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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7 토새
제목 : 어떤 죄에서도 자기 의로 구원, 어떤 구원 속에서도 자기 죄로 실패, 그 시작은 의의 후퇴
찬송 : 60장(날 구원하신 예수를)
본문 : 창세기 19장 24절 -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에스겔 14장에 의와 죄 구원과 멸망에 대한 기본 원칙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범죄 하는 영혼, 그 영혼은 죽으리라. 하나, 나의 의로 다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의로 내가 구원받지 못한다. 노아 다니엘 욥 그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자기 의로 자기 생명만 건지지 자기 자녀도 건지지 못하리라 에스겔 14장 14절과 20절에 반복되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자기 자녀도 건지지 못한다. 자기 의로 자기 하나만 건진다. “아비의 죄를 아들에게로 주어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이 말씀하고 모순되어 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죄는 삼 사대, 의의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자기 의로 자기만 자기 생명만 구한다? 자녀도 구하지 못한다. 급하면 이거 강조하고 급하면 저거 강조하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하나님을 본 자가 없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알던 자다. 대면이란 말은 얼굴 대 얼굴입니다. 성경 전체를 보며 불변의 진리 완전하신 하나님이 일점일획도 가감 없이 기록한 말씀 이거 무조건 맞는 걸로 두고, 또 모순되는 말씀도 각각 맞는 걸로 두고 좀 생각해 보면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시야가 밝아지고 넓어집니다. 그러라고 여러 면으로 기록해 놓은 겁니다. 인체에 머리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인체의 심장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머리 없으면 큰일 나는구나, 심장 없으면 큰일 나는구나, 그러면 되는 겁니다. 머리는 없어도 산다, 심장이 있어야 산다 그 말은 아닙니다.
타락한 이후에 죄인 된 우리 속의 옛 사람, 믿기 전에 사람 믿은 이후에도 믿기 전에 자기 속의 옛 사람과 주변에 죄악의 세력에게 살아오면서 익어진 것이 있고 물든 부분이 있어가지고 그 부분이 신앙생활 하는 내속에서 자꾸 물 타기를 하고 흐리기도 하고 흔들기도 하고 요동을 쳐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뭐든지 믿음 생활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게 왜 이렇게 고장이 되며 이 고장이 어떻게 오는가, 이걸 연구를 해야 될 건데 자기 속에서 생기는 의심은 맞고 하나님이 왜 이렇게 거짓말을 하지? 왜 이렇게 틀렸지? 기록을 하다가 이게 틀렸나? 모세가 민족주의가 되어 자기 나라 건국 실화를 그냥 좀 과하게 적었나? 또는 베껴 적다가 또는 번역하다가 실수가 됐나? 학이라는 것은 전부 이쪽으로 나가는데 그 학이 바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아예 원수를 엉뚱한 데서 잡고 있는 겁니다. 내속에서 잡아야 되는데.
오늘 새벽의 말씀은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자기 의로 자기가 구원을 받는 것이 절대 최종의 기준입니다. 그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의인이면 아들이 그 의에 물이 들고 영향을 받고 윗물에서 자꾸 의가 내려오면 아랫물이 맑아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또 하나님이 돕습니다. 아버지의 의를 봐라. 그런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티면 자기 죄로 자기는 죽습니다. 부모가 죄인이 되어 죄악 세상에 태어난 아이 그리고 그 아이 속의 죄악성 별의별 것이 이 아이를 흔드는데 부모까지 죄를 지어 아이를 죄로 교육하고 삶아버리면 그거 피하지를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처럼 나는 주님 모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감사함으로 간다, 그러면 부모의 어떤 죄도 지도자의 죄도 천하의 죄도 홍수 심판으로 죄악 세상을 완전히 다 잠가버려도 구원의 방주로 떠서 초월해 버립니다. 여러 면을 좀 살펴야 됩니다.
여기 소돔 고모라의 마지막 처벌에 롯의 아내 두 딸은 죄인입니다. 롯은 그래도 의인입니다. 롯 때문에 아브라함이 기도한 것은 롯이 의인이었고 또 롯을 구한 것은 이게 후퇴는 해도 그래도 의인이라 롯 속에 의로운 요소가 있어 그래도 구원은 했고 딸 둘 아내는 뒤에 보면 구원의 여지가 없는데 왜 소돔에서 천사가 손을 잡고 끌어내어 주는 이런 강제적인, 이런 특혜적인 은혜를 베풀었을까? 소돔에서 나왔는데 “뒤를 돌아본 고로” 그러면 소돔에 유항 불비의 재앙을 소돔 안으로 지역을 특정 한다면 아내와 딸들은 죄인인데 의인 때문에 구원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소돔 고모라의 재앙을 좀 넓게 봐 보면 결국은 피하지를 못했습니다. “돌아본 고로” 아내는 “돌아본 고로” 죄인을 끌어다가 억지로 심판 자리 옆으로 옮겨놔도 마음은 콩밭이라 소돔 안에 잘못된 것을 유황 불비가 때릴 때에 뭔 소리가 나고 난리가 났을 터이니 나의 소돔의 모든 생활과 그쪽으로 향하자는 나의 모든 노력은 다 저렇게 불바다가 되어 마땅하다, 그리고 새로 주시는 인도를 향해 나아갔다면 아내 속에 구원받을 의의 요소가 있어 그것 때문에 살린 게 됩니다.
그런데 내면은 전부 소돔에 있었고 소돔에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몸은 끌어다가 밖에 갖다 놨으나 아내의 모든 생애와 모든 중심과 모든 현재의 내면 전부는 소돔에 그대로 놓고 나왔습니다. 몸을 끌어내면 마음도 나와야 되는 건데 그게 구약입니다. 구약의 제사와 계명을 지키는 것은 그 자체가 구원은 아닙니다. 일단 외부 육체 겉으로 맞춥니다. 그러면서 안으로 밀고 들어가야 됩니다. 안식일을 지키며 몸이 오락을 금하고 몸이 돈 벌이를 금하고 몸이 노동을 금하고 그 자체가 구원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걸 요구한 것은 몸이 매매의 경제생활, 육체의 노동, 몸이 좋아하는 모든 쾌락의 세상의 향락을 끊고, 끊으면 그러면 그 속에 들어있는 인격, 내면이 세상과의 관계가 단절된 그 상태에서 이 내면이 주님을 향해야 되는데 그리고 은혜 받는 이 일로 나아가야 되는데 주님과 하나 되고 주의 은혜를 받으라고 육체의 모든 것을 끊으라 했는데 육체 모든 것을 끊기만 하고 내면이 주를 향하지 않고 은혜 받을 준비가 되지 않으면 겉은 주일을 지키고 내면은 주일을 범한 것이 됩니다. 이게 구약은 육체로 시작하고 외부로 시작하여 내부로 나가는 건데 육체로 시작은 했으나 내면에 이르지 않으면 외식에서 끝이 납니다.
반대로 신약은 내 내면이 나의 심령이 내 마음이 주님을 향하고 주께 전력한다면 외부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핑계를 대고 마음이 중요하지 육체가 중요하냐, 부부 사이에 마음이 부부끼리 하나면 됐지 뭐 몸이야 이 남자주나 저 남자주나 그게 뭔 중요한가? 내 마음이 남편밖에 없고 내 애정이 주님밖에 없는데 뭐 몸이야 이 남자 잡든 저 남자한테 가도 그게 뭔 중요하냐? 난 일편단심이다. 속의 것이 진짜면 밖이 지켜지고 표가 납니다. 겨울을 지난 나무가 말라 죽어 버렸는건지 이게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외부의 물을 없애버려서 겉보기에는 전부 다 말랐고 죽은 것처럼 보이나 제일 안에 추위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나무의 제일 안에는 살아 있고 이걸 보호하기 위해서 겉을 방패로 삼았는지 속이 영 죽어버렸는지 봄이 되어 움이 돋으면 한겨울에 잔가지는 말라 꺾으면 부러져 버렸고 나무의 껍데기를 벗겨 보면 생명의 흔적이 전혀 없어 죽은 건지 아니면 속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겉이 버틴 건지 이건지 저건지 그냥 봄에 움싹 돋는 걸 보면 압니다.
내면에 주님의 동행이 정말이고 여기에 주력을 하다 보니까 외부는 이럴 수 있고 저럴 수 있다면 가면 갈수록 점점 외부의 외면도 좋아져야 됩니다. 그래서 속에 들어 있는 생명이 정말 생명이라면 외부에 살아있다는 표시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빛이 번져 나오고 새어 나오게 돼 있습니다. 구약은 반대로 겉을 구원하고 겉이 아니라 겉을 구원하고 이것이 안으로 들어가야 이게 구원입니다. 소돔 성으로부터는 아내와 두 딸이 구원받았습니다. 외부 구원. 그리고 구원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나왔는데 나온 뒤를 보니까, 나온 뒤를 보니까 아내는 껍데기만 끌려 나왔고 아내의 생애와 애착과 모든 내면은 전부 소돔 한가운데 그대로 두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철저한지 그 와중에 뒤를 돌아보지 말아라, 그것까지 돌려버렸습니다. 소금기둥이 되었고 이 소금은 거름에도 밭에도 쓸모없고 뭐 음식에 쓸모없는 것은 말할 것 없고 “밖에 버리워 밟힐 뿐 이니라”
아내, 딸 둘은 어찌 되었는가? 차라리 소금 기둥 된 아내는 자기로서 끝이 났는데 딸 둘 이 죄인들도 끌려 나왔는데 죽을까봐 돌아보지 않았으니 아, 심판이 내리고 나니까 그때서라도 깨달은 걸 보니까 아직도 내면의 생명의 역사가 좀 있는가? 좀 더 지켜봐야 되는데 나온 뒤에 한 짓을 보니까 이것들은 더 큰 죄입니다. 1차 멸망시킨 소돔성 안에 있는 멸망, 껍데기가 밖에 나왔다가 속을 뒤 안에 두고 있어 다시 이거는 맛 잃은 소금이다, 소금이 아닙니다. 아무 짝에도 필요 없다. 구원운동에도 필요 없고 세상에도 이거는 아무 짝에도 쓰지 못한다. 맛 잃은 소금, 버리운 소금. 그래도 아내는 거기에서 끝났습니다. 딸 둘은 자자손손 번창을 해가지고 구약기간 끝나기까지 복음운동만을 훼방하는 100%로 순종, 그런 복음의 원수 노릇을 했습니다. 애굽 사람 또는 이런저런 사람은 3대 10대가 가면 여호와의 총회로 돌아올 수 있다. 모압과 암몬족속은 영원토록 들어오지 못한다. 이렇게 딱 결론을 내린 걸 보니까 롯의 두 딸 속에 들어있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뿐입니까? 정작 롯은 딸들의 민족이 아니라 롯의 민족입니다. 구원받지 못할 의인은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의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의의는 하나도 없구나, 의가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구나, 후퇴하는 의는 이렇게 무섭습니다. 반에서 꼴찌는 더 놀아봐야 꼴찌 이상은 없습니다. 이하는 없습니다. 현상 유지는 됩니다. 이건 어쩌다가 하나라도 올라갈 소망이 많습니다. 1등이라는 것은, 유지도 하고 1등 중에서도 더 1등으로 올라갈 수도 있지만은 1등은 순간 2등 되는 것이 쉽습니다. 그래서 정통의 신앙 좋은 신앙 고급의 신앙 앞선 신앙은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이 말씀이 항상 평생 걸립니다. 뒷 선자는 앞 설 수 있다. 나중 된 자는 먼저 된 자 될 수 있다. 이래서 신앙 있는 사람, 얼마나 긴장해야 되는지 모릅니다. 불신자 이솝이 지은 이야기인가? 토끼 거북이 달리기 이야기? 그거 비교가 안 되니까 뛰어서 1등하고 그렇기 때문에 토끼 뒤를 따라가는 것은 너무 빠르니까, 비교가 안 되니까 이거 주춤할 수밖에 없고 그 주춤하는 사이에 잠깐 방심이 되며 깊이 잠이 들어 거북이 같은 것이 앞을 가로질러 1등을 하기 까지 영 잠 들더라. 불신자가 본 세상의 생명들의 일반 관찰기 입니다. 관찰기. 돌은 큰 돌이 끝까지 큰 돌 되고 작은 돌은 끝까지 작은 돌 됩니다. 강은 늘 강이고 바다는 늘 강보다 넓습니다. 생명을 주지 않은 만물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만물은 타락 후 저주도 덜 받았습니다. 식물은 저주를 더 받고 동물은 저주를 더 받고 동물 중에서도 고급일수록 저주를 더 받고 제일 저주를 많이 받은 것이 제일 꼭대기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늘 조심해야 됩니다. 주변에 한 달란트 두 달란트가 보이기 때문에 육체를 주셨고 외부를 주셨기 때문에 다섯 받은 사실은 깜빡하기 쉽고 하나와 다섯, 둘과 다섯을 비교하며 하나가 세 배를 더 벌어 세 달란트를 더 남겨도 본전과 다 합해봐야 아직 넷이라 다섯은 까먹지만 않아도 그냥 가만히 있어도 기본적으로 너보다 신앙이 낫다 그런 줄로 착각을 합니다. 이게 먼저 된 자 나중 되는 방법입니다.
은혜가 더할수록 신앙의 귀한 노선에 섰을수록 칼날 위에 섰다. 심판 위에 섰다. 또 다른 그 다음에 문제가 되어 집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믿고 가는 게 더 낫다 맞다. 더 낫다 맞다 이 정도였는데 다른 쪽이 모두 다 너무 흑암이 되고 너무 내려앉는 바람에 별 것도 없는데 더 돋보이는 것 같습니다. 내가 발전을 점점 함으로 더 돋보이는 것은 좋은 일인데 난 대충하고 있는데 주변이 내려앉음으로 내가 돋보이면서 내 신앙이 지금 발전이 되고 낫다 생각하는 이게 참 큰일입니다. 세상이 좋아지고 심판에 가까워지면 신앙의 먼 쪽으로부터 세상과 죄악에 빠져 밑으로 다 꺼져 내려앉습니다. 저 중심에 있는 신앙들은 외부에서 슬슬 속화가 되어 올 때 난 내 자리만 지켜도 1등입니다. 2등과 차이가 너무 많이 납니다. 비교해서 나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 달란트보다는 많고 두 달란트보다는 아직도 많지 않느냐, 이게 문제가 아니라 너한테 준 다섯은 어떠하느냐? 내 속에다 대고 지금 직접 묻고 있는데 두 사람은 바보고 저 사람은 죄인이 아니냐고 바리새인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가지고 옆에 있는 죄인 세리의 죄만 자꾸 보니까 얼마나 떳떳한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뻔뻔스럽게 큰소리를 치고 광고를 할 만큼 되어졌습니다. 받은 은혜가 얼만데. 어디 비교할 데가 없어 그 죄인하고 비교를 하고 앉았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이게 기준이고 목표인데. 이게 목표인데. 완전하신 하나님 여기를 목표로 삼아 나는 얼마나 아직까지 부족한가? 이 면에 주력하면 천하가 다 홍수에 잠겨도 방주로 구원만 받는 것이 아니고 새 출발의 기회만 받는 것이 아니라 노아 홍수 뒤에 실패하는 노아까지를 넘어설 수가 있습니다.
연휴인줄 몰랐는데 뭐 그냥 휴일이 주말에 가까우면 사이에 있는 평일까지도 휴일을 만들어 3박 4일, 4박 5일, 휴일을 아무 때나 만들고 있을 때 이때 일정 잡고 흐트러져 세상에 깊이 들어가기 딱 좋습니다. 가족 중에 정말로 불러 구원을 받아야 되는데 너무 오랜 세월 방치가 되어 이거 한번 끌고 오기 위해서는 연휴에 함께 시간을 보내주지 않고는 안 되겠다, 이래서 불가피하게 연휴에 가족 모임도 가지며 마지막은 하나라도 끌어오고 그 인간도 끄는 이 사람이 속에 놀고 싶어 놀러 갈 일은 절대 없고 날 끌어가는구나, 알면서도 한 걸음씩 끌려오면 귀한 구원의 기회가 되고 집안에 이 식구 구원하기 위해서 그냥 전도 나갑니다, 하는데 보니까 이건 전도가 아니고 선교고 선교가 아니라 이거는 세상 속으로 아예 기어 내려가려고 작정을 한 것이 되면 롯이 됩니다. 작정된 것은 아내와 딸들이고 내 아내와 딸들이 주님이 주신 선물인데 이걸 이혼하고 떼 낼 수가 없어 그냥 할 수 없이 소돔으로 가는 척하지 제가 가면 전도할 겁니다, 욥이, 롯이 소돔 갈 때 가족 따라 죄 지으러 갑니다, 그랬겠습니까? 의인들, 신앙생활 괜찮게 하는 분들 그 그럴 리가 없이 앞선 분들이 세상으로 내려간 이유가 다 그렇습니다. 내가 돈 좋아 돈 벌 줄 아냐? 그 돈으로 주님과 복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 거지. 정말 그게 속에 들어앉았는지 네가 핑계대고 작정하고 따라가는지 죄인이 죄인 된 것은 솔직하지만은 의인이 죄를 짓기 위해서 의를 포장하고 죄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긍휼이 더 많이 쏟아졌기 때문에 진노도 더 많아집니다.
연세 많은 분들의 자녀 사랑도 극히 조심하시고 젊은 분들이 이 좋은 날 세상으로 피치 못하게 좋은 기회 가질 때 더 조심하시고 그래야 철없이 멋모르고 세상에 매진하는 이런 희망 없는 시대에 태어난 소년들 어린 아이들에게 빛이 있어야 소망이 되어 진다는 거 꼭 기억하십시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1차-kh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