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새22.4.30 마7:24 주님의 대속 인하여 시대조류에 맞서 나와 주변을 고치며 자라는 생명의 불변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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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새22.4.30 마7:24 주님의 대속 인하여 시대조류에 맞서 나와 주변을 고치며 자라는 생명의 불변행위

관리1 0 77 2022.04.30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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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30 토새
 
제목 : 주님의 대속 인하여 시대조류에 맞서 나와 내 주변을 고치며 자라는 생명의 불변행위
 
찬송 : 101장 (주 예수 대문 밖에)
 
본문 : 마태복음 7장 24절 -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반석이란 말은 흔들리지 않는 영원불변의 기반을 말합니다. 이것은 사상이라 하나 사상도 아니고 이건 민심이라 하나 민심도 아니고, 철학이라고 하고 싶으나 철학도 요동하는 것들입니다. 이 땅 위에 요동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영원불변의 존재는 주님 한 분입니다.
 
주님으로 구원 받은 주님의 대속의 은혜, 여기에 뿌리를 박은 여기에서 뻗어 나온 이것을 가지고 움직인 것만 다 영원불변입니다. 진리가 영원불변인데 주님의 대속이 없으면 진리는 정죄 기능만 있지 우리를 붙들어주는 구원의 기능은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영원불변인데 주님의 대속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 성령의 역사는 없습니다.
 
주님의 대속이 우리 안에 진리와 성령의 역사를, 역사를 구원의 운동, 심신을 성화 시키는 변화의 기능으로 만들어 가게 돼 있습니다. 주님 대속으로 자기의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면 그러면 남의 잘못이 참고가 되어 자기 속의 단점을 고치게 되는 이게 변화의 계기가 되어 집니다. 믿는 사람의 마음이라도 자기중심이 되어 남을 보면 남의 단점만 보이면서 그 단점 때문에 그를 무시하고 그 단점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남을 비웃게 되어 집니다. 그리고 자기중심은 자기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자기를 오히려 보호를 하고 변명을 하고 감싸하고 버팁니다. 합리화까지 해가며 달래가며.
 
주님의 대속을 생각하는 마음, 주님의 대속에 붙들린 마음이 되어 지면 자기 눈에 언뜻 들어오는 남의 단점이 자기 단점을 고치는 계기가 되고 촉구가 되고 촉발이 되고, 남의 단점이 보일 때 주님이 그 단점을 고치려고 구원하셨으니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함으로 자기 단점을 고치려고 작정을 하게 됩니다. 주님의 대속 주님의 구원, 사활의 대속 때문에.
 
사활의 대속이란 죄를 씻는 사죄, 주의 뜻을 찾는 칭의, 주님과 동행의 화친, 천국에 애타는 소망이 주님의 대속입니다. 이 사죄 칭의 화친 소망의 마음으로 남의 단점이 보이면 즉시 변환 전환이 되어, 이 사죄를 주셨는데 저런 죄가 내 속에 있는가? 얼른 조사하게 돼 있습니다. 다른 사람 사고 난 것, 다른 사람 고장 난 것, 다른 사람 실패한 것 다른 가정이 어떻게 하다가 화재가 났는가, 어떻게 불행하게 되었는가. 이게 보일 때마다 주님이 저걸 씻어주셨는데 내속에는 어찌 돼있는고? 그래서 자기를 고치되, 주님 피 흘려 날 구원하기 위해 고난을 당하신 그 고난 각오하고 기억하며 자기 단점을 고치려고 노력하게 되어 있고, 자기의 단점을 고치고 나면 여기까지가 사활의 대속에 죽음의 대속입니다. 난 고쳤고, 그리고 내가 맡은 주변의 사람들은 어찌 돼 있는고? 살펴 그들까지 바르게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이게 부활의 대속이 되어 집니다.
 
이렇게 되어 질 때에 잘 보이는 남의 단점으로 나를 고치고 나를 고쳐 깨끗해지고 내가 보배롭게 되어 지면 밝아진 눈과 그 경험을 가지고 내 식구 내 교인 내 주변 주님이 한 몸으로 주신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이걸 바르게 하나? 이렇게 주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주력을 하려고 들면, 눈이 밝아지고 자기를 고치기 전에는 남의 잘못이 잘 보이고 남의 잘못이 잘 보이면 바로 수술한다고 가르치려 들었으나 그래가지고 그게 모두 다 분쟁이 되었으나, 이제는 밝아지니 저 암 덩어리를 고치기는 해야 되겠고, 잘못 건드렸다가는 퍼져서 더 빨리 가겠고, 주님께 지혜를 구하고 방법을 찾게 해달라고 애 터지게 되어 있고, 방법을 알고 길을 찾는다 해도 인간 혼자서는 넘어갈 수 없는 장벽이 많으니 저 사람 마음문도 나처럼 열어 달라고 간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수요일 또 어제 쭉 해석한 내용들입니다. 이렇게 남의 잘못을 자기 잘못을 고쳐보고 그리고 도와줄 때 참 선지자며, 이 사람이 좋은 나무라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고 이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니, 이렇게 생각하고 움직인 생애 전부가 하늘에 가져갈 나의 마음 나의 행위 나의 이력이 되어 지고. 이순서가 잘못되고 이 자세가 잘못된 부분은 내 속에 있는 내 성격과 내 과거라도 그건 다 버리고 가야 됩니다. 다 지옥에 태우고 가야 됩니다. 내 건데도 잘못 된 내 것은 베어내고 태워야 됩니다. 내 속에 암 덩어리를 내거니까 끝까지 쥐고 간다고 하면 다 죽으면 됩니다. 무리한 것은 달래면 되고 흐린 것은 밝게 하면 되지만은 암 덩어리라는 것은 이것은 쳐서 죽이고 이것은 잘라 내버리는 수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방향을 잡고 자기를 고치며 맡은 식구들을 챙겨 한 걸음씩 나아가게 되어 지면 이 행위, 이 행위의 기반과 근거가 반석입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 주님의 대속 인하여 진리로 자기를 고친 것, 주님의 대속은 반석이고 주님의 대속 인하여 산 것은 그 위에 건설이고, 진리와 성령의 역사는 반석이고 진리와 성령으로 나를 고치고 남을 고치며 노력한 세월 반복한 연습은 의의 연습 경건의 연습 자라가는 복이 되어, 이게 바로 신앙의 건설, 내가 변화 받은 분량이 되어 집니다.
 
오늘 아침 결론으로 누구의 잘못을 볼 것이냐? 가족과 주변 늘 보입니다. 접하고 사는 가족과 교인과 주변 사람들의 단점, 그것까지만 참고하고 날 돌아보면 되겠는가? 거기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시대도 참고해야 됩니다. 오늘 사는 모든 사람의 단점의 총합이 이 시대의 조류입니다. 아니라는 사람도 있지만은 총합에는 들어가 있습니다.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오늘 여수가 이 모양이 되었는가? 여수 시민 25만 명의 잘못이 모여진 결론입니다. 왜 전남북이 한번 말 한번 돌아가면 전부 똘똘 뭉쳐 뭐 옳든 그르든 무조건 한 쪽으로 매진하는가? 호남의 민심인가 이게 세계의 빛이 되는 이게 인권인가? 그게 빛이고 인권이고 그 말을 시비하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르고 간에 일단 주변이 움직이면 뭉쳐놓고 보는 것, 그러다가 유대인들이 예수 잡았습니다. 뭔 죄를 지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 편이 마구 뭉쳐서 그냥 난리가 나니까 같이 떠들고 봤습니다. 빌라도가 이 죄를 어떻게 할래? 그러니까 그 죄? 아 우리가 지고 우리 자손이 지면 될 것 아니냐? 그 말에 걸려 2천년 그들이 고생했고 지금도 세계 제일 잘나가는 나라인데 세계 제일 전쟁터 속에서만 70년, 80년이 진행 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는 내가 그 죄 책임진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 아니고 내 인생 내가 책임지고 내가 책임 못 지면 자자손손 우리 애들이 지면 될 것 아니냐, 이런 소리는 헛 것 이라도 입 밖에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걸 어떻게 고칠까? 내가 고쳐야 자녀에게 희망이 있지 내가 고칠 걸 내가 고치지 못하고 밑으로 흘려놓으면 밑에는 홍수가 나고 저수지가 됩니다. 밑에 절벅거리는 물 조차 피하려고 애를 써야 되는데 뭐 절벅거리는 물에 빠져 죽을까 설마? 그 물이 모여서 태산같이 홍수가 되고 강물이 되면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오늘의 이 나라에 주님이 주신 은혜가 얼마인데 그 은혜를 이렇게 갚아서야 되겠는가? 전 인류가 역사 이후에 가장 잘 먹고 가장 흥청망청 잘 먹고 잘 사는데 전 인류가 똘똘 뭉쳐 주의 복음을 이렇게까지 맞서도 되겠는가? 75억의 세계적인 추세를 보며 난 그런 잘못이 없는가? 나는 75억이 홍수에 다 빠져도 노아처럼 방주의 준비로 벗어나고 든든하게 구원 받아 죄인의 무리 죄인의 회중에 들지 아니하고 복된 의인의 걸음을 걸어간 난 노아와 같은가? 노아와 자녀는 75억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홍수가 나도 노아의 가정은 끄떡도 없었습니다. 난 그리 돼 있는가? 그 전에 홍수를 불러오는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가고 있다가 그날까지 먹고 마시고 흥청망청 거리다가 그 날까지. 노아가 홍수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세상의 흐름이 세상을 휩쓸어가는 운동이 좋은 게 좋다, 좋으니 실컷 먹고 마시고 즐기자,
 
잔소리 마음 아픈 소리 양심의 가책이 되는 소리는 입 밖에 내지 말아라,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거다, 술 먹고 간암 4기가 된 환자한테 술을 또 퍼마셔서 흠뻑 취하게 하면 고통은 잊어버리겠지. 근심도 잊어버리겠지. 그리고 푹 곯아떨어지겠지, 그러면 더 빨리 죽겠지요. 그게 축복인가, 그게 돕는 길인가, 그게 지성인이며 그게 인격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거 아파서 못 견디는 병입니다, 이리되면 100프로 갑니다, 지금부터라도 돌아섭시다, 이게 사랑이며 이게 상대방을 아끼는 생명의 운동인가?
 
전 인류가 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정신이 없는데, 노아와 노아의 가정은 끄떡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아 가정도 나이 구성을 들여다보면, 500세 이후에 낳았던 세 명만 방주에 타고 그 세 명 밑에도 동생이 있을 만하고 그 앞에는 많은 형제간들이 많이 있었겠으나 다 노아를 떠났고 제 마음대로 살았고 주변이 그러니 나도 주변 따라갑니다, 그랬지 천하가 다 흔들어대도 난 노아 아버지의 길이 옳으니 이 길에 서겠습니다, 그 사람만 셈 함 야벳입니다. 아담의 자손을 다 합해서 가인과 아벨뿐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전에 많은 자녀들이 출생했고 떠나 살았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나서 셋을 주신 그 내용을 보니까 아담 주변에 살았을만한 사람이 가인과 아벨이었고 둘 싸움이었습니다. 그 둘의 생활을 떠나 산 넘고 물 건너가면 먼저 태어나 떠나 살던 사방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아가 500세 이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그리고 셋은 방주에 들어가는 걸 볼 때 평생에 흔들리지 않고 한 길을 가는 노아에게, 큰 아들 둘째 아들 490세에 낳은 아들도, 먹고 마시고 이렇게 좋은 세상에 뭔 맨 하늘에 무슨 비가 온다고? 그 아버지 좀 설교가 너무 지나치고 아버지의 옹고집이 이건 벽창호라 참 답답하다, 저 양반을 갖다가 잡아 돌릴 수가 없으니 놔두고 난 내 길을 갈란다. 아담부터 노아 때까지 그 이후로까지 200세 넘어 아이를 못 낳은 사람은 없습니다. 200세 안에 출산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빠른 사람은 65세입니다. 65세에서 200세 사이에 첫 출산이 있고 900살이 넘어가도 출산을 하던 때입니다. 노아에게 500세 이후의 셈 함 야벳이니 노아의 많은 자녀 중에 셈 함 야벳만 아버지의 길을 따라갔다. 아브라함도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많았습니다. 이삭의 에서도 이삭을 떠났습니다. 노아의 자녀들 중에서도 노아의 시대에 흔들리지 않는 세상이 흥청망청하니 그걸 볼 때마다 노아가 자기 속을 자꾸 점검함으로 “완전한 자라”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자라” “의인이라” 날 때부터 원죄가 없는 의인이 아닙니다. 노력하고 애를 쓰고 순종하고 시대와 맞서가며 자기를 지켜냈습니다. 이게 좁은 길이며 이게 좋은 나무라 아름다운 나무를 맺는데 셈 함 야벳이 여기에 붙었고 나머지 자녀는 너무 심하다 저렇게까지, 저렇게까지 심하게 믿어 되겠는가?
 
성이라는 것이, 이번 집회 때 주로 배울 주제가 성인데, 성이라는 것이 아무리 크고 아무리 완벽한 성이라도 한 쪽만 열리면 그때는 성이 아니라 독안의 든 쥐가 되어 집니다. 삶는 가마솥이 되어 집니다. 막으려면 다 막아 버리든지 아니면 이판사판 처음부터 그냥 성 쌓을 연구를 하지 말고 편히 살든지. 다 쌓아 놓고 한 쪽을 열어 버리면 그 쪽으로 다 들어옵니다. 그리고 도망을 못갑니다. 성이 없으면 사방 어디로라도 한번 시도라도 해볼 건데 성이 독안을 만드니 열리는 순간 끝이 납니다. 믿을 바에야 바로 믿어보든지, 그것도 100점을 그냥 맞으라면 우리야 못 맞지만은 주지 않는 것은 받지 않으신다. 없는 것을 달라 하지는 않으신다. 있는 것만 받으신다. 할 마음만 있으면 받으실 것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 한다. 고린도후서 8장 12절의 이런 소망을 주셨으니 제가 할 수 있는 제게 주신 은혜 이거 가지고 천하와 맞서고 주변과 맞서고 나와 떨어질 수 없는 사람, 그 들 속에 있는 단점, 시대의 잘못, 시대의 조류를 읽어가며 단속 또 단속, 그 단속 그 조심, 그 단속 그 조심인 그 행위 그 자체가 방주입니다. 이건 불변입니다.
 
이번 집회를 준비하는 마음의 자세로 한 주간 시대를 보며, 그건 뭐 안 보일 수 없으니까 피할 수 없으니까 시대를 보며 참 그렇다, 이 시대가 이러니 얼마나 탄식이냐가 아니라 이 시대가 이렇다 내 속에도 물 들어 밀고 베어 들어와 있겠구나. 그리고 내 속을 세탁하고 소독하고 씻고 닦고, 그러다보면 성령이 돕고 진리의 능력이 도와서 나 하나 바른 길 걷게 되고 그리고 주변 하나 둘 만들어 가다보면, 그게 한 열 명 쯤 되어 지면 앞으로 좀 더 그러겠구나, 소돔 같은 세상이라도 좀 더 지켜봐 주실 거고 그 마저도 후퇴를 해서 열이 여덟 되고 여덟이 다섯 되고 다섯이 둘되고, 소돔을 천사가 방문했을 때 쯤, 하나가 열로 늘어난 것이 아니라 열은 넘어야 되는 롯의 집에 조사를 들어가 보니까 이건 뭐 엉망 강아지 판 돼가지고 겨우 롯 하나 남았는데 롯 하나의 등불도 간들간들 흔들리며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아니라 나와 내 가정은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나면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모세를 이은 여호수아의 결심 하나입니다.
 
 
 
1차-k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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