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새22.10.27 마6:6 은밀한 기도의 이유, 신앙 양심을 통해 친히 보여주며 최종적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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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새22.10.27 마6:6 은밀한 기도의 이유, 신앙 양심을 통해 친히 보여주며 최종적 인도

관리1 0 95 2022.10.27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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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7 목새

제목 : 은밀한 기도의 이유, 신앙 양심을 통해 친히 보여주며 최종적 인도

찬송 : 121장(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본문 : 마태복음 6장 6절 -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골방에 들어가라. 문을 닫아라.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계신다. 은밀한 기도를 하라. 6절 한 절 안에, 떠들지 말아라. 사람을 보지 말아라. 이 말씀을 반대로 깊이 하고 계십니다. 그 앞에 5절에 보니 기도 할 때에 사람이 보는데서, 심지어 사람이 보라고, 큰 거리 모퉁이에서 떠들고 기도하는 것. 거기에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도도 있지만, 사람에게 보이려고 큰 거리 모퉁이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광고하고 선전하고 나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를 외식기도라고 한다라고 먼저 5절에 말씀하시고 어쨌든 하나님께 기도를 했으니 상 받을 일인데, 천국 가서 받을 영원한 상을 세상에서 미리 받아버렸으니, 그 기도의 혜택은 더 이상 없다.

그리고 6절입니다.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는 것이다. 골방이 없는 사람은 어떡할 것인가? 빈 들판에서는 그러면 기도를 못할 것인가? 위치적이고 장소적인 골방도 골방이지만, 은밀한 중에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 아버지 하나님이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기도. 그것은 소곤소곤 숨어서 하는 것입니다. 부부 간의 대화, 남이 들어서 별로이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부부 둘의 이야기,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로서 하실 말을 하시고, 우리는 아들로서 아버지께 말씀을 듣고 여쭤보고 이런 부자 관계, 그건 옆집이 할 일이 아니고 남이 할 일이 아닙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장소적인 은밀한 곳, 남이 보지 않는 곳, 남이 들을 수 없는 곳, 장소적으로도 골방이 좋고 우리 마음의 골방은 어디일까? 자기 속에 자기의 몸은 남이 보는 곳이라면 자기 마음은 남이 볼 수 없는 곳입니다. 자기 마음속에도 감정 욕심 이런 쪽의 마음들은 밖으로 떠드는 그런 외부 지향적인 마음입니다. 마음 안에도 과거를 살아온 지식, 과거에 대한 기억은 마음 안에서도 골방입니다. 마음 안에 지성 속에 더 계산하고 따지는 것이 이성입니다. 지성, 이성, 그 속에 더욱 깊이 들어 앉아 있는 마음을 양심이라고 그럽니다. 양심. 인간 마음속에 가장 깊은 것, 양심이라고 그럽니다.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을 보면 눈이 커지고 온 몸이 그냥 표시가 납니다. 남이 봐도 얼굴과 손발은 표시가 납니다. 얼굴과 손발은 남이 보라고 있는 것입니다. 외부를 상대하기 때문에, 발로는 걸어가면 모두가 압니다. 손으로 처리하면 전부가 압니다. 얼굴은 온 몸의 보이는 표시판 계기판입니다. 그 얼굴의 색깔 눈동자 눈빛 말을 딱 보면 누가 봐도 알도록 해놓았기 때문에, 얼굴에 원래 말이 얼골입니다. 얼골. 얼이라는 것은 속에 들었는데 이게 밖으로 표시가 되는 골, 뼈, 상판 떼기라 계기판이라. 차로 말하면 운전석에 있는 계기판만 들여다보면 안에 있고 밑에 있고 숨겨 놓은 엔진을 오만 것을 여기에서 다 알 수가 있습니다. 차의 기름통은 안에 감춰 놓지 밖에 열어놓고 다니지를 못합니다. 다 날라가니까. 연료통은 감춰놓고 연료통 속에 연료는 남이 가져갈 수 없도록 볼 수 없도록 이렇게 덮어놓았으나, 운전석의 계기판에는 기름이 절반이다 다 찼다 모자란다 이렇게 보이는 것처럼, 심지어 엔진이 일분에 몇 천 번 돌아가는데 수천 번 일분에 돌아가는 그 엔진의 움직이는 것까지 운전석 계기판에 다 이렇게 보이게 해놨습니다. 이게 얼굴입니다. 보면 보일 수 있도록

발은 걸어가면 보이게 되어 있고 손은 처리하면 보이게 되어 있고. 얼굴은 그 인간의 계기판이라 그 인간의 속에 감춰놓은 것 덮어놓은 것 전부 얼굴 보면 다 압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관상이라고 그럽니다. 하나님께 기도는 얼굴 가지고 하는 것 아니고 손발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손발과 얼굴이라는 것은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 실행 속에, 하나님과의 기도는 보이는 손발 보이는 얼굴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 앉아 있는 마음으로 기도를 합니다. 이 마음도 여러 겹겹이 있는데 마음속에 감정 욕심 의지, 이런 것은 바깥쪽에 드러내고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 욕심, 의지, 그런 마음속에 들어앉아서 차분하게 기억하는 것을 지성이라고 그럽니다.

은밀한 중에 계신다.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 문 까지 닫아라. 이게 무슨 말인고 어디에 이런 것이 있는고? 열왕기상 16장 17장, 엘리야가 아합왕으로 더불어 전쟁을 하고 전부 꺾어버리고 이겼는데 이세벨이 그냥 두지 않겠다고 난리를 하니까 유다 광야로 피하여, 시내산까지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데려다가 엘리야에게만 살짝 이야기를 하시는데, 하나님의 응답 하나님의 말씀을 세미한 음성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용장입니다. 850명의 이방 선지자, 전국의 제일 유명한 것들을 다 데려다 놓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고, 아합왕과 싸워 이긴 굉장히 드러내고 활동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엘리야의 말 한 마디에 3년 하늘이 비를 닫아서 흉년이 오고, 엘리야의 기도에 하늘에서 불이 때리고, 바알과 아세라 850명의 이방 선지자를 다 죽여 버리며. 뭐 떠들고 싸우고 용감하고 전국과 세계가 다 아는 이런 용맹한 굉장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큰 역사를 가지고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지를 못하고 자기까지 죽을까봐 도망했던 엘리야. 온 이스라엘의 시끄럽고 복잡한 그곳에서 남쪽 유다 광야 속으로 들어갔고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거기에서 또 40일을 더 골방 속으로 아무도 없는 곳으로 걸어가 시내산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아예 살지 않는 유다 광야 3일을 들어가고 거기에서 아무도 없는 광야 40일을 더 걸어 그 다음 하나님을 고요하게 뵙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세미한 음성, 잘 듣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는 그런 고요하게 가늘게 작은 소리로 엘리야를 하나님이 찾고, 그 다음 하나님께서 제자 엘리사를 세우거라. 이래라 저래라 몇 말씀 하시고. 이후에 엘리야는 소리 없고.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일을 다 해버렸습니다.

신약의 마태복음 6장 6절, 기도란 떠드는 게 아니다. 남을 향하는 게 아니다. 깊이 속으로 들어오너라. 네 얼굴 너의 손발 그것은 실행하는데 쓰는 것이고, 몸속의 마음, 마음속에서도 더 깊은 마음, 제일 깊은 신앙의 양심까지 들어와서, 하나님이 내게는 오늘 어떤 하루를 주실까? 요즘 우리 가정의 이런 저런 일들은 하나님의 어떤 뜻일까? 사람도 뜻은 속에 숨겨두고 잘 내지를 않습니다. 이 물건 사시라 이러시라 저러시라 이런 것은 해도, 그 깊은 속의 생각과 뜻은 안에 묻어 둡니다. 하나님은 무슨 뜻으로 나에게 이런 가정, 이런 현실, 이런 세상을 주셨을까? 휩쓸리라는 뜻일까? 출애굽 때에는 2백여만 명 탈출하는데 휩쓸려가야지. 그때는 낙오 되면 아니됩니다. 출애굽처럼 온 민족이 함께 가는 그 대오에 따라 나서라는 것인가? 지금은 쫓기는 다윗을 따라 고난을 받으라는 때인가? 지금은 왕이 된 다윗을 모시고 세상을 징벌하러 돌아다니라는 때인가? 지금은 시내산 아무도 없는 곳, 아무도 모르는 곳, 아무도 생각도 못하는 그곳으로, 심지어 엘리야조차 생각하지 않은 곳으로 깊이깊이 사람 없는 곳, 인간의 생각이 없는 곳, 인간의 뜻과 인간의 고려와 인간의 계획과 인간적인 것 다 걷어 치워버리고 출애굽 할 때에 모세를 불렀던 이번에는 엘리야만을 부르시는 그 하나님 앞으로 걸어가는 지식의 구별, 이성의 사리의 판단까지 들어가고, 이렇게 준비 되었을 때에 마지막 신앙의 양심 속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데까지 나아갈 것인가? 정식의 기도는 그런 기도입니다.

그러면 주일 오전 예배에 사회자의 대표기도는 몇 백 명 앞에 다 들으라고 떠드는데 그거는  골방 기도가 아니라 만인 앞에 떠드는 기도가 아니냐? 그 기도하러 모인 만인 몇 백 명 전부를 대표하여, 그 전부를 한 사람으로 삼아 그들의 마음에 이 기도의 내용을 전하고 모두와 함께 하나님 앞으로 들어가는 기도이기 때문에 주일 오전 대표 기도가 소리를 크게 내서 기도를 해도, 주변에 있는 세상이 아니고 인간이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첫째는 늘 지식의 기도, 지성 기도라야 됩니다. 어제 무슨 일 있었더라? 지금 세상에 경제가 어떻더라? 현재 우리 가족의 당한 일이 뭐더라? 이것은 단순 지식입니다. 이것이 지식 지성적인 기도입니다. 주님, 우리 가정에 귀한 이 아기가 수술실에 오늘 아침에 들어갑니다. 이건 지식입니다. 오늘 우리 집에 막내가 인생을 결정할만한 중요한 시험을 봅니다. 이건 지식입니다. 이건 뭐 계산할 것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입니다. 지식입니다. 경제 문제가 있어서 제가 지금 이렇게 어렵습니다. 제가 이렇게 새 가정을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지식입니다. 있는 그대로입니다. 있는 그대로 지식적으로 파악하고. 이 위에 이성적 기도란, 이치로 따져보는 이성의 기도란, 왜 이런 상황이 오게 되었습니까? 제가 대책 없이 자꾸 술을 먹다보니까 간이 이렇게 나빠져서 간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자꾸 담배를 피우다 보니까 폐암에 걸려 항암 주사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식이고. 왜 이렇게 되어졌는지 따져보는 것이 이성적입니다. 이렇게 건강을 무시하고 하나님 주신 기회를 쉽게 생각하고 내 멋대로 막 살았으니 이런 상황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치로 따져서 비교해 보고 살펴보고, 말씀으로 기억해보고 말씀으로 따지다보면 내 속의 신앙 양심이 죽을 짓했으니 죽어야 맞겠구만, 죽을 일을 그만큼 했으니 죽어도 싸다. 내 속의 나의 마음인데 나의 편을 들어야 될 나의 마음까지도 죽을 짓을 그만큼 몇 십 년을 했으니 죽어도 싸다. 이게 지성 속에 이성 속에 들어 있는 양심이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앞에 지난 날 걸어온 것은 죽을 짓을 한 것이 맞습니다. 백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맡겨놓은 이 가족들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저는 100번 죽어도 아직까지는 그래도 제가 책임져야 되는 가족이 사람들이 있으니 살려주옵소서. 네가 10년 더 살면 그 사람들한테 더 나쁠 건데? 이런 양심의 가책을 통해 하나님께서 비로소 은밀한 중에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죽어 싸다. 너 지금 급하니까 기도하지. 또 건강해 놓으면 또 그 짓할 건데? 네가 벌써 하나님 앞에 한번이냐 두 번이냐 세 번이냐? 습관이 되어 아주 하나님을 달래려 들고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너 지금 기도하는 것인데? 이게 하나님과 내 양심 사이에 고요하게 오고가는 대화입니다. 이것을 골방 밖에 나가서 네거리 가서 떠들면서 그런 기도를 못합니다.

아무도 없는, 심지어 나의 옛사람 나의 고집 나의 주관 나의 인간적인 계산까지 다 치워버리고, 주님이 이런 현실을 주셨습니다. 이 현실을 분석해보니 이렇습니다. 그런데 양심으로 보니 제가 죽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하나님 앞에 선다면, 성경도 읽지 못했고 실행도 하지 못했고 주님 앞에 갈 때에 준비한 것이 너무나 없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꼬셔서 또 세상 구경 다니고, 죄 지으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 네가 이 땅 위에 이루지 못한 너의 야욕을 위해서 지금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 아니냐? 이게 내 양심에서 이런 것을 찌르고 이런 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그러면 이번에 낫게 되면 이번에 다시 기회를 잡게 되면 정말로 주의 뜻을 찾아 실행하는 일에 주력하겠느냐? 자기로서는 자문자답 같은데 말씀을 들고 분석하고 자문자답을 하는 이런 가운데,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내 마음 속에 오셔서, 나를 깨우치기도 하시고 다지기도 하시고, 또 인도하는 그런 일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정말 기도다운 기도는 눈 감고 조용한데서 신앙의 양심을 찾아 고요히 지난날을 돌아보고, 그리고 모든 상황을 비교해보며, 그리고 주님이 뭘 원하시는지? 말씀으로 상황으로 따져볼 때에, 주님의 소원을 알 수 있고 그 소원을 붙들 때에 그 다음 주님 앞에 부탁할 것, 용서받을 일, 각오할 일들을 주고받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다보면 하룻밤도 그냥 지나가고 밥 먹는 시간도 잊어버려서 철야가 되고 금식이 되는 것이지. 네가 금식 하냐? 나도 3일 금식 해 보겠다. 네가 철야 하냐? 나도 날 잡아서 해 보겠다. 안 하는 것보다는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백번 낫지만은 최종적인 신앙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남과의 경쟁 남에게 과시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현실을 통해 내게 말씀을 하시고 말씀을 통해 그 현실에 소원을 말씀하시는데 마지막의 결론은 나의 신앙 양심을 통해 성령으로 감화와 감동을 통해 보여주시고 인도하시니, 이것을 찾으려면 어쨌든 고요하게 양심에 귀를 기울여야 되기 때문에, 그 과정은 은밀한 때와 은밀한 장소와 은밀한 마음의 방법을 통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 얽힌 모든 현실이 술술 풀리고 또 가야 할 사명의 길이 환하게 보이면 이왕 가는 길 감사하고 찬송하고 힘 있게 복되게 걸어가고, 지켜보는 사람들도 참 부럽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고 동행하는구나. 지켜보는 분들도 그래야 되고 내 속에 감사 기쁨은 넘쳐야 되고 이게 은밀한 중에 기도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1차-L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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