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새22.12.12 창29:31 하나님의 완전 인도, 레아와 라헬을 똑같이, 현재 미래 주님의 인도만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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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새22.12.12 창29:31 하나님의 완전 인도, 레아와 라헬을 똑같이, 현재 미래 주님의 인도만 따라

관리1 0 72 2022.12.12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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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12 월새

제목 : 하나님의 완전 인도, 레아와 라헬을 똑같이, 현재 미래 주님의 인도만 따라

찬송 : 29장(예수 나를 위하여)

본문 : 창세기 29장 31절 -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기도드리겠습니다.
주일의 은혜 한 주간의 세상 속의 은혜 다르지 않음을 깨달아 주일도 평일을 마음에 두고 은혜 받고 세상 속의 한 주간도 주일의 은혜가 이어지는 우리들이 되어 세상에 사나 천국에 살고 하늘을 준비하는 이 시간 되도록 잠든 심령 깨워주시고 또 피곤하여 잠든 이들 꿈속에 마 음 속에 주님 아듬어 세상을 향한 저들 되지 않고 신앙을 향한 세상 되도록 함께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하나님은 완전자십니다. 한쪽으로 치우치시면 편벽이 되고 편입이 되고 일방이 되어 집니다. 하나님은 완전자시라 우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본질 본체적으로 굳이 말하자면 7:29둔건? 입니다. 뭐가 없단 말인고? 쏠림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걸 굳이 표현한다면 원만 하다 라고 그럽니다. 둥글 원(圓) 자입니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물에 물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런 타락의 잘못된 원만이 아니라 경제면으로도 완전, 도덕적으로도 완전, 사회적으로도 원만, 진리의 말씀 지식으로도 당연히 완전 우리가 바로 그리 되기는 어려우나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 하라” 하나님의 깨끗하심처럼 깨끗 하라 하나님을 본 받아 만들었기 때문에 어려도 하나님을 향해 나갈 준비는 다 돼 있습니다.

또 천사처럼 만들지를 않아 우리의 문제는 많지만은 장점이 있을 때 이 장점으로 단점을 살려가야 되고 자기의 부족한 면이 있을 때 그 부족한 면을 포기하면 낙심 죄가 되어 집니다. 여기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내려오는 지금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원래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데라 였고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래 본토는 밧단 아람의 하란이 아니라 갈대아 우르입니다. 갈대아 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망할 때 보면 북쪽에 앗수르가 먼저 북쪽 이스라엘을 점령합니다. 바벨론은 그 앗수르 다음에 더 먼 나라입니다. 멀고멀어 어딘지도 모르는 갈대아 우르, 그곳에 있던 데라가 가나안을 향하여 방향을 잡다가 아이들 가족을 다 데리고 그 갈대아에서 가나안까지 오다오다 그만 멈춘 곳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옳고 바른 길을 향해 결심하고 걸어가다가 좋게 말하면 그 사람이 연약하고 받은 은혜가 적어 끝까지 걸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가야 되는데 중간에 멈추면 끝까지 걸어가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후퇴며 도태며 배신이며 섭섭한 동지의 이탈로 볼 수가 있습니다. 교회를 함께 가기로 결심했다가 주저하는 사람, 또 함께 출발을 했는데 주일 오전을 출발하다가 이제 오후까지 더 나가야 되는데 오전에 그치는 사람, 믿기는 믿는데 믿는 사람이라고 해야 될까 그냥 휴일이니 주일만 나오는데 밤 예배 새벽예배까지 더 자라가야 되는데 머뭇거리면 이거 늦어지는 겁니다. 재촉해야 됩니다. 그런데 중간에 하란에 주저앉은 데라와 형제들과 조카들과 아브라함의 원 집안들 아브라함도 거기 주저앉았는데 아브라함에게는 계속 가라 해서 하란을 출발하고 가나안까지 끝까지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의 원 아버지 집안은 갈대아 우르에 있었고 가나안을 향해 전부 오다가 가나안 직전에서 서버렸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게 아브라함입니다. 아직까지는 더 나아가면 됩니다. 아직까지는 원래 방향이 하나고 계통의 하나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차이 없이 거리 없이 딱 붙어 동행이고 밧단 아람에 있는 형제간들은 마지막 단계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전에 지금 머뭇거리고 있는데 이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데리고 올 때 우선 살고 익어진 주변에서 구하면 거리나 알기 때문에 더 낫지만 편하지만은 세상 살아가는 데는 주변이 낫지만 함께 걸어온 신앙의 과거의 동행이 내 신앙만큼 오지는 못해도 나와 함께 방향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여기다 대고 보내가지고 거기 있는 리브가를 끌고 가는 까지 들어왔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한 걸음 더 갔고 리브가와 리브가의 아버지 브두엘은 아브라함과 함께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머뭇거리는 상태인데 아들을 위하여 이쪽에서 데려왔기 때문에 신앙으로는 한 계통이고 한 목적이고 한 방향입니다. 아브라함만큼은 되지 않아도 아브라함 주변은 세상은 좋고 세상은 맑고 세상은 편리하나 아야 아브라함의 아버지로부터 가나안을 향해 내려오는 이 개통이 아니기 때문에 가난한 주변에서 구하지 말고 내 본토 내 친척 그쪽으로 가서 데려오도록 범위를 딱 정한 겁니다.

나보다 앞서 있어 나를 끌어주면 제일 좋고, 적어도 나하고 신앙이 맞아 함께 가는 것이 그다음이고 세 번째 내 신앙 정도는 되지 않아도 앞서가는 나를 부러워하고 또 이왕이면 그쪽이면 좋겠다고 사모하고 그런 이야기를 듣고 좀 뒤에 있으나 방향이 맞는 늦어진 사람을 끌어다가 앞에 세우는 것이 더 낫고 앞선 사람 제일 좋고 동행이 가다 있고 아쉽지만 뒤에 있는 사람 그러다가 저는 다리 고쳐주며 약한 무릎 세워 함께 가는 게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몰라서 못 가는 길 배워서 가면 선생님이 있고 함께 가면 한 몸이고 동지고 다 이래서 우리가 믿고 이래서 걸어가는 건데 지난날의 나처럼 아직도 머뭇거리는 사람 이번에는 내가 잡아끌면 아브라함이 리브가를 어 이삭과 붙이는 것과 같고 이게 형과 문제가 생겨 야곱을 피하게 할 때 리브가가 자기처럼 또 외갓집에 보내 거기서 사람을 만나 다시 또 출발하도록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밧단 아람은 우선 보면 집안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가나안으로 왔다가 야곱이 신앙으로 후퇴하고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냥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 때문에 갔고 그다음 가서 리브가가 이삭처럼 뒤따라온 것처럼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가서 아내를 붙들고 다시 가나안으로 전진하는 이런 일이었기 때문에 결혼에 나를 신앙으로 끌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나는 약하니까 그걸 좋은 마음 가진 분들이 흔히들 그렇게 부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벌써 그 정도 마음을 가진 사람은 신앙에 앞선 사람이라 그 신앙에 앞선 사람을 다시 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내가 약하기 때문에 신앙으로 나를 끌어줄 수 있는 사람 그 정도의 마음이면 엄청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은 좋으나 그런 사람까지 끌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있으면 좋은데 주지 않으면 이 마음으로 함께 갈 사람이 있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한 몸입니다. 없다면 내가 한 걸음 뒤에 있는 사람을 붙들기 위해서 거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를 끌어내는 방향으로 노력할 수는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으로 보면 이삭의 아내를 데려오라는 아브라함의 부탁에 이삭을 데리고 가지는 말아라 가서 데려오고 오지 않겠다면 나와의 약속은 상관이 없다, 시간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신앙에 바로 이전 신앙입니다. 신앙은 후퇴하는 것이 아니다. 후퇴한 신앙을 데려오는 거다, 넓게 보면 한 신앙에 하란에 있는 원래 그들과 아브라함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가는 방향은 직진이지 후퇴는 없다, 그 다음 야곱과 같은 경우는 불가피하게 같지 요셉처럼 요셉이 애굽 처럼 그렇게 같이 좋아서 간 것은 아닙니다. 이거는 현실이 있는데 가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브두엘에게서 그 딸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은 알고 있으나 야곱이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에서의 보복이 두려워.

가야 되는데 가지 않고 갔다가 영 눌러앉을 기미가 있으니까 외삼촌과 사촌들을 전부 하나님께서 들쑤셔 가지 않으면 죽여 버릴 만큼 쫓는 바람에 야곱이 왔고 얍복강도 그렇게 넘어갑니다. 그러나 넓게 보면 한 몸입니다. 그곳에서 얻은 두 아내인데 둘 중에 라헬은 야곱의 눈에 좋아 보였더라, 레아는 그냥 싫어서 보지 않고 싶었더라, 좁은 야곱의 눈으로 보면 그런데 넓게 보면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합니다. 하나는 지금 필요하고 하나는 뒤에 필요합니다.
하나는 이래서 필요하고 하나는 저래서 필요합니다. 보기 좋은 라헬을 통해 곧 닥칠 흉년을 준비할 수 있는 당장의 생존을 넘어갈 수 있는 이런 구원의 길이었고 그러나 그 이후에 장구한 세월 속에 영원무궁 천국까지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삼직의 제사장 왕 이 중심의 두 개통은 레아에게 하나님이 맡겨 놨으니 오른팔은 오른팔이라 좋고 일반적으로는 오른팔로 살지 왼팔로 삽니까? 그런데 오른팔 고장 나면 안 쓰던 왼팔이 이렇게 소중한 줄 어찌 알았습니까?
맨날 오른팔로 글 쓰는 작가가 오른팔만 있으면 되고 왼팔 이건 먹여 살리니까 참 골치가 아프다, 오른팔이 영원 자존입니까 이게? 하나님께서 우연히 하나 만들었고 그냥 스페어타이처럼 그렇게 하나 붙여놓은 겁니까? 둘이라야 보기도 좋은데 균형도 맞는데 이거 두 개가 합작을 할 때 오른팔이 오른팔인 만큼 왼팔이 한 번을 움직여도 이거는 완벽하게 온전하게 원만하게 하나님을 닮은 우리가 되어 집니다.

구약을 보면 성부 하나님만 보이고 성자 성령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없진 않은데 신약으로 들어서니까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 별로 필요 없는 것 같고 성령도 필요 없는 것 같고 성자만이 전부고 다 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부터는 성령만 있고 성부 성자는 그림의 떡 같고 뭐 배경에 그냥 종이호랑이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완전히 삼위일체가 한 분인데 성부가 계실 때 성자가 떨어져 있었습니까? 하나였지. 성자가 오실 때 성부는 한 발 뒤에서 구경하셨습니까? 동행하셨는데 성령이 역사할 때 성자의 대속은 놀고 있었습니까?

“레아는 총이 없더라” 겉보기가 어리숙하고 못나 보이는데 정말 알짜배기는 그 속에 감춰 두는 겁니다. 연세 많은 분들 돈 없을 때 만 원짜리 10만 원짜리 하나 얻어 놓으면 그 장판 밑에 들어가고 뻔히 장롱 제일 밑에 서랍 그 밑에 넣고 뭐 전국 어디 가나 그냥 나이 많은 사람 돈 감추는 데는 뻔합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금반지, 현금 좋은 걸 반짝거리는 보배 상자에 두지는 않습니다. 귀할수록 그냥 없는 듯이 이렇게 감춰버리지. 눈이 귀해도 눈은 밖에 내놓지만 눈 없이는 살 수 있습니다. 심장은 오 분 멈추면 초상 쳐야 됩니다. 너무 소중한 것이라서 벽 안에 철근 안에 숨겨두고 이건 평생 안 보는 겁니다. 남이 봐도 이걸 봐야 될 쯤에는 큰일 나는 겁니다. 뇌라는 것은 아예 철바가지 안에 넣어 놓고 접근도 못 하도록 해놨습니다. 이게 바보고 추하고 창피해서 남들한테 감춘 것이 아니라 너무 너무 너무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깊은 속에다 대고 감추고 없는 듯이 삽니다.

거지로 살다가 돈 좀 벌어 놓으면 돈 벌었다는 표시를 주변에 대고 팍팍 내는데 그 거지출신이라는 뜻입니다. 막 예배당까지 와가지고 뭐 세상 돈 있다고 거드름 해가지고 그냥 교인들을 남자는 머슴이고 여자는 그냥 시녀 부리듯이 자세가 그런 거 안 봐도 그 사람 그 이전에 거지로 살아 그렇습니다. 체질적으로 돈 많이 살아본 분들은 돈 표시나면 뒤에 큰일 난다고 체질이 돼가지고 그냥 더 아끼고 자연스럽습니다.

공부도 그렇습니다.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강단에서 뭐 원어를 빼고 뭐 영어를 쓰고 그러지 뱅뱅 돌고 보면 한글로만 된 성경만 가지고도 죽는 날까지 부족한데, 라헬에게 예쁜 걸 줬을 때는 우선 예뻐야 되는 것도 있고 또 예뻐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안에도 있는데 하나님이 원만한 하나님, 온전한 하나님,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 하나님이라 레아를 줄 때는 레아가 필요한 겁니다. 우선 라헬이 예쁘니까 우선 라헬 속에 우선 좋은 것도 주시고 우선은 별 거 없는 것 같은데 이 속에 어떤 보배가 있을까, 연구를 할 일인데 아, 덮어 놓고 눈에 마음 들지 않는다고 순간적으로 그냥 찢어버리고 밀어버리고 그렇게 고통을 줬고 그 고통이 사무엘을 귀하게 가지기 위해서 한나의 고통은 일반어머니의 고통이 아닌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한나가  신앙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그것까지 감안해서 있는 힘 다하도록 옆으로 눈이 돌아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한쪽으로 몰아놓고 그 속에서 사무엘을 뽑아내듯이 형 일곱이 다 나서도 막내는 어디 갔는지 알지도 못하도록 이렇게까지 되어 진 데서 다윗을 뽑아내듯이 된 줄 안 모세가 40에 나섰으나 아무도 모르는 광야에 40년을 더 밀어 넣고 뽑아 쓰듯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다윗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고 모세도 갑자기 나타났고 사무엘도 갑자기 나타났고 구원의 계통 유다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 같지만 우리가 몰라서 갑자기 나타났지 보이는 화려한 꽃은 가지가 있고 그 밑에 둥치가 있고 그 땅 밑에는 뿌리가 말도 못하는 세월 속에 모든 준비가 있었습니다.

그 야곱의 눈에 레아가 그냥 별 거 없으면 하나님께서 훗날을 두고 준비를 하시는구나, 그 속에 더 들여다봐야 되는데 우선 좋은 거는 좋고 우선 안 좋은 거는 안 좋고 이게 오늘만 보는 안 믿는 사람의 매일 매일의 생활입니다. 어려울수록 힘들수록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할 만한 그런 절망처럼 보이는 현실이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굉장한 걸 뒤에 준비하신다, 그리고 잘 준비하면 넉넉하게 충분히 준비하여 어떤 은혜도 감당할 수가 있게 되어 지니 만사를 깨닫고 알고 보면 믿는 사람에게는 실망 없고 좌절 없고 변동 없고 그냥 인도함을 따라 한 걸음걸음 걸어갈 뿐입니다. 충실하게 흔들리지 않고 걸어갈 때 이걸 하나님이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장소에 마음껏 쓰시고 불편이 없는데 이런 준비 과정에 흔들림이 있으면 이거 뒤에 좀 문제가 커지는 그런 문제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오늘이 선봉이 오늘의 만사를 걸고 믿는 우리는 오늘이 아니라 그 다음을 보기 때문에 만사 조심조심 걸어가는 오늘 하루 되도록 하십시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좋으면 좋아서 좋고 우선 좋은 것 뒤에 또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우선 좋지 않은 것은 더욱 귀한 것이고 이 두 발로 걸어가면 늘 찬송하며 걸어갈 수 있을 겁니다.



1차-k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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