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주후22.12.11 창29:20 라헬에 매인 야곱의 허송세월, 레아를 통한 하나님께 순종, 복된 길 선택할 것
(자료 배치)
1. 설교 타이핑
2. 설교 교안
----------------------------------------------------------
(설교 타이핑)
221211 주후
제목 : 라헬에 매인 야곱의 허송세월, 레아를 통한 하나님께 순종, 복된 길 선택
찬송 : 110장(아침 해가 돋을 때), 185장(하늘 가는 밝은 길이) / 6장(전능왕 오셔서)
본문 : 창세기 29장 20절 -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
다 같이 묵도 드림으로 예배 시작하겠습니다.
(기도)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주님께서 우리 위하여 모든 면의 고난과 어려움을 기쁨으로 감당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이 은혜를 생각하며 또한 앞선 종들의 부족한 면을 보이시고, 우리 자신은 얼마나 약할지 우리 자신을 생각하며 앞선 종들도 부족함이 보이는데, 우리 자신은 얼마나 더 조심하며 더 두려워하며 더 주님 앞으로 다가가지 아니하면, 우리 자신은 넘어질 수밖에 없는 극히 미약한 저희들인 것을, 주님께서 우리 각사람 마음 마음에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불충을 늘 돌아보며,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지지 아니하도록 항상 주의하고 주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며, 주님의 뜻을 이행코자 하는 이 염려와 이 권능이 항상 같이 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이 방심하지 아니하도록 주님께서 우리의 각사람 마음 마음을 친히 주장하사,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이른 자의 수가 극히 작은 두 사람 뿐이었으므로, 남은 사람은 전부 다 광야에서 멸망한 것을 늘 기억하고 우리 자신 주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면, 넘어지는 것은 필연인 것을 항상 우리 마음속에 생각하고 주님과 주의 말씀을 따라 걸어가는, 이 시간 예배가 되어 질 수 있도록 주님께서 친히 인도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사람이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면 시간도 잘 가고 오히려 잘 가는 시간이 아까울 지경이고, 어려움도 없고 또 성과도 좋기 때문에 일 시킨 사람이 봐도 좋아 보이고, 또 일하는 자기도 좋고 만사 모든 것이 좋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자기하기 싫으면 시키는 사람도 애 먹고 자기도 괜히 고생한다 싶으니 힘도 나지 아니하고, 마음이 없으니까 될 일도 안 되고 엉망진창이 되어 집니다. 기계는 싫건 좋건 돌리면 돌아갑니다. 천국만 만들고 우리를 천사처럼 만들었더라면 아예 죄 지을 기회를 주지 않으셨더라면, 좋기는 좋은데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처럼, 그냥 새장 속에 새처럼 그럴 뻔 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 자라 아시기 때문에 죄를 겪어보지 않은 천국과, 죄를 겪어보고 하나님 없는 세계를 겪고 돌아온 이 두 감사가 다른 줄 알기 때문에 완전자이기 때문에 죄악의 세상을 만들었고, 한 번 죄를 지으면 소망이 없는데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해결함으로 더 좋은 우리의 구원이 되어졌습니다. 야곱의 모든 손에 실수 허송세월은 야곱이 130에 철들며 불과 몇 년 사이에 모든 것을 다 복구했고 감사한 야곱이 되어졌고, 오늘 우리는 몇 천 년을 지나 야곱을 재미있게 읽어보면서 이렇게까지 내가 해서야 되겠는가. 야곱을 보고도 또 그 일을 하면 짐짓 죄를 짓는 사람이기 때문에 알고 짓는 죄는 두 번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야곱의 실수를 보고 실수하지 않는 우리가 될 수가 있고, 야곱의 길을 이렇게까지 보고도 또 그 길을 걸어가면 그 순간순간 해당된 기회는, 둘째사망으로 정리해 버리고 다시는 사하는 법이 없게 되어 짐으로, 야곱이 불리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유리한 것도 아닙니다. 기회는 똑같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야곱을 읽어보고 뒤를 따라가면 되어 집니다. 야곱의 잘못된 길은 안가면 성공입니다. 야곱의 성공한 길은 뒤만 따라가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음에 내 이름을 적을 수가 있습니다.
오전에 라헬은 곱고 아리따운 사람이었더라. 남자가 한 번 보고 푹 빠져버렸습니다. 내게 그런 면이 있다면 또 내가 그런 것이 눈에 띈다면 조심해야 됩니다. 독버섯은 예쁘답니다. 꽃뱀은 예쁘답니다. 이게 미운 것이 되면 누가 쳐다보겠습니까. 고우니까 쳐다보지. 뭐든지 미끼가 다 그런 겁니다. 선악과를 볼 때마다 저거 먹으면 죽는다 하나님과 끊어진다. 이래 봤는데 귀신이 들어와서 눈을 돌려놓으니까 선악과 안 먹고는 못 배기도록 되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달려가는 길은 망해야지 막아주는 길이 없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처럼 생사를 초월하고 세상을 초월하고, 영계까지 직접 보고 온 사람의 눈에 좋은 것은 좋은 게 좋습니다. 눈이 바뀌어버렸으니까. 그만큼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성향이 바뀌지 않은 우리 정도의 눈으로는, 좋은 게 보이면 위험하겠다. 조심하는 게 지혜롭고 하나님이 주시는 현실은 현실이고 인도는 인도인데, 내 눈에 좋게 보이지 않을 때는 속에는 좋은 게 있는가 보다. 그리고 그만 따라가 버리면 저절로 복음 받고 그렇게 한두 번 두세 번 복 받고 나면 내가 야곱이 됩니다. 내가 야곱보다 나은 내가 되어 집니다. 그런 복된 상식을 가지십시다. 라헬은 곱고 아리따웠더라. 레아는 야곱이 원치 않고 밀어냈습니다. 레아 속에 유다가 있는데 그 유다로 예수님이 오시는데, 다윗 왕과 이스라엘에 왕들이 전부 다 나오는데 금 방석을 앉혀주는데 밀쳐버렸습니다. 그리고 가시방석에 앉겠다니까 어떡하지요? 당해야 싸다 말이 나오는 겁니다.
요즘은 다 자기 마음대로 뭐 다하니까 놔두고 예전에 부모가 복된 길 노력해서 마련해 주는데, 기어코 자기 인생 자기가 책임진다고 뽁뽁 나간 사람들 많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가면 친정에 와가지고 왜 그때 나를 안 말렸느냐고 펄펄 뛰고 부모한테 대듭니다. 그거 이길 수도 없고 속으로 나도 그랬다 이것아. 날 닮아 놓으니까 똑같은 짓 한다 그럽니다. 여성들에게만 해당된 말 아닙니다. 여자들은 그 길이면 남자들은 주로 공부인데, 작은 초등학교 공부라도 쬐끔은 시키는데 밀려가고 마지못해 가고 친구 따라가니까 가고, 노는 재미로 가고 부모는 공부를 모르니까 이제 학교 보냈으니까 된 줄 알고, 나중에 공부 한 덕을 못 보게 되면 그 공부 안한 것들이 꼭 부모한테 그때 좀 더 시키지 그럽니다. 또 그때 학교 다닐 때 매를 들고라도 좀 막 그냥 혼을 내고 가르쳤으면 얼마나 좋지 않느냐고 똑 그 소리합니다. 집 나갈까봐 못 그랬지 요즘 듣기 좋은 말로 극단적 선택할까 싶어서 못 밀어붙였지. 부모의 마음이 어디 그냥 길만 있으면 안 밀어붙였겠습니까. 이거 뭐 소 돼지도 아니니 잡아먹을 수도 없고 노예가 아니니 어디 짜 매 놓을 수도 없고, 하다하다 안 돼서 마지막에 부모가 다 손 놔버린 겁니다. 재벌집이 그렇고 왕가가 그랬고 집집마다 다 그랬고 다리 밑에 거지들도 다 그럽니다. 부모들은 당해보고 알았기 때문에 자녀만큼은 좋은 길로 밀려고 합니다. 근데 자기들이 싫다는데 어떡합니까. 애 터지는 거는 부모 마음이고 망할 길을 좋다고 막 춤추면서 그냥 달려가는 것은 청년들이고 젊은 사람이고, 어린 사람이고 어릴수록 그렇습니다.
나라가 망하려면 어릴수록 지도자가 된다고 막 푹푹 밀어줍니다. 얘들이 말하는 것은 앞서가는 진보라고. 앞서가는 진보인지 낭떠러지에 그냥 직행으로 머리 박고 죽는 망할 길인지. 가정들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고 오늘 오후예배 한 번 더 마음을 모으고, 오늘 우리 현실은 우리 각자에게 주셨는데 오늘 이 시간에 어느 길이 인간적으로는 좋은가. 시내 놀러 가는 것이 좋겠지 집에 텔레비보고 잠자는 게 좋겠지. 하나님은 내게 뭘 원할까? 주님의 날 이름 붙여 놨으니 그리고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이 못되니, 오전으로 부족하여 한 번 더 공부하는 겁니다. 그걸 복습이라 그럽니다. 복습이라는 걸 숙달이라 그럽니다. 공차는 거 하나도 숙달, 숙달 숙달을 해가지고 그다음 스타가 되지 나면서부터 아무거나 차고 다 됩니까? 그리 되면 그건 괴물입니다. 뻔히 알면서 하나님 앞에 이 서툰 우리가 말씀을 배우는 것은, 1년에 부활절 한 번 성탄절 한 번 두세 번 나오면 됐지 뭐 매 주일 갖다가 머리가 그리 나쁘냐. 가봐야 다 뻔한 소리인데.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쉽게 보이면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알았더라. 시시하게 생각했더라. 그래서 아무나 줘버렸더라 그걸 경홀히 여겼더라. 그랬습니다.
야곱 같으면 목숨 걸고 이거는 쥐고 보지 이걸 내놔? 그런데 에서는 너나 하거라 밥 한 그릇이면 됐지. 오늘의 오후예배가 그렇고 오늘의 주일이 그렇고 오늘의 신앙으로 걸어가는 모든 걸음이 그렇습니다. 여기에 오후예배 보는 우리는 저부터 신앙이 그렇게 훌륭하지를 못합니다. 마음에 뭔가 이건 좋다 싶으면 위험하지 않겠는가. 귀신이 미끼를 던지지 않았을까 조심조심하면 지혜롭습니다. 우리 정도 수준에 이거는 좋다고 턱 잡으면 거의 실패합니다. 오전 예배의 전부였습니다. 레아는 야곱 눈에 별로였으나 하나님은 그 속의 생명과 영생을 다 담아주셨는데, 라헬은 보기가 좋았으나 야곱이 평생이 영 뒤 꼬이고 영 엉망이 되는 것이 라헬 속에 다 들었는데, 저 진로 저 직장 이런 길 저런 길 모두가 좋아서 집중하는 그 길에는 허송도 많고 분쟁도 많고, 마지막에는 후회했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다시는 기회를 주지 않았더라. 대개 그리 됩니다. 그 라헬이 낳은 아이가 요셉과 베냐민 둘입니다. 그 요셉이 야곱이 총력을 기울여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요셉으로 내려가는 듯했습니다. 요셉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근데 우선은 훌륭한 요셉인데 먼 역사로 요셉의 훗날을 보니까 그 밑에서 에브라임 므낫세가 나오는데 그 므낫세 에브라임은 레아의 후손 유다의 구원 유다의 왕 유다의 예수님의 구원에 계통에, 북쪽으로 맞서서 늘 싸움 박지기만 하는 모든 족속들의 두목이 전부 다 라헬의 요셉족속들입니다. 참 좋아도 훗날이 걱정입니다.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인 레아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장자 르우벤이 있었지요. 둘째 시므온 있었지요. 르우벤 시므온 둘이 걸어간 그 걸음에 세 번째 끼워준 것이 하나님과 백성,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죄와 고장을 전부 해결하는 레위지파 대제사장, 하나님을 섬기는 구약의 중심이 세 번째 다 들어왔습니다. 장남 르우벤으로 앞을 막고 시므온이 2겹으로 또 막고 그 속에 레위지파를 주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모든 문제 다 해결하고, 해결이 되었으니 네 번째 유다를 세워 하나님의 백성을 복된 길로 인도하는 다윗과 그 대대의 왕통, 그 이어진 예수님 그리고 오늘 우리까지 내려오는 것이 구원의 계통입니다. 이게 다 레아 밑으로 주신 겁니다. 내 눈에 이러고, 이러고 이러면 뭐 세상도 좋고 신앙도 좋고 좋지 않겠느냐. 세상의 절반 발 담근 우리 수준에 속으로는 세상이 더 좋은 우리 수준에, 우리 눈에 좋은 거는 보통 좋지 않은 겁니다. 일반적인 학생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공부에 별로 좋은 거 아닙니다. 정말 공부에 매진하는 사람 눈에야 뭐 좋은 도서관 좋은 책 어려운 문제지를 원하겠지만, 그 다음 자녀들의 훗날 요셉은 출애굽이 아니라 애굽에 들어갈 때는 지도자였는데, 들어간 애굽에서 이제 재출발하는 진짜배기 하나님의 백성의 출발은 레위지파의 모세가 지도자였고, 역사 제1의 지도자입니다. 모세를 통해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기록해 주시며, 하나님 나라에 걸어갈 모든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모세는 기록하고 갔지만은 예수님 올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세가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그건 다 외우고 살았습니다. 그게 모세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기록했고 모세의 형이며 아론은 구약의 제사장의 전부입니다. 이런 복을 가득 채워 레아에게 쥐어주며 그 레아를 하나님께서 야곱 앞에 보여주니까, 이건 싫고 이거 말고 남이나 주랍니다. 에서 손에 쥐어준 장자의 명분은 뭐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야곱이 달라니까 밥 한 그릇에 그냥 넘겨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세월 속에 지방 따라 형편 따라 변치 않습니다. 불변의 하나님 정확한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이 순간순간 가장 좋은 현실을 조성하시고 운영하시며, 우리에게 조성된 현실 그 움직이는 운영을 눈으로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아는 말씀으로 가지고 자기 현실을 이렇게 겹쳐 봐보면 이러는구나. 이러라는 구나. 저러라는 구나. 이거 안 된다는 말이구나. 이렇게 다 알게 되어 있습니다. 이거 모른다 할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은 중생된 사람은 신앙의 양심에다 대고 중생된 영을 통해, 이게 맞다 이건 아니다 소소히 다 가르쳐줍니다. 발람선지의 양심에다 대고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저주를 하다니 아무리 은금을 가득 채워도 아니 된다. 한 번은 가르쳐줬습니다. 안 봐도 알지만은 발람의 양심에 하나님이 안 된다 그랬습니다. 양심으로는 분명히 하나님이 안 된다고 그러는데, 발람 속에 욕심 야욕 발람 속에 명예심 발람 속에 일확천금을 노리는 요행심이, 신앙양심을 통해 하나님이 안 된다는데도 계속 뒤흔들다가 결국은 발람을 끌고, 발람의 욕심이 발람의 목을 끌고 가니까 이제 발람의 심신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 역사를 저주한다고 꾸역꾸역 걸어갔습니다.
그때는 발람이 그런 길 걸어갔고 오늘은 우리가 우리 인생에 하나밖에 없는 길을 우리가 그런 식으로 걸어가는지 돌아봐야 됩니다. 그렇게 어렵게 문제를 내지는 않으십니다. 1학년이면 1학년답게 고등학생이면 고등학생답게, 저처럼 고등학생을 좀 넘을 정도의 신앙은 더 어렵게 냅니다. 나로서는 아는 말씀 나로서는 양심을 아무리 써도 이건지 저건지 잘 모르겠다할 때는, 그거 틀렸다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책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어리고 어떻다. 어떻다 해도 조금 생각해보면 어느 건지 뻔뻔히 알 수가 있는데, 발람처럼 욕심으로 양심을 꾹 눌러놓고 그러고 나서 가는 게 옳은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까지 억지를 부리면 네 두목 귀신 따라가라 이래 버려버립니다. 알고 보면 억지지. 오늘까지 역사에 발람이 가는 게 맞냐 안 가는 게 맞냐 헷갈려서 실수를 했다. 그럴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 녀석 그냥 완전히 돈에 미쳐서 죽을 짓 했지 이러지. 그런데 발람은 사실은 잘 몰랐습니다. 이럽니다. 자기변호입니다. 억지고. 오후에 야곱의 라헬 사랑에 무슨 문제가 있었느냐. 14년 봉사한 거 헛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뭐 그냥 그렇게 재미가 있었지 않냐 육체의 쾌락이었습니다. 죄악의 낙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안 되는 것. 뭐 재미로 말하면 뭐 책에 공부하는 것보다는 책 가지고 불장난하는 게 낫지. 교과서 찢어가지고 딱지 만들어서 딱지 따먹기 하는 남자 애들 보셨습니까? 그놈의 수학책 찢어가지고 딱지를 치면 더 재미있겠지. 그래 되겠습니까? 이게 야곱이 제 눈에 좋아 보이는 라헬을 향하여 걸어간 자기 허송이었습니다. 그 다음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는데 그러면 라헬은 어찌 되었는가. 라헬은 야곱을 만난 다음 죽는 날까지 고통이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위하여 살았는데 그 라헬만 좋다면야 야곱은 뭐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이런데, 야곱은 라헬이 좋은데 야곱의 좋은 것은 죄악의 낙이었고 그리고 내가 고생을 해도 라헬만 좋으면 좋겠는데, 라헬은 야곱을 만난 날부터 그날부터 고생이 시작되어 버렸습니다. 왜 고생입니까 장사를 해야 되고 뭔 돈을 벌어 와야 되고 목축을 하느라고 고생입니까.
사랑싸움이 벌어져 버렸습니다. 사랑을 받았는데 사랑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사랑을 했으면 이제 고대사회는 아들을 낳아야 되는데, 하나님이 몇 절이지요? 총을 주지. 31절 옆에 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고” 야곱이 볼 때 레아에게는 좋은 게 보이지 않습니다. 야곱 눈에 좋은 게 보이질 않습니다. 세상사는 데는 경쟁력이 빠지고 인물이 빠지고 모든 것이 모자랍니다. 왜? 구원의 계통에 생명의 역사를 맡기려고 세상은 그렇게 많이 주지를 않은 겁니다. 세상이 많아지면 세상 속에 신앙이 썩어버립니다.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고” 레아에게는 아이를 주셨더라. 야곱은 오로지 라헬인데 라헬은 아무리 가도 아이가 없습니다. 무자하였더라. 아들 없어도 놀고먹으면 되지 뭔 재미가 있냐? 그 아들이 그냥 육체의 아들이 아니라 생명의 열매입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가 씨앗이 되어 또 열매를 맺고 또 열매를 맺고, 이게 생명의 역사인데 이어지는 생명의 영생의 역사인데 아리땁고 어여쁘더라. 훗날을 하나님이 막아버렸습니다. 야곱의 죄악의 낙에 별로 눈에 보이는 게 없더라. 아이를 주셨습니다. 첫째 르우벤도 주고 둘째 시므온도 주고 레위도 주고 유다도 주고 이만하면 천하를 다 주는 건데, 레아에게는 계속 주고 나중에 열 명의 아들들이 나오는데도 라헬은 아이가 없게 이렇게까지 막아버렸습니다. 구약은 육체의 이스라엘이라 보이는 사람 보이는 아들이 아들이고, 오늘 신약은 나의 신앙을 이어가는 신앙의 훗날 신앙의 열매 신앙의 결실, 얼마나 영생이 내 신앙 뒤에 따라오느냐 이런 걸 말합니다.
손 목사님 신앙을 호적의 자녀들이 가지지 않으면 호적으로는 자녀 없고, 하나님 앞에서는 자녀 이름에서 빠져버립니다. 우리교회는 손 씨가 없었는데. 우리의 신앙이 손 목사님 신앙을 이어가면 천국에서는 우리의 신앙이 손 목사님의 신앙이 됩니다. 육체의 자녀가 신앙까지 가지면 안팎 복이 터지는 거고, 구약은 육체의 이스라엘이고 신약은 신령한 이스라엘입니다. 다 상식이고 이건 당연한 겁니다. 아직도 세상이 좋은 야곱 야곱의 눈에 세상 살아가는데 예쁜 것 근데 라엘 속에는 31절 “무자 하였더라” 아들을 주지 않습니다. 열 명의 아들이 나오는데 라헬 쪽에는 한 명도 주지 않으니 죽을 지경입니다. 죽을 지경. 32절 레아는 야곱에게 밀렸습니다. 쳐다도 안 봅니다. 귀찮다 그럽니다. 그런데도 큰 아들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남편 야곱에게 버림받은 눈치나 보는 그 여성의 괴로움을 하나님이 권고하셨더라. 믿는 사람은 세상에 눈치 보이고 직장 가면 눈치 보이고 주일을 지키려면 가시방석이 되고, 평일날 밤 예배까지 나오려면 돈 손해 보고 많은 눈치 보이게 돼 있습니다. 죄악세상 안에 신앙으로 살려면 세상이 신앙을 이리 쥐어 박고 저리 쥐어 박아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믿는 사람이 세상을 사는데 불편이 없었더라. 그러면 그 속으로 세상 편이라 그렇습니다. 교회 오면 신앙생활하고 세상 가면 세상하고 한 덩어리 되는데 뭐 쥐 박겠습니까. 착하다 그러지. 청와대에서도 좋아하고 여당도 좋아하고 야당도 좋아하고 절에 중들도 좋아서 식사하자고 목사님 청하는데 가서 앉아서 밥도 먹고, 또 자기 교회에 와서 교인들에게는 오로지 예수밖에 없다 그래야 또 이제 월급이 나오겠지. 이런 걸 팔도기생이라 그럽니다. 천하의 어떤 남자든지 다 좋다 돈은 벌겠지 재미도 보겠지. 그런데 성경은 그런 걸 갖다가 창기신앙이다. 지조는 없다 그럽니다. 난 주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죄악세상 속에서 난 주님밖에 없습니다. 끝까지 그 소리 하면 집안에서도 치이고 동네에서도 이상하고 친구들 사이에도 돌리고 다 그러는 겁니다. 구약이니까 레아는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고통이었는데, 하나님은 레아에게 르우벤을 챙겨줬습니다. 33절 시므온도 하나 더 더해주셨습니다. 34절 그런 다음에 세 번째는 레아를 주셨습니다. 하나 둘 세 번째는 보배 중에 보배를 주셨습니다. 네 번째는 유다를 주셨는데 이건 전부입니다. 더 이상 볼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열두 아들 필요 없이 유다 하나만 가지고도 되지 않느냐 그 정도 유다입니다. 그런데 그 유다가, 유다가 되려면 레위지파의 제사가 있어야 됩니다. 둘을 다 주셨습니다. 이런 복을 레아에 넣어 야곱 앞에 주면 제 마음은 라헬이지만은 제 인간적인 생각을 꺾겠습니다. 내 인간적인 그런 소원을 미루겠습니다. 그만 그럴 일이지 빡빡 씌워대며 아니로소이다. 아니로소이다. 끝장을 봐도 아니로소이다. 계속 밀어붙이면 아들만은 자유성을 길러야 되기 때문에 누가복음 15장 둘째 아들이 아버지 품 아니라도 세상은 넓습니다. 돈만 있으면 세상에 시대에 유력한 인재들을 기다리는 데가 있습니다. 뭐 이런 사람이 있고 저런 거 다 있습니다. 염려 마시라고. 내게 돌아올 내 몫만 주시라고 아버지가 전부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전부인 줄 아는데 아버지 밖에 세상 넓습니다. 먼 나라도 있습니다. 구경거리 좋습니다. 성경에는 일일이 적지 않아도 이런 많은 대화 속에 아버지가 챙겨주지 그냥 덜렁 챙겨주면, 앓던 이 빠지라고 사생아는 그러겠지마는 친아들은 누가 그럽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그러겠습니까? 많은 대화 속에 챙겨서 갔습니다. 그 먼 나라 가니까 뭐 허랑 방탕이라고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보니까 천국 준비에 쓸 기회를 두고 갈 세상에 다 헛일을 했는데, 둘째 아들은 좋아서 그냥 뭐 이런 좋은 세상을 갖다가 아버지 밑에 있었으면 어떻게 알았으랴. 진작 나올 걸. 큰 형님 저 인간은 오늘도 아버지 밑에 그 짓 하고 앉았겠지 먼 주일이라고 토요일 어디를 가도 그냥 시간 보고 말이지. 공부하다가도 그냥 주일 계산하고 책 엎어버리고.
예를 들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 라헬을 보고 좋아서 그냥 어쩔 줄 모르는 이 야곱에게, 하나님은 라헬에게 죽을 때까지 고통을 주셨습니다. 라헬이 죽을 지경이니까 야곱이 죽을 지경입니다. 레아가 낳아놓은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뭐 열 명도 눈에 보이지 않고, 라헬이 직접 낳는 아이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 보배는 다 있는데. 하나님은 정말 보배가 니느웨에 있다는데 요나 선지자는 갈 데가 없어 니느웨를 갑니까? 갈 데가 없어. 갈 데가 없어 니느웨를 갑니까. 빠져 도망까지 가버렸습니다. 발람 선지에게는 가도 거기는 안 된다고 그러는데 목숨 걸고 밀어붙이고 결국 가버렸습니다. 중생된 우리에게만 오는 시험입니다. 중생 안 된 사람에게는 이런 시험 없습니다. 아예 상관없습니다. 잘 가든 말든 버려놨습니다. 잘 가든 말든 무조건 다 지옥입니다. 믿는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남아 있는 너 마음속에 세상에 대한 그리움, 아직까지 네 마음속에 들어있는 육체의 쾌락, 아직까지 네 마음속에 이랬으면 저랬으면 작은 소원 아름다운 소원 야욕 뭐 별의 별 거 다 있는데, 이런 기회에 이거 하나 꺾자 저런 게 저거 하나 접자 말씀이 인도하며 현실을 통해 기회를 주시는데 어떻게 할 건가. 야곱의 모든 생사고락은 라헬입니다. 라헬이 기쁘면 기쁘고 라헬이 슬프면 나도 슬프고 그리 되면 2계명의 범죄가 됩니다. 1계명은 하나님이냐 아니냐가 1계명입니다. 2계명은 좋고 나쁜 것이 어디에 걸려 있느냐. 여기에 복이 있고 여기에 저주가 있고 이리 되면 하나님 아닌 것에 생사화복을 걸면 그걸 우상이라 그럽니다.
야곱은 말이 하나님이지 실제 생활을 들여다보니까 야곱의 생사고락은 라헬입니다. 라헬 죽을 때 야곱은 따라 죽고 싶었는데 라헬이 낳아 놓은 요셉 때문에 살 수 있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살지 이거 아니면 난 죽는다.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 들어올 때 나도 죽는다고 끝까지 버틴 게 야곱입니다. 그런데 또 베냐민까지 하나 더 있으니까 이제 요셉 없는 대신에, 베냐민을 붙들고 130살까지 붙들고 이게 죽는 날에는 나도 죽는다. 하도 라헬에게 생사와 복을 다 거니까 라헬을 미리 데려가니까, 라헬이 남겨둔 요셉 붙들고 요셉 없애버리니까 베냐민 붙들고, 그러니 마지막에 이 베냐민을 뽑아 내지 않고는 야곱 속의 우상은 해결이 안 됩니다. 결국 가지고 있으니까 그것까지 뽑느라고 그렇게 많은 일들이 생겼는데 알고 보니까 야곱 속의 문제점입니다. 야곱 안에 있는 암 야곱 안에 있는 옛 사람 야곱 안에 깊이 숨어 있는 해결해야 될 이걸 정리하기 위해, 야곱이 생사화복을 다 걸고 앉아있는 라헬에게 하나님이 가로막고 고통을 주셨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라헬에게 자꾸 문제가 생기면, 내가 하나님이 아니라 이걸 너무 지나치게 우상으로 여겼는가. 나를 돌아보고 그걸 떠나야 할 라헬에게도 아이를 주겠는데. 귀하게 받은 아이를 부부가 이 아이를 쳐다보면 이게 전부 다 온 가정이 이게 전부다, 이게 슬프면 우리도 슬프고 이게 없으면 우리도 없다. 하나님은 말로 하나님이고 우리 가정의 생사복은 이 아이다 하고 들이 부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아이를 죽는다. 산다. 뒤 흔들어버려야 되겠지. 데려가지는 못하지만 아이가 가다가 엎어지고 앞이 막혀야, 내가 이 아이에게 소망을 하나님보다 더 기울이는 바람에 이 아이를 이렇게 고통을 주는구나. 아이에 대한 고통은 내가 그 아이에 대한 애착 집착이 너무 심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아이 이전에 라헬부터 집중하니까 라헬부터 고통을 주십니다.
한국의 교회가 한국이라는 이 나라 민족이 소중해서, 민족을 위한 교회 되고 민족을 위한 기독교 되고 이 나라를 위한 기독교가 되면, 결국 하나님이 이 나라를 내려 앉혀 버립니다. 이건 세상 사람에게 맡겨놓고 믿는 사람은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우리가 신세 지고 사는 이 나라에 도움 되는 길입니다. 해방 전까지는 38선 이북의 교회가 오늘 남한처럼 소복했습니다. 그리고 남한에는 교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먼저 믿고 잘 믿은 북쪽의 이북교회가 신앙생활 잘하니까 인물이 난다. 돈이 벌린다. 좋아진다. 좋아진다고 그러니까 북쪽의 교회들이 교회를 가서 선교사 줄을 잡아야, 내가 잘 되고 나라가 잘 된다고 이리 되니까 하나님께서 38 이북의 교회를 단 한 개도 남겨주지 않고 다 쓸어버렸습니다. 교회가 하나님만 바라보니 하나님이 이 교회를 아껴줘야 되는데, 교회를 아끼기 위해서 나라를 보살펴주게 돼 있는데, 하나님을 떼 내버리고 하나님의 생사화복도 떼 내버리고, 교회만 가면 잘 된다더라 선교사 줄잡으면 잘 된다더라. 온 북쪽의 교회가 국가와 나라와 가정과 자기를 위해서 이 땅위에를 위해서 교회를 활용하고 교회를 움직이니까, 50년 반세기를 지켜보다가 북쪽의 교회를 다 없애면서 그냥 없앤 게 아니라, 세계 역사에 가장 잔인한 정권을 주셔서 씨를 말라버렸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지 두고 갈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면 아니 된다. 하나님이 원하면 두고 갈 교회를 투자하는 것이지. 그 바람에 남한의 교회는 세계적인 교회가 되었고 북한은 씨를 말라버렸는데 남한의 교회가 하나님보다, 하나님보다 이 나라의 발전이 먼저 아니냐. 이리 되면 큰일 납니다.
항상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됩니다. 교회 안도 세상도 하도 평양 닮자고 그래 싸니 세상은 그럴 수 없다. 그거 안 믿는 사람들이야 당연히 그러는 거고 또 교회 중에서도 신앙과 역사를 잘 모르면, 교회 씨를 말리면 북쪽을 따라갈 수 있느냐 목숨 걸고 활동하는 거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교회 교회위의 지도자 교회위에 신앙의 눈을 가진 최고의 지도자들은 밑에는 모르고 중간은 몰라도, 한국의 기독교가 두고 갈 땅에 국가를 위해 민족을 위해 관심이 잘못되면, 하나님께서 남한까지 손대버린다 여기까지 생각하면서 교회는 교회답게, 교회는 교회답게 야곱은 야곱답게 나갔더라면, 아브라함 이삭을 내려오며 하나님이 영생을 준비하는 이 땅위의 책임자가 야곱이니, 여기에 충실하여 이 일에 레아 주면 레아 감사하고 이 일에 라헬을 하나 더 주면 또 더 감사하고, 이왕이면 예쁘니까 좋고 이래야 되는데 마이 땅 위에 두고 갈 라헬, 라헬 얼굴의 미모가 중국 사람들은 10일 간다고 그럽니다. 권력은 10년 가고 꽃의 아름다움은 10일 간다. 그걸 뭐 한자로 뭐라더라? 화무시용? 화무십일홍. 꽃이 10일 붉은 거 있더냐? 꽃이 10일 이상 예쁜 거 있더냐? 권세가 10년 가는 거 있더냐? 그리고 다시 봐보면 한 열흘 예쁘지 뭐 11일째부터는 첫날보다 못 할 걸요.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하루 먹고 3일 먹고 일주일 먹고.
저희 때 저 시골에서 시내에 공부 시키면 쌀 이렇게 한 말인가 주면, 이거 가지고 자취하는데 라면 한 개에 애타는 애들이 쌀 준 걸 팔아가지고 라면을 먹습니다. 질긴 애들이 삼일 먹습니다. 삼일 먹으면 이제 웬만하면 지겨워서 안 먹습니다. 최고 질긴 것들이 일주일을 먹습니다. 라면만 일주일 21번을 먹고 나면 그다음부터 제정신 차립니다. 먹고 죽고 싶을 만큼 맛이 있어도 음식이든 여자든 뭐든, 뭐든, 뭐든. 물질에 속한 것은 처음이 제일 낮고 똑같은 거 반복, 반복 반복하면 그건 점점 줄어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란 신령한 것이란 모를 때는 얼마나 좋은지 모르다가, 알고 나면 더 좋고 알고 나면 더 좋고 이건 영원무궁토록 계속 좋아집니다. 자기 아내 자기 남편을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라 그리고 좋게 보려고 연구를 하면, 레아처럼 꼴 보기가 싫었는데 다시 보니 볼 만하고 또 보니 귀하고 다시 보니 더 예뻐지고, 세월이 지나가면 이렇게 고운 사람을 주셨으니 그냥 왜 이런 보배를 몰랐을까. 그러고 사는 것이 신앙의 결혼입니다. 이 정도 말할 때는 뭐 체험하고 겪어본 거 같지요? 남 얘기 같지 않지요? 놈이야 뭐 그런 걸 어떻게 데리고 사느냐 그건 남 얘기고 나한테 좋으면 좋은 거 아닙니까? 갈수록 좋은 걸 봐보셨습니까? 10년 10년 10년이 지나니까 더 곱게 보이는 것도 보셨습니까? 아브라함 사라가 그랬습니다.
아브라함 사라가 그랬습니다. 할아버지 그런 줄 뻔히 알면서 이 야곱은 그냥 하나님과 하나님의 복귀한 줄은 아는데 야곱의 마음속에, 이 청춘에 그냥 인물 따라 가는데 여기에다 대고 모든 걸 다 쏟아 놓으니 야곱을 정신 차리게 하려면 라헬을 손대지 않을 수 없어, 야곱 때문에 애꿎게 라헬만 죽어납니다. 형은 아들을 척척 낳지 종들도 낳지 10명이 나오는데 나오지 않으니, 그 라헬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느냐는 것은 여기 29장 30장을 봐도 알지만 이건 좀 약과고 사무엘상 1장을 보면,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브닌나와 사랑싸움이 벌어지고 브닌나는 아들을 낳고 아들이 없어 한나가 얼마나 고통 받은 고 심리를 자세하게 적고 있습니다. 이건 뭐 죽지 그냥 살지를 못하겠다는 이런 고통을 라헬에게 주셨는데, 그러다가 뒤에 요셉 나왔으니까 되지 않았냐. 몇 장 넘겨서 35장 18절입니다. 35장 18절 라헬 말고는 아들이 열이나 되고 라헬의 아들은 열한 번째 잡았는데, 겨우 하나인데 이 하나 가지고 되지 않아서 하나를 더 낳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35장 16절입니다.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쭉 길을 가고 있었는데, 라헬이 요셉 뒤에 또 하나를 더 가졌습니다. 16절 끝입니다. “라헬이 임산하여” 아이를 가져서 “심히 신고하더니” 아이 때문에 고생을 하더니 17절 “라헬이 난산할 즈음에” 난산이란 말은 아이를 낳을 때 당하는 고생입니다. 일반적인 고생이 아니라 죽을 고생이 닥쳐버렸습니다. 산파가 라헬에게 두려워 말라 아들이다. 아들이 나오고 있다. 나오든 말든 라헬이 죽어 가는데 이 지금 치열한 가정에 엉망인 가정에 라헬이 죽으면 요셉은 어떡할 거며 이아들은, 억센 형 열 사이에서 이아들의 앞날이 어찌 되나 라헬이 없으면. 마지막 베냐민을 놓을 때 낳을 때 죽게 되고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는 그 마지막 순간, 베냐민 아들 이름을 베노니 따라 하십시다. 베노니(베노니). 그 베노니의 ‘베’자의 2자가 1 2 3 4. 2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 난 밖에 보면 2번은 슬픔의 아들이다.
요셉은 뒤에 낳아도 귀하게 잡았지만은 아직까지 어머니가 지켜주는데, 하나 더 낳는데 이 아이 때문에 죽고 이 아이 때문에 죽을 고생하다가 죽어버리면서, 태어나는 이 아이 둘의 인생이 어찌 될 건가. 야곱의 위의 형 열은 세겜성 하나를 다 싹 쓸어버리는 무작한 인간들입니다. 이걸 잘 알기 때문에 또 라헬이 야곱의 총애를 받고 형하고 그냥 형을 영 긁어 놓은 바람에, 그 레아도 나쁜 사람은 아닌데 이 사랑 싸움에 독이 올라 있으니 그의 형 열이 있으니, 이 사람들이 한 성을 다 도륙 내는 난한 사람들이니. 요셉 막내만 해도 걱정인데 출산하면서 자기가 죽게 되니 슬픔의 아들이다. 라헬의 평생을 되돌아보니 야곱 만나기 전에는 좋은 집에 예쁜 딸이라 소망이 있었는데, 야곱을 만나고 야곱이 라헬에게 모든 걸 쏟아 붓는 순간부터 분쟁이 생기고 별별 싸움이 다 생기고 죽을 고생을 다했는데, 마지막 둘째 아들 때문에 죽게 됐고 그 아들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다. 라헬은 야곱 때문에 죽을 때까지 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최후는 막내 출산 때 죽어버립니다.
믿는 사람이 뭐 예를 잘못 들면 오해할 테니까 여기는 미술가는 여기는 별로 없지요. 미술가. 미술가는 없으니까 미술 욕 좀 해볼까요. 나는 그림이라면 주일도 없고 그림이라면 하나님도 없고 난 그림 그리기가 좋으면 뭐 북극 남극 아프리카 세계를 돌아다니고, 난 그림의 목숨을 다 바쳤다. 그 인간을 하나님이 사랑하면 그림 화가 예술 세계를 하나님께서 엉망을 만들어야 되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미술 때문에 미술계가 난리가 나게 돼 있습니다. 야곱이 공차는 축구선수면 이 인간이 주일날 월드컵 나가면 안 되니까 한국은 예선에서 다 떨어지게 만들어 버릴 겁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가는 팀은 맨날 그냥 교통사고가 나고 전부 지게 만들어 버릴 겁니다. 운전을 잘못했다. 차가 잘못했다 운영을 잘못했다 하기 전에, 하나님의 귀한 아들 하나님의 소원이 쏠려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복 때문에 나의 관심과 나의 진로를 잘못 잡으면, 나 때문에 나를 치지는 못하고 수많은 것이 당하고 어려워집니다. 어느 날 야곱이 출연했고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이 야곱을 고치기 위해서 라헬만 계속 두드려 댑니다. 그 바람에 요셉도 서른 살까지 고생고생 죽은 줄만 알았습니다. 야곱이 13년간 요셉은 100% 죽은 줄 알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은 구약은 야곱만 그렇지만은 이 시대에, 오늘 우리는 우리 현실에 우리는 다 자기 현실에 우리는 다 야곱입니다. 어쨌든 하나님 좋게 하나님이 인도가 어딘가 여기에 주력하지 아니하고, 내 현실의 주인공 오늘의 야곱인 우리가 다른 취미, 해서 안 되는 길 이런 거 저런 거 찾고 앉았으면 이것도 막고 저것도 막고, 그것 때문에 내가 애착하는 쪽이 문제가 생깁니다. 라헬의 불행. 그러면 이제 라헬은 고생하다가 요셉 하나 챙겼고 요셉 하나 가지고 안 되기 때문에 계속 발버둥을 쳤는데, 하나 더 생기니 됐다 했는데 둘째 때문에 죽어버렸고. 라헬은 그런데 그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은 어찌 되느냐. 두 자녀의 불행으로 또 이어집니다. 야곱 때문에. 요셉은 요셉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따로 역사하나, 동시에 이 요셉을 가지고 야곱을 회개시키려고 요셉은 아버지가 알기로는 죽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죽은 것보다 더 힘든 13년에 고난의 길을 걸어갑니다. 베냐민은? 베냐민이 태어나면서 엄마 죽고 고아로 자랐습니다. 뭐 아버지가 총애하지만은 그 아버지가 영생 불변은 아니니까 그 이유가 또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7 년 흉년이 1년 지나고 2년 지날 때 베냐민까지 또 이제 내놔야 될 때가 생겼습니다. 이때 야곱이 후회합니다. 뭐라고 후회하지요? 따라 하실까요.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뒤에 43장 13절 요셉이 아버지 회개시키려고 베냐민을 데려오라 할 때, 야곱이 라헬 위해서 살았고 130년 라헬이 두고 간 요셉 위해서 살았는데 요셉 날아갔고, 베냐민 하나 붙들고 이게 죽으면 나도 끝장이다 그러고 있는데, 그 베냐민마저 놓지 않으면 안 되도록 포기하게 만들 때 그때서야 야곱이 이제 눈치 챘습니다. 내가 라헬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니 라헬을 고통 시키고 돌아가셨구나. 내가 요셉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니 요셉도 빼가셨구나. 내가 베냐민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다고 붙으니까 믿는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 앞에 거는 건데, 베냐민하고 딱 합해서 베냐민 죽으면 나도 죽는다. 이러고 앉았으니까 베냐민마저 세 번째 베냐민마저 빼가려고 그러니까 야곱이 그때 정신 차렸습니다. 아 하나님이 내 속에 하나님 사랑보다 더 사랑하는 걸 빼가기 위해 그랬구나. 그래서 베냐민을 끝까지 지키다가 베냐민을 내 줘야 될 때 잃으면 잃으리로다. 뺏기면 뺏기리로다.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다. 마음껏 잘 살 수 있는데 죽어야 됩니까? 죽어야 된다면 죽으리다. 멋있게 이렇게 말하면 좋을 건데 야곱은 130살까지 말로는 하나님인데 다른 거 뒤로 챙기다가 하나, 또 챙기다가 둘. 베냐민까지 빼내려니까 그때서야 이제 깨닫고 창세기 43장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이제야 포기했습니다. 가서 죽으면 죽고 하나님이 원하면 결정하고 나는 따라가는 거지.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가 너무 애착한 것이 잘못이었구나. 그리고 애굽을 가보니 요셉도 살아있고 베냐민도 살아있고, 요셉은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천하만국의 총리가 되어, 이게 그대로 천국까지 이어지면 영원무궁토록 영계와 우주의 하나님 하나밖에 없는 자녀 되고, 그게 야곱의 길이고 요셉의 길이고 그게 오늘 우리의 신앙의 매 순간의 선택이 바로 될 때 그리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작으나 크나 알고 보면 이런 선택을 늘 주십니다. 그때마다 복된 선택으로
오늘도 감사 다음도 감사. 우리 주일학생들부터 우리 청년들 얼마나 기회가 많은데, 다 알고 나서 후회하면 후회밖에 남지 않고 미리 알고 쥐면 앞날이 창창 열립니다.
(기도)
매 순간마다 항상 두 길을 열어주시고, 보이는 세상에 유리하고 또 내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이걸 꺾고 이걸 말씀으로 바꾸어 주님과 주의 인도를 따라가면, 매 현실 매 순간 매 주일 주일 죽는 날까지 영생의 성화의 요소가 한량없이 쌓여, 그 분량이 하늘의 영광되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손발이 되어 영생무궁이 펼쳐질 터인데. 상상 못하고 짐작 못할 무한한 복을 이 땅위에 한 번 먹고 말 식물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형 에서처럼, 또 라헬 때문에 130년을 허송한 야곱처럼 오늘 우리에게 그리 되지 않도록 믿음의 귀한 조상들의 실수와 가슴 아픈 허송을 적어가며, 우리에게 우리교회 우리공회 우리 각자의 매 순간이 그리 되지 않도록, 원하시는 이 애절함을 마음에 느끼고 근본적으로 우리의 자세와 방향을 바꾸는 모든 교인들 되도록, 한 주간도 은혜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모든 선택을 복되게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1차: K.Y.Y
-----------------------------------------------------------------
(설교 교안)
22.12.11주전 창29:16~20 세상 사랑은 헛일 총공 신풍
■ 야곱의 가정
1. 결혼
(라헬) : 곱고 아리따운 사람
(레아) : 원치 않았고 부족한 사람
2. 자녀
라헬 : (⑴요셉) 베냐민, 단 납달리
레아 : 르우벤 시므온 (⑵레위) (⑶유다) 잇사갈 스불론, 갓 아셀
3. 자녀들의 훗날
⑴ 요셉 : (애굽)에 들어 갈 때 지도자
⑵ 레위 : 구약의 지도자
① 모세 : (역사) 제1의 지도자
구약의 (율법)을 기록
② 아론 : 구약의 (제사장) 계통
⑶ 유다
① 다윗 : 구약의 (왕통)
② 예수님 : 구원의 (주님)
■ 야곱의 라헬 사랑
1. 결혼을 위해
① 14년 봉사 > (헛일)
② 수 일 같이 여김 > (쾌락)
③ 자기 신앙 > (허송)
2. 라헬 사랑의 결과
① 라헬의 불행
고통 : (죽을) 때까지
최후 : (막내) 출산 때 사망 베노니 슬픔의 아들 35:18
② 두 자녀의 불행
요셉 : (애굽)으로 팔려감
베냐민 : (고아)로 자람
③ 야곱의 후회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43:14
147세 평생에 (130)세에 회개 인생의 절반 정도
■ 하나님의 인도 역사
1. 라헬
총애를 받고 > (인간)적으로 너무 좋으면
자녀를 갖지 못함 > 찌르는 (가시)를 주심 한나의 경우
2. 레아
총이 없으므로 > (자녀)를 주심, 29:31
세상 소망을 없애고 > (영생)을 주심
3. 믿음의 조상의 가정
① 이삭 - (이스마엘) 이삭보다 14세 위, 12 방백을 낳음
② 야곱 - (에서) 야곱 귀향 때 4백인을 거느리고 맞음
③ 레아 - (라헬) 야곱의 평생 총애를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