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새22.5.6 창18:30 죄와 의는 길러 가는 것, 롯을 향한 아브라함 기도, 의의 최대 죄의 최소 중심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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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새22.5.6 창18:30 죄와 의는 길러 가는 것, 롯을 향한 아브라함 기도, 의의 최대 죄의 최소 중심 방향

관리1 0 125 2022.05.06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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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6 금새
 
제목 : 죄와 의는 길러 가는 것, 롯을 향한 아브라함 기도, 의의 최대 죄의 최소 중심 방향
 
찬송 : 61장 (이 세상 험하고)
 
본문 : 창세기 18장 30절 -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아브라함의 자세가 있습니다. “구하라주실 것이요” 한 명이 없어도 조카가 있으니 멸하지 마옵소서, 만약에 이렇게 기도 했더라면 구하는 대로 주신다 했고 조카하나 구하기 위해 의인이 한 명도 없을지라도 아무도 멸하지 마시라,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처음부터 간단합니다. 그런데 그리 되면 조카가 의인인데 죄인이 될지라도 죄인이 그냥 죄인으로 그대로 있어도 주신 현실 세상을 죄 짓는데 쓰기 때문에 그것도 그냥 둘 수가 없는데 죄라는 것은 이게 돌처럼, 흙처럼 두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죄는 그 뒤에 악령이 죄를 짓게 했기 때문에 하나 지으면 둘되고, 둘되면 열 되고 요즘 돌아다녔던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그냥 하나만 돌아다닌 것이 아니라 이게 새끼를 치고 마구 뿌려 버리고 번식을 합니다. 악령이 그렇게 흩어 댑니다.
 
소돔으로 들어갈 때 롯은 의인이었습니다. 또 아내와 딸들은 순종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종들도 주인을 위해 아브라함의 종들과 싸운 주인을 위한 충성스러운 종들입니다. 그렇다면 의인을 위하여 충성을 한다면 그 종업원들 충성하는 그들을 의인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꾸 의가 늘어나 가야 될 텐데 종업원들은 아예 기록도 없고 그 다음, 딸 둘은 정혼한 사위 둘을 보니까 신앙을 알겠고 장인의 이야기를 “농담으로 여겼더라” 딸들의 모습입니다. 또 뒤에 죄 짓는 걸 보니까 그렇습니다. 아내는 소돔으로 갈 때는 소망을 가지고 갔겠지마는 죄를 지어 잘 되리라 그랬겠습니까? 주님 은혜로 출발했을 고 주님을 찾아 걸어왔고 고난 속에 주의 은혜 구경했고 큰 복도 받았고 그리고 이제 소돔으로 가면 주의 은혜로 더 잘될 줄 알았지 주의 은혜 받아 더 잘 먹고 더 잘 살려고 들어갔다가 주님은 떼버리고 그리고 소돔에 애착을 가졌는데 그 애착, 그 집착이 죽어도 놓칠 수 없고 떼 내 버릴 수 없는 소돔 사랑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들어갈 때는 대충 세상이 좋아도 뭐 주님의 이름이라도 걸치고 들어갔는데 하나님이 유황불비로 때리는 것을 보면서도 그러면서도 결국 돌아 봤습니다. 죽어도 놓칠 수 없는. 그러니 상한 심령의 롯 하나만 남았습니다.
 
큰 의가 작은 의로, 작은 의가 연약한 하나의 의가 되어 아내 하나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축소되는 이 의인데 그 작은 의마저 꺼져 버린다면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의가 없어지면 이제 작은 죄가 슬금슬금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그 롯이 아내를 따라 소돔 사랑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이고 소돔에 물이 푹 들어 놓으면 천사들 온 걸 보고 마구 그냥 어른이나 젊은 사람이나 몰려드는 그런 속에 또 롯도 하나 될 것이고 소돔에 의인 하나가 없을지라도 내 혈육이 있으니 살려 주옵소서, 그리되면 큰 의인이 작은 의인이 되고, 작은 의인이 작은 죄인 되고, 작은 죄인이 큰 죄인이 되어 하나님과 맞설지라도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오히려 소돔은 세상으로 발달하는 곳이니까 죄악 세상을 밀어주시고 후원해 주시라 그 기도가 됩니다. 하나님을 쥐어박는 기도가 됩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나를 쥐어박고 큰 죄인이 되거라, 그건 그렇게 구하는 것은 안 된다고 적을 것도 없이 그냥 안 되는 겁니다. 그거 억지지.
 
마태복음 7장 7절 “구하라 주실 것이요” 어린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요약해서 한 마디 한 겁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무얼 구하지요? 네가 네 속에 들보가 있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 엉뚱한 길 가고 있고 불행한 건데 세상을 준 이유와 반대가 되고 있는데, 세상에서 심판을 마련하고 있는데 돌아 서거라, 네 속에 단점이 없을 리는 없는데 그게 보이지 않거든 없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네 시야, 네 생각, 네 사상, 네 눈을 다 가려 버렸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거다, 그런데도 너의 단점을 찾지 못하겠거든 “구하라” 알아야 해결을 하겠습니다, 모르겠나이다, 없진 않은데. “구하라 찾으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알려 주실 거다, 하나님이 알려 주는 방법은 많은데 모든 사람에게 가장 쉽게 알려 주는 방법은 성경보다, 성령의 감화보다, 더 쉽고 확실하게 알려 주는 것은 네가 네 단점은 못 찾아도 주변의 다른 사람의 단점은 죄악 세상에 죄악 인간의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성경 없고 성령 없어도 남 단점은 네가 귀신처럼 귀신이 되어 잘 알지 않냐? 그걸 보고 거울에 비친 네 얼굴 보는 것은 쉽지 않나? 자기 눈으로 자기 얼굴 보는 것은 어렵습니다. 못 봅니다. 그런데 벽에 걸린 거울을 보고 거울에 있는 얼굴을 보며 아 이렇구나, 저렇구나 그건 안 보일 리가 없습니다. 네 단점의 거울은 어디에 있느냐, 네 주변 사람들의 단점 그게 바로네 단점이다. 거울에 비친 너의 모습처럼 네 주변에 너와 관계된 사람들의 단점 보이거든 네 속에 그게 있다고 찾아봐라.
 
거울은 보면 그대로 보이는 거 같은데 좌우가 바뀌게 돼 있습니다. 거울에 있는 아내의 단점을 보며 남편 네가 여자들의 잔소리, 쓸데없는 소리 나는 입이 무거워 뭐 말도 안 하는데 왜 아내의 바가지 긁는 저 단점이 내 단점일까? 그 단점 들여다보면서 저 잔소리가 왜 나왔는가? 왜 저런 걸 나한테 붙여놨는가? 그게 그대로 나인데 보는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면 그거 뭐 바로 파악이 다 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너무 어려워 이해가 되지 않으면 “구하라 찾으라” 도무지 더 이상 찾을 길이 없거든 “문을 두드려라 남편 실컷 욕해 놓고, 제 단점인데. 아내 실컷 원망해 놓고, 제 단점인데. 아, 부부는 이 정도인데 자녀들은 좀 세상이 그런지 왜 이 모양이 꼴일까? 제 얼굴인데. 자기 단점인데. 첫째는 보면 나오는 것이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입장을 좀 바꿔 보면 되는 것이고, 입장 때문에 반대로 보이는 겁니다. 원인이 누구냐? 그리고 나이나 여러 형편을 보면서 짝을 맞춰 보면 딱 들어맞습니다. 왼손 오른손 반대로 생겼습니다. 맞춰 보면 정확하게 맞습니다. 이 왼손 그대로 오른손을 하나님 만드시고 오른손 그대로 여기 만들었더라면 두개가 똑같은데 맞춰보면 이게 어긋맞게 돼 있습니다. 정확하게 반대인데 맞춰 보면 딱 하나입니다. 천국과 세상이 타락 전에는 그대로 내려 온 거고 타락을 해서 세상이 뒤집어졌으니 뒤집어진 세상을 뒤집어보면 전부 맞아집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도 그렇습니다. 신격과 인격 사이. 천한 세상에 내 고칠 단점을 위해 하나님은 만물을 총동원하시고 운영까지 하면서 보여주고 알려주고 고치도록 하는데 눈에 대들보가 막고 앉았으니 자기중심입니다. 그게. 자기중심이 대 들보라 자기중심이 되면 보일리가 없습니다. “구하라” 네가 성경을 모르고 양심이 화인 맞아 양심이 죽어버려 성령의 감화와 감동까지 차단이 되었을지라도 네가 싫어하는 네 주변의 단점들 그걸 보고서 있는 사람이라도 자기를 찾아야 되는데 그래도 믿는 네가 영은 살아 있는데 찾지 못 하겠느냐, “구하라 찾으라” 끝까지 네가 구할 줄을 몰라 잘 못 구하면 열심내고 얘가 터지는 너의 정성을 보고 고쳐 주리라, 그러면 넌 싫다 하는 것 그걸 하나님이 알려줘서라도, 알려 주셔서라도 “좋은 것으로 주지 않겠느냐” 아버지의 사랑이니까.
 
소돔에 간 조카 롯이, 조카 롯은 삼촌 망하고 제 잘 되는 게 롯의 심보가 되었을지라도 뭐 가족은 다 그런 거고, 그렇게 되었을지라도 아브라함은 삼촌이니, 어른이니 그래도 지도책임 있으니 자기의 길을 따라 온 조카고 또 자기만 못 하여 슬금슬금 세상으로 내려갔고 그리 내려갔으니 지금 신앙이 예전처럼 그러지는 않을 것이고 이 정도를 가지고, 제일 먼저 나간 서울공회 교인들 연락이 끊어진지 30년이 넘었으나 지금쯤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안 봐도 이 여수 순천 주변의 신앙입니다. 그다음, 곁길 나간 대구 공회 사람들은 어떨까? 서울 공회 보다는 낫겠지. 그런데 어느 정도일까? 절반 단계 있겠지. 그 이렇게 다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공회만 이만큼 잘 되고 다른 것들은 전부 내려 앉아 차이가 많이 나면 훨씬 돋보이지 않겠느냐? 이게 대 들보고 자기중심입니다. 롯은 그럴지라도 아브라함은 롯이 하나밖에 없는 내 혈육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1차로 맡긴 나의 것입니다. 이게 잘 되어야 작은 아브라함이 큰 아브라함이 됩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모신 아브라함보다 하나님을 모신 부부 되고, 하나님을 모신 이삭이 되고, 하나님을 모신 조카 롯이 되고, 하나님을 모신 조카 롯의 가족과 종업원과 그로 인하여 소돔이 점점 의인이 하나씩 둘씩 줄어 드는 것이 신앙의 본능적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맡긴 위치며 아브라함은 이게 살아 있습니다. 그 감촉이. 괜히 대인배의 호기가 아니고 잘 먹고 잘 사니 뭐 거지에게 빵 부스러기 던지면서 멋지게 한 마디 구호하고 그런 척 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적으로 원리가 그렇습니다.
 
머리는 굉장히 민감하게 살아 있고 목 이하에 온 몸이 말을 듣지 않으면 생지옥 됩니다. 21년 전에 성가롤로병원 바로 옆 침상에 한 30대나 되었을까 아주머니가 목 위는 멀쩡합니다. 목 밑에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도 못합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도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머리 쪽이 멀쩡한데 가슴, 팔 쪽이 조금 돌아가면 그 얼마나 숨 쉴만하겠습니까? 양팔은 잘 움직이고 발은 집어도 감각은 없으나 조금 움직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휠체어라도 탈수 있지 않겠습니까? 머리에 생각과 감각이 목으로 등으로 팔로 무릎으로 저 발끝까지 생생하게 그대로 잘 이어지면 좋은 겁니까? 시기 질투가 나야 되겠습니까? 아, 나만 이렇게 멀쩡하면 좋은데 뭐 팔 다리까지 급이 나하고 같아서? 자기중심이라는 것이 여기까지 나가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롯과 같이 출발했으나 갈수록 자꾸 좋아졌습니다. 혈육의 조카 객지에서 그거라도 하나 내 편, 이건 타락한 인간의 생존투쟁에 우리 편 인성을 만들어 싸우는 짓이고 혈육을 사랑하는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자체 그 본능에 분석을 해 보면 가인이 성을 쌓아 하나라도 모아들이고 단결하여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그 다음 어떡하려고? 그래야 옆에 걸 더 가져 오지. 작은 죄가 큰 죄가 되고 큰 죄가 큰 죄악이 되어 마구 뻗어 나가는 겁니다. 위에서는 심판의 나를 계산하고 앉았는데. 아브라함은 가면 갈수록 그 반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손보고 보복할 사람들이 많았으나 넓은 세계의 자기이기 때문에 이걸 되돌려 하나님께 붙들린 나에게 순종하여 순종하는 만물 피조물을 만들어가는 이런 아브라함인데 하물며 조카 롯이겠습니까? 이게 하나님 중심의 의인입니다. 조카 롯은 그 반대고.
 
조카를 위한 기도가 죽으나 사나 불신자도 가진 본능, 나하고 같은 거, 나하고 비슷한 거 가까운 걸 모아야 내 덩치가 점점 커지고 그래야 세상 점령에 유리 하지 않겠느냐? 그리 되면 대들보가 눈을 가리고 있는 겁니다. 그 생각, 그 생각에 따라서 나오는 기도까지 전부 하나님과 맞서게 됩니다. 소돔에 때린 유황불비가 이번에는 아브라함 머리 위를 노릴 판입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저 조카 롯 의가 줄어들어도 그래도 조카 롯은 상한 심령으로 버티지는 아니할까? 이것이 아직까지는 꺼지지 않았을 터인데 이 의가 꺼지지 아니했다면 이게 다시 불살라 올라가면 어떨까, 소망을 두는 것은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계산해 보면 한 50은 채워져야 되겠는데 나보다 못 하니 40, 여자가 강짜니 30, 딸 둘까지 그냥 붙어 있을 테니 이게 좀 늘어 나가야 되는데 그 의가 더 줄어 서름, 지금쯤은 남자들이 있을 터이니 그것들 때문에 더 늘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스물, 그 동네 사돈 집안들까지 다 고려하면 열, 왜 열까지인가? 의가 하나도 없을지라도 살려 주옵소서, 그거나 열 이하 아홉이라도 살려 주옵소서, 그거나. 그거나 그거나 똑같습니다. 열까지 줄어드는 것은 꺼져가는 의가 다시 늘어 나갈 수 있는, 그래도 그 정도입니다.
 
6.25 때 밀려 내려와서 전국이 다 삽시간에 끝장이 났는데 낙동강을 방으로 그 손바닥만한 데서 지금 지키고 있는데 그 손바닥만 해도 그게 낙동강이 막고 있으니 아, 그렇다면 그렇게 밀렸지만은 낙동강을 방어로 견디다가 다시 밀고 올라올 수가 있지 않겠는가, 낙동강 전선에 작은 불씨는 그냥 작은 불씨가 아니라 꺼져 가다가 영 끝나는 것이 아니라 꺼져 가다가 거기서 버틴다, 거기서 버티면 다시 소망이 있겠는데 소망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소망을 위하여 기도하는 그 의의 앞날이 주님의 대속의 은혜고 그게 아버지가 좋은 것으로 줄 줄 아는 좋은 것입니다. 다 밀어 버려서 전국이 100% 공산당이 되더라도 주여, 복을 주옵소서, 그러면 뭐 더 망하고 더 망하여 지옥 밑바닥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밀어 넣으라는 말이 되는데 자기중심이란 그냥 두면 그렇게까지 되어 집니다. 그렇게까지. 오천만 하는 짓이 지금 그렇지 않습니까? 전 인류 75억이 단결하여 발전시킨 오늘이 지금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상상도 못할 만큼 이렇게 바벨 이상의 망할 세상이 되었는데 아직도 위에서 복을 더 주시랍니다. 더 큰 지옥을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리 하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 커져가는 죄악은 막는 것을 하나님이라고 그럽니다. 져 주는 척하지 지지는 않습니다. 내려온 것만큼 뻗어 나가는 용수철을, 용수철을 누르면 누르는 만큼 더 멀리 튀어 나가기 때문에 인간은 죄를 지으면서 우리가 이긴다, 그러지만은 주님은 더 밀어 부쳐라, 그리고 더 멀리 가도록.
 
아브라함의 기도가 30까지, 왜 30? 왜 20? 그런데 왜 10에서 더 숫자를 내리지는 아니 하셨을까? 오늘 내가 오늘 나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맺어진 가족, 교회 그 상황에서 자기를 잘 들여다보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내계 우리의 집회 잘 가다가 그냥 주춤하고 지금 좀 내려와 있습니다. 다시 기회 주시면 또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다, 동시에 옆에 있는 다른 공회들도 미지근해지던 것이 뜨끈뜨끈 해 지면 이 열이 올라가는데 도움이 됩니다. 너 때문에 내가 의인되고 나 때문에 네가 의인되고 이러면 언제라도 소망이 있습니다.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 나 때문에 너 좀 내려앉고, 너 때문에 나 좀 내려앉고 몇 번 그러다 보면 끝장납니다. 자세 지식 생각 첫걸음의 방향을 잘 가져야 됩니다. 천하에 죄인 몹쓸 인간들이 태어날 때부터 작정하고 그렇게 온 인류가 끔찍하다 할 만한 죄를 지어야지 작정하고 처음부터 그렇게 나가는 사람 없습니다.
 
죄든 의든 생명성이 있어 모락모락 길러서 커 나가는 겁니다. 다만 타락 전에는 의를 기르면 마구 빛의 속도로 자라가고 타락한 후에 불행은 의를 기르려면 질질 끌어다가 갖다 놓으면 겨우 따라온다고 느낄 만큼 의가 자라는 것은 돌 트듯이 자랍니다. 돌이 커지겠습니까마는 커지기는 커지는데 도무지 의는 자라지를 않아 애가 터지고 죄는 어떻게 심지도 않았는데 날아가는 씨앗이 심기고 심겼는 줄도 모르는데 벌써 이만큼 자라고 돌아서니까 뭐 그냥 이만한 뿌리 깊은 나무가 되고 죄가 죄 자라는 만큼만 자란다면 우리는 뭐 한 며칠 믿으면 다 의인 될 판입니다. 이게 타락의 자기중심의 그 자기 중심이란 말 한마디 그 시가 가는데 천하를 이렇게 만들어 놓는 기반이 그게 자기중심입니다. 자기중심은 정확하게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만 죄를 만드는 공장이지. 만 죄악을 하늘에까지 뻗어 올라가게 만드는 이거는 배후입니다. 더 나쁜 죄입니다. 작은 의미의 죄는 아닌데 큰 의미의 그 죄 자체가 자기중심입니다.
 
교회도 복음 운동도 공회에도 집회도 우리 신풍교인이 생각할 때는 이런 의미는 평소에 별로 눈에 보이지 않는 큰 면입니다마는 이게 그대로 가정으로 줄어 들면 구역도 우리 구역은 엄청 이렇게 잘 되고 그러면서 상대 구역들은 더 내려가 버리면 격차가 나면서 더 돋보입니다. 그 자기중심이 복음 전도까지 밀고 들어와서 숨어 있습니다. 이건 없는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걸 보며 나를 보고 나를 찾아 의라는 것은 커 나가지는 않을지라도 커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에 키워 나가려고 발버둥이라도 쳐야 마음이라도 가져야 그래야 해결이 되어 지고 소망 있고, 언제 이 정도니까, 이미 그 순간 자라 나오던 것이 방향을 그냥 튼 것이 아니라 반대를 향하여 이제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겁니다. 집회 참석의 자세하나, 또 집회까지 갔다 왔으니 아이고 큰일 했다 좀 발 뻗고, 그 순간이 올라가던 의가 주춤 하고 또 올라가는 거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또 이제 집회 갔다 왔으니 이전보다 더 맑은 정신으로 의가 쌓이지는 않을지라도 의에 대한 마음, 소원 말이라도 항상 이렇게 가져야 됩니다. 삼십, 이십, 열까지 내려 왔다가 중단한 것은 그다음, 한 번 더 기도하면 하나님 멱살 잡고 죄 지으러 가자고 끄는 것이 됩니다. 그건 기도가 아닙니다. 유황불비로 맞을 죄지.
 
“의로운 롯이 그 심령을 상하더라” 그거보다 더 나쁜 일이 됩니다. 롯 구하려고 롯 보다 더 큰 죄인이 되가지고 롯을 의인 만든다, 말이 되겠습니까? 그 모습이 항상 우리 속에 자세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1차-k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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