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새22.5.28 마11:16 곧 오실 주님 소개를 남의 일로 여긴 무감각, 한 몸의 간절로 전환 기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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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새22.5.28 마11:16 곧 오실 주님 소개를 남의 일로 여긴 무감각, 한 몸의 간절로 전환 기회를

관리1 0 115 2022.05.28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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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8 토새
 
제목 : 곧 오실 주님 소개를 남의 일로 여긴 무감각, 한 몸의 간절로 전환 기회를
 
찬송 : 18장(내 진정 사모하는)
 
본문 : 마태복음 11장 16절 -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주님이 오시면 구원과 심판이 결정이 되고 지나가버립니다. 주님 오시기 전 세례 요한을 먼저 보내어 주님을 맞을 수 있도록 강하게 외치며 기다렸습니다. 세례 요한이 “피리를 불어도”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장단을 맞춰줘야 되는데 뭔 기쁨이 있어 피리를 불고 춤을 추고 그러해야 할까?
 
구약 교회가 기다리던 주님,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천국의 구원의 기회인데 아브라함이 바라보던 주님, 보지 못하고 갔습니다. 요셉이 그토록 사모하던 주님, 요셉도 주님을 눈으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역사에 수없는 의인들 선지자들이 보고자 해도 볼 수 없고 그냥 사모함으로 지나갔는데 주님이 오셨으니, 세례 요한이 오신 주님을 맞았고 오신 주님을 소개하니, 그 얼마나 기쁜 일인지. 요한이 피리를 불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 요한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이 피리를 불면 주님이오셨다고 환호하고 기뻐 함께 난리가 나야 될 터인데, 그 피리를 왜 부는고? 뭐 그렇게까지 좋을 일이야?
 
이게 하나 되지를 못했습니다. 구원의 기쁨을 함께 가지지 못했고, 또 “우리가 애곡하여도” 이 주님을 주님으로 맞지 아니하면 뭐 그냥 지나가고 마는가? 길거리에 있는 금덩이를 주으면 횡재하고 또 그냥 모르고 지나가면 그 뿐인가? 그게 아니라, 주우면 황금을 횡재하고 줍지 않으면 유황 불비의 지옥불로 쓸려 가는데, 둘 중에 하나니 기뻐 춤을 추든지 아니면 애곡하며 땅을 쳐야 될 일인데 마치 남의 일처럼, 물 건너 불구경처럼. 광양만 바다 건너 불 나봐야 뭐 여기까지야 불이 오겠습니까? 구경이나 하지. 그런 건가?
 
하나님께서 한 몸으로 엮어주신 우리들의 형편, 형편을 남모르게 남다르게 느끼는 것이 복이고, 또 한 몸으로 아닐지라도 우리의 주변은 우리의 환경이고, 우리의 환경이라는 것은 넓은 의미로 보면 바로 다 우리가 되어 집니다. 나무가 없으면 새가 살지를 못합니다. 풀이 없으면 벌레가 살지를 못합니다. 새가 살지 못하고 벌레가 살지를 못하면 새나 벌레를 잡아먹고 사는 다른 짐승이 살지를 못합니다. 나무 없고, 풀 없고, 벌레 없고, 짐승 없으면 사람이 살지를 못합니다. 알고 보면 환경도 넓은 의미의 난데, 환경이 어찌 되는지 분위기도 볼 수가 있어야 됩니다.
 
이 시대가 주님의 진노 가운데 주님의 구원과 양 갈래로 나뉘어지니, 춤을 추든 애곡을 하든 이게 남의 일이 아닌데. 남의 일이 아닌데 니느웨가 불바다 되고 나 혼자 살면, 소돔이 불바다 되고 나 혼자 살면, 노아처럼 주님과 동행하다가 구원 받은 사람과 그 안에서 멸망 받을 사람이 혼자 어떻게 빠져 나온 것과는 영 가는 길이 달라집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환경은 입장은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이니 이 장터에 하나가 되어 주고받으며 자라가야 되는 신앙의 좋은 생명과 기회가 오늘처럼 이렇게 되어 지면, 애곡할 수 있어야 되고 애곡이 아니면 기뻐 춤을 출 수 있어야 됩니다.
 
주님과 120년 동행한 노아는, 시대의 선지자였고 외쳤으나 함께한 이는 없었고, 120년을 변치 않고 한 길 걸어간 그 끝에 홍수심판은 천지 만물을 전부 다 노아의 것으로 만들었지 마는, 소돔에서 나온 롯처럼 회개하지 않았더라면 니느웨처럼 오늘 우리 환경이 그렇게 되지는 않도록 우리 함께 다 애절한 마음, 애 타는 마음, 이것이 기도로 모여지고 니느웨는 악독이 하늘에 상달을 했습니다. 모여지고 쌓여지니 위로 치켜 올라간 겁니다. 우리는 그 반대쪽에서 애가 타서 애절한 마음으로, 애절한 마음 간절한 마음을 모으고, 모으고, 모으면 이거는 또 기도가 되어 하나님 앞으로 상달이 되어 집니다. 한쪽은 망하도록 죄악이 하늘에 상달이 되고 한 쪽으로는 그걸 보며 또 애절한 마음이 또 상달이 되어, 이 애절하고 애타는 기도와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있어야, 니느웨 꼴 나지 아니하고 소돔 꼴 나지 아니합니다.
 
뒷날에 보니까 소돔은 그냥 망했고 니느웨는 더 망할 곳인데, 구원의 기회를 받았습니다. 소돔보다 더 한 오늘, 니느웨도 구원을 받았는데, 그 말은 소망은 늘 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소돔에도 믿음 소망 사랑은 있고, 니느웨 같은 흑암의 나라에도 이 나라도 보내가지고 믿음 소망 사랑은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은 하늘에서 해나 비를 의인뿐이 아니라 악인에게도 꼭 같이 내려주신다. 악인에게도. 악인이라고 해를 걷어 가시고 비를 걷어가지는 않습니다. 의인과 악인에게 함께 해와 비를 주신다 하물며, 우리들이겠습니까?
 
간절한 마음 애절한 마음 기도로 자꾸 모아서, 예배당에 오셔서 눈 감고 기도하는 것도 기도고, 이거이래서 안 되겠는데, 세상으로 길이 없고 희망이 없는데, 그 마음이 바로 기도로 다 변환이 되고 주님은 기도로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합을 때리려고 선지자를 보내셨는데 아합이 역사에 죄인 중의 죄인이나 굵은 베를 입고 그 걸음을 무겁게 천천히 걸을 때, 아합의 그 모습을 보고도 하나님께서 진노를 변경 시키셨습니다. 하물며 우리들이겠습니까?
 
이아침 애절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결혼과 출산만 이어진다면 공회는 아직까지는 오늘 말세를 비추는 등대가 될 수가 있고 그 빛으로 남이 혜택을 받기 전, 자기와 자기 가정에 복이 이어질 겁니다. 1주일만 금식하고 버티면 1주일은 안 죽습니다. 1주일 금식하고 버티면, 가족이 아무리 강팍해도 애절한 마음이 전해질 것이고, 악과 죄가 잦아들 겁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 니느웨는 짐승도 금식을 했는데 짐승도 금식을 시켰는데, 주인이 죄악으로 망하면 소떼 양떼 너도 견딜 수 없는 거다. 죽는 것은 매 한가지인데 긍휼을 구하다가 죽으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이, “죽어도 살겠고” 아예 그렇게까지 하기 전에 그 뜻을 돌이키실 거다, 불신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불신자들. 자녀를 뭐 요즘 말을 듣나? 말을 듣나? 핑계도 그런 핑계를 대면 곤란합니다. 부모가 굶어보십시오. 같은 밥을 먹으면서 굶어봐 보십시오. 이래라 저래라 그러니까 반발이 나오지. 너, 너 마음대로 살고 나, 내 마음대로 산다. 난 살 의미를 찾지를 못하겠다. 내 인생 내가죽든 말든 네가 뭔 상관이냐? 네가 내 자식이면 내 부탁을 들어야 내 자식일거고 너 내 말을 듣지 않으니 나하고 너하고 상관도 없는데 넌 처먹어라 난 굶어죽겠다! 아, 니느웨 불신자들도 금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돌리고 진노를 복으로 바꿨는데, 너는 안 믿을 자유가 있고 난 믿을 자유가 있다, 넌 먹을 권리가 있고 난 안 먹을 권리가 있다, 넌 너 마음대로, 난 내 마음대로. 부모가 금식으로 내 인생 내 마음대로 한다 그래 봐 보십시오. 그게 제 자식이면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어린 것들이 자살한다고 부모를 협박하는데 그걸 보고 기른 부모가 그 방법을 왜 모릅니까, 알지. 자기는 먹을 밥 다 먹고, 눈총을 쏘고 회초리를 드니까 튀지. 뭐 굳이 이런 방법 한 번도 설명은 드린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설명 하나 마나 모릅니까? 다 아는데. 똑같으니까 안했겠지.
 
이게 니느웨 소돔, 이게 홍수 때 하나님이 멸망을 손에 들고 쏟아 부으며 하시는 심정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앞에서 부추긴 대제사장 그들만 죄인이고 폭동이 일어나니 멋 모르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한 사람들은 선량한 사람이라 속았던 사람이고 피해자들이냐? 그 놈이나 그놈이나 똑같지. 평양에 권력 잡은 김정은이는 나쁜 놈이고 그 밑에 백성들은 억울하게 모두들 당했다 그러는데 천만에요! 공짜로 준다니까 좋아서 다 그쪽에 붙었지. 해방 직후에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내려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철조망도 없을 때. 왜 거기 있었던가? 부자 빼앗아서 공짜로 준다니까 아, 뭐 그래서 되는가? 그러면서 속으로는 기대를 했지. 동업을 했지. 할아버지 김일성이하고 지금 고생하는 사람들의 할아버지가 동업자들입니다. 동지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김일성이하고 그 할아버지들이 서로 서로 동지, 동무 그러고 살았습니다. 이제 와가지고 김 씨만 욕하다니? 똑같지. 속이는 사람, 속는 사람은 동업입니다. 뒤로 보면 한 통속입니다. 아니면 표가 나게 돼 있습니다.
 
죄인이 아니라는데, 죄인이 아니라니, 친구들이 죄인인데, 그러면 친구 보면 아는 겁니다. 주님이 그렇게 굽어보시는 줄 알고 식구 중에 하나가 죄를 짓고 죄악의 돈을 가져오면 안 되는데, 그러면서 그 돈 가지고 쓰고 다니면서 뒤로는 함께 즐깁니다.
 
소돔 전체에, 니느웨 전체에 불벼락을 때릴 때 억울한 사람도 한 둘은 섞여 있지 않겠는가? 섞여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똑같은 인간들입니다. 하나님이 그 정도를 구별 못해서 아브라함의 기도처럼 의인이 있는데 “죄인들과 의인을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이래가지고 세상을 공의로 인도한다는 말을 들을 수가 있겠나이까? 하나님 그렇지 않다 했습니다. 의인 헤아려봐라, 50명이 10명까지 내려간 것은, 더 이상 헤아린다고 나오는 게 아닙니다. 큰 의인이 작은 의인으로, 작은 의인이 배후에 숨어 죄인을 부추기고 있었지. 시대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습니다. 이런 의미까지를 담을 때 우리는 공동체라 그럽니다. 공동체? 좋게만 쓰는데 그 속에 무서운 책임이 함께 있습니다. 모두 애절하고 간절하게, 들이 닥치는 하나님의 진노를 복으로 바꿀 수 있도록.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역사 이후에 없는 이 좋은 시절 5월, 거기다대고 5월의 마지막 주 빈자리 없이 전부 다 채워달라고 기도하고, 몸만 끌어다가 채우는 것이 아니라 애절하고 간절한 마음을 함께 모아 여기 우리 예배당에서 주일마다 올려지는 그 애절함이 저 평양에 김 머시기 핵미사일을 쏘아도 우리 여천 신풍 위에는 떨어지지 않도록, 우리의 기도의 간절함이 그렇게 하늘에 닿으면 여기만은 하나님이 대신 막아주실 수 있도록 돼야 되지, 다른데 가는 미사일을 끌어다가 신풍 하늘에 일부러 갖다 때려야 되겠다, 이렇게까지 되도록 하지를 말아야 됩니다.
 
 
 
1차-K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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