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알지도 못하는 원방에서 저 섬에서 빛을 받고 그 빛을 따라 걸어오고 오다 보니까 아이쿠 이게 세상으로 괜찮은 것이 아니라 세상은 제쳐버리고 하늘이 여기에 있구나, “이방에게까지 구원을 주시리라” 그 구원을 받고 받아 온 것이 이 복음 시작한 이스라엘의 반대편 끝에 있는 우리들까지도 이 빛이 비추어진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나라의 빛이 오히려 반대로 세계를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력이 없어 세계를 향하여 빛을 비친 적고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열어주신 신앙의 기본 기회를 잊어 버렸고 묻어버렸고 어디 흘려버린 걸 다시 돌아가며 되찾아 챙겨야 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 뭐 지금 이러고 앉았나? 자기 자체에 대한 강한 자의식이라 그럽니다. 어쩌다가 왕자가 얻어먹고 살다가 어느 날 아니 왕자인데 내가 왜 지금 이 짓을 하지? 왕 몰래 궁궐 담을 넘어 거지하고 서로 바꿔치기를 해버렸던 겁니다. 돌아가려니까 거지가 왕자가 된 다음 내어주기 싫어 딱 길을 막고 있습니다. 아 얻어먹다 보니까 어느 날 불쌍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니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앉았지? 자기가 도망 나온 그 구멍으로 올 게 아니라 그 구멍을 막아놨다면 정문에 가서 호통을 쳐야지.

이런 것을 자의식이라 그럽니다. 저런 회사를 들어가야 되는데 저런 회사 뒷구멍이라도 들어가야 되는데 들어갔으니까 나는 이제 회사를 가진 사람이라 내 인생 팔자 고쳤다, 이제 안심이다, 내 값을 올려보자 이게 거지 얻어먹고 사는 생활 입니다. 호랑이가 배고프다고 풀을 뜯어 먹는다 그런 일이 있냐,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무리 아무리 직장이 없다고 아무리 먹고 사는 게 바쁘다고 주일을? 예배를? 교회를? 하나님 앞에 조심을? 내가 이러지만 안 되겠지, 이게 제정신 차릴 때가 이게 이사야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은 이 사람을 붙들고 땅 끝까지 내게 준 기회 있는 데까지 나를 붙들고 하나님이 해 나가실 역사의 시작이 되어 집니다.

우리는 그냥 대충 한 사람이 아닙니다. 지난날을 자꾸 되돌아봐서 아 내가 어쩌다가 그냥 이 꼴로 살게 되었나? 자기의식. 이게 교만이 아니요 이게 벌대로 돌아다니는 엉뚱한 것이 아니라 원래를 바로 찾아 나의 값 나의 의미 나의 위치 나의 사명 내게 이미 주어진 것 또 지난  날에 순종하여 신앙으로 열심히 살 때 그때를 찾아 가지십시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1차-k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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