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새23.2.4 사49:8 이어지는 평소 기도, 그 준비 위에 응답, 때가 늦기 전 기회가 최선의 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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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새23.2.4 사49:8 이어지는 평소 기도, 그 준비 위에 응답, 때가 늦기 전 기회가 최선의 여부

관리1 0 55 2023.02.04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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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4 토새

제목 : 이어지는 평소 기도, 그 준비 위에 응답, 때가 늦기 전 기회가 최선의 여부

찬송 : 157장(고요한 바다로)

본문 : 이사야 49장 8절 -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미리 기도해야 될 때에, 일 생기기 전에 미리 기도하고 또 기도는 한꺼번에 많은 분량보다 작게 작게 끊어서 이어가는 것이 기본입니다. 작게 기도해라 그 말로 들어버리면 곤란합니다. 이어지는 기도가 기도입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염소와 달리 양은 목자 아니고는 도무지 생존이 어렵답니다. 목자만 바라보는데 10마리를 기르는 목자, 10마리가 넘으면 감당이 안 되는 목자가 있고, 100마리를 쉽게 기르는 실력 있는 목자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10마리 한 사람은 100마리를 기르니 실력이 10배입니다. 그런데 10마리 밖에 못 기르지만 인내가 있어 늘 그 10마리는 잘 기르는데 실력은 100마리나 한번 씩 어디 가버리면 그냥 양을 돌보지 않고 놔둬 버리는 그런 목자. 10마리 기르는 목자는 10마리는 끝까지 감당을 하는데 실력은 100마리나 한 번씩 엉뚱한 일 해버리고 잊어버리고 그다음 중단해버리면 아예 한 마리도 맡기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단면으로 보면 100마리 능력이 10마리 능력보다 10배지만은 이어지는 것을 봤을 때 끊겨지는 100마리보다 이어지는 10마리가 낫다. 10마리는 10마리인데 100마리는 어느 순간 돌아서면 어디 갔는지 한 마리도 없이 다 흩어져버렸습니다. 교회 일꾼들을 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을 거느리는 신앙의 지도자인데 이 신앙의 지도자가 한 번씩 휘청해버리면 정신이 없어져 버리면, 그러면 그 사람의 최대치 능력으로 그 사람의 실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평균 이어지는 평소를 봐야 하기 때문에 실력이 없어도 이어지는 사람,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이어지지 않는 사람. 계속 면을 보는 겁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급하면 3일 금식도 하고 뭐 일주일 철야도 하고 엄청나게 통성기도로 쏟아 붓는데 이어지지 않으면 이게 문제입니다. 기도가 연약해도 기도가 부족해도 또박또박 이어 나가는 기도, 그 늦기는 늦어도 그런 인내의 기도 계속의 기도 그 기도가 어느 날 큰 일을 냅니다. 꼭같이 이어지는 기도를 크게 한다면 깊게 한다면 간곡하게 한다면 그리고 이것이 계속 이어진다면, 우리가 아는 주기철 목사님처럼 또 여기 손 목사님처럼 또는 백 목사님처럼, 역사적으로 봐도 모두가 봐도 누가 보더라도 참 능력이다. 신앙의 세계가 옳으냐 그르냐 할 것 없이 참 능력이다. 보면 나오니까. 그런 분들의 기도는 순간순간 기도도 강하고 깊고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평생을 쭉 이어갔습니다. 좋기야 그것이 가장 좋은 겁니다.

그런데 그런 큰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이사야 49장 8절의 말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다.” 대낮에 기름 사 들이는 것은 그건 하면 하는 겁니다. 꾸준하게 한 방울씩 아침에도 점심때도 저녁때까지. 말씀으로 살면 말씀으로 살려고 할 때 내 마음의 저항이 일어납니다. 이걸 꺾어버리고, 내가 내 멋대로 살아도 되고 내가 말씀대로 살아도 되는 이 양단 이 갈래길에 그래도 말씀으로 사는 것이 맞다. 오늘도 내 마음 한 번 꺾고 내일도 내 마음 한 번 꺾고 또박또박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는 생활이 이게 마태복음 25장에서는 기름 준비이고 이사야 49장 8절에서는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다.” 줄 수 있을 때 너는 마련할 수 있을 때에. 학생의 공부로 말하면 시험 공지가 나오지 않았을 때에 그냥 읽으면 되는 때 마음 기울이면 되는 때 아무 염려 없을 때, 그때 하나 둘 하나 둘 읽어두고 외워두고 쌓아두면, 그런데 타고난 학습력이 따라가지 않으면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아니 공부한다고 노력해가지고 다 될 것 같으면야. 머리 나쁜 사람은 아무리 공부해 봐도 안 됩니다.

수학도 해야 해서 들어보려고 한 적이 있는데 수학은 아무리 들어봐도 제 머리 속에 들어와 앉지를 않습니다. 칠판에 아무리 쉽다고 적어 대봐야 그게 왜 저리 되는가? 그런 마음도 있고. 또 이게 이제 잘 맞질 않으니까 저거 배워서 어디 써 먹을까? 이제 생각이 여기까지 가면 머리가 주인 뜻을 알아차려서 쓸데없는 거 한단다 이리 돼버리면 집중하던 것도 집중이 안 돼 버립니다. 원래 안 되지 집중 안 되지 두 개가 어울려 에이 말아버리자 그리 되면 10년 20년 공부해봐야 그냥 의미 없게 생각 없게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그런 사람 수학 공부한다고 세월 속에 쌓이는 것 아닙니다. 겉돌고 말지. 왜 그러냐?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빼놓고 세상을 살면 운동 잘하는 사람은 저절로 운동 잘할 것이고 노력한 사람은 노력한 것만큼만 잘 될 것이고. 타고난 음감이 없으면 아무리 들어봐야 뭔 소리인지 모르는 것이고. 그러나 신앙의 길에는 하나님이 하라 해서 하면 그리고 내가 할 만큼 해놓으면 할 만큼 한 내 위에다 대고 구원의 날에 하나님께서 얼마를 위에서 부어놓느냐? 뭐 측량을 못 합니다.

흔히들 모세가 워낙 실력이 있어서 홍해 바다를 건너고 광야 40년을 지도했다고들 그러는데 그 모세가 실력 있다고 광야 40년을 또는 홍해를 건너고 말고 그러지를 못합니다. 홍해는 모세도 죽어야 되고 미련해도 어려도 무능해도 실력이 있어도 인간으로는 홍해는 다 죽어도 표도 나지 않는 데입니다. 실력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순종할 때 홍해는 하나님이 찢어놓고 갈라놓고 건너가게 했지 200여만 명이 마구 그냥 몰려드니까 그 기세에 놀라서 홍해바다가 뒤로 물러선 그런 경우가 아닙니다. 그런 걸 구원의 때라고 그럽니다.

광야 40년 사막이란, 어깨에 메고 나간 발효되지 않은 떡 반죽 뭐 그런 반죽도 다 가져갔으니 일주일이야 먹었을 겁니다. 사람이 아무리 먹을 걸 쥐고 간다 한들 한달 치를 이고 지고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한 달도 아니고 일 년도 아니고 40년입니다. 농사 없이 곡식 없이 식물 없이 주워 먹을 것 없는 광야의 40년이란 억세다고 살아남는 게 아닙니다. 많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눈치 있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광야를 몇 달 몇 년 그랬으면 어떻게 어떻게 살아나지 않았느냐? 우리의 강퍅이 자꾸 옆으로 빠져나가고 세어 나가니까 아예 40년 기간을 끌어버린 겁니다. 40년. 이건 위에서 돕는 은혜 아니고는 뭐 모세가 실력이 있고 없고 그런 것이 아니라, 홍해와 광야 40년 이런 게 구원의 날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아무리 손꼽아 봐도 내 수준으로는 이게 구원의 날입니다. 세상이 다 그런데 서울 강남도 아니고 신풍의 여기서 어떻게 세상을 이길 것이며 살아날 것인가?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난 사람이 잘난 사람을 낳고 잘난 왕 옆에 잘난 전국의 인재가 모이고 모이니 더 많아지고 나중에는 시골 골짝골짝 숨어 있던 인재까지 전부 뽑아서 추려서 몰려가다 보니 예전에는 개천의 용도 나고 신풍에 인물도 나지만은 지금은 뭐 한눈에 딱 봐도 조금이라도 인물 될 사람은 시내 가고 위로 갔지 남아 있는 사람이 없는 때입니다. 그게 우리의 부족입니다. 부족은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봐야 얼마나 하겠는가? 그래서 포기하는 사람. 그 귀신이 주는 절망의 죄입니다. 하라 했으니 하라 하신 분 때문에 할 뿐입니다. 그분이 능력이 있으니 내 것 조금 더 해봐야 얼마나 소용 있겠느냐? 그래서 나의 조그마한 것을 더 하지 않으면 내가 보탠 양은 있으나 없으나 상관이 없는데 내가 발을 쏙 빼버린 그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라 하신 그 말씀을 어긴 것 말씀을 벗어난 것은 무한하신 하나님이 더해주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부족해도 내게 맡긴 것은 내가 하는 겁니다. 끝까지.

은혜의 때에 응답하겠다. 지금 이미 늦은 거 말고 지금 기도해야 될 것 지금 기도하면 기도할 수 있는 이런 때에 어쨌든 또박또박 기도하십시다. 스물의 결혼을 꿈도 못 꾸는 시대가 됐는데 어떻게 우리가 시대를 거스르겠습니까? 그러나 말 안 듣는 것은 제가 말 안 듣는 것이고 또 말해보는 것은 내가 해보는 것이고. 그런데 말해 보는 그 마음씨를 주님이 들여다보면서 제가 스물이라도 추진하니까 지켜봐 주시라 하나님 앞에 보이기 흉내, 그걸 쇼업이라고 그럽니다. 흉내 내기. 보십시오 제가 한다고 합니다. 했지요? 했지요? 주님은 야 이 놈아 네 양심이 지금 다 하지 않고 있고 네 양심이 지금 쏙 빠졌는데 무슨 소리냐? 이 하나의 대화로 가지고 창세기로 계시록까지를 차분하게 읽어보면 성경에 다 있는 내용입니다.

롯이 소돔을 갈 때 이렇게 주님 주신 복이 많고 이렇게 주님 맡긴 양떼가 많고 주님이 맡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마음은 아니나 이 사람들 때문에 어떻게 합니까? 이걸 죽이지도 못하고 살리지도 못하고. 입장이 그러니 이해하시라. 삼촌 아브라함에게도 또 하나님 앞에 양심에 롯의 이말 저말, 전 최선을 다했습니다. 보십시오. 원래 제가 뭐 그렇고 이렇고 그냥 저것들이 그렇고 저 할대로는 다 했습니다. 빌라도가 대야에 물까지 떠다 놓고 난 분명히 예수 살리려고 했다. 이분 아무리 봐도 죄 없다. 예수 죄 없다. 나 살리려고 다 했다. 봤지? 그리고 물을 떠다 놓고 손으로 싹싹 씻었습니다. 만인들아 봐라, 빌라도는 살려주려고 이렇게 했다. 그런데 성경은 민란이 나면 로마 황제에게 보고가 되면 네 직장이 어렵게 되겠지. 죄 없다 네가 선포했고 예수를 살리는 거 그건 네가 하면 할 수 있겠지. 그런데 너 직장에 문제가 생기니까 만민 앞에 또 위에 하늘에 있는 신에게 전 할 일 다 했습니다. 뭔가 이건 예삿일이 아닙니다. 하늘도 겁이 나고, 직장도 문제고. 예수를 딱 심문해 보니까 이건 뭐 그냥 보통 그런 사람이 아니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이럴 때 자기 제일 속에 있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먹고 살아야 되니 근데 또 양심에 찔리니 걱정도 되니, 두 손을 부지런히 씻으면 난 무죄하다. 난 이 일에 상관없다. 난 보지 않은 거다. 니들이 원해서 너들이 한 거다. 외치면 외칠수록 하나님은 ‘빌라도 네 이놈.’ 사도신경에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유대인, 사도신경에 아무도 적지 않고 빌라도 그놈 이름을 갖다가 써 붙였습니다. 십자가에 매단 겁니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도신경은 그렇게 적혀 있는데 빌라도 그놈이 십자가에 못 박아 영원무궁토록 죽은 거고 주님은 못 박혔으나 부활하여 십자가하고 상관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하십시오 라는 말을 가지고 할 수 있는데도 발을 쏙 빼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문제는 이게 문제입니다. 네가 할 수 있는 것도 있지 않냐? 없지 않습니까? 하나는 있지 않냐? 하나 어디 있는데요? 하나 있지 않냐? 다섯 달란트가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언제 다섯 달란트라 했냐? 적어도 두 달란트들은 주셨는데 전 둘도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너한테 언제 둘을 요구했느냐? 하나밖에 주지 않지 않습니까? 하나 줬지. 내가 원하는 게 하나지. 넌 하나 그 조차도 하지 아니했지. 그건 자기 양심이 자기를 향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언젠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까지 인가? 육하원칙으로 살펴보는 겁니다. 언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이런 식으로 따져보는 것이 있지요. 제가 그래도 가방 들고 학교는 갔습니다. 앉아 있어도 뭐 그냥 아무것도 들리지도 않고 알아지지 않으니 그래도 앉아는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한 달란트입니다.

오늘이라는 날이 복입니다. 평소라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 엄청난 복입니다. 아이가 스물 되지 않았을 때가 기회입니다. 그때 해결을 했어야 됩니다. 19년을 갖다 슬금슬금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다 푹푹 밀어줘 놓고, 아이 스물인데 말은 했습니다. 근데 씨알도 먹히지 않습니다. 그러도록 만든 인간이 누구냐? 너지. 이래야 되는 겁니다.

북쪽에 수천만 명에게 수령님을 하나님보다 위에 만들어 뒀는데 그 인간들이 뭐 돈 있어 만들었습니까? 머리 좋아 만들었습니까? 하니까 하는 거지. 부모를 갖다가 교주를 만들어도 만들 수 있는 세월인데. 그냥 데리고 놀았지. 그냥 던져 놓았지. 던져놨으니 벌망생이 되는 거고. 데리고 놀았으니 애들 장난 삼아.

롯이 창세기 28장입니까, 롯이 천사를 영접하고 살아날 구명줄을 잡았는데 사위들에게 큰일 났다 얼른 나가자 하니까 “농으로 여겼더라.” 놀고 있네, 농담하네. 그 뭐 또 한 잔 먹고 잔소리를. 롯이 소돔으로 온 이야기를 들어서 벌써 눈치 채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롯의 소돔 생활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겁니다. 장인 당신이 남다른 것은 알고 하늘의 선지자라는 것은 알지만 이 소돔에 당신이 걸어 왔지 끌려 왔냐? 잡혀왔냐? 뻔히 다 아는데. 심지어 소돔에 잡혀왔다가 전쟁이 나는 통에 롯이 잡혀갔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해냈습니다. 구출한 다음, 그 소돔 그런데 가니까 그렇다. 날 따라 오너라. 강제하지 않았습니다. 넌 소돔이 좋지? 네가 좋으니 소돔에 살아라. 그때 미안했습니다. 그게 다 연극인 것입니다. 소돔이 좋아 소돔에 산 것입니다. 전쟁 통에 포로까지 잡혀 갔으니 제 마음이 정말 있었더라면, 그때 아내와 딸들에게 봐라 이 소돔 온 덕분에 포로 되어 우리가 어떻게 될 뻔 했나? 이 길이 틀렸다. 꼭 너희들이 소돔이면 난 가정을 떠나 부모 자격을 내려놓더라도 난 삼촌 따라 주님의 길 걸어간다. 포로 되어 갔다가 돌아올 때라도 삼촌을 따라갈 기회는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가족 핑계였는데 알고 보니 자기가 좋아 간 것입니다. 한 번은 어떻게 실수가 되지만은 두 번 세 번 이어지면 가족이 도둑질하는데 제가 뭐 어떻게 합니까? 근데 세월이 지나가다 보면 공범입니다. 망봐주고 해먹은 것입니다. 저 망 봐주지 않았는데요. 다시 연구해 봐라. 네가 발을 담그고 함께 지은 죄다.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는 뒤에 롯의 결과를 보니까 그 망할 딸들 그거하고 롯하고 한 편이었습니다. 한 몸이었습니다. 그게 모압과 암몬입니다. 지는 애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펄쩍 뛰었는데 말을 안 들어? 그리 가고 그리 가고 그리 가면 어찌 되는지 몰랐습니까? 롯도 아브라함과 함께 출발한 시대의 의인인데.

오늘 우리의 속을 주님이 두렵게 들여다보며 장난하지 말아라, 하나님 앞에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것처럼 그러지 말아라는 말씀으로. 정말 작정하고 좋을 때 또박또박 기도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합시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1차-L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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