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새22.12.16 창29:32 레아에게 닿은 구원 계통, 괴로운 현실로 주신 넘치는 구원 기회, 그 인도를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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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새22.12.16 창29:32 레아에게 닿은 구원 계통, 괴로운 현실로 주신 넘치는 구원 기회, 그 인도를 볼 것

관리1 0 67 2022.12.16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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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6 금새

제목 : 레아에게 닿은 구원 계통, 괴로운 현실로 주신 넘치는 구원 기회, 그 인도를 볼 것

찬송 : 118장(예수 나를 오라하네)

본문 : 창세기 29장 32절 -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기도드리겠습니다.
모든 것 만드시고 오늘도 따로 만들고 따로 조성하시며 새롭게 인도하시며 보이는 것 속에 그 움직임 속에 주님은 볼 수 없는 주님으로 오라 하시고 우리는 말씀과 양심과 주신 현실을 보며 현실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만 가는 것도 아니고 보이는 현실과 현실에 움직임 속에 볼 수 없는 주님을 따라가는 성령의 사람 주님 가신 십자가를 따라가는 사람 말씀 안에서의 모든 것을 찾아가는 이 아침 되어 오늘 하루가 죽을 하루가 산 하루가 되고 살아가는 결심 매 선택 매 걸음걸음 모아 많은 것을 영생으로 바꾸는 이 하루 되도록 우리 모든 교인들 깨워주시고 걸어가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진행되는 공사에 사고 없도록 주님 안전 지켜주시고
우리는 오늘만 보며 계획하고 대처하지마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음과 먼 훗날 주님 오시는 날까지 우리가 계획하며 우리가 건축하며 우리가 운영하는 모든 것 다 주의 은혜 가운데 복되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구약의 이스라엘이니 보이는 아들은 아들인데 생명의 열매, 생명의 역사, 생명의 씨앗이 되는 이면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약의 음식 먹는 것은 우리는 신령한 양식으로 레위기 11장을 읽는 것이고 보이는 세상을 창조한 창세기 1장은 오늘도 주님은 내게 필요한 신앙의 환경을 만들고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 위에 이렇게 운영하심을 보는 겁니다.

어느 날 야곱이라는 사람이 밧단 아람 마을에 나타났습니다. 이 사람이 앞으로 오실 주님의 족보의 계통이니 현재는 야곱이고 이 길에 구원의 계통이 들어온 겁니다. 겉으로는 야곱을 붙들고 그 야곱 속에 육체가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계통을 잡았어야 됩니다. 원래 데라 할아버지 그다음 야곱으로 이어지며 가나안으로 갈 때 함께 다 갔었어야 됩니다. 그런데 한 발 늦었으나 이삭 야곱을 통해 다시 늦어진 밧단 아람에도 빛이 비추어졌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아브라함 이삭 손주 야곱이 계속 가나안을 지켜야 되는데 그 마음은 그 마음이나 하나님은 야곱을 밧단 아람으로 중간에 가다가 쳐져버린 가야 할 길을 늦췄고 멈췄고 아직 빗나간 것은 아니고 직선으로 가야 될 길이 멈추므로 한 걸음 늦어진 이곳에 야곱을 통해 하나님은 구원의 손길을 다시 주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롯이라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뒤를 따라 나온 유일한 사람인데 이게 소돔이 어른거리니 소돔으로 빠져버렸습니다. 이것은. 뒤로 간 것이 아니라 옆으로 새버렸습니다. 여기서 떨어진 잘못된 운동이 모압이었습니다. 그 모압의 수백 년 내려오는 실패의 역사에 야곱의 후손 한 4백년, 5백년이 지나는 야곱의 후손 그 야곱의 후손 중에서도 4, 5백년까지는 안 되겠고 몇 백 년 뒤 4, 5백년 되겠습니다. 4, 5백년 뒤 오랜 세월 뒤에 야곱의 먼 후손 엘리멜렉이 먹고 사는 문제로 가면 안 되는 모압으로 빗기러 갔습니다. 이 가정이 옆으로 한 걸음 잘못 간 것은 망할 일이었고 그건 가서 안 될 일입니다.

그건 그렇고 이들의 잘못된 선택에 옆으로 새버린 그가 룻의 마을로 들어왔고 룻은 이스라엘 야곱의 후손 그중에 다윗의 몇 대 조상이 될 엘리멜렉이 들어왔을 때 그 엘리멜렉 아들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구원의 계통에 뻗쳐진 손을 잡았고 룻은 구원의 계통에 서게 됩니다. 옳고 바르게 걸어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내 잘못이 아니라 나의 신앙의 지도자 때문에 나의 신앙의 가정에 부모들 때문에 복 없는 길 늦어졌고 또는 잘못되었을지라도 내가 하나님 앞에 복 받을 자세가 되어 지면 주님은 그들에게도 구원의 손길을 뻗칩니다.

주님 오셔서 잃어버린 양에게로 왔다, 구원의 계통에 하나님의 백성들만을 위해 오셨는데 가나안 여인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가나안 여인도 주님 때문에 병났고 수르보니게 그 여인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주님에게 병 치료를 원했을 때 이스라엘에 잃어버린 양에게로 왔다, 너희들은 개다, 누가 자녀에게 줄 떡을 개들에게 주겠느냐, 이럴 때 그 개들도 개 같은 인격도 하나님이 주신 참 사람의 구원의 계통이 아니라 두고 갈 세상을 향하여 정신없이 물고 뜯고 싸우는 이런 잘못된 사람이라도 개도 주인의 부스러기는 먹지 않습니까? 그거 믿음이다, 구원이란 능치 못하심이 없고 가림이 없다, 그래서 가나안 여인 또 이방 여인 이방 사람들도 주님이 구원하신 일이 있습니다.

구약으로 오면 그렇고 또 알고 보면 주님은 구원의 계통에 한길을 주시며 그 안에 있다고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주저앉으면 실패고 그 길이 아니라도 만유주 하나님 구원의 저 영생을 내게는 주지 않나? 마음과 소원이 있는 사람에게는 벌써 그 소원이 주님이 구원을 하시려는 징조입니다.

레아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라 한 걸음 더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따라갔어야 되는 그 자기 아버지 자기 할아버지 계통입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쪽에서 늦어짐으로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야곱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미쳐졌을 때 야곱의 육체가 아니라 야곱 속에 들어온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봤어야 되고 저 친척이 어떻게 온 것 같지만 그 친척 속에서 구원에 가까운 한 계통을 알았어야 됩니다. 눈앞에 라헬 때문에 자기가 밀쳐지는 그 어려움, 그 불편이, 그 고통이 이게 들어 구원의 소망을 더 강하게 가지게 하는 건데 주일에 돈 벌 것이 많은데 교회를 나오겠습니까?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 돈 벌 직장도 시원치 않으니 이건 고통인데 이건 불리함인데 이건 괴로움인데 많이 벌어 아이들도 잘 먹이고 싶고 나도 잘 벌어 좋은 세상 좋게 살고 싶은데 그런데 좋은 직장을 갖지 못하니 이건 불편입니다. 이건 경제적인 괴로움입니다.

그런데 주일, 예배, 집회, 성경 읽고 신앙생활 하는데 한 걸음 더 유리하다면 인간이 볼 때 어렵고 괴로우나 이 속에 천국 가는 길이 훤하게 열려 아, 이런 좋은 길이 어디 있나 주님 따라가는 혼자며 주님 따라가는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라 했으니 세상이 보면 어렵다는 것이고 세상이 보면 어려우나 다음을 보면 영원복락이니 이런 좋은 길, 그런데 이게 모양이 괴로우니 전부 세상 좋은 길로 따라가고 주와 말씀을 따라가는 괴로운 길은 전부 다 피하다 보니까 이 괴로운 길이 인간이 나서기는 어려워 좁은 길이나 실제 걸어가 보면 걸어갈 만하고 아, 주님이 걸어가면서 그 길을 갖다가 그냥 놔뒀겠습니까? 알고 보니까 시온의 대로라 아무도 경쟁자도 없고 이건 다 내버려두니 뭐 그냥 하늘나라 영생을 두고 오늘의 불편을 다시 들여다보면 세상에 정주지 말아라, 세상에 소망 두지 말아라, 세상 때문에 넉넉하게 쳐지지 말고 붙들리지 말아라, 천국을 향하여 부지런히 부지런히 걸어가자는 특별한 사랑이었습니다.

야곱이 흠뻑 사랑하여 둘이 정신없는 라헬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이 되고 계통인 야곱과 라헬이 둘이 좋아 정신도 없는데 그 아무리 정신없어 봐야 그거 둘이 세상으로 좋은 거니 거기는 생명은 없다, 생명의 역사도 없다, 구원의 새로운 운동도 없다, 레아는 사랑을 받아야 되는데 육체의 이 땅 위에 사랑이 없어 서러우냐? 어려우냐? 세상에 대한 소망이 없고 세상에 대한 편리는 없는 거 보니 구원의 하나님의 기회는 더 많이 주어진다, 그 르우벤으로 보여주신 겁니다. 주신 르우벤이 얼마나 복인 줄도 모르고 이걸 가지고 야곱에 두고 갈 땅 위의 사랑을 받지 않겠느냐 그 계산하고 앉았는데 하나 더 주신 것이 시므온입니다. 하나 가지고 안 된다고 간구하고 발버둥치니 또 더해 주셨습니다. 괴로움 속에 주셨으니 영생의 소망인 줄 알고 간구를 더하니 또 주셨으니 시몬을 통해 하나님께 더 나아가고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멀어진 것이 이제는 하나님과 직접 붙들릴 수 있는 이런 기회라 이렇게 봐야 되는데 레아는 아직도 마음속에 그런 걸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괴로움을 통해 생명의 역사가 시작이 되었고 간구함으로 또 더해 주셨고 그리고 또 더 고통과 괴로움 속에 세 번째 준 레위를 통해 열두 아들도 열두 아들 다 때를 따라 사명을 따라 필요하지마는 그 전체가 하나님과의 문제가 되는 죄 문제를 완전히 씻어버리고 하나님께 붙들리는 이 두 손을 잡는 데는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

오늘 하루의 현실 속에서도 열두지파적인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기회 우리 마음 마음 우리 행위 행위 속에 주님의 생각 되고, 주님의 소망되고, 욕심도 주님의 욕심 되어 성령의 소욕이 되어 지고 오늘 하루에 열심히 충성하는 그 충성도 두고 갈 땅의 것의 충성이 아니라 주의 인도를 따라 붙이는 충성이 되어 지고 오늘 하루의 지식도 지혜도 선도 이렇게 따지다 보니까 오늘에 주어진 기회를 전부 다 붙들면 이게 오늘의 열두지파적인 그 열두 아들 그냥 헤아리다 보니까 열둘이 아닙니다. 전부가 하나님이 볼 때 다 필요하여 하나님이 주셨고 우리가 몰라서 그냥 헤아리다 보니까 열둘입니다. 오늘에 주시는 하나님의 기회 전부가 열둘입니다.

이 전부가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부활의 요소 되고 생명의 심신이 되려면 주님과 멀어지고 끊어지는 이 죄 문제는 레위지파가 해결을 합니다. 레위 지파. 이게 레아의 괴로움과 그 레아가 간구하고 발버둥치는 그 속에서 나왔습니다. 왜 레아가 세상으로 어렵고 세상으로 그렇게 간구했던가, 세상이 불편하니까 일부러 세상을 불편하게 만들어 버리면 자기가 하나님인가, 현실 조성은 하나님이 해주는 겁니다. 현실을 뒤바꾸는 것은 하나님이 하는 겁니다. 만들고 바꾸는 현실을 들여다보며 현실이 이렇게 생겼고 오늘 현실이 이렇게 돌아가니 말씀으로 보고 신앙의 양심으로 느껴볼 때 이 길과 저길 중에 이 길이구나, 이 마음과 저 마음 중에 저 마음이 옳구나, 그리고 한 걸음씩 또박또박 하다 보면 그 결과가 르우벤적인 생명, 시므온적인 생명, 레위적인 하나님과의 연결, 그리고 부어주시는 유다적인 인도의 지도가 있어 자기의 모든 요소가 전부 다 살아나고 하나가 되고 내 속에 하루하루 지나갈 때마다 어제까지 걸어온 신앙으로는 생각도 못하는 오늘의 하루가 되어 집니다.

나무에 순이 자랄 때 보면 예전 예배당 마당에 그 등나무는 하루에 한 뼘 자랄 때가 있습니다. 20cm. 하루에 5cm, 10cm는 자고 일어나면 쑥쑥 큽니다. 낳아 놓은 아이들도 자랄 때 오뉴월 하룻볕이 무섭다, 그 오뉴월은 달력에 5, 6월이 아니고 음력 5, 6월입니다. 오뉴월 하룻볕이 무섭다, 첫여름 초여름의 아이들 쑥 자라는 것처럼, 알고 보면 하나님은 육체는 자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으나 신앙으로는 끝없이 자라 가는데 매일매일 이 하루 때문에 나의 신앙이 어제와는 비교도 안 되고 이번 이런 선택과 이런 현실과 이 순종의 한 번 때문에 뭐 지난 날 어제까지 나로서는 생각도 못하게 이렇게 쑥쑥 자라가 버립니다.

라헬은 세상사랑 있는 대로 다 받았습니다. 그런데 라헬 속을 들여다보니 생명의 역사 가져갈 신앙의 은혜는 보이질 않습니다. 레아에게는 하나님께서 뭐 그냥 앞에서부터 넷 다 몰아주는데 앞에서부터 넷이 지금은 몰라도 훗날 이게 전부라 할 만큼 이렇게 주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도 또 지금 우리 교회에 주는 모든 현실도 오늘 하루 또박또박 걸어가며 이게 훗날에 뭘 만들는지 그건 주님만 아시고 우리는 순종만 하는 겁니다.

첫 추위 속에 건축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교회에 작은 거 하나도 온 교인이 직접 나와서 소쿠리에 뭐 자갈 모래 이고지고 다 그 전국 어느 교회나 어디나 다 그러던 것이 세상 돈이 얼마나 많아졌던지 연보 건축 광고를 안 하는데도 모아둔 연보 적금에서만 나가도 공사가 시작이 됩니다. 또 현재 적금에 좀 모자라는데도 교회 현재 수입 지출 좀 아끼면서 몰아버리면 뭐 그렇게 우리 범위 넘는 것이 아닙니다. 밖에서 좀 돈을 움직이지만 현재 교회가 가진 여기저기 있는 경제 범위 안에서 하고 있습니다.

공사하는 데라도 한 번씩 좀 들여다보시고 눈으로 보고 모두들 노년의 마지막 날까지 새벽 예배 나오고, 우리 손양례 집사님처럼 예배 보고 가셔서 한 시간 만에 천국 가는, 뭐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기계처럼 똑 그렇게 다 주지 않으시고 노년에 1년을, 5년을, 10년을 새로 짓는 집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될지 모릅니다. 저도 그렇고 다 그렇습니다. 난 죽는 시간까지 열심히 걸어가다가 그냥 순간 갈란다, 내가 하나님입니까? 내가 하나님이면 내가 결정하는데 소원은 그렇지만은 주의 인도는 다를 수 있습니다. 내일이라도 언제라도 이곳은 내가 주님 앞에 서기 전 마지막 내 집이 되고 내 예배당이 될 수 있다, 어떻게 짓는지 가서 눈으로 보고 팔다리로 도와주지는 못해도 눈으로 보면서 마음속에 안전하게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안전. 또 튼튼하여 주님 오실 때까지 저게 손보지 않을 수 있도록 그러면 좋지 않겠습니까? 이 예배당은 모이는 사람이 적을 수도 있고 더 많아질 수도 있기 때문에 조립식으로 지었습니다. 일부러.

이번에 짓는 것은 가정집처럼 튼튼하게 짓습니다. 따뜻하게 지을 겁니다. 나중에 저기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때 돼가지고 그때 미안하게 들어가지 마시고 지금 기도하시면 그게 좋은 일입니다. 나는 들어가지 않을지라도 내 신앙의 식구, 우리 구역, 식구 우리 식구 저기서 주님 오실 때까지 예배당 건물을 쳐다보며 예배당 별관처럼 신앙생활을 할 거다, 이런 마음으로 기도하시고 그 다음 평소에 연보한 연보로 가지고 또 앞으로 평소 연보할 연보로 가지고 짓고 있습니다. 공회 건축은 늘 그렇습니다. 마음을 모두시고 기도를 더하여 두고두고 이곳에서 신앙 생활하는 이대로 끝까지 지켜 나갈 수 있도록 그렇게 모두 마음도 정성도 모두어 가시고 훗날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1차-k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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