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새22.12.26 눅2:40 주님의 고난을 연구 계산, 점점 커지는 깊이 넓이만큼 성찬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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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새22.12.26 눅2:40 주님의 고난을 연구 계산, 점점 커지는 깊이 넓이만큼 성찬의 준비

서기 0 92 2022.12.26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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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6 월새

제목 : 주님의 고난을 연구 계산, 점점 커지는 깊이 넓이만큼 성찬의 준비

찬송 : 29장(예수 나를 위하여)

본문 : 누가복음 2장 40절 -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예수님의 인성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을 두고 말씀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내면은 하나님입니다. 영원불변. 영원불변의 하나님이시니 사람 되어 오셨을 때에도 신성 하나님은 자라거나 강하여지거나 이렇게 변화 변동이 없습니다. 완전자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완전자가 인간으로 오시며 그 인간을 가졌는데 예수님의 밖은 참 사람 인간이고 안에는 참 하나님 신성입니다. 주님이 입고 오신 인성 몸 마음 영 합해서 인간 부분은 태아로 또 출산하여 아기로 세상을 시작했고 서른셋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니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여기 40절에 “아기가 자라며” 예수님의 인성도 자라갔습니다. 자라간 면을 두고 말하면 좋아 보이나 그 어렵다  말고 어려웠다 말이고 불편했다는 말이었습니다.

“점점 모든 면으로 자라가더라” 우리 때문에 그 출발을 성인으로 불편 없이 시작하지 않으시고 인간이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짐승 먹이통 인간이 먹는 짐승 사료통에서 시작했습니다. 뭐 사료통 밑에도 있지 않냐? 더 이상 내려갈 것 없이 인간 이하면 되는 겁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출산 인간의 출생 인간의 시작 그 시작 밑에니 짐승의 먹이통으로 시작하여 그 다음 “점점 자라가시더라”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더라” 그리고 그 마음 그 생각 지혜가 충족해지더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이때 하나님은 이위 성자 하나님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우리 구원을 위하여 역할은 따로 맡으셨으나 꼭 같은 하나님이신데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성부 하나님의 뜻을 성자 하나님이 받들어 모셔야 되고 성자 하나님 원하는 대로 그 인성이 조금 더 착오 없이 이탈 없이 빈틈없이 순종을 했으니 사람으로 말하면 마음이 마음먹었을 때 그 몸이 따라가는 사람이 있고 못 따라가는 사람이 있고 별별 가지가 다 있습니다. 좀 앉아 있어야 될 자리인데 일만 하고 공부를 안 해본 사람, 양반질을 안 해본 사람, 오래 앉혀 놓으면 좀이 쑤셔서 그냥 나가서 일은 해도 도무지 앉아 있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글을 많이 읽어 훌륭한 인품을 가졌다고 선생 노릇은 해도 한겨울 현장에 곡괭이 들고 보내놓으면 뭐 한 시간을 못 버티고 그냥 쓰러져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의 결정 그 마음에 따라 몸이 얼마나 움직이느냐 우리는 마음의 결정에 몸이 따라오는 것이 문제고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주님 속에 완전하신 신성이 그 신성이 가진 인성 인간을 어려서 명령, 어려서부터 그대로 끌며 자라며 강하여지고 주시는 지혜를 인성이 받아 지혜가 충족해 가며 그렇게 자라가고 강해져 가고 또 그 마음이 지혜로워지는 만큼이 거룩입니다.

그릇은 1리터인데 2리터를 부어버리면 절반은 흘러버립니다.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신성 하나님은 무한이라 무한정으로 부어줄 수 있으나 인성 주님은 아기였고 소년으로 자라가며 자라가는 만큼 강하 여자며 그 안은 지혜로 점점 이렇게 자라 가는데 아기 때 소년 때 청년 때 장년 때 필요한 건강, 필요한 강함, 필요한 지혜를 늘려주시고 늘려갔고 이게 그릇이 되고 거기에 필요한 만큼 안내를 채워 인성은 죄가 없으니 완전이고 또 하나님이 부어주는 은혜를 흘리지 않고 다 받았으니 완전이고 그 주신 은혜 주신 기회에 100% 순종했으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여 점점 자라가며 지극히 큰 것에까지 충성하게 되면서 말씀 어긴 죄 없고 점점 자라가며 주님의 생각대로 하고 싶은 자율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거 다 꺾어 버렸고 없어서 죄 짓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은 겁니다.

자라며 강하여지면 혼자 방향을 잡을 수 있는데 그리 되면 그게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신성 하나님 원하는 대로 인생이 100% 장악이 되고 그대로 순종했으니 늘 인성과 신성은 동행이었습니다. 이 위 성자 신성은 일위 성부 하나님과 동일이고 하나이기 때문에 이건 문제가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성과 인성 사이는 떨어질 수 있고 틀어질 수 있는 사이입니다. 떨어지고 틀어질 수 있는 것이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구주가 된 겁니다.

그 인성은 원래 죄를 지을 리도 없다, 이렇게 되어 지면 우리 대속이 되질 않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다 보면 우리 위해 얼마나 큰 고난을 받으셨는가, 그냥 수준 낮은 우리로서는 바늘로 내 손끝을 찔러보며 조금 찔러보면 이것도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 못을 박고 매달려 놓으면 얼마나 아플까 주사바늘로 수술로 치과에서 그런 걸로 고통을 느껴가며 주님은 이런 고난을 받으셨구나, 이렇게 헤아려 가는 것이 빠르기는 빠릅니다. 이렇게 헤아려 가서 깨닫는 것은 많아봐야 접시물이고. 부모가 되어 아이를 원하는 그 부모의 마음에 소원이 있고 아이에 대한 부모의 기대와 소원이 있었는데 이게 틀어질 때 표 없이 얼마나 낙망이 되고 실망이 되는지 이걸로 느껴보면 접시 물 정도가 아니라 양동이 정도 아주 큰 다라이와 같은 그런 크기로 주님의 고난을 느끼실 겁니다.

점점 더 자라 아이가 제 인생 산다고 물어보지도 않고 보고도 없이 제가 결정하고 나 돌아다니고 인생 방향 틀어버릴 때 저런 걸 위해서 그냥 그동안 수고 했나, 나름대로 어디 가도 괜찮으나 부모를 부모로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결정 그런 인생의 진로를 잡을 때에 그 텅 빈 마음 흐트러진 마음 이 빈 마음을 느끼며 주님이 이런 고난까지 다 받으셨구나, 그럴 때 이 고난은 이제 측량할 수 없게 커져버립니다.

훗날에 그 아이가 철이 들어 어릴 때는 뭐 그냥 사탕 하나에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웃음을 팔 때 그건 부모를 좋아해도 그건 사탕 하나 정도고 이게 좀 덩치가 커지며 아이 등록금 때문에 추운데 나가 고생한 것이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습니다. 이럴 때 이제 그 부모를 알아주는 것이 양푼이나 다라이 만큼 될 것이고 어느 날 그 아이가 부모의 은혜는 바다보다 넓고 하늘보다 높은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인간으로는 참 많은 것을 깨닫고 느꼈구나, 이렇게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 주님에 대한 감사 양면으로 살피는 것이 성찬인데 하나님이 사람 되어 왔으니 그 얼마나 답답했을까 십자가에 못 박히고말고 전에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너무 고난이라 모두가 울고 감동하고 나도 죄 짓지 않기 위해서 애써야 되겠다, 그러고 주님이 물위를 걸으시고 주님이 오병이어로 2만여 명을 먹일 때 환호하는 그 찬양 소리를 들을 때는 주님이 별로이 고생을 하지 않았다, 꼭 그리 말하지는 않으나 대개 다 그리 넘어갑니다. 이게 참 기가 막힌 겁니다. 주님이 물위를 걸으시고 갈릴리 바다가 순종을 하고 제자들이 깜짝 놀랄 때바로 그게 오병이어 직후였는데 아이 도시락으로 2만 명이 먹고 모두 임금을 삼으려고 난리가 날 때 그때는 주님이 고생하지 않았던가, 주님의 고난을 주님에 대한 감사를 느끼는 순서 따져보는 그 순서가 이게 점점 넓어지고 주님도 자라고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해져 갔는데 주님이 그렇게 자라가시고 강해져가고 지혜를 충족해 간 이유는 우리의 신앙 우리의 구원의 감사 우리의 구원의 고난을 연구하는 면도 자라 가고 강하여 가고 계산이 넓어지고 많아져서 이것까지 이런 고생을 했나 그리 되어져야 됩니다.


예전에 남자아이들 철드는 것은 군대 가가지고 첫날 빨래 해보고 첫날 뭐 그냥 밥 해 보고 이거 해보고 저거 해보면 이거 뭐 참 주는 밥 먹고 있다가 딱 해보는 순간 이 생고생을 그렇게 매일 하셨나, 그러면서 이제 그때부터 철들기가 시작되는 겁니다. 그럴 때 또 고운 집 아이들도 밖에 나가 일을 해보면 부모가 이렇게 일을 하고 그렇게 돈을 벌었구나, 여자아이들 철드는 것은 시집가서 이제 눈치 볼 때 아, 어머니도 우리 집에 시집 와서 처음에는 이랬겠구나, 그 다음 아침에 이 추운데 나가서 그냥 물이고 와서 밥 했겠구나, 그러면서 이제 그 고난을 겪어보며 느끼는 겁니다. 그러다가 아이 때문에 1년간 몸이 무거워 그냥 못 견딜 때 어머니 날 위한 것이 이런 길도 걸어갔구나, 출산 때 고통을 통해 이 길도 걸어갔구나, 이게 날 보고 한 번 웃어주는 것 때문에 이 생고생을 다 했구나,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아가면서 점점 느끼게 되지 그 교과서로 가지고 테레비보고 뭐 말을 들어 아는 것은 바위에 눈 쌓인 것과 같아서 바위에 눈이 쌓이면 우선은 흰 눈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중에 애가 말을 듣지 않을 때 내가 그때 엄마한테 한 소리 한 게 그 마음에 이렇게까지 되었구나, 이러면서 이제 자라가듯이 주님이 아이로 오셔서 자라가며 강하여지며 지혜가 충족하여 점점 이렇게 그 인성을 가지고 간 그 길이 우리가 따라가며 주님이 걸어가신 길 이 길도 있었구나, 이 고난도 있었구나, 이 안타까움도 있었구나, 이 탄식도 있었구나, 그러면서 계속해서 자라가는 겁니다.

성찬을 준비하는 한 주간인데 주님은 어디까지 고난을 당하셨는가, 각자 느껴보고 헤아려 보려면 얼마든지 깊어지고 넓어질 수 있습니다. 그냥 잠깐 눈 감고 생각해 볼 때 이게 큰 죄니 이거 해결해야 되겠구나, 그렇게 쉽게도 해야 되고 신앙이 어리면 그 신앙의 철이 좀 들어야 되는 이런 새벽예배 교인들은 주님이 걸어가신 걸음걸음이 어디까지였던가 갈릴리 풍랑 이는 바다를 척척 걸어갈 때 주님은 영광스럽고 편안했고 아주 웅장했던가, 완전의 하나님 무한의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었으니 그 몸 안에서 얼마나 줄어들고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혹시 그런 거 생각해 보셨습니까?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요만한 그런 하수구에 쏙 들어가 가지고 나오지도 못하고 그냥 몸부림도 못 치고 쬐어 들어오는 그 분위기 공산당 애들은 뭐 그런 시간 가는 고문은 하지 않고 일본 애들이 고문을 할 때 지략적으로 고문을 하면서 사람을 꼼짝달싹 못하도록 쪼아가는 고문이 있습니다. 그냥 한 칼에 죽고 총 한 방에 죽으면 눈 지끈 감으면 가겠는데 이렇게 꼼짝달싹 못 하도록 우겨 싸면서 이게 한 시간도 아니고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말라 들어가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주님은 인성을 가지는 순간 그리 되었습니다. 부활을 하고 나니까 이제 해방이 됐는가, 우리 기준에서 보면 부활은 출세를 한 건데 완전자 무한의 하나님은 부활부터가 이제 영원무궁토록 우리 위해서 자기를 최소한으로 쥐어짜는 시작이었습니다.

그 많은 걸 마음속에 생각하고 그 감사가 입술에 붙은 얕은 감사 말고 그 세 살짜리 그냥 좋으면 헤헤닥거리고 웃고 안 좋으면 팩 돌아서는 이런 10원짜리 참 수준 낮은 그런 웃음의 울음 울음도 가짜 웃음도 순 그런 거 좀 무거워지고 좀 넓어지고 좀 깊어가며 여기까지 감사해야 되겠구나, 이런 것까지 고난을 당했구나, 이건 몸으로 느낄 수가 없어 우리에게 마음을 주고 지혜를 준 겁니다. 이 마음의 지혜와 생각을 가지고 주의 고난을 많이 넓혀 나가고 깊이 나가도록 하십시다. 잘 안 되면 그냥 부모 생각하면 저절로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부모 걸어가며 날 위한 수고가 어디까지였던가 그것만 생각해도 엄청나게 죄송함과 감사함을 넓혀 나갈 수 있습니다. 그 이후가 되면 주님이 끌어 무한으로 감사와 죄송함을 알려주실 겁니다.




1차-k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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