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밤22.8.24 계1:9 주일의 은혜로 사도 요한의 전환, 설교 찬송 기도의 예배와 주일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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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밤22.8.24 계1:9 주일의 은혜로 사도 요한의 전환, 설교 찬송 기도의 예배와 주일의 본질

관리1 0 108 2022.08.2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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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4 수밤

 

제목 : 주일의 은혜로 사도 요한의 전환, 설교 찬송 기도의 예배와 주일의 본질

 

찬송 : 196(너 시험을 당해)

 

본문 : 요한계시록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다 같이 묵도 드림으로 예배 시작하겠습니다.

 

(기도)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구약의 안식일로 세상생활 속에 주의은혜로 재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주님, 주님 오셔서 신약으로 사활의 대속 붙들고 어떤 세상이든 2차 창조의 신령한 것을 만들어 가도록, 인도해 주시고 또 이 밤도 불러주셨으니 만사 주의은혜 감사하고, 좋아질 때 방심하지 않게 하시고 나빠질 때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보이는 모든 것 뒤에 절대주권의 주님이 우리 구원 위하여 복되게 인도하심만을 믿어, 모든 현실 환경 속에 주의 인도를 발견하고 따르는 매일이 되게 하시고 이 밤이 되게 하시고, 3일 예배로 향하는 모든 마음과 걸음걸음 되게 해주옵소서. 이 시간도 군무와 병원과 요양과 출타와 또는 시공을 초월하여 먼 곳에서, 이 마음 이 중심으로 주일의 은혜를 붙들고 매주를 복되게 살고자 원하는 우리 모든 교인들, 어두워져 갈수록 밝은 빛을 비출 수 있도록 자기진리의 빛을 마련하는 시간들 되도록 인도해주옵소서. 이 밤도 함께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주의 날 주일에 성령의 감동을 받고 평생 복되게 신앙생활 잘했던 사도요한이지만은, 또 이 주일날 성령의 감동하여 살아온 날 또 성령의 인도를 따라 다시 마음이 새롭게 되어졌고, 새로워진 마음으로 본 것이 11절에 일곱 교회입니다. 여기 일곱 교회는 당시의 일곱 교회인데 주님 오실 때까지의 신약의 모든 신앙, 개인이든 가정이든 교회든 주님 오실 때까지의 모든 신앙의 종류를 7교회로 표시해 놨습니다. 신약시대 전부의 교회가 한눈에 보이게 되는 이런 사도요한의 감동 이렇게 눈이 열려버린 것은 시공을 초월한 신령한 은혜인데, 이렇게 큰 은혜를 받게 된 것이 바로 주일입니다. 사도요한에게 계시록을 본 그 주일은 특별하지 않느냐? 특별합니다. 근데 그 특별한 은혜가 우리에게도 매주일 특별하게 주어집니다. 믿고 준비하고 받으려 하면 받을 것이고 설마 그렇게까지 그렇겠느냐, 그러면 은혜를 줘도 못 받습니다. 참 세상에도 그런 일은 많습니다. 수도 없이 이야기하지만은 유럽에서 배 타고 무조건 가면 무조건 아메리카 대륙 미국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이게 섬이면 비껴가는데 유럽보다 더 크고 하도 길고 큰 나라라. 끝까지만 가면 무조건 도착을 해버립니다. 근데 그게 그렇게 큰 게 있을 줄 알았습니까? 가본 사람은 혼자 다 쟀고 설마 그렇게까지 그렇겠느냐 그 사람들은 가기 싫고 도전하기 싫어, 남들 다 차지하고 나서 뒤에 들어가려니 비자 받느라고 그렇게 어려워 줄서고 난리입니다. 먼저 가면 다 제 건데.

 

역사적으로 이 땅 위에 그런 일을 하나 준비해 놓으신 것도 이 땅이 그 땅이야 가든 안 가든 그건 큰 문제가 아닌데, 아 적게 먹어도 뭐 신풍 살면 미국 다 가진 것보다 뭐 별로 부족하고 모자란 거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네 끼 먹습니까? 세끼 먹지. 두고 갈 땅에 건 역사를 한번 보여주면서 하늘이 이렇다면 어떻게 할래? 이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위에 그런 기적 그런 기막힌 일들을 한 번씩 주십니다. 그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60년대 공대는 석탄과가 제일 셌습니다. 탄광 가야 돈 번다고. 70년대가 되니까 섬유 옷 실 뽑는 실공장 가야 돈 번다고 전부 머리 좋은 사람들 그쪽으로 갔습니다. 먼저 간사람 돈 벌고 뒤따라가는 사람들은 헛고생하고, 먼저 간사람 돈 벌고 뒤따라가는 사람 헛고생했는데, 그 뒤에 가는 사람들은 참 그렇게까지 사람들이 그럴까 그래 싶습니다. 그 세상에 이런저런 일을 많이 펼쳐놓고 땅의 것은 이러나저러나 큰 차이 나지 않는다. 하늘나라 영생이 고정될 터이니 영원을 두고는 헛일하지 말아라. 그것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고 그렇지 않느냐? 이건 무조건 됩니다.

 

사도 요한이 주님을 일찍 만난 분입니다. 제자들 중에서도 그리고 주님 제일 가깝게 따라다닌 사람입니다. 주님 무릎에 기대고 누워서 이렇게까지 허물없이 주님과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엄청나게 주님을 잘 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12제자 중에 주님을 제일 가깝게 제일 잘하는 사람 이 정도입니다. 사장님 운전기사야 운전할 때만 잘 알겠지, 사장님 집의 식모는 뭐 가정에 무슨 일이 있는지 다 알겠지. 사도요한은 유일하게 주님 품에 안겨 눕기도 했던 그런 제자입니다. 주님을 제일 잘 안다고 생각을 했는데,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보니까 생전의 주님하고는 비교도 안 됩니다. 참 생전에 알던 주님은 비교도 못 하겠구나. 부활 후 주님을 보며 이제 주님을 안다 생각하고 죽는 날까지 주님을 전하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계시록 110절에 그 주일날 성령의 감동이 되어 지금까지 아는 주님. 주님은 키가 이렇고 모습이 이렇고 주님의 모습은 기록에 나오지 않습니다. 혹시 친척들이 예수님 사진 그림 이런 것 주시면, 성경에 읽어보니까 이런 게 없던데 나는 성경 그대로 믿으련다. 그러고 그냥 물리치든지 아니면 받아서 어디 좀 놔두는 게 좋습니다. 주님은 사진 그림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도요한은 주님을 직접 본 분입니다. 부활의 주님도 봤습니다. 생전의 주님보다 부활의 주님이 훨씬 좋았습니다. 그리고 평생 주님을 전하고 주님은 이런 분이라 전도를 하고 가르쳤는데 여기 밧모라는 섬에 귀향 갔을 때쯤은 90이 넘었다. 100살쯤 됐다 그런 말들이 있는데 정확하지 않아도 굉장히 나이가 많았을 때입니다. 평생 주님을 모시고 주님을 가르친 주님을 제일 잘 아는 사도요한이 자기는 주님을 굉장히 잘 안다고 생각을 했는데, 계시록 110절에 주일날 마음이 열리며 성령이 다시 한 번 주님을 보여주는데, 지금까지 알던 주님의 방향과 반대로 돌아서서 다시 주님을 새로 보니까, 뒤에 한 페이지 넘겨서 한 페이지 넘기기 전 17내가 볼 때에주님을 볼 때에 넘깁니다. 그 발 앞에 주님 발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 같이 되었더라.” 주님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을 했는데 주일날 성령의 감동이 되어 더 밝아지고 더 깨끗해진 지식으로, 다시 주님의 머리칼을 보고 그 눈을 보고 그 입을 보고 그 발을 보고 그 입은 옷을 보니까 놀라서 기절을 해버렸습니다. 이런 분이셨구나.

 

지난주일 오전오후에 학생들한테 뭔 숙제를 드렸을 건데, 어머니 생일은 어떤 날인가 내 생일은 어떤 날인가 생일 연구 좀 해보라고 그랬습니다. 나 태어난 내 생일은 어머니 고생한 날입니다. 나 좋아할 게 아니라. 20살이 되고 40살이 되고 나이가 많아져 보면 어릴 때 알던 어머니보다, 어릴 때는 어머니 품이 있었는데 나이가 많아지면, 어떤 분은 1년에 한 번 보고 어떤 사람은 멀리 가면 1년에 한 번도 못 보고 그럽니다. 근데 세월이 지나가고 보면 어머니는 너무너무 높아서 그 키를 재지 못하겠고 그 사랑을 담을 수가 없겠구나. 해서 어머니 사랑은 하늘보다 높다. 요 하늘 우주 하늘보다는 좀 높을 겁니다. 그렇다고 천국까지 가는 건 아니고 저 바다보다 깊다. 저 바다보다는 깊을 겁니다. 영계만큼 깊지는 못합니다마는 그거 어머니 품속에 뒹굴며, 어머니하고 24시간 10년 살아도 그때는 모릅니다. 떨어져 봐야 알지. 자기가 아이를 낳아봐야 알지 낳아놓은 그놈이 애를 먹여야 알지.

 

사도요한이 주님을 생전에 직접 모시고 다녔습니다. 그 품에 드러누운 사람은 요한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가까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보니까 알아보지를 못할 만큼 너무 높은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껏 평생 우리 예수님 구원의 주님은 이런 분이라고 가르쳤는데, 평생을 가르치고 이제 죽을 때가 다 돼가지고 정말로 주님을 너무 잘 안다 생각을 했을 때, 여기 계시록 110절 어느 주일날 성령이 다시 또 한 번 더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는데, 지금까지 알던 주님과 돌아서서 새로 보니까 주님은 내나 그 주님인데 12, 사도요한이 몸을 돌이켜 뒤에서 나는 소리를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몸을 돌이켰습니다. 몸을 돌이켜 뒤를 보니까 일곱 금 촛대가 보였습니다. 일곱 금 촛대는 하나님의 교회를 말합니다. 그 촛대 사이에 그 교회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주님입니다. 옷을 입었는데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걸음걸음 저렇게 신중했구나. 발에 끌리는 옷을 입으면 함부로 노닥거리지를 못합니다. 발에 끌리는 옷 입고 도망가겠습니까? 뭐 장난치겠습니까? 구약의 제사장 옷은 발에 끌리는 옷입니다. 조심하라고. 주님은 하나님이신데도 우리구원 날 위하여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완전 자 무한자 절대자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그 행동 하나하나 나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율법의 정죄 앞에 흠도 점도 없는 행동, 지옥 데리고 갈 악령 귀신이 흠을 잡으려고 아무리 뒤져도 흠도 점도 없는 완벽한 행동, 하나님과 동행의 소망에 어떤 면으로든지 흠도 점도 티도 없는 그 행동 위하여, 만유 주 하나님 사람 되어 한 발 걸음 발걸음 그렇게 조심하셨습니다. 아이 가진 엄마들은 아이 때문에 조심할 겁니다. 주님 우리 위하여 조심한 것이 훨씬 더 조심을 많이 했습니다. 나이가 많아지고 자꾸 부모의 위상이 좋아지면 부모 때문에 아이들 손해 볼까봐 더 신중해지고 조심합니다. 주님 우리 위하여 조심한 것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일까 하면 비교가 안 됩니다.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주님의 가슴에 금띠를 띠고금띠를 띠고? 그 머리카락 그 몸에 털 하나하나가 흰색인데 거룩한데 흠도 점도 없는데, 주님에 속한 것은 그 어떤 티끌 하나도 흠도 점도 없는 깨끗한 거룩한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주님의 두 눈은 요한이 잘 아는 눈인데 새로 주님의 두 눈을 보니까 불꽃 같고, 그 주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요한이 주님의 품에 드러누웠을 때 요한의 심리를 알았고 과거를 알았고 훗날을 알았고, 요한은 마음속에 담아두면 주님이 자기마음 다 모를 줄 알고 별의별일 다 했는데 주님은 그거 다 보고 있었던 겁니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겁니다.

 

그의 발은 풀무에 달련한 빛난 주석 같고” 15절 주님의발, 주님이 이 땅위에 걸어가신 걸음걸음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어떤 고난을 당하셨는지, 날 위하여 대신수고 얼마나 하셨는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다. 쇠를 녹이는 용광로에 주님의 발이 들어갔다 나왔으니 그 발이 멀쩡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람 되어 이 고생 이 고난 그 걸음 그 조심 다 하셨구나. 사도 요한이 제자들 교회를 위하여 조심한다고 했는데 사랑한다고 했는데, 모든 교인들은 요한을 의롭게 거룩하게 깨끗하게 봤는데 그리고 요한은 주님을 안다고 가르쳤는데, 주일날 성령의 은혜를 받아 눈이 밝아지고 돌아보니까 지금까지 안 것은 뭐 갖다 대지를 못하겠습니다. 그만 죄송하고 감사하고 주의 은혜와 요한의 차이가 너무 나서 엎드려 그냥 거의 죽어버렸습니다. 놀래서. 이런 은혜를 받는 날이 주일입니다. 돈 벌기 바쁜데 하루일당 손해보고 나오는 주일 그런 주일이 아닙니다. 또 한 주간 돈을 잘 벌려면 주일날 잘 쉬어야 돈 벌러 열심히 나가야지. 그렇게 놀고 휴식하고 돈 잘 벌라고 준 주일 아닙니다. 또 가족이 주일날은 편안하게 둘러앉아 대화도 하고 이렇게 오붓하게 가정행복을 위하여 떼 놓은 주일이라. 처음 믿을 때는 다 주일이 그런 줄 아는데 주일은 그런 데 쓰는 게 아닙니다.

 

아니 결혼 금반지를 갖다 빼다가 엿 바꿔 먹으면 그거 제정신입니까? 엿 장사가 있어야 엿장수를 알 건데 요즘 애들한테는 뭐라고 그래야 압니까? 다이아 반지를 빼다가 그냥, 그냥 종이 한 장 하고 바꾸는 그런 일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주일에 요한계시록을 받고 계시록을 보니까 주님 올 때까지 신약이 다 보여 버렸습니다. 요한에게 어느 주일은 그런 은혜를 주시지만은 내게도 그런 주일 그런 은혜를 늘 주시는가, 주님은 그렇게 주십니다. 내가 눈을 감고 있으니까 못 보는 거지. 장맛비 석 달 폭우가 퍼부어도 물통에 뚜껑을 닫아 놓으면 물 한 방울도 안 들어갑니다. 안 들어가는 게 정상이지. 한여름 대낮에 햇빛이 마구 쨍쨍 쬐이는데도 눈 딱 감고 돌아다니면 태양이 없네. 안 보입니다. 없어 없습니까? 안 보니까 안보이지. 주일의 은혜는 또 성경에 기록한 모든 은혜는 항상 우리를 위하여 대기하고 준비되어진 은혜입니다. 이걸 줄까 저걸 줄까 그것만 다르지. 주일에 깨달은 결심, 주일에 깨달은 새로운 지식, 주일에 돌이킨 것만 앞으로 7일 써먹을 수 있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주일날 거머쥐지 못한 것은 한 주간 살아봐야 새로이 나아지는 건 없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기름을 한 되 넣으면 차는 기름 한 되 치만큼만 갑니다. 한 되가 몇 리터인가요? 추 이솔. 한 대가 이만큼인데 한 대가 몇 리터인지 혹시 아나요? 2.5리터 정도 될 겁니다 한 되가. 맞습니까? 2.5리터 대략. 1리터짜리 물통 두 개 정도면 한 됩니다. 차에 한 되 기름을 넣으면 한 20km 갑니다. 20km 가가지고 한 되 기름 마지막 한 방울 똑 떨어지면 차 무조건 섭니다. 휴게소에서 기름 넣은 것만큼만 갑니다. 20km만 간다고 했는데 한 되에, 휴게소에서 기름 한 되 넣고 20km 갔는데 만약에 10km를 더 간 사람이 있으면 차 세워놓고 걸어갔을 겁니다. 아니면 남의 차를 타고 갔든지 그 차로는 못갑니다. 휴게소에서 40리터 기름을 넣으면 여수에서 서울까지 갑니다. 400리터면 400km 주일날 깨달은 거 주일날 바뀐 거 주일날 받은 거 주일날 기회만, 6일을 살아가며 이걸 천국 갈 자기기회로 바꿀 수 있습니다. 주일날 못 받은 것은 못 바꿉니다. 주일이 빵점이었는데 그러면 6일은 빵점이니까 놀아도 되지 않느냐 그게 아니고, 이번 주일 빵점이니 6일간 열심히 준비를 해야 그 다음 주일날 받을 은혜를 받습니다. 주일 전 6일은 오는 주일을 준비하는 주일입니다. 휴게소까지 가야 기름을 사든지 채우든지 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주일이 실패되면 한 주간은 이미 실패했고, 그런데 이번 한 주간은 다시 준비하여 그 다음 주일 은혜를 받아 그 다음 주일은 만회를 하는 겁니다. 주일이란 이런 게 주일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신약에 주님 오시는, 모든 개인과 교회와 가정의 신앙의 형태와 형편 전부를 요한이 순간적으로 다 봐버렸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내가 살아갈 한 주간 나하고 상관된 앞날은, 항상 주일에 밝아진 눈으로 그다음 볼 수가 있는 거고, 눈이 침침한데 안과 병원 가가지고 요즘 레이저로 가지고 깨끗하게 해버리면, 안경도 던져버리고 콘텍트도 던져버리고 눈이 아주 밝아진답니다. 안과 병원 가서 수술해서 밝아진 눈, 밝아진 눈 감고 살면 수술 하나마나 같습니다. 밝아진 눈 좋은 눈 이제 이걸 가지고 이제 들여다보기만 하면 예전과 달리 밝아 보입니다. 이게 주일이고 주일아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주일은 수술하는 날이다. 눈을 밝게 하는 날이다. 위장 수술해서 뭐든지 먹을 수 있게 해주는 날이다. 관절 치료하여 손발이 옛날처럼 좋아지는 날이다. 좋아진 걸 가지고 주저앉으면 효력은 못 봅니다. 고치지 않고는 뛰 돌아다녀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을 주일 하나를 가지고 모든 걸 평가하는 것은 주일 하나가 전부는 아닌데, 주일을 보면 안다 그 말입니다.

 

주일로 시작하고 주일로 모든 걸 가질 수 있으니 이거는 믿는 첫 순간에 가르치는 것이고, 우리 교회처럼 손 목사님 계통으로 이렇게 세워졌고 공회에 선교회들은, 주일 학교 때나 주일 가르치지 장년반 상대로 주일 설명하고 그럴 일은 별로 없는데, 최근에 이런 저런 여러 기회로 제가 관심 있게 지켜보는 저 어디 교회 어디 교회, 일부러 갈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어 그냥 상관을 안 하는데, 요즘은 하도 이렇게 서로 광고를 해서 눈에 들어오니까 기대했던 어느 교회 그 우리보다 잘 믿는 어느 교회 우리보다 잘 믿는 교회 엄청 많습니다. 특히 공회 안에는 공회 한 200개 교회 중에 우리 교회는 뒤에서 아마 한 50등 정도밖에 안 될 겁니다. 신풍교인들은 못 모르고 손 목사님 가족이 세웠다고 1등인 줄 아는데, 그 역사로 보면 1등에 들어갈 수 있지만은 신풍교회의 신앙은 공회 200개 교회 중에 중간이 안 됩니다. 굉장히 낮습니다. 근데 교회로 봐서는 굉장히 123등 한 5등 안에 들어가는 교회들, 이 교회 저 교회를 우연히 이렇게, 이렇게 접해 봐보니까 주일 다 없어져 버렸고, 예배 다 갈아치워서 예배 없어졌고, 주일 없어지고 예배 없어지고 찬송도 없어져 버렸고 기도도 없어져 버렸고, 설마 이런 교회의 기도가 정말로 없어졌을까?

 

주일날 사회 보는 그 대표 기도하는 분들이 기도문을 집에서 써와가지고 기도문을 읽으면서 기도합니다. 기도하다가 모르면 또 보고 또 모르면 보고, 설교는 보고하는 것이 좋습니다. 실수할 가능성이 있으면 실수 안하기 위해서 설교는 보는 것이 낫습니다. 실수 안하도록 준비하고 외워서 안보고 하면 더 좋은데, 서툴러서 실수할 바에는 설교는 보고 하는 게 낫습니다. 설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는 뒤죽박죽 틀린 게 많아도 안 봐야 그게 기도입니다. 왜 그런지 혹시 아십니까?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세를 봅니다. 저게 애가 타는가? 저게 애가 타는가? 이것만 봅니다. 뭐 울던 두드리든 뒤로 넘어지든 억지를 쓰든 곱게 말을 하든 정말로 저것이 애절한가? 정말 애가 타는가? 기도는 주님이 이걸 제1로 봅니다. 회사는 돈 잘 벌면 최고의 회사입니다. 군인은 적을 잘 죽이면 좋은 군인입니다. 배달부는 빨리 갖다 주면 최고입니다. 배달부 예뻐 봐야 빨리 안 갖다 주면 무슨 소용? 군인이 아무리 친절해도 못 이기면 뭔 군인? 돈 못 벌면 그게 회삽니까? 기도란 하나님께서 다 좋은 게 좋은데 기도한 하나님께서 제일 생명적으로 보는 게, 하나님 앞에 애절하고 간절하고 하나님 앞에 자세가 어떤지가 제일 중요합니다. 눈 뜨고 기도문을 읽는 것보다는 눈 감는 게 그게 애절한 기도입니다.

 

근데 왜 기도문을 갖다가 다 적을까? 기도문을 집에서 적어오면 기도문이 멋이 있습니다. 화려하게 예쁘게 아름답게 또 구색을 딱 맞춰서 누가 봐도, 그 기도 참 다양하고 예쁘고 모든 내용을 포함하면서 교리도 높고 쉽고 기도가 그냥 딱 멋진 훌륭한 기도구나. 기도는 주님이 그걸 보는 게 아니고 주님 아니면 못 견딘다고 뒹구는 그 애절 간절을 봅니다. 주님 앞에 이거 이래서안 되겠습니다. 돌아서겠습니다. 이거는 주셔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애가 타는 기도가 말이 바뀌고 표현이 잘못되고 뒤죽박죽 해도 상관이 없는 것은, 기도는 교인한테 내 기도 들어볼래? 이렇게 발표하는 설명이 아니고 하나님께 올라가는 기도라. 하나님은 내 마음을 다 압니다. 애가 타는데 저게 말이 헷갈렸구나. 단어가 잘못 쓰였구나. 기도는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라 뭐 뒤죽박죽해도 다 알아봅니다. 상관이 없습니다. 근데 대표 기도가 되면 모든 교인이 함께 기도를 하는 대표기 때문에, 함께 기도하는 사람이 알아 들어야 됩니다. 기도하는 분이 뭔 부처님 날 살려달라고 했다고 대표 기도하는 사람이 마음속에 부처한테 기도했다고 듣겠습니까? 실수로 듣지. 좋은 게 좋으나 기도는 하나님께 애절하게 간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네가 얼마나 급하냐? 내가 정말로 얼마나 급하냐? 이걸 보기 때문에 기도는 눈 감고 하는 게 좋습니다. 내용이 빠지기도 하고 그래도.

 

설교라는 것은 하나님 내 말 들어보셔야 됩니다. 이게 아니고 제가 이렇게 발표를 잘합니다. 하나님께 광고 선전 설명 채점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교회에 어떤 말씀을 원하시는가? 이걸 붙들고 교인들에게 세상이 이러니 우리가 이런 거 조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교인들에게 전하는 것이라 교인들이 알아먹어야 그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설교는 하나님한테 들으세요. 가 아니라 교인들한테 하나님께서 이런 걸 원합니다. 이것 싫어합니다. 세상이 이런데 우리는 이렇게 가야 됩니다. 그래서 설교는 내용이 정확한 게 제일 중요합니다.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실수하니 차라리 원고를 써서 읽는 게 좋습니다. 근데 원고를 써서 읽다보면 듣는 사람들의 시선이 흐트러지다 보면 들리지를 않으니까, 내용은 최대한 정확하게 잘 외우고 잘 전하되 교인들의 눈을 보면서 설교를 하시라. 그래야 집중이 되고 마음이 열린다. 라고 하는 겁니다. 설교는 정확해야 됩니다. 기도는 간절이 필요한 겁니다. 근데 설교하는 데 보면 원고 없고 그거야 다 전문가니까. 기도하는 데는 원고를 가지고 읽고 기도한다? 어린 교인도 아니고 가정 예배도 아니고 공회전체에서 123번 손꼽는 교회인데, 그 정도면 대한민국 몇 손가락 가는 교회일 건데, 주일 오전 사회면 그 교회 교인 중에 최고에게 맡겼을 텐데, 우리 교회보다 기도를 잘한다. 못한다 말이 아니라 기도가 뭔지를 몰랐다 그 말입니다. 기도는 정성인데 기도는 간절인데. 기도에 간절을 빼버리고 자세를 빼버리고 하나님께 드릴 기도를 교인들한테, 제 기도 소리 한번 들어보시라 기본적으로 이건 기도가 아닙니다.

 

또 찬송이란 들어보니 하나님께 참 감사하다. 들어보니 하나님께 참 죄송하다. 그런데도 이렇게 은혜 주시니 감사하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가 찬송입니다. 찬송. 다섯 살짜리가 엄마가 좋아서 막 그냥 악을 쓰면 시끄럽다고 쥐어박습니까? 말 못한다고 벙어리라고 그럽니까? 말은 못해도 엄마를 보면 좋아서 발버둥을 치는 그 모습을 좋아하는 거지. 서른 살 대학 나온 며느리가 어른들 앞에 막 그냥 아나운서 목소리로 그냥 이렇습니다. 이렇습니다. 쫙 인사말을 하는데 참 마른 비단처럼 매끈한데, 그 속에 뭐 그냥 별로 감사는 보이지 않는구나. 아이 남자가 좀, 좀 모자란데 제가 이러고저러고 열심히 해가지고 돈을 이렇게 벌었습니다. 못난 내 아들 때문에 네가 고생한다. 참 미안하다 찬송이 아닙니다. 요즘 남자가 남자 같은 남자가 없는데 이 남자는 나밖에 모릅니다. 그러면 돈 안 벌어줘도 괜찮고 이런 고운 아들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참 어떻게 아들을 잘 낳아 놓으셨습니다. 돈은 벌고 오냐? 이 뭐 돈이 뭔 필요 있습니까? 제가 벌면 되는데. 저는 저만 쳐다보는 남자 하나면 됩니다. 이 남자 참 잘 낳아놓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찬송입니다.

 

제 목소리 들어보시겠습니까? 제가 얼마나 버는지 들어보시겠습니까? 당신 아들 인간 노릇도 못하는데 제가 이 가정을 일으켜 세워서 손주가 이리되고 저리되고, 이건 시부모한테 와가지고 그냥 판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겁니다. 예배당의 찬양대 예배당의 찬송인도가 이 목소리가 얼마나 좋은 성악인지 한번 들어보십시오. 화음이 어떤지? 얼마나 멋있는 곡을 얼마나 아름답게, 그건 서울시립 합창단한테 들어도 웬만한 교회 찬송가보다 더 은혜롭습니다. 우리 서인교회는 서울 옆에 안산시에 있습니다. 안산시는 시장과 의원들이 전부 다 교인들이라 그런지 모르겠는데, 안산시립 합창단은 죽으나 사나 찬송가만 불러댑니다. 거기에 권사님들만 찬양을 해도 안산시립 찬양대가 성가대가 부르는 노래는 찬송을 불러도 그건 세상 노래입니다. 중이 찬송가 5장 복의근원 부르면 찬송가 됩니까? 노래자랑 되는 거지. 불교인들이 찬불가라고 불교인들도 성가대 만들어 놨는데, 불교찬양대가 성탄절이라고 거룩한 밤 고요한 밤 노래 부르면 찬송입니까? 그 성가대 발표지. 안산시립 찬양대의 찬송가 부르는 것은 하도 곡이 좋아 저도 한 번씩 듣습니다. 그건 합창이지 찬송은 아닙니다.

 

노래를 잘 부르지 말라 말이 아닙니다. 목소리 키우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깨지는 소리는 깨진 거답게 애는 애답게 무식하면 무식한 거답게, 주님이 감사해서 찬송을 부르면서 아이 복의 근원 강림하사 이렇게 좋을 리가 있나? 곡조와 박자와 음정이 뭐가 맞으면 더 좋은데 안 맞아도 감사가 들어 있는 찬송이 찬양입니다. 목사님 가시고 나니까 찬양대가 전부 다 성가대가 되고 성가대가 다 그냥 합창단이 돼 버렸습니다. 아직까지 우리공회 밖에서는 저건 찬양이다 싶은 걸 별로 본 적은 없습니다. 찬송 없어졌지 기도 없어졌지 찬송 기도 없어졌으면 예배가 아니지. 주일이 없어진 지는 한 40, 50년 됐지 공회도 30년 전부터 주일 없어졌습니다. 우리에게만 몇 남은 우리에게만 주어졌는데 이런 소식이 요즘 공회 안에 다른 교회 소식이 들려서 요즘 주일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여기 계신 분들 주일문제는 아니고. 신앙대로 하지 그러면 어떻게 다 잘하겠습니까? 그러나 교회는 기본 방향이 있습니다. 개인은 아무리 어떤 일을 다 해도 교회란 교회로서 지켜야 되는 게 있습니다. 또 교인이란 그렇게 못 살아도 알기는 알아야 됩니다. 학생은 공부하는 게 맞는데 알기는 알아야 됩니다. 공부가 안 되는 거야 어떡하겠습니까? 그건 사람마다 다른데. 회사란 돈을 벌어야 되는데 그게 회사입니다. 못 벌지라도. 군인은 총이 무서워 도망을 갈지라도 이걸 갖다가 적을 이겨야 군인인데, 참 도망가는 군인이라 서글프다 알기는 알아야 됩니다. 교회란 주일 예배 그다음 기도 찬송 기본이라는 게 있습니다.

 

여기 밤 예배에 참석하는 분들 새벽예배에 참석하는 분들부터, 다시 한 번 주일을 좀 철저하게 기억하셔서 노력해도 안 되는 건 할 수 없고, 아무리 해도 40등밖에 안 되는 사람한테 1등 우등상 가져오라고 그러겠습니까? 1등 하면 좋은데. 60등이 40등 한 것만 해도 장하지 그런데 40등이 1등인 줄 알면 안 됩니다. 내 노력으로 다 해가지고 40등까지 올라온 것은 장황한 겁니다. 잘한 겁니다. 더 올라갈 수 있는데 40등에 앉아서 노는 건 안 되고. 자기 신앙은 각각 다릅니다. 원리는 아셔야 됩니다. 밤 예배와 새벽예배에 참석하는 분들은 주일이란, 사도요한이 9절에 나 요한은 너의 형제다 요한이나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나 똑같습니다. 입장이 같습니다.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다아 요한이 나와 같으니 나도 요한처럼 예수님의 환난, 예수님의 나라, 예수님의 참음. 예수란 구원 아닙니까? 구원의 운동 구원의 유익을 위하여 살다 보면 어려움 오는 거고, 그러다 보면 주님께 붙들려 살려고 참음으로 인내로 계속 해야 되는 것이고,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가 이렇다고 내가 그리 살아야 되고 남들한테 알려야 되고, 그게 알려지게 돼 있고 또 예수님은 이런 구원이라는 것이 그렇게 되어지는 겁니다. 이리 살다보면 저절로 세상 생활에서 불리해지고 외톨이가 되고 밀려나게 돼 있습니다. 갈 자리에 못 가니까 어울려야 되는데 못 어울리니까. 술자리가 돈이 술자리에 앉아서 돈은 술잔을 내 앞에서 그냥 넘겨야 되니 남들이 쳐다볼 거고 그게 밧모라는 섬입니다. 섬이라는 것은 바닷물이 가다가 바닷물이 가다가 못가고 서면 그게 섬입니다. 물 따라 가면 되는데 섬이 있으면 서야 됩니다. 더 가면 박치기해서 안 됩니다. 서는 곳. 배가 지 아무리 가다가 섬이 있으면 일단 서야 됩니다. 돌아가는 건 돌아가고.

 

밧모라는 섬에 있었더니세상생활 잘하다가 믿는 사람이라. 세상생활 잘하다가 주일 때문에, 세상생활 잘하다가 예배 때문에, 친구들은 그대로 직진하는데 자기는 주일에 쉬고 가야 됩니다. 안 쉬고 박치기 하면 주일하고 박치기 하면 무조건 다 깨집니다. 뒤가 분명히 안 좋습니다. 등산할 때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면 빨리 갑니다. 깨져서 문제지. 그래서 돌아서 내려오는 겁니다. “밧모라는 섬에 있었더니믿는 사람은 주일을 지키려다 보면 세상생활 잘하다가 털컥, 공부 잘하다가 중단, 곳곳에 얼마나 그냥 귀찮은지 6일 지나면 7일 만에 한 번씩 서다 가야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주일 없이 쫙 가는데 주일 없이 가면 건강이 안 좋습니다. 간에 안 좋습니다. 안 쉬고 계속 가면 엔진도 내려앉습니다. 요즘 차는 모르겠습니다. 2040년 전에 차는 4시간 달리면 반드시 30분 엔진을 쉬어주라 그럽니다. 그렇게 엔진을 쉬면 3050년을 타도 짱짱합니다. 내친김에 7시간 8시간 계속 달려버리면 3040년 갈 차가 5년 안에 엔진 바꿔야 됩니다. 별 수 있습니까? 물질계. 인간이든 생각이든 돈이든 뭐든 무리하면 문제가 되어 집니다. 불신자도 악한 사람이라도 과학만 아는 사람이라도, 날 위해서 주일 하루는 쉬다가는 것이 지혜롭고 믿는 사람은, 주일이 잘못되면 크게 깨진다. 그러니까 조심하는 거고. 음주운전 한다고 다 사고 납니까? 음주운전 하다가 가끔 사고 나지. 근데 한 번 걸리면 면허증 나가버리지 사고 나면 죽어버리니 그래서 음주운전 안 하는 겁니다. 계산 다 해보고. 믿는 사람 주일 쉽게 손대면 음주운전하고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주일 없이 1? 10년 잘 돌아다니는 분도 있습니다. 한 번 깨질 때는 10년 치 한 번에 깨지면 복구는 어려울 겁니다. 본인을 위해서 계산한 다음 좋은 길을 가시라 그 뜻입니다. 원리는 그렇습니다. 원리가 아무리 좋아도 스무 살짜리는 혼자 다니지마는 다섯 달자리는 엄마 가슴에 엄마 등에 업혀 댕겨야 됩니다. 남 신세 지지 않는 것이 좋다. 원리입니다. 다섯 살짜리 다섯 달자리는 못 걸어 다니니까 이거는 업혀 다녀야 됩니다. 신세 지지 말란다고 다섯 달자리가 혼자 걸어가다가 다치면 어떻게 됩니까? 주일입니다. 주일을 준비하느라고 9절에 요한이 겪은 평소 그 결과 밧모라는 섬에 쫓겨났습니다. 이 상황을 딱 보시면서 너 주님 때문에 너 말씀 때문에, 너의 세상 생활 이렇게까지 손해 보고 이렇게까지 몰렸구나. 딱 보시고 그 순간 마음을 다시 열었습니다. 그래서 밧모 섬 이전의 요한과 밧모 섬 이후의 요한은 전혀 다른 요한입니다. 하늘과 땅 차이. 주일과 주일 사이가 이렇게, 이렇게 가파르게 발전을 하는 겁니다.

 

3 학생들의 진도가 그냥 바쁘게 가는데 한 일주일 빼놓으면, 일반적으로 공부 좀 하는 애들은 한 일주일 빼버리면 못 따라가는 겁니다. 1년 쉬어 버리면 못 따라가는 겁니다. 서울까지 차 두 대 가는데 우리 집회 장소 2시간 가는데 5분 먼저 출발한 차 따라가려고 해보십시오. 30분을 막 그냥 위험운전을 해야 됩니다. 근데 뭐 한 시간 두 시간 빼먹고도 가면가지 위험한 겁니다. 안 좋은 겁니다. 특별히 주일을 좀 잘 생각하셔서 부모들 쥐 박고 말하지 마시고 계산 잘해라. 음주운전 재밌을 거다. 한번 깨지면 저 집처럼 된다. 누구처럼 된다. 구경하고 하거라. 비교 판단을 시켜 모르면 연구해보게 하고 조금 느끼면 네가 마음먹고 해라 그렇게 되는 게 늦은 것 같아도 빠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1: K.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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