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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8 수새
제목 : 하나님이 맡긴 구원의 대상, 단점과 속성 나부터 말씀으로 돌아보고 챙길 때
찬송 : 50장(내 너를 위하여)
본문 : 누가복음 2장 8절 -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치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하나님이 맡겨주신 구원의 대상 학교 교사에게는 학생이 자기 가르칠 학생입니다. 공부 못하는 학생이 교사의 존재 이유입니다. 말 안 듣는 아이들이 교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제 공부 잘하고 제 생활 잘하고 뭐 알아서 모든 것이 다 모범적이면 교사 어디에 쓸 겁니까? 말 잘 듣고 좋은 학생이면 큰 강당에 100명 200명 앉혀놓고 가르쳐도 불편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씩 들여다보며 그 학생의 장단점 살피며 제대로 교육을 해 보려고 하면 교사 한 명, 100명 못 가르칩니다. 한 대여섯 명, 열 명 넘기도 어렵습니다. 말 듣지 않는 학생 엉뚱한 짓 하는 학생 이게 바로 교사의 필요한 양이 되어 집니다.
여수시민 25만 명이라도 알아서 법 잘 지키는 사람이면 경찰서가 왜 필요합니까? 뒷골목에 도둑들 주먹들이 있으니 경찰 천 명이 월급 받고 이것들 때문에 있는 겁니다. 왜 전국의 세무서 직원들이 이렇게 많습니까? 전부 돈을 떼먹으려고 하니 전부를 다 들여다보다 보니까 확실히 그렇게 직원들이 많이 필요한 겁니다. 이걸 신앙으로 가지고 들어가 그런 교사 그런 경찰 그런 세무서 직원의 원리는 자연이고 이걸 신앙의 원리로 가지고 들어오면 나 주변에 주일 철저하게 예배 조심스럽게 말씀 생활, 기도 생활 본인들이 알아서 잘하면 목사가 왜 필요하며 구역장이 왜 필요합니까?
교회를 나와야 되는데 안 나오는 교인 그 한 사람 때문에 교회와 반사와 구역과 모든 교회의 조직이 있는 겁니다. 내 주변에 내가 있어야 신앙에 도움 되는 사람 자기 양입니다. 이걸 그대로 자기 마음속으로 가지고 들어와서 내 마음은 말씀으로 살고 내 마음은 말씀을 떠나지 아니하며 내 마음은 늘 긴장하고 주님 앞에 조심하고 다 그렇습니까? 마음이라는 것은 입보다 더 방정맞고 더 빠르기 때문에 몸 중에서는 입으로 짓는 죄가 제일 많습니다. 야고보서 3장. 빠르고 많고 이거는 걷잡을 수가 없는데 마음의 죄는 이거는 뭐 그냥 우주를 날라다닐 수 있는 이런 탁월한 존재입니다.
그 마음을 왜 그렇게 날래게 만들어 놨는가? 마음이 우수해야 영이 마음을 타고 마음을 차처럼 몰고 영원토록 주님 모시고 손발이 될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탁월합니다. 사람의 마음보다 더 빠르고 우수하고 재주 좋은 물질은 없습니다. 영은 영이니까 천하 만물 천하 동물 천하 인간 인간의 모든 것 중에서도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을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마음이 옳은 것만 생각하는가, 복된 것만 노력하는가, 하나님이 내게 주지 않은 것은 아예 마음이 어디 한번 품어본 적도 없는가, 그러면 자기 양떼는 잘 길러놓은 사람입니다. 학생이 공부하는 마음에 집중을 해야 되는데 공부 외에 마음이 자꾸 움직이면 그 마음 거머잡지 않고는 공부는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말씀에 집중하면 돌보지 않아도 되는 양인데 번개처럼 변덕도 부리고 안 가질 마음 가지고 시기도 있지 미움도 있지 질투도 있지 욕심도 지나치지 별의별 생각 다 해보지 안 가질 두려움도 가지지, 가지지 말아야 되는 방심도 하지 좀 좋으면 교만하지 조금 좋지 않으면 좀 기다리면 좋을 건데 낙망하지 이게 목자가 필요한 양입니다.
저로 말하면 신풍 교인 전부도 돌아봐야 되지만은 신풍교인 전부보다 더 급한 양떼는 제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래서 나오는 논리가 80억 전 인류가 짓는 죄 전부보다 내가 지은 죄 하나가 나에게는 더 큰 죄입니다. 상식으로 불교로 말하면 저 무지몽매한 죄인들을 가르쳐 옳은 길로 인도해야 된다, 그런 불교를 대승불교라 그럽니다. 참 웅대하고 웅장하고 위대하지요. 온 마을 온 도시의 저 주민들은 전부 죄인인데 저들 속에 들어가서 바른 걸 가르치고 바른 길로 인도한다, 이게 태국 버마 라오스 그쪽의 불교들입니다. 따뜻한 쪽의 불교들은 전부 대로가에 있고 도심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중들이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맨 날 도로에 시장에 쓸고 다닙니다. 온 국민을 위하여, 대승불교. 대승불교 반대말은 뭘까요? 저 뒤에 학생들 김신윤? 대승불교 반대말은? 소승불교라 그래요. 나나 돌아보자. 내 마음에 죄인이 많은데 뭐 나 구원을 한다고? 소승불교. 이 소승불교는 깊은 산속에 산 속에 누가 찾아오고 싶어도 어디가 앉았는지 모르는 아주 골짜기 처박혀 앉아 가지고 돌 쳐다보고 나무 쳐다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 마음은 어디로 도망을 댕겼는가? 내 마음은 이게 잘 붙들려 있는가? 자기만 돌아보는 걸 소승불교라 그럽니다. 그런 불교는 하나님 없고 뭘 모르니 인간이 노력을 하다 보니까 내가 살아야 남을 살리지 않겠는가, 소승불교. 아 저 수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되어 저렇게 난리인데 저걸 얼른 구해야 되지 않겠는가, 대승불교.
이제 성경으로 돌아와 하나님 앞에 우리를 세워놓고 여수 25만 명이 전부 믿는 사람 되게 해달라는 기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내 속에 내 마음은 전부 다 믿는 마음입니까? 내 마음은 탈이 나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으면 다 믿어지고 다 순종하게 되어 집니까? 다윗만큼 위대하십니까? 솔로몬처럼 실수 안 합니까? 요셉도 13년 던져 놓으니까 마지막에는 빈틈이 생겨 버렸습니다. 요셉 하나의 그 마음이 해결되고야 천하를 구원했습니다. 다윗을 그렇게까지 오랜 세월 연단을 시킨 이유는 아들 솔로몬 때 성전을 짓게 하기 위한 사전 준비였습니다.
기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너부터 고쳐라, 나 고치면 다 끝났습니까? 너 고쳐본 경험으로 주변을 돌아 보거라, 불교로 말하면 우리는 소승 대승을 함께 가지고 갑니다. 항상 순서는 나를 먼저 돌아보고 날 돌아본 한 걸음 그 다음 주변을 돌아보며 옆에 걸음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날 돌아보고 옆을 살피고 또 옆을 보며 저 인간이 저러니 난 어떻겠는가? 내가 나를 보니 인간들은 그렇지 않겠는가? 또 인간들 해 굳는 짓을 보니 나는 오죽 더 하겠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도 두 개 주시고 손도 두 개 주시고 발도 두 개를 주신 것은 오른발 나가고 왼발 나가고 왼발이 나갔으면 오른발이 나가고 오른손 왼손이 이렇게 움직이면서 처리해야 모든 것이 원만하고 균형이 맞습니다. 오른발은 걸어가지 않고 자기는 고치지도 않고 남만 고치라는 사람은 오른발은 꼼짝 않고 왼발만 자꾸 걸어가니 한 발은 말뚝처럼 박아놓고 왼발로만 계속 걸어가면 자기는 걸어 다닌다는데 남이 보면 제 자리에서 뺑뺑 돕니다. 또 왼발은 고정을 시켜놓고 오른발로만 자꾸 걸어가면 하나님이 맡긴 가정도 있고 주변에 사람도 있는데 이건 내놓고 기도원의 산속에 가서 자기만 고친다고 그래 싸면 발전이 있는 것 같아도 발전이 없습니다.
목회자가 목회를 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그 성경이 자기를 고치고 교인을 고치고 함께 좋아지는 것처럼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날 돌아보고 식구를 돌아보고 식구를 돌아보고 날 돌아보고 하나님이 인간을 다 직접 만들어도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부부 둘 속에서 아이를 빼 내는가, 둘 속에서 아이를 빼놔놓으면 요건 요 쪽 저 쪽 둘을 섞어 놓은 거라 부모가 아이를 딱 쳐다보면 저 아이 속에 저건 내 단점, 저 아이 속의 저 단점은 저쪽 단점 쳐다보며 서로 그거 고치고 그거 돌보다가 자기도 돌보고 자기들 돌보면서 이걸 고치며 나아가라고 준 겁니다. 애만 쥐어박지 말고. 아이만 쥐어박아서 그게 사람들 것 같으면 뭐 천하 모든 아이들은 다 위대해지겠습니다.
말할 거는 말하고 고칠 거는 고치며 동시에 자기 속에 지난날을 돌아보며 저게 안할 말을 갖다 저렇게 벌로 해쌓는데 나는 어릴 때 어떠했나? 나는 지난 날 어떠했나? 내 성격은 어떠한가? 저게 영웅호걸이 돼가지고 그냥 한 방에 천하를 다 쥐려고 그냥 노름이나 하고 그냥 뭔 투기할 때는 없는가? 들여다보는데 나는 내 속에 저렇게 불로소득으로 어느 날 한 방에 모든 걸 다 쥐려는 도둑놈 심보가 내게는 없는가? 날 돌아보며 내속에 있는 단점은 아이에게 자자손손 내려가니 아이들을 위해서도 내 속의 단점은 내가 고쳐야 되겠고 이래서 자기를 돌아보며 주변을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보며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여기 주님 오실 때 밤에 목자들이 밤이니 세상이 이렇게 자기를 돌아보고 남을 돌아보도록 쉽게 그렇게 놔두지를 않습니다. 이리저리 흔들어 버리지 좋으면 좋아서 흔들고 안 좋으면 주변에 원망 불만을 내 가지고 휩쓸어 가지.
말씀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려운 것이 없는데 죄악의 세상은 밤중이라 전기불이 없어 어두운 것이 아니라 날 돌아봐야 된다는 생각이 없어 어둡고 또 하나님이 맡긴 내 신앙의 사람들을 어떻게 좀 잘 돌아볼까? 이런 생각과 이런 길을 비춰주지 않으니 이게 어두운 세상입니다.
그렇다 해도 밤중에 오늘도 내가 내속에 말씀과 거리가 멀고 주의 뜻과 거리가 멀고 주님 없이 살고 세상만 자꾸 걱정하고 있는 나를 말씀으로 주의 뜻으로 주님 모시고 영생을 소망하며 챙길 때 이미 주님은 거기 계십니다.
내 주변을 그렇게 챙길 때 주님이 능력으로 함께 하시며 그리고 놀랍게 그냥 신앙이 쑥 자라버립니다. 바로만 걸어가면 몇 발자국 걸어다 가다 보면 아이 걸음도 멀리 가버립니다. 방향을 잘못 잡으니 헛일 하는 것이지. 성찬을 앞두고 주님은 내 속에 뭘 염려하시나 들여다보십시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1차-kh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