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새22.10.11 왕하16:14 주일과 예배 먼저 하나를 붙들어 나머지를 전부 살려내기 위한 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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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새22.10.11 왕하16:14 주일과 예배 먼저 하나를 붙들어 나머지를 전부 살려내기 위한 구별

관리1 0 87 2022.10.11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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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1화새

제목: 주일과 예배라도 먼저 하나를 붙들어 내어 나머지를 전부 살려내기 위한 구별

찬송: 47장 (웬말인가 날 위하여)

본문: 열왕기하 16장 14절 -

또 여호와의 앞 곧 전 앞에 있던 놋단을 옮기되 새단과 여호와의 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단 북편에 두니라

성전은 크게 말하면 먼저 울타리, 담이 있습니다. 신앙과 생활, 하나님과 인간, 천국과 세상 두 가지를 구별한다는 뜻입니다. 구별이라는 말이 거룩이라고 그럽니다. 단어 자체의 개념을 못 잡으면 아주 그냥 엉뚱한 데로 갑니다. 남녀의 이성의 사랑을 주님의 대속의 사랑과 단어가 같다고 섞어버리면 주님의 대속의 사랑이 가는 곳마다 7계명의 죄로 시작하여 모든 죄가 다 밀고 들어가 버립니다. 주님의 구원의 사랑을 부모 자녀의 혈육의 사랑과 섞어버리면 동물의 세계가 돼버립니다.

끼리끼리 모여지는 우정의 사랑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하늘의 사랑과 섞어버리면 이건 이 땅 위의 약육강식의 패당거리로 전락해 버립니다. 과거로 올라갈수록 그 구별은 뚜렷하고 현대로 내려오고 주님 오실 때가 가까워지면 밤중을 향하기 때문에 나든 누구든 이 구별이 뒤섞여 버리게 되어 있고 그걸 짙어지는 밤중이라 그러고 밤중에 절정이 되면 세상은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한 시대 어느 한 개인적으로는 이런 저런 혼란이나 높낮이가 있어도 역사적으로는 되돌릴 수 없이 갈수록 깊어진다, 그리 아시면 됩니다.

신앙의 출발이 출애굽의 성막이고 이건 목화솜 같이 또는 식물의 줄기를 쪄서 말려서 머리카락처럼 한 가닥 한 가닥 이렇게 풀어 내 가지고 가로세로 짜는 것이 성막의 기본입니다. 480년이 지나 솔로몬 때가 되면 이제는 준비했고 이제는 가나안에 정착을 했기 때문에 그 말은 첫 신앙이 지났고 과도기를 지났고 이제는 각자 자기 신앙에 주님 앞에 신앙다워야 하기 때문에 솔로몬 성전은 가장 좋은 돌로 또 해외 저 북쪽에 높은 레바논 산에 세계 가장 좋은 백향목을 뗏목으로 물로 바다로 옮겨 천하 어디에서 와서 봐도 감탄할 최상 최고의 건축을 한 것이 성전입니다.

이 성전에서 이 땅 위에 하나님과 동행 그리고 보이는 솔로몬 성전에서 볼 수 없는 하늘나라를 만드는 그 목표가 에스겔 40장 이후에 에스겔 성전입니다. 성막은 솜 같은 걸 올올이 저 비벼 실로 만들고 그 실을 수없이 짜서 찬을 만든 것이 성막, 천막, 천으로 만든 성전이라면 솔로몬 성전은 제대로 된 성전이고 솔로몬 성령까지는 이 땅 위의 성전이나 이 땅 위에 신앙의 생활로 나아갈 마지막의 목표 그 결과는 이 땅 위에서는 가질 수 없고 목표로만 달려가는 것인데 에스겔 성전은 담과 대문 이야기밖에 없다 할 만큼 그렇습니다. 담과 대문 이야기로만 빼곡하게 적습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목적이 완전자의 절대자의 창조라 그냥 우리를 만들며 막바로 천사가 흠모할 그 천사 위에 영생의 완전한 우리를 만들면 하나님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세상을 주시고 지옥을 만들어 놓고 타락이라는 과정을 거쳤는가, 쇠를 그냥 쇠로 만들어도 되는데 쇠가 용광로를 들락날락하며 녹였다가 찬물에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그 `초, 2초를 헤아려가며 그렇게 만들어 갑니다. 이렇게 들락날락하고 나면 말도 못하는 강철이 되어 집니다. 이게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죄 없이 만들면 절대자가 만들어도 절대자가 가장 좋게 만든 그 수준 그런데 그 절대자가 우리에게 타락의 과정을 주시면 죄 없이 타락 없이 만든 절대자의 최고의 작품보다 더 나아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은 영혼 전의 첫 순간에 하나님 같은 우리인데 하나님 같은 우리의 수준을 그 이상이 없고 그다음, 하나님 전부가 다 쏟아지는 방법으로 만들었으니 그게 죄입니다. 그래서 죄악의 세상은 피할 수가 없고 죄악의 세상은 은혜요 선물로 필수입니다. 아예 기본이 이렇게 되어져야 지난 8월 집회의 말씀처럼 이 땅 위에 건강 가정 경제 전쟁 등 어떤 불행도 어떤 환란도 그냥 감사로만 상대할 수 있는 자기가 되어 지고 이런 자기를 만들어 버리면  믿는 순간 그 어떤 불행도 아이야 자기 눈에는 없는 겁니다. 공부가 목적인 이유가 제대로 박히고 나면 학교에 어떻게 던져놔도 그건 다 좋은 것밖에 없는 겁니다. 이게 되지 않으면 이걸 방법론으로 밀고 끌고 가는 데는 많은 허비가 있고 내적으로 그냥 원하고 원해서 발버둥치지 않는 학생을 이걸 만들어 놓으려면 비용도 만들지만 결국은 제대로 되지 아니합니다.

그 모든 것을 담아 성막에도 성전에도 그리고 에스엘 성전에도 성전의 제1번은 담입니다. 구별입니다. 하나님 앞과 하나님 없는 생활을 완전 구별을 해버렸습니다. 이 안은 거룩할 성(聖)자고 이 밖은 세상 속(俗) 자입니다. 속세라, 속화라 그 속자가 세상 속(俗) 자입니다. 그냥 세상 속 자가 아니라 탈선한, 타락한, 나가버린 속자입니다. 기본적으로 성전을 강조해야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타락을 절대 예정에 넣어두셨고 목적 안의 첫 번째 순서이기 때문에 죄와 구원의 이 관계를 구별하지 못하고 난 뭐 뒤섞여 엉망이 돼버립니다. 주일과 평일, 예배와 일반 시간, 신앙과 세상 생활 철저하게 구별하는 이유는 죄인이니까 죄로 출발을 했으니까 세상밖에 몰랐으니까 주일이라도 예배라도 하나님 앞이라는 이 신앙만이라도 먼저 하나 붙들기 위해서 구별하고 그렇게 그러는 겁니다.

이걸로 전부가 아니라 전부 속의 주일 하나를, 모든 시간 중에 예배 시간을, 모든 생활 속에 신앙의 생활 하나라도 살리고 철저하게 유지하게 하는 이유는 이게 끝이 아니라 이걸 붙들어야 나머지를 점점 번져 나가 전부를 다 변화를 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형 사고가 나서 엉망이 되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이런 응급 환자를 데리고 오면 다 놔두고 심장부터 살핍니다. 심장 멎었으면 끝나고 다른 사람한테로 가고 일단 심장에 숨 붙어 있으면 인공호흡을 하든 뭘 하든 심장부터 살려놓습니다. 이게 살면 발가락이고 그다음 눈꺼풀이고 온갖 것은 뒤에 방법이 있고 순서가 있는 것이고 심장 멎어버리면 이거는 뭐 그다음 아무리 멀쩡해도 끝나니까 심장을 먼저 살리는 겁니다. 그 심장을 먼저 살리는 이유가 눈이 필요 없다,
팔다리가 필요 없다, 모든 장기가 필요 없단 말이 아닌 건데 뻔히 알면서 귀신은 주일과 예배와 신앙의 최소한을 붙들려고 노력을 하다 보면 생명을 붙들고 다 살려 나가기 때문에 귀신은 옆에서 뭐라고 히죽거리면서 한 마디씩 던지느냐 저게 주일은 교인이고 평일은 세상 사람이더라, 예배 시간에는 뭐 신앙생활에 그렇게 잘하는데 가정에서 보니까 엉망이더라, 이게 귀신의 유혹입니다.

믿는 사람이 주일과 예배와 신앙생활을 잘하고 가정과 친구와 사회생활과 학업과 직업 생활과 사회생활이 엉망이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전부가 죄인데 하나를 살려야 살려나가기 때문에 성전의 담을 그렇게 강조하는 겁니다. 제사장 아니고 상전의 출입의 방법 아닌 자가 다가오면 제사장 중에 울타리를 지키고 대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있어 칼을 들고 죽여 버립니다. 법이 그렇습니다. 그렇게까지 성막의 울타리를 그리고 성전에 문을 지키는 이유는 이것만이라도 붙들어야 모든 걸 살려나가는 다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걸 똑같은 현상을 딱 뒤집어버리면 시각을 바꿔버리면 저것들은 뭐 교회나 예배 때는 믿는다고 그러는데 생활을 보니 실천을 보니 아, 아이를 낳았는데 단번에 그게 성자가 됩니까? 뱃속에 아이를 가지면 이게 벌써 영어를 하고 이게 돈을 벌어옵니까? 말도 안 되는 억지지. 이게 성전 담입니다.

천하 세상 중에 이스라엘 중에 예루살렘 중에 그 다음, 작은 성전 하나 이 하나를 붙들면 이 속에서 하나님 앞에 들락거리며 배우며 은혜 받고 그리고 담을 나가 세상 속에 이제 세월 속에 천천히 이렇게 하나씩 바뀌어 가는 것이 순서며 그게 유기적인 생명체의 자라감인데 출애굽을 막아서다가 놓치니까 추격을 하다가 놓치니까 그다음, 가나안에서 기다렸다가 성전을 못 짓게 480년 버티다가 드디어 성전이 마련되니까 밖에서 뒤흔드는 겁니다.

오늘 우리로 말하면 주일을 알아야 평일이 이제 주일답게 슬슬 바뀌어 나갈 것이고 시간 중에 제일 귀한 예배 시간을 울타리로 쳐서 그 안이라도 붙들고 있어야 그 다음 예배의 밖의 시간이 조금씩 나아질 것이고 필연적이지 않습니까? 이제 막 시작하고 첫 은혜 받고 주일과 예배와 신앙이라도 잘 해보려고 그러면 집구석에 와서 살림은 이래 사는 게 교회만 쏘다니냐? 경제는 뭐 이렇고 직업은 이런데 뭔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 다냐? 교회에 다니는 것들은 교회 가서는 천사고 나오면 엉망이더라, 제일 집중하는 게 목사 강단의 입입니다. 뭐 강단의 입이야 뭐 다 멋지나 목사들부터 많은데 아니 목사 되면 바로 천사가 됩니까? 그건 천주교입니다.
천주교는 교황 되고 신부되면 죄가 없다 그럽니다.

기독교는 출발부터가 교인이나 목사나 똑같은데 뭔 소리냐, 그러고 출발한 겁니다. 왜 목사 세웠냐? 하나라도 돈 주고 좀 예배당에 앉혀 놓으면 나을까봐 나아지면 옆으로 번져가며 더 나아질 것이고 다른 사람들 혜택 볼 것이고 하나 한 번 한 걸음 앞세워 놓고 나머지 뒤 따라 가기 위해서 똑같은 데 하나 대표로 세워 봤을 뿐이지 안수하고 이름 갖다 붙였다고 그날부터 사람 되는가? 그런데 목사 이름 딱 얹어 놓으면 귀신이 교인 마음에 들어가 가지고 천사인데 보자, 아니 이렇고 저러네? 이게 귀신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아, 인간이라 다 죄를 짓는데 우리보다는 나으니 그래도 길러가며 기다려주자, 또 이렇게 마음을 먹으면 이거는 그런 유혹을 안 받는데 이런 마음을 딱 먹으면 이번에는 또 오른쪽으로 당기던 귀신이 중앙을 잡으면 또 왼쪽으로 또 당겨버립니다. 이번에는 어떤 마음을 주냐? 아니 뭐 하나님 앞에 너나 내나 같은 죄인이고 같은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았으니까 너나 나나, 이래놓고 그 다음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든 교회와 앞세운 교회의 위임 대표 책임자를 또 쥐어 박게 만들어 버립니다.

처음에는 모세 너나 내나 그러다가 열 재양과 홍해 바다를 건너고 보니 이제 급이 다릅니다. 급이 다르니까 그 다음, 고라를 앞세워 가지고 너나 나나, 이 또 평준화를 만드는데 그 평준화의 뜻이 하나님 앞에 같은 죄인이니 같은 말씀으로 나아가야 되는 분담이 있고 위치가 있다다, 그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를 앞세워 그다음 끌어가는 과정에는 부모가 있고 사회에는 왕이 있고 교회는 당연히 앞세우는 종이 있는 법인데 그거 무시해버립니다. 좌우로 넘어진다고 죄 되고 우로 넘어진다고 무조건 좋은 거 아닙니다. 좌로나 우로나 정도에서 치우치면 똑같은 죄가 됩니다. 모든 것을 막는 것이 담입니다. 구약은 성전의 담 안에 첫 번째 순서가 제단, 담 밖에서 설치된 주관 세상 자기를 잡는 데가 제단입니다. 아하스가 이거 치워버리고 처음부터 담을 치웠다가는 온 나라에서 구경할 테니 담 안에 첫 단계가 놋 단인데 놋 단 치워버리고 놋 단 다음이 자기를 씻는 말씀의 회개인데 회개하는 세숫대야 물두멍 치워버리고 하나씩 둘씩, 하나씩 둘씩 제거해 나간 것이 지금부터 한 2천 5백년은 넘을 것이고 3천 년 안 될 것이고 그 중간쯤입니다.

신앙생활 제대로 한다고 내가 아니라 남들이 볼 만큼 세월이 지나고 신앙생활을 한 이런 새벽 기도에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성전은 안 울타리 지켜내야 됩니다. 부족하든 말든. 그다음 울타리 밖에서 뛰어 돌아다니던 생각 습성 그 어떤 것도 담 안에 들어오면 잡아야 됩니다. 구약은 자기를 위해 양 한 마리를 잡았고 오늘은 내속의 성격 인격 지식 사고  방식 하나하나 잡고 나서 그다음, 세상에서 가져 묻혀온 것 하나씩 씻어내고 그리고 들어가는 데가 하나님이 직접 계신 성전 안에 집입니다.

오늘도 세상에서 생각한 날들이 뭔가? 그런 게 있습니다. 주님은 7일에 하루 주일과 평일로 나눠 버립니다. 이게 담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그냥 시간으로 봅니다. 직업에 따라 나이에 따라 형편에 따라 그냥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시간과 아닌 시간 딱 잘라버립니다. 신앙이 있든 없든 일단 잘라놓고 그 안에서 다시 계산합니다. 그리고 만사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신앙의 부분과 그리고 내가 맡은 세상 속에 활동해야 되는 둘로 나눕니다. 나눠놓고 그 다음 이제 번져가고 넓혀가고 길러가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여기 성전 울타리는 아직까지 치우지 아니하고 14절에 여호와의 앞 제단부터 제거하고 들어오고 17절에 물두멍과 그 물두멍의 배경이 되는 회개의 근본이 되는 물탱크에 해당되는 놋바다를 치워버립니다. 타락의 순서와 같습니다. 읽고 그다음 우리는 그 반대로 가면 그게 구원이고 오늘의 복이고 이 말씀을 기록한 이후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화요일 오늘 하루에 새벽 시간 이건 하루에 성전에 소중한 부분으로 삼겠다, 그러면 그리 되는 겁니다. 주일에 오전만 그러겠다, 그 발전 과정에 그럴 수 있습니다. 밤 예배까지 그러겠다, 그럴 수 있습니다. 각자 자기가 세워놓은 성전 울타리 구약은 손도 댈 수 없고 신약은 자라감에 따라 형편 따라 자유롭게 정할 수 있습니다. 단 갈수록 한 걸음씩 넓혀 나가야지 천하  없어도 한 걸음씩 후퇴하면 후퇴하는 의인은 하나님은 이미 죄인으로 보십니다.


1차-k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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