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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6_월새
제목 : 목적 대상으로 존귀, 모든 현실은 더욱 존귀케 하는 동기 기회라는 자기 자각
찬송 : 14장(큰 영화로신 주)
본문 : 이사야 49장 5절 -
그가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자격과 시작은 존귀해도 그게 유지가 되는데 하나님의 은혜 능력이 아니면 존귀한 것이 존귀한 것으로 이어지지는 못합니다. 왕의 아들이 왕은 되어도 충신들이 붙들어 주지 않으면 더 위험하게 되고 추해지게 되고 내려앉아야 됩니다. 비행기가 뜨기는 뜨지만은 띄워놓은 비행기가 떠 있도록 연료가 따라가지 않으면 올라간 것만큼 또 내려와야 되고 내려올 때는 좋게 내려오지를 못하고 추락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를 존귀하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힘이 그 존귀함이 이어지도록 능력으로 붙들어 계속 지켜주십니다. 왜 존귀한가? 하나님만 상대하는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하나님이 받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기쁨이 하나님의 만족이 되고 인간은 인간의 수준만큼 하면 되지만 하나님은 완전자입니다. 완전자 보시기에 기쁨이 되려면 두루두루 모든 면이 다 갖춰져야 됩니다. 완전자가 만족하면 우리의 출발이 만족이라야 되고 이어지는 게 계속 완전자 앞에 만족이라야 됩니다. 이게 우리의 존귀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상대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만족케 하시는 그 대상 이렇게 만드시려고 만들 때부터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을 베낀, 하나님과 같은 물론 출발은 힘이 적습니다. 아무리 작아도 왕궁에 태어난 아들은 못나도 피부가 안 좋아도 시력이 안 좋아도 덩치가 그래도 왕의 아이는 덩치가 좋아서 왕 되는 게 아닙니다. 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이거는 존귀한 왕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이 길러 가시는, 하나님을 상대하는, 하나님이 기뻐하고 하나님이 만족하는 이런 우리가 되게 하시려고 처음에 목적을 정해 놓으셨으니 이거는 뭐 굴러가도 가다가 엎어져도 되게 되어 있습니다. 왕의 아들은 전염병에 가는 수도 있고 왕보다 더 큰 쪽이 와서 쥐어박으면 인질로 잡혀가는 신세가 될 수도 있으나 하나님은 완전자입니다. 절대자입니다. 자연스럽게 영원불변입니다. 이분이 밉게 보면 억울하다고 뛰든 말든 불쌍해집니다. 이분이 예쁘게 보면 무조건 좋은 겁니다. 이게 제일 중요하고 다른 것은 뒤에 저절로 따라오는 겁니다.
임금님의 손가락 손가락만큼 그게 생겨야 되고 위치도 그래야 되는데 임금님 손가락이 임금님 눈 옆에 붙어 놓으면 그거 뭐 임금이라 모두들 고개는 숙여도 속으로는 웃을 일이요, 구경거리요 괴물로 볼 겁니다. 힘에 눌려 눌리나 속에는 존경심이 없고 사랑이 없고 우스개 거리 밖에 되지 않을 겁니다. 임금님의 손가락은 손가락이 붙은 그 위치의 그 모양 그 기능이라야 그게 좋은 겁니다. 임금님의 손가락이 나는 임금님의 손인데 왜 이렇게 짧으냐, 머리카락처럼 길면 좋겠다, 그 순간 임금님 통째로 망쳐버립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믿는 순간 죽는 날까지의 모든 순간순간 전부 자기의 위치에 따라 하나님이 알아서 만들어 가시니 믿는 사람의 기본은 존귀한 자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고 관리하시고 인사 배치하시고 사명을 주실 터이니 그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틀로 오게 돼 있습니다. 추운 겨울 주셔도 그거라야 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고 신앙 들고 열심히 노력해도 성적이 올라가지 않는다면 그 모양 그 짜임새도 주님이 필요해서 주신 것이고 그래서 평생을 두고 뒤에 후회하며 그때 좀 이런 방법을 썼을 걸, 이 면을 좀 더 보충했으면 나을 걸 그런 후회조차도 우리를 위하여 복되게 해 주시는 또 하나의 선물입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의 억울하고 서럽고 잘못 결정한 모든 고통은 돌아온 이후에 복 되게 복되게 첫째보다 더 나은 자기를 만들어 주는 그런 동기요 그런 과정이었습니다. 집 한 번 잘 나가기 잘했다, 구경 한 번 잘하고, 그건 아닙니다. 나가고 보니 부모 밑이 얼마나 좋았더라, 이게 복입니다. 이게 존귀한 자의 필수의 자격입니다. 이걸 만들려면 나가봐야 되고 고생해 봐야 됩니다. 고생은 안 됐으나 그 고생이 들어 아버지 밑에 있던 것이 얼마나 귀한지를 자각하게 된 이 은혜는 아버지 밑에 있던 첫째보다 나가본 둘째의 감사가 더 많았습니다. 이래도 복이고 저래도 복이고 이거는 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자기를 자각하는 마음 돈 벌고 싶어도 돈이 도망가서 세끼 밥 먹기도 어려운데 뭔 감사해라 뭐 각자에게 필요한 대로 다 준다 거기 만족해라 그렇게 슬슬 달래서 패자들 억울한 사람 마음을 우선 그냥 위로 시켜 계속해서 노예로 부려먹으려고 그런 고등 전략을 적어 놓은 거 아닌가? 이렇게까지 생각이 기발하게 나가면 머리가 좋은 게 아니고 주님이 거라사인 지방에 갈 때 어느 사람이 사는 곳이 무덤입니다. “무덤 사이에 살더라” 그곳은 사는 곳이 아닙니다. 주소지가 잘못된 겁니다.
사람들이 내쫓고 버려서 그런가? 집에 붙들어 놔도 쇠사슬을 풀고 튀어나갑니다. 죄짓고 불행해지는 그 입장 그런 생을 사는 데는 이거는 뭐 잡아줘도 안 되고 붙들어 매 놔도 안 되고 쇠사슬로 묶어놔도 굉장한 힘으로 풀고 나가는데 이거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귀신의 힘으로 풀고 튀어나가니 인간으로는 붙들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 되면 참 곤란합니다.
어제 오전에 초두에 말씀을 드렸는가? 원수 속에도 좋은 거는 배워 와야 그래야 내가 미운 원수보다 나아집니다. 이게 복수 중에 최고의 복수입니다. 나는 20점 원수는 60점, 60점짜리를 20점도 안 된다고 쥐어박을 것이 아니라 원수 60점 속에 좋은 걸 베껴 오면 20점 나 더하기 원수의 60점이 되면 80점이 돼버립니다. 60점 원수가 80점을 우러러 보게 돼 있습니다. 원수보다 나아지는 것이 복수지 60점짜리 원수를 어떻게 그냥 욕을 해가지고 남들이 60점이 아니라고 만들어 볼까? 그러면 20점이 20점에서 또 더 기어 내려가야 됩니다. 그 짓하다 보면.
이 방법이 애국이라고 뭐 그냥 바락바락 난리를 하고 애를 쓰고 앉았으니 그 원수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욕만 해라. 네 입만 더러워지고 욕만 해라. 발전의 기회는 전부 증오로 바뀌어서 나쁜 데만 눈이 떨어졌구나, 우리는 더 올라가 버리는데. 이리 되는데 이게 지옥적인 이게 마귀적인 이게 불쌍한 인간들이 더 불쌍해지면서 나는 불쌍하니 너희들은 나를 동정해야 된다, 끝없이 이쪽으로만 머리가 튀어지면 죽는 날이나 돼가지고 아차, 방향을 잘못 잡았다, 그때는 가는 날입니다. 이건 미리 바꿔야 됩니다. 가정에서 바꾸고 엄마들이 그거는 말 몇 마디로 바꿔놓으면 바뀌어 집니다. 이거는 가정교육으로 맞춤 교육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차분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꼭 찍어봐라 이렇고 이렇고 이렇지 않냐? 어릴 때 그게 연한 가지일 때 방향을 바꾸면 바뀌어 집니다. 그러고 나서 그렇게 딱 굳어지면 지금 이 말을 하는 저처럼 바뀌어서 평생에 이게 교리가 되고 신조가 되고 이렇게 걸어가다 보니까 별 것 없는 사람이 쑥 많이 좋아져버렸습니다.
저도 20년 동안은 원수 뒷 발목을 무는 연습만 하고 그것만 생각하고 그게 좋은 건 줄 알고 그렇게 그냥 발버둥을 쳤었습니다. 그런데 대학 2학년 때 부산으로 편입 가서 3, 4, 5, 3개월 설교를 듣다가 이거 완전히 방향을 바꿔야 되겠구나, 3개월째 어느 날 생각 자체가 바뀌었습니다. 그때 제 몸 그 이전이나 이유나 꼭 같습니다. 제 이름도 꼭 같습니다. 세상도 그 세상입니다. 모든 것이 안팎으로 그 세상 그 사람 그대로인데 제 속에 들어있는 빼딱한 사상을 바꿔보고 나니까 그때부터 그다음 세월 속에 자꾸 나아지다 보니까 지금 이렇게 정평정가하고 있는 겁니다.
저하고 인생관 가치관 모든 보는 비판 평가가 다른 분들 너는 떠들어라 난 나대로 간다, 그러고 앉아 있으면 양심 없는 거 됩니다. 양심은 어느 지식이 맞는가, 둘을 나란히 비교를 하고 비교를 해서 더 좋은 게 있을 때는 더 좋은 걸로 바꿔가져야 최소한 양심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 양심이 있을 때 그 양심 속에는 말씀을 빛으로 받아가지는 신앙의 양심으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세상 양심 없으면 신앙의 양심이 따라가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종자라도 땅이 없으면 그건 자라가지를 못합니다. 그 씨앗 그 종자 그대로 매달려 있지 땅을 만나야 그다음 땅을 먹고 땅에 버티고 땅과 싸우면서 그다음, 자라는 겁니다.
안 믿는 세상의 자연의 일반의 양심 그 토대 그 기본이 없으면 신앙양심이란 어디 비빌 틈이 없습니다. 그건 교리서에 그거는 성경책 안에만 머물고 있습니다. 이게 좋으냐? 저게 좋으냐? 둘을 비교해 보면 나오는데 뭐든지. 남한이 좋으냐? 북한이 좋으냐? 요래조래 비교해 보면 아, 낫기는 남한이 낫다 여기까지는 가야 양심입니다. 이게 있는 사람이 성경을 읽어야 씨 뿌리는 비유가 이해가 되고 천지창조의 믿어지는 믿음을 주님이 주실 수가 있고 그렇습니다.
이게 애가 터져 세상의 비유를 자꾸 합니다. 주님은 세상 비유 안 하셨습니까? 씨 뿌리는 비유, 누룩 비유, 어부의 비유 천국 안에 있는 것으로 말씀하신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해봐야 그건 못 알아듣습니다. 주님 이 땅 위에 오셔서 가실 때까지 했던 말 하늘의 말이 아니라 죄인들의 세상의 언어였습니다. 오신 그 모습도 지옥 갈 죄인의 모습 그 쓰신 표현과 언어도 이 땅 위에 언어 썼지 천사의 영계의 신령한 언어를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 주님 더러운 이 세상을 다 밟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늘 씻어야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을 박아 흐르는 피를 보니 “물과 피가 흘렀더라” 죄인 우리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 그 모습 그대로 다 쏟고 가셨습니다.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를 존귀하게 만들어가는 순서가 그렇습니다.
공회신앙을 죄악 세상 중에서도 마지막 때, 그중에서도 장소적으로 한국 땅 그 안에서도 남한에 이 신앙의 좋은 종자를 심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자연 현상 모든 정치 현상 사회 현상 우리가 듣고 보는 이 모든 얽힌 자기의 개적인 일 사회적인 모든 소식과 환경은 외면하는 순간 복음은 자기가 길러가야 되는 자기의 천국은 전부 닫혀버립니다.
그런데 이걸 모두 닫아라, 닫아라 그러니 그 말을 듣는 저는 속으로 저 사람 속에 귀신이 저 사람을 통해 저를 흔들고 있는데 거기에 넘어갈 정도의 신앙은 아닙니다. 그 정도는 제가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속에 있는 귀신을 떼 내고 그 사람을 귀한 이 복음에 붙여놔야 되니 이제 연구를 하는 겁니다. 그가 듣고 볼 때 그 말이 반영이 되는구나, 부탁한 사람은 자기 말이 반영이 되어 복음의 좋은 출발을 하게하고 저는 전할 것은 전해야 되겠고 그게 어려우니까 어려운 거지 뭐 아무나 쉬우면 그게 그렇게 보배겠습니까? 그런데 더 자세히 보면 그 말 속에 나를 고치는 아주 중요한 치료약이 있고 또 수술의 칼이 있으니 그런 말을 들을 때 그것으로 나를 고치고 그래서 내가 좋아하고 그 다음 더 좋아지고 고쳐진 나는 거라사인 지방에 그 좋은 사람을 안에서 붙들고 있는 저 귀신을 그 사람하고 떼 놓아야 이 사람이 멀쩡한 사람이 되는데 이런 것이 가정의 결혼에 이런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 속에 섞여 있는 그런 복잡하고 중요한 사안입니다.
그냥 대충 먹고 그냥 대충 사는 것은 뭐 요즘 같은 이런 천국은 우리가 천국을 아직 못 가봐 그렇지 이거보다 더 좋을까? 이거보다야 더 좋겠지 이거보다 좋아도 얼마나 더 좋을까 싶을 만큼 이런 좋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만큼을 줘도 악을 악을 쓰면서 막 이게 지옥이라 그래 싸니 그놈의 마음이 바로 지옥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그런 기회입니다.
우리 신풍교인들만은 신풍에 살며 신풍의 좋은 점만 챙기고 신풍이 있는 참 골치 아픈 단점은 쏙쏙 다 피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라고 여러 면에서 좋고 저보다 나은 목회자가 많은데 하필 이런 사람을 딱 보내지 않았겠는가? 함께 그렇게 연구하십시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존귀한 자를 존귀한 신풍에 존귀한 현실로 주셨는데 이건 존귀한 게 아니고 저 서울의 머시기가 호랑이한테 물려가지 않아서 그냥 내가 죽겠다고, 그 참 천국에 갖다 놔도 지옥에 스스로 기어 내려가면 그건 둘째 사망에 속한 것이라 주님이 구해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이 그렇게까지 또 그러면 돌아온 둘째 아들이 다시 나가면 그건 두 번 환영이 없습니다. 문이 닫혀버립니다.
1차-kh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