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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7 주전
제목 : ①말씀 따르는 양심, 하나님을 향한 빛 ②공회 시무투표 : 교역자, 장로 - 장천룡 조사님 인도
사회: 장천룡
설교: 장천룡
찬송: 41장(불과 같은 성령이여)
본문 : 마태복음 6장 22절-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다 같이 기도드림으로 예배를 시작 드리겠습니다.
(기도)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세상에 있는 어떤 소망과 비교해도 비교할 수 없는 지극히 큰 소망을 저들에게 허락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죽고 부활하신 대속의 공로를 통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 낳아주시며, 아들 된 저들이 하나님을 향해 자라가며 영계와 물질계 전체를 통치할 수 있는 이 실력자로 자라갈 수 있도록, 세상의 모든 현실을 통해 오늘날까지 양육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믿는 사람이 알지 못해 그렇지 알기만 알면 이 소망을 붙들고 죽을 때까지 전심전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지만, 저들이 소경이라 어리석어 이 소망의 가치를 몰라 이 소망을 자기의 소망으로 삼지 못하고 있는 줄 압니다. 이러므로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오늘도 주일을 허락하시고 예배시간으로 인도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시간 성령이 각자의 마음을 감화하고 감동하사 내게 주신 소망 내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깨달아, 두 번 다시 세상을 쳐다보지 아니하고 오직 이 구원의 소망을 전부로 삼아, 자기의 전부를 다 바쳐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나갈 수 있는, 변화와 변동의 이 시간이 되도록 이 시간 내내 함께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에 어디에서 이 예배를 참석하든지 남녀노소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각자에게 필요한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해 주옵소서. 이 주일을 기억하며 예배시간을 기억하며 모인 곳곳마다 주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 하시되, 특별히 이 시간 마칠 때까지 동행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몸으로 말하면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기록해 주셨습니다. 만약에 보지 못한다면 그다음 걸어가는 것이나 또 먹는 것이나 몸으로 하는 모든 일에 말할 수 없는 불편이 있습니다. 이걸 한번 느껴보려면 눈을 감고 1분만 또 한 5분만 걸어봐 보면, 눈이 보지 못하면 얼마나 불편한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이 말씀은 눈을 지금 가르친 말씀이냐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다. 눈이 어두우면 몸이 어둡다 이게 결론이 아니고 근데 만약에 내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은 얼마나 하겠느냐. 몸에 눈이 불편해도 이렇게 몸이 불편한데 만약에 네 인격 그리고 네 인생 네가 평생 걸어가는 길에 네 눈이 없다면, 네 인격이 어떻게 될 거며 네 가정이 어떻게 될 거며 네 세상 생활이 어떻게 될 건가. 그걸 가르친 말씀입니다. 세상 속담에도 몸 전체를 100냥으로 계산을 하면 눈을 90냥이라 그럽니다. 중요성으로 말하면 눈이 몸 전체를 두고 말하면 90%나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네 몸이 아니고 네 마음 네 인격 너라는 사람, 그리고 네가 이루는 가정, 부부, 자녀 또 세상의 모든 건설이 만약에 뭐가 없다면요? 눈이 없다면. 이 눈이 없다면 네가 어떻게 될 거냐 그걸 한번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빛이라는 것은 양심을 두고 말합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중생된 영을 제외하고는 나한테 있는 요소 중에 제일 보배가 양심입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세상을 살다 보면 세상에 지킬 것이 참 많습니다. 지켜야 될 것이 참 많은데 그중에 첫째로 지켜야 될 것이 뭐냐 그게 네 마음이다. 마음 중에 어떤 요소일까요? 그게 양심이다. 왜 양심이 이렇게 중요하냐. 하나님이 믿는 사람에게 모든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는 귀가 누구냐. 양심입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령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귀, 그 귀는 양심입니다. 양심을 죽여 버리면 양심이 없으면 하나님이 나한테 아무리 말해봐야 나는 귀머거리니까 듣지를 못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특별히 여기 양심을 눈이라고 그랬습니다. 눈을 달리 여기에 등불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빛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럼 내가 걸어가는 길에 무엇을 앞세우지 않으면요? 무엇을 찾고 무엇을 앞세우지 않으면요? 양심을 찾아 양심을 앞세우지 않으면 볼 것도 없는 겁니다. 네가 뭘 하든 양심 없이 부부생활을 하던 양심 없이 자녀를 키우던 양심 없이 사업을 하던, 양심 없이 네가 뭘 하든 그건 소경이다. 소경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양심이 하나님이 나한테 주신 중생된 영은 어차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중생된 영을 빼고는 하나님이 나한테 주신 제1 보배가 보물이 뭐냐. 그게 양심입니다. 그 양심을 가르쳐 여기에 눈이라고 그랬습니다. 그 양심을 가르쳐 등불이라고 그랬습니다. 그 양심을 가르쳐 빛이라 그랬습니다. 이러니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불신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믿는 사람들, 성공할 수 있는 성공의 자본은 하나님이 다 주셨습니다. 태어난 것을 보고, 나는 이런 지혜가 없고 나는 머리가 없고 나는 배경이 없고 나는 실력이 없고, 그래서 나는 성공하지 못한다. 그게 아닙니다. 성공할 수 있는 제일 귀한 자본 양심을 주셨습니다. 그 양심을 뭐라고 그런다고요? 눈이라 그럽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잘 쳐다볼 수 있으면 성공하지 않을래야 성공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떻게 장사를 하면 돈을 좀 벌 수 있을까. 그게 보인다면 돈을 못 벌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이 보인다면 공부를 못 할 리가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출세할 수 있는지 그 출세가 보인다면 출세를 못할 리가 있습니까? 문제는 보는 것과 안 보는 차이 못 보는 차이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불신자들을 봐도 돈을 버는 사람들은 그걸 볼 줄 아는 눈이 있습니다. 못 보는 사람들은 열심히 합니다. 전심전력을 기울여 노력하는데 노력하는 만큼 돈이 벌어지지를 않습니다. 뭐가 없다고요? 눈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눈은 100냥 중에 90냥입니다. 보기만 보면 나머지는 시간문제지 반드시 해낼 수가 있습니다. 보지를 못하는 사람은 죽기까지 해도 자기가 잘못 보고 소경이니까 보지를 못해서, 잘못 보고 잘못 가니까 그게 죽도록 노력하는 만큼 더 실패할 수밖에는 없는 겁니다. 근데 그 성공할 수 있는 눈이 뭐냐. 몸으로 말하면 눈이지만 그게 우리의 인격을 말하면 우리의 인생을 두고 말하면, 그 이름이 양심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양심만 붙들면 세상 적으로도 성공하는 사람들은 양심을 씁니다. 신앙적으로도 성공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양심을 써서 성공합니다. 왜 그러느냐. 양심이 눈이니까요. 이 양심만 붙들면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 그중에 무엇을 지키라고요? 양심을 지키라 그럽니다. 이래서 양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첫째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양심은 눈이다. 눈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양심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 하나님이 나한테 직접 하시는 말씀을 듣는 양심은 귀다. 눈이다. 등이다. 등불이다. 그 정도가 아니라 선한 양심은 누구를 향해 찾아간다고요? 하나님을 향해 찾아간다. 하나님을 직접 쳐다볼 수 있는 것이 그 이름이 뭐냐 그게 양심이다.
양심이 얼마나 귀한지 성경 여러 군데 이렇게 말씀을 해 놓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양심이 무엇이냐 양심은 제일 옳은 것을 찾습니다. 제일 옳은 것. 다시 말하면 양심이 찾는 것은 진리입니다. 제일 완전한 것을 찾습니다. 흠이 없는 점이 없는 제일 완전한 것을 찾습니다. 완전한 것이 누구지요? 하나님입니다. 진리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인적요소가 양심입니다.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인적요소가 양심입니다. 그러니 양심이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요소입니다. 근데 이 양심에게는 특별한 성질이 있습니다. 양심은 주인이 있습니다. 그 주인의 이름이 뭐냐. 그게 지식입니다. 어떤 양심도 양심은 반드시 지식의 지배를 받습니다. 자기가 가진 지식. 그래서 도적놈도 양심은 있는 겁니다. 사기꾼도 양심은 있는 겁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양심은 있는 겁니다. 양심 없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문제는 그 양심이 어떤 양심이냐가 문제인 겁니다. 지식에 따라 양심은 달라집니다. 타락 전에는 지식이 단일지식이었습니다. 타락 후에는 수많은 지식이 생겼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각 사람이 지식이 다 다릅니다. 이러니 각 사람마다 양심이 다 다릅니다. 너 양심 없네, 소리를 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이 지식이 그런 지식이니까 그 지식에 따라 그 양심을 가지는 겁니다. 이러니 양심은 최고의 보배인데 문제는 이 양심이 무엇의 지배를 받는다고요? 지식의 지배를 받습니다. 양심만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에 있는 모든 요소는 전부 지식의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의 몸은 밥을 먹고 삽니다. 자라기도 합니다. 튼튼하게도 됩니다. 근데 마음이라는 것은 안 믿는 불신자들도 말합니다. 지식을 먹고 마음은 삽니다. 자랍니다. 그리고 성장합니다. 강해집니다. 이러니 그 사람의 감정은 그 사람의 지식의 지배를 받습니다. 돈이 최고라는 사람은 돈을 벌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 돈을 못 벌면 기분이 나쁩니다. 감정뿐만 아니라 마음에 있는 모든 요소는 전부 지식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니 자기라는 인격을 바꾸려면 뭘 바꿔야 되지요? 지식을 바꿔야 됩니다. 지식을 바꾸지 않고 자기의 인격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자기감정이 그게 자기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그 감정은 무엇의 지배를 받는다고요? 지식의 지배를. 내가 어떤 지식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그 감정이 사람마다 다 다른 겁니다. 이러니 부부가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지식을 하나로 만들면 부모자녀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지식을 하나로 만들면. 예수 믿는 사람 전체는 하나가 돼야 됩니다. 단일감정이고 단일욕심이고 단일소망이고 가능합니다. 지식이 하나 되면 예수 믿는 사람은 정확하게 모든 믿는 사람들이 하나가 됩니다. 그걸 단일교회라 그럽니다. 이러니 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습니다. 인적 요소로서는 무엇을 거머쥐어야 되느냐 양심입니다. 양심을 거머쥐지 못한 사람은 볼 것도 없는 겁니다. 눈을 빼버렸습니다. 실패입니다. 인적요소로는 양심입니다. 근데 양심의 제일 중요한 특성이 지식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다고요? 성경을 주신 겁니다.
완전하신 무형이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을 영감이라 그럽니다. 그 영감은 반드시 어느 범위 안에서만 역사하지요?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담아주신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영감 진리 성경 하나님의 전부는 어디에 다 담아주셨다고요? 성경입니다. 우리의 전부는 어디에 다 달려 있다고요? 양심입니다. 성경과 양심이 만나면 이걸 가르쳐서 산 양심이라 달리 말하면 신앙양심이라 그럽니다. 살았다는 말은 하나님과 연결된 거죠. 하나님과 연결된 양심 산 양심 달리 말하면 신앙양심인데, 이 신앙 양심은 옳은 것을 찾되 어디에 근거해서 옳은 것을 찾는다고요? 성경에 근거해서 옳은 것을 찾습니다. 성경에 근거해서 옳은 것을 찾는 것만 산 양심 신앙 양심입니다. 이것만 예수 믿는 사람의 눈입니다. 양심을 쓰는데 자기가 아는 자기지식 자기주관 자기가 배운 것 들은 것 아는 것, 이걸 근거해서 옳은 것을 찾으면 양심은 쓰지만 그 양심은 어떤 양심이라고요? 죽은 양심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끊어진 겁니다. 그 양심 쓰면 쓸수록 그 사람은 점점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양심은 무엇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그러면 생각이 되시나요? 성경을 위해서 만든 게 양심입니다. 세상에 있는 어떤 지식 어떤 인간의 지식, 그 지식을 가지고 옳은 것을 찾아봐야 마지막은 양심을 쓰면 쓸수록, 세상지식을 가지고 인간지식을 가지고 옳은 것을 찾으면 찾을수록 양심을 쓰면 쓸수록, 마지막에 만나는 것이 뭘까요? 그건 진리가 아닙니다.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거짓말쟁이라고 그러지요? 거짓은 전부 누구에게서 다 나왔다고요? 마귀에게서 나왔다. 거짓의 아비라고 그럽니다. 마귀가. 세상에 나와 있는 인간들이 발표한 모든 인간지식 세상지식은 어디에서 나왔다고요? 악령에게서 나왔습니다. 마귀에게서. 그러니 인간지식 세상지식을 가지고 여기에 근거해서 옳은 것을 찾으면 결국은 어디를 향해 갈 수밖에 없다고요? 진리의 반대 거짓으로 가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님의 반대 귀신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이게 죽은 양심이고 이게 죽이는 양심입니다. 양심이란 무엇을 위해서 주신 것이냐 그러면 오직 성경을 위해서 주신 겁니다. 성경과 양심이라는 것은 둘이 한 짝입니다. 이게 두 개 합쳐질 때 이게 최고의 가치를 말하는 겁니다. 근데 전부 다 양심을 쓰는데 자기생각 자기 아는 지식 인간지식 세상지식 이걸 가지고 옳은 것을 찾으니까, 자기는 양심을 쓴다고 그랬는데 그 양심은, 양심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양심은 하나님과 끊어진 하나님과 끊어지게 만드는 죽은 양심이요 죽이는 양심입니다. 이러니 오늘 오전에 드리는 말씀은 남녀노소 누구든지 모든 믿는 사람한테 하나님은 성공할 수 있는 것을 다 주셨습니다. 인적요소로 말하면 양심입니다. 그게 눈입니다. 그게 귀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고 그 말씀을 통해 내가 어떤 길을 걸어가야 되는지 환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러니 내가 성공하려면 부부가 잘 되려면 부모가 자식을 잘 키우려면, 요셉같이 그런 세상에 권세를 가지려면 아브라함 같이 거부가 되려면, 반드시 무엇을 찾아서 무엇을 앞세워야 된다고요? 양심을 찾아 양심을 앞세워야 됩니다.
양심을 빼면 소경입니다. 양심이 있어야 비로소 눈을 뜹니다. 근데 이 양심을 아무리 찾아 붙들어봐야 그 양심에 뭐가 더해지지 않으면요? 성경이 더해지지 않으면 그 양심은 아무 짝에도 못씁니다. 오히려 양심을 쓸수록 성경이 더해지지 않으면, 양심을 쓰는 것만큼 그 사람은 거짓을 향해 또 귀신을 향해 찾아가게 돼 있습니다. 양심이란 절대적으로 지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어떤 지식을 가졌느냐. 그 지식에 따라 양심은 제일 옳은 것을 찾기 때문에, 지식이 잘못되면 아무리 양심을 철저하게 잘 쓴다 할지라도,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이 진리의 반대 거짓이고 하나님의 반대 귀신입니다. 그러니 방법이 없는 겁니다. 이러니 오늘 오전에 첫째로 양심이 보배니까 무엇을 하자고요? 양심을 찾아 양심을 앞세우자. 그런데 양심이 전부냐 양심 하나 가지고는 절대 안 된다는 겁니다. 양심을 위해서 주신 최고의 선물이 뭐냐 그게 성경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성공할 수밖에 없는 자본, 이건 신적요소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제일 귀한보배가 그래서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이 영감으로 나타납니다. 그 영감이 진리로 나타납니다. 그 진리로 담아주신 게 성경입니다. 오늘 성경이 없는 분이 있나요? 다 가졌지 않습니까. 오늘 양심이 없는 분이 있나요? 다 가졌지 않습니까. 두 개를 뭐하기만 하면 된다고요? 합하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예배 참석해서 들은 말씀 가운데 그 말씀을 가지고 이 말씀대로 제일 옳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 그게 신앙양심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니까 이 말씀을 읽어보니까 이 말씀대로는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제일 옳은 것일까? 그게 신앙 양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연결된 양심입니다. 그러면 오늘로서는 지금 이 순간으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제일 옳은 것을 찾아서 행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게 하나씩 둘씩 쌓여 가면 오늘은 나는 부족한데 자꾸 성경 말씀대로 진리의 성경 말씀대로 옳은 것을 찾아서 자기를 고쳐나가니까, 고쳐나가는 만큼 이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서 자라가게 되는 겁니다. 이게 신앙양심입니다. 대부분 양심을 제외하고 신앙생활을 하니까 문제가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감정이 있습니다. 이 감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듣습니다. 욕심도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듣습니다. 소망도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듣습니다. 우리 마음에 수많은 요소가 있지만 그 요소 중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요소가 양심입니다. 이 양심을 제껴 버리면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때부터는 귀머거리가 되고 소경이 되는 겁니다. 아무리 예배를 참석해 봐야 아무리 성경을 읽어봐야,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외워봐야 뭘 찾지 않으면요? 양심을 찾지 않으면. 양심이 뭐라고요? 어떻게 하는 것이 제일 옳은 것일까 좋은 것일까 이 말씀을 지키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이 말씀대로 지켜 사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제일 옳은 것일까. 자기 수준에서 틀려도 상관없습니다. 부족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이 양심을 쓰면 점점 옳은 것을 찾게 돼 있습니다. 이 양심을 쓰지 못하게 우리 마음속에서 그 양심을 쓰지 못하도록 반대하고 방해하는 게 뭐냐. 보통 욕심입니다.
이 욕심이 강한 놈입니다. 억센 놈입니다. 양심은 강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 있는 자기양심은 자기가 키워야 되는 겁니다. 자기양심을 자기가 찾아서 자기가 키우지 못하면 이 양심은 약하기 때문에, 욕심이 쥐 박으면 쥐 박힙니다. 오늘 내가 꼭 저걸 가지고 싶은데 저걸 가지기 위해서 욕심은 얼마든지 제 속에 양심을 쥐어박습니다. 지근지근 밟아버립니다. 그러면 양심이 소리를 못 내는 겁니다. 가책만 되는 겁니다. 욕심이 앞장을 서면 그다음부터는 욕심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갈지를 모릅니다. 욕심은 옳은 게 없습니다. 욕심이라는 것 자체는 그냥 내가 좋으면 하고 싶으면 원하면 일단 가지고 보는 겁니다. 그게 욕심입니다. 근데 대부분 이 욕심이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고 주권 합니다. 이 욕심을 꺾어야 됩니다. 소원을 꺾어야 됩니다. 감정을 꺾어야 됩니다. 무엇만을 내 마음속에 주인으로 주장으로 주권으로 세워야 되느냐. 그게 양심입니다. 항상 뭐라고요? 옳은 것이 뭐냐. 근데 그 옳은 것을 말할 때 무엇을 가지고 말한다고요? 성경입니다. 모르는 말씀 필요 없습니다. 오늘 내가 이 예배시간에 말씀을 드릴 때 이게 옳구나. 이게 말씀이구나. 이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나, 아는 대로 노력하면 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라 소리는 안 합니다. 나 할 수 있는 것만 하라 그럽니다. 나, 아는 대로 이 말씀을 들어보니까 이 말씀대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겠구나. 그러면 그게 신앙 양심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신앙양심이 되면 또 이렇게 신앙양심으로 살려고 하면 이게 사는 것이 쉬우냐.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뭐가 첫째 반대를 하지요? 내 속에 주관이. 그러면 큰일 난다 손해 본다 너 문제가 생긴다. 내 속에 주관이 인간지식이 끊임없이 내 속에 이 신앙양심으로 살지 못하도록 반대를 하고 방해를 하는 겁니다. 신앙양심으로 사는 게 쉬운 게 아닙니다. 제 속에 주관을 꺾어야 되고 그리고 평생 자기가 자기 원하는 대로 살아왔습니다. 그걸 옛사람이라고 그럽니다. 그 옛사람이 일어나서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또 반대를 하고, 그 반대하는 옛 사람도 죽여야 되고, 그렇게 살아보려고 하니까 옆에 사람이 나보다 잘 믿는 사람이 먼저 믿은 사람이 그렇게 하는 거 아니다. 또 뭐라고 그러지요? 옆에 사람이 내 주변에 사람이 사건이 그렇게 살지 말라고 또 반대를 하고, 왜? 오늘 우리가 보는 성경 말씀이라는 것은 세상과는 정반대입니다. 같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하면 세상 속에서는 광야가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고 인정해주지 않고 홀로 외롭게 살아야 되는 것이 신앙 걸음입니다. 이러니 이 신앙양심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은 겁니다.
안 믿는 불신자들 중에서도 성공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걸 붙들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걸 꼭 지키는 사람들이 보면 성공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르쳐 세상 적으로 말하면 양심은 있다. 양심가라고 그럽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봐야 그 신앙생활이 성공할 건가 실패할 건가. 양심을 찾아 양심을 붙들되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양심을 쓰는 이 신앙양심을 찾아 가지지 못하면, 결국은 자기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그러는데 결국은 하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 봐보면 어느 길로 걸어간다고요? 불신자들이 양심 쓰지 않고 실패하는 것처럼, 믿는 사람들도 신앙양심을 쓰지 않으면 그 신앙이 걸어가는 걸음이 결국은 뭐 할 수밖에 없더라. 실패할 수밖에 없더라. 실패하는 걸음을 걸어가더라. 이래서 오늘 오전에 첫째로 하나님이 성공할 수 있는 최고의 보배 양심을 주셨습니다. 그 양심을 위해서 최고의 하나님의 선물 성경까지도 주셨습니다. 이 두 개가 합쳐질 때 그걸 신앙양심이라고 그러고 이걸 산 양심이라 그런다. 이 양심을 찾아야 된다. 두 번째 이 신앙양심으로 사는 것이 쉬울 것 같으면 모든 믿는 사람들이 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성공을 했을 겁니다. 근데 이 신앙양심으로 사는 것이 그렇게 쉽지를 않다. 몇 가지나 있어서 반대를 한다고요? 네 속에 주관 인간지식 네 속의 옛 사람이 그리고 네 밖에 모든 세상이 전부 다 합쳐가지고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반대하고 방해하는 겁니다.
그러니 세 번째 이 양심은 남이 키워줄 수는 없습니다. 남은 절대 이 양심을 키워줄 수 없습니다. 양심은 누구만 키울 수 있다고요? 자기만 키울 수 있습니다. 자기 속에 자기양심입니다. 이 양심이 옳은 것을 찾을 때에 그게 옳다. 그리고 밀어주면 이 양심이 점점 힘을 얻는 겁니다. 아예 내 마음속에 옳은 것을 찾으려고 생각을 안 하면 양심은 없는 겁니다. 옳은 것을 찾으려고 할 때 그 옳은 것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을 붙들고, 잘해봐라 밀어주면 이 양심이 힘을 얻는 겁니다. 만약에 이 양심이 옳은 것을 찾았다. 찾았을 때 그 양심이 옳은 대로 내가 하려고 애를 쓰면 그 양심이 점점 강해지는 겁니다. 그러다가도 양심이 이 양심을 내 감정 때문에 내 자존심 때문에 내 성질 때문에, 한 번 툭 치면 이 양심이 휘청하고 주저앉아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양심을 붙들려고 하면 또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평생 신앙생활을 하지만 뭐만 되는 거지요? 이러면 안 되는데 들은 말씀이 있으니까. 그 말씀 때문에 양심이 자꾸 말을 하니까 내 마음에 가책만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이 양심을 붙들어 살리지를 못하면 결국 평생 신앙생활 해봐야 가책만 되는 겁니다. 가책만 되고 말씀을 들을 때 가책만 되고 그다음 또 지나고 나면 또 아무것도 아니고. 가책이 된다는 말은 아직도 양심은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가책조차 되지 않는다면 양심을 완전히 파묻어버린 겁니다. 그 사람이 하는 어떤 언행심사도 거기에는 무엇이 없다고요? 구원이 없습니다. 이 신앙양심을 써서 신앙양심으로 산다고 해도 또 이것이 실제 영생의 구원이 되느냐. 그건 또 별개의 문제입니다.
내가 성경에 근거해서 양심을 찾아 양심대로 살면 그걸 신앙양심 산양심이라 그러는데, 그래서 옳은 것을 찾아 살 때 그걸 양심생활이라 그럽니다. 그러나 이 양심 생활은 영생이 되지를 못합니다. 양심생활이 영생이 되려면 내가 옳은 것을 찾아 정말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그렇게 살 때에 하나님이 보시고, 너 잘하고 있네. 네가 하는 것이 맞다. 거기에다가 도장을 찍어주면 인정을 해주면 거기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면, 그때 그걸 영감생활이라 그럽니다. 영감생활 전 단계가 양심생활인데 이 양심생활조차 못하고 있다면 영감생활은 아예 거리가 먼 겁니다. 영감생활이 될 때 비로소 그때 구원이 되는 겁니다. 영생이라는 구원은 영감생활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게 신앙의 순서고 이게 신앙의 자라가는 단계입니다. 이러니 양심을 찾지 못했다면 또 성경에 성경을 다하지 못했다면, 신앙양심 자체가 안 되는 거고요. 이렇게 찾아서 한다고 하면 비로소 양심생활이 되는 거고요. 그 양심생활에 하나님이 도장을 찍어주면 함께 해주시면 비로소 영감생활 그게 실제 구원입니다. 근데 대부분은 어디에 다 멈춰 있지요? 양심을 찾아 성경대로 양심을 쓰는 이 일조차도 전부 다 대부분은 하고 있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천국의 건설의 구원이 얼마나 이루어졌을까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힌 일입니다.
통성으로 기도드리겠습니다.
■ 시무투표
오늘은 1970년부터 우리공회 전국교회가 2년마다 실시하는 목사님과 장로님 시무투표일입니다. 오늘 출석한 중학교 1학년 이상 전체교인이 투표를 해서 4분의 1 이상이 반대를 하면, 목사님은 즉시 사직시키고 후임을 결정하게 되며 장로님은 직책만 2년간 중단시키게 됩니다. 투표 순서는 목사님에 대하여 먼저 투표를 하고 그다음 장로님에 대하여 투표를 하겠습니다. 실시간 예배 참석자들의 온라인 시무투표 방법은 화면 공지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표시 방법은 찬성하실 분은 투표지에 구멍을 뚫거나 찢으면 되고 반대하실 분은 투표지를 가지고 계시다가 그대로 내면 됩니다. 호명하는 분들은 제일 앞줄로 나와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남반에 안응규, 최원규, 여반에 오정옥, 김영예 나오셨나요? 호명된 분들, 호명된 분들 앞으로 나오십시오. 안응규, 최원규, 오정옥, 김영예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시무투표 모든 절차에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찾아 잘 진행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금방 말씀드린 네 분 앞으로 나오시면. 가지고 일단 앉아 계셔주십시오. 먼저 안내를 하겠습니다. 먼저 목사님에 대한 투표를 하겠습니다. 목사님은 평소 설교하신 이영인 목사님입니다. 본 교회를 위하여 현재 계시는 목사님을 좋다고 생각하면 투표지에 구멍을 뚫고, 목사님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원하면 투표지를 받은 그대로 내시면 됩니다. 기권을 하실 분은 투표지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투표지를 그냥 내면 반대가 됩니다. 투표는 자기의 신앙과 전체의 교회를 위하여 신앙양심으로 신중히 결정하시고, 감정이나 인정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위원들께서는 지금부터 투표지를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받은 투표지를 가지고 받으신 분들은 아직 표시를 하지 말고 기다려 주십시오. 중학생 이상이면 다 받으시면 됩니다. 중학생 이상이면 다 받으시면 됩니다. 중학생 이상이면 다 받으시고 투표하지 않는 분도 일단 받아두시기 바랍니다. 혹시 못 받으신 분들은 손을 들어 표시해 주시면 나눠드리겠습니다. 유아실 사무실 빠진데 없도록 나눠 주시는 분들은 챙겨봐 주시기 바랍니다. 중학생 이상은 다 받으시면 됩니다. 투표하지 않을 분도 받으시면 됩니다. 투표 위원들은 남은 것을 걷어주셔야 됩니다. 전체를 다 걷어주십시오. 남은 거. 나누고 남은 것은 앞으로 가져다주십시오. 다 받으셨습니까? 피아노 잠깐요. 투표방법 다시 한 번 설명 드리겠습니다. 목사님이 그대로 계시기를 원하는 분은 투표지에 구멍을 뚫고 목사님이 다른 곳으로 가시는 것이 좋으면 투표지를 그대로 내면 됩니다. 표시를 할 때 옆 사람을 보지 말고 앞을 보면서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옆을 보지 말고 앞을 보십시오. 찬성은 찢고 반대는 그냥 내면 됩니다. 방법을 투표방법을 모르면 옆 사람한테 물어볼 수는 있습니다. 방법만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다 됐습니까? 투표 위원들 걷겠습니다. 나뉘어졌던 봉투에다 담아주십시오. 남은 것은 앞으로 다 주십시오. 여기다 주십시오. 기권하실 분들은 안 내시면 됩니다. 유아실 사무실 빠짐없이 다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다 걷었으면 앞으로 가져와 주십시오. 낼 사람들 중에 안 낸 분 있으면 손 들어주십시오. 없습니까?
지금부터 오영근 장로님에 대해서 투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오영근 장로님 어디 계시나요? 예 일어서 주십시오. 뒤를 한번 돌아봐 주십시오. 혹시 모르는 분이 계시면 오영근 장로님이십니다. 앉아주십시오. 투표인들이 이제 투표지를 나누겠습니다. 중학생 이상은 다 받습니다. 투표하지 않을 분도 받습니다. 중학생 이상은 다 받으시면 됩니다. 투표하지 않을 분도 받으시면 됩니다. 유아실 사무실 빠짐없이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표시는 하지 마십시오. 한 번 설명을 더 드리겠습니다. 안 받으신 분이 있으면 손을 들어주시면 됩니다. 남은 것은 앞으로 가져와 주시기 바랍니다. 설명을 한번 드리겠습니다. 찬성은 찢으시면 됩니다. 반대는 그냥 내면 됩니다. 옆 사람을 보지 말고 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옆 사람을 보지 말고 표시만 해주십시오. 표시가 다 됐으면 걷겠습니다. 위원들은 거둬주시기 바랍니다. 유아실 사무실 다 살펴봐 주십시오. 걷은 것은 앞으로 가져와 주십시오.
1차: K.Y.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