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20 수밤
제목 : 자신의 존재와 사명은 과거 신앙은 물론 포기한 자신까지 말씀으로
찬송 : 191장(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본문 : 이사야 49장 9절 -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자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다 같이 묵도 드림으로 예배 시작하겠습니다.
(기도)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의 형상을 목적으로 정하시고, 우리에게 자유성을 허락하사 실수도 하며 넘어지며 이탈하지만, 이것까지 경험이 되고 오히려 원하고 원함으로 주를 향하도록, 사활의 대속으로 길을 열어 놓으시고 말씀과 성령과 매일의 현실을 통해, 각자가 걸어 갈 길을 인도하시는 주님, 오늘이 그날이며 또 다시 돌이켜 주를 향하여 힘 있게 걸어갈 은혜를 받는 예배의 시간이오니, 세계만방에 세운 주의교회들마다 동일한 은혜로 함께하시되, 부족하여 예배에 더욱 마음을 기울이는 저들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이 시간도 주의 인도와 은혜를 바라고 애타게 기다리는 가정들, 건강문제 자녀문제 신앙과 세상에 여러 문제를 가진 어린 교인 또는 장성한 교인, 공회와 우리 모든 교회에 함께하시고, 평소에 신앙으로 부족하여 5월과 8월의 집회를 준비하고 있사오니 오가는 길 늘 지켜 주시고, 준비하는 마음이 기쁨과 감사에 넘쳐 말씀이 자신과 참석하는 모두를 변화시켜, 마지못해서가 아니고 억지로가 아니고 부득이함이 아니라, 감사가 넘치는 우리의 걸음 되도록 함께해 주옵소서. 이 시간도 친히 동행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잡혀 있는 자에게” 죄에게 붙들려 꼼짝 못하고 있는 자에게, 악성악습에 붙들려 신앙으로 자유하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도 붙들려 있는 자입니다. 친구가 좋아 친구 안면 때문에 우정 때문에 붙들려, 우정은 죄가 아닌데 우정에 붙들려 신앙의 자유를 못한다면 그것도 붙들린 자입니다. 어떻게 세상을 살며 들어놓은 지식이 있어, 말씀과 다른 지식 그 지식 때문에 신앙의 지식을 자유하지 못한다면, 그 지식도 털어 버리고 그 지식에게 붙들린 데서 나오셔야 됩니다. 아예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은 기본구원으로 하나님이 불러내어 주시고, 그건 우리가 노력할 것도 없고 알 것도 없이 해결을 해 주시는데, 믿고 난 후에 내 마음과 내 행위에 붙들린 것은, 내가 나의 양심을 통해 이거 붙들리는 게 주님이 주신 은혜인가? 이거는 끊어야 이게 주님이 기뻐하시는가? 그건 찾아보고 따져 보면 쉽게 알아집니다. 죄 짓는데 붙들린 것은 끊어버리고, 말씀으로 나아가야 되는데 게을러 못가는 사람 게으름 잘라버려야 되고, 어떤 것이든지 너의 신앙의 자유를 붙들고 있거든 그건 잘라 버려라. 부모의 사랑이 절에 가서 빌어야 복 받는다. 이렇게 절로 가자고 붙들면 부모의 손, 부모의 인정은 끊지를 못 하지만은, 절에 가자는 그 부탁은 죄송해도 끊을 수가 있어야 됩니다.
또 다 함께 신앙생활 하는 우리 교인들로 말하면, 누가 절에 가자 그러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인도를 이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틀림없이, 그 옆에서 이렇게 저렇게 잘못 영향을 미쳐 이러고 저러니 그러지 말아라 그럴 때, 애매한 것은 부모의 말 선배의 말을 참고 하는 게 좋습니다. 근데 분명히 틀렸다면 부모의 부탁 목사의 요구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랴 사람을 기쁘시게 하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니라. 그럴 때는 주님 따라가지. 부부도, 부모도, 자녀도, 민족도, 그 어떤 것도 주님 따라 가는데 붙드는 것은 그건 곤란합니다. 험 할 때는 딱 잘라버려라 깨버려라 이러는데, 요즘은 먹고 살만하고 다 지성인이 되어 주님을 따라가는데 방해되는 것이 있거든 정리해야 되고 좀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이 정도만 표현해도 다 알아듣는답니다. 그렇게들 지성인이 되었습니까? 그거 그러는 거 그거 사람으로선 그러면 안 됩니다. 이 정도 말하면 뭐 다 알아듣는 답니다. 그래서 말을 부드럽게 하라 그러는데 글쎄요? 갈수록 사람은 더 미개해져서 사람은 자극이 더 강해야 될 것 같은데, 아예 말도 못 꺼내도록 막는 방법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49장 1절 봅니다. “섬들아” 하나님의 나라와 떨어져 끊어진 곳, 아예 별도로 별다른 세계, 별 다른 세계. 한 가정 한 식구 안에서도 다른 식구들하고 사상이 다르고 말투가 달라, 뭐 아예 그냥 별개로 노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가족이야 죽든 말든 뭐 나 술 먹으면 되지. 옛날에 아빠들, 이건 섬에 있는 사람입니다. 요즘은 일반적으로 괜찮은데 10대나 20대 이렇게 성장과정에, 뭔 말을 들었는지 난 내 멋대로 라고 펄쩍 뛰고 뭐 모든 건 난 내 마음대로다. 이럴 때에 섬이 되는 겁니다. 하루 놀고먹는 데는 섬에 있는 리조트가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래 살면 섬사람 됩니다. 섬사람이라 그러면 뭔 말인지 알지요? 갇혀서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쳐 자기들의 세계는 따로 있는데, 이게 남들이 어떻게 보는지 이게 자기한테 좋은지 나쁜지, 그 이런 걸 모르면 섬사람 될 수 있습니다. 섬나라를 좁히면 한나라 안에 섬도 마찬가지입니다. 섬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걸 객관적으로 보고 듣고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해야 되는데, 도무지 남 생각 남 행위는, 고려 밖이 돼 버리면 뭐 세상에서 별종이라 그럽니다. 굉장히 나쁜 말입니다. 아주 나쁜 말.
“섬들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세계와 뚝 떨어져, 죄악의 바다 건너에 딴 세계를 만들고 난 이 안에서 행복하다. 자기 세계를 만든 자더라. 우리나라 옛말로 말하면 우물 안에 개구리더라. 우선은 좋아 보이냐? 그 좋지 못하다.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이어지기는 이어졌는데 너무 너무 거리가 멀어, 뭐 섬처럼 떨어진 거나 너무 거리가 멀어 통하지 않는 거나 비슷해 보입니다.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를 들으라? 더 집중하여 귀를 기울이라. 약속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의 출처, 나의 시작, 나는 어느 공장 출신인가? 국산인가 중국산인가.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존재를 말하는 겁니다. 이사야 너라는 존재는, 너라는 인물은, 너라는 인격은, 출생 때부터 하나님이 따로 떼어 놨다. 인류가 많아도 넌 특별히 필요해서 따로 존재를 찍어서 만들었다. 사람이 많다고 많은 사람이지 나는 아닙니다.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이 역사해 그 사람을 한 번만 만들었지 둘을 만든 적이 없습니다. 지문이 다르고 얼굴 생긴 모양이 다르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너? 너 아니면 안 되겠다. 존재적으로 나를 이렇게 따로 떼 놓으셨습니다. 왕궁에 왕은 왕 된 재미로 살고 왕자는 왕자 재미로 살고, 잘난 사람은 잘난 재미로 살고 믿는 사람은 이런 말씀 하나를 통해, 이사야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이 불러 딱 따로 떼놓으셨구나. 난 내 자리 내 사명 내 앞날이 뭔지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 인류역사 영원무궁토록 나란 나 하나밖에 없는, 이런 나로 준비를 하셨구나. 이만하면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고 넘어도 되어 집니다. 이 자부심이 자만심이 되고 못된 남 무시가 되는 게 문제지, 자기의 존재가 어떤 가치가 있다는 자존, 존재성의 가치를 두고는 끝없이 감사하고 연구해도 좋습니다. 나라의 왕궁에 왕이 따로 있냐? 넌 5천만의 왕이겠지만 난 하나님 앞에 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말이 아니고, 다른 사람은 따로 만들어 다른 걸 맡겼고 나는 따로 만들어 내게만 맡긴 것이 따로 있습니다. 태라는 것은 존재를 말합니다.
그 다음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태라는 것은 내가 만들어진 나라는 존재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라는 존재가 뚝 떨어져 어느 날 불쑥 솟아난 것이 아니라, 그 부모를 통해 부모의 양가의 내력을 통해 환경을 통해 역사를 통해, 또 열 달을 통해 형성된 성격, 1년 3년 5년 이렇게 내력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러면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인류는 아담과 노아 한 명으로부터 번져 졌습니다. 근데 왜 일본사람과 우리가 이렇게 다릅니까? 왜 섬진강 동쪽에 저 경상도 사람과 우리가 그렇게 다릅니까? 왜 내가 네가 왜 그렇게 다릅니까? 먹는 게 다르고 뒷산이 다르고 앞에 바다가 다르면, 먹는 게 다르고 보는 게 다르고 여기에 따라 적응을 하고 세월이 가다보면, 종자는 같은데 영 가운데 형성과정이 그리 되어지는 겁니다.
아무리 착해도 조폭 가운데 넣어놓으면 뭐 꼴찌를 하던 중간을 하던, 조폭 되고 양아치 되지 선비 되겠습니까? 개도 서당 개 3년이면 선비인 줄 알고 뭐, 뭐 짓는 게 다르답니다. 그 이런 환경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못된 것들이 있는데 어느 인간들이 그런 말 하는지 다 아시지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사람. 아니 환경이 다르면 다른 게 정식이고 교육학 상식에 다 나오는 얘긴데,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니? 환경의 지배와 영향을 받기 때문에 환경을 좋게 만들라고 생난리를 하면서, 어떤 환경으로 어떻게 걸어왔는지는 뭐 블라인드 채용이라고 묻지도 마라 그러니까 미쳐도 보통 미친 건 아니지요? 세상이 미쳤을 때 미친 줄은 아시고 미친 세상한데 미쳤다 그러다가 뚜드려 맞으면, 그건 순교가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 간섭하는 자나 아침에 일어나 개귀를 잡는 자와 같다. 그 개한테 물려 가지고 뭐 좋다고? 세상은 미쳤습니다. 미쳐 놓으니까 미친 소리 하는데 똑같이 짖어대면, 미쳤던지 개가 되던지 비슷해집니다. 사람이 개처럼 짖어 되겠습니까? 사람은 사람답게 눈치가 있어야지.
“섬들아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그리고 처음에는 나를 들으라. 존재적입니다. 귀를 기울여라 더 집중해서 들여다 보거라. 섬은 끊어진 세계, 원방은 멀어서 감각이 없는 세계. 발이 저리면 발을 꼬집어도 느끼지를 못합니다. 너무 멀어 그렇습니다. 발가락이 절단이 되면 손안에 쥐고 있어도 느낌이 없습니다. 그게 섬과 원방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너무 멀어져버리면 교회 예배 시간이 자꾸 줄어들고 예배 보는 정성이 줄어들고, 신앙생활의 기회와 열심히 자꾸 식어지고 줄어들고 후퇴를 하면, 마치 편마비가 온 뇌졸중 중풍 환자처럼 슬금슬금 멀어지면, 마비증세가 오는 겁니다. 아예 딱 끊어지면 섬, 멀어지고 둔감해 지면 원방 백성들입니다. “귀를 기울이라” 그리고 잘 들어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이사야를 두고 기록했으나 오늘 우리에게는 우리가 다 이사야와 같은 우리들입니다. 우리 현실에 나란, 모든 사람은 자기중심으로 현실이 만들어 지고 운영이 되는데, 아무리 못나도 자기 현실에 자기는 주인입니다. 중심입니다. 이사야입니다. 이 나를 만들 때부터 특별히 만들었고 이걸 만들어가는 과정, 출생하는 과정,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엄마가 아프리카 사람이면 아이는 안 봐도 좀 검을 것이고, 엄마가 저 영국 사람이면 좀 흰 것일 거고 뭐 뻔한 거 아닙니까? 그 모태로부터 복중으로부터, 그 어머니가 아이를 갖고 젖을 먹여 그런 생각을 하고 길렀으니, 그 흐름을 보면 어떻게 나오는지를 압니다.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나를 만들었다 존재. 내 이름을 말씀하셨다. 이름은 역사입니다. 나의 하는 일, 사명을 말합니다. 학교에 몇 십 명 교사가 있어도 과목별로 나누면 영어교사, 국어교사, 수학교사, 교사는 똑같은 교사인데, 영어교사는 영어 잘할 것이고 국어 교사는 이서지 뭐 잘하고? 국어 잘하고, 체육교사는 공 잘 차고 다른 것이 정상입니다. 너! 너라는 존재 그리고 내 이름을 말씀하셨다. 선지자니까 선지자의 역할 사명이 있습니다. 선지자 중에서도 이사야 시대의 선지자니까 이사야 시대의 선지자는, 한 50년 60년 전에 있었던 아합시대의 엘리야와 또 그쪽은 북쪽입니다. 이쪽은 유다나라 한 60년 후에 이사야입니다. 사명이 다릅니다. 제사장과 선지자는 사명이 다릅니다. 똑같은 선지자인데 타락한 북쪽 이스라엘의 엘리야와. 남쪽 유다나라에 이사야는 같은 선지자라도 사명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때 왕은 아합입니다. 이사야 때는 히스기야와 같이 말을 하면 알아듣는 왕입니다. 오늘도 한 예배당에 함께 예배를 드리나 한 명도 빠짐없이, 너 아니면 안 되겠다고 하나님은 존재적으로 따로 만세전부터 찍어 놓고, 다 따져서 그다음 만드셨고 그리고 여기다 대고 얹어놓은 사명이 또 다릅니다.
교사가 많으면 영어교사가 한 학교에 서너 명, 국어교사 서너 명 그럴 수 있습니다. 근데 어느 교사는 1학년 반, 어느 교사는 2학년 반, 어느 교사는 3학년 반, 가르치는 내용이 다를 거 아닙니까? 똑같은 3학년인데도 우월반이 있어 우수한 아이들 가르치는 영어교사, 평생 배워봐야 ABC가 잘 안 되는 반에 영어교사, 역할이 다를 거 아닙니까? 달라야 마땅하지. 2절입니다. 그러면 1절에서는 존재적으로 사명 적으로 그리고 “섬들아 원방 백성들아” 아 믿는 사람들한테 얘기를 하지 왜 안 믿는 불신자들에게 얘기를 했는가? 뒤에 보면 나옵니다. 2절 “내 입을”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날카롭게 칼같이 만들었다. 뭔 매 입술 부리, 매 부리처럼 뾰족하게 송곳처럼 만들었다가 아닙니다. 입이니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방법. 이 마이크란 망치로 못 씁니다. 밥도 못 먹습니다. 이걸로는, 근데 이걸로 말을 하면 말은 깨끗하게 잘 전달되어 집니다. 선지자의 입, 이사야의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들었다. 입을 칼같이 만들었으니까 누구를 송곳으로 이렇게 찌를 때 입술로 부리로 쪼사라고 그러지는 않았겠구나! 이사야의 말이 강하다는 뜻이겠구나! 조목조목 요목요목 딱딱 찍어 이 왕의 잘못은 무엇이며 이 백성의 문제는 무엇이며, 예전에는 병원에 가면 한의사들은 의사든 그냥 모든 걸 다 봤습니다. 모르는 게 없습니다. 근데 하나를 잘 알기는 어렵습니다.
요즘은 대학병원 가면 과목이 한 50개 됩니다. 신경외과 하나 안에도 전공이 네 개 다섯 개 있습니다. 머릿속에 혈관 막힌 건 이 사람이, 머릿속에 혈관 옆에 암은 이 사람이, 아이들 머리에 고장 난 것은 또 저 사람이, 평생 하나만두고 그냥 질주를 하니까 아주 그냥 정확하게 예리하게, 원인 원인을 딱 딱 짚어 가는데, 둔탁한 육체도 정확하게 예리하게 이렇게 치료를 하니까, 뭐 사람을 100년 건강하게 살리는 것이 예사인데, 둔탁한 인체 보다 더 예리하고 예민한 우리의 마음, 생각, 신앙의 세계는 그냥 잘 믿으면 천국 갑니다. 두리 뭉실 한마디로 말을 해 놓고, 웃고 사시고 자기 것 나눠주고 살면 다 좋은 겁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할 것 같으면 성경 말씀을 이렇게 많이 적은 하나님이, 실수를 했다 그래야 되겠지요. 이 많은 말씀 토시 하나도 필요 없이 반복하며 그냥 적은 거 없습니다. 이사야의 입을,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 말씀으로 지적하고 가르치고 고치고, 수술 할 일들이 그렇게 정확하게 분류해가며 예리하게 하나씩 하나씩 살펴가시겠구나. 그리고 잘못된 것이 있을 때는 수술하시겠구나. 그리고 내 속에 죽이고 끊어야 될 것은, 그 칼로 죽이고 도려내야 되겠구나.
뭐 부부끼리 맨날 싸워 싸면 그 싸우는 이유가 대부분은 다 그거 다 수술해서, 제거하면 좋을 그런 자기중심에 좀 지나친 거 아니겠습니까? 그걸 자꾸 부추겨 되겠습니까? 날카로운 칼같이 만들었다. 이사야를 그렇게 만들어 이방 백성들을 수술하느냐? 그것도 필요하고 오늘 우리는 이런 말씀 읽을 때, 내 마음 안을 들여다보면 이 마음이 지구보다 넓지 좁지를 않습니다. 내 생각, 내 사상, 내 지식을 분류해 보다 보면, 이거는 작은 우주가 아니라 큰 우주보다 더 복잡습니다. 대충 넘어가는 거 아닙니다. 뭐 말하자면 태초의 진화론자들처럼, 어느 날 그냥 세상이 만들어지고, 어느 별에 살까 그렇다가 화성 가서 살까? 생명은 다 죽었겠지. 목성 가서 살까? 들어가기 전에 다 죽었겠지. 지구 찾아 들어온 것들은 그래도 어떻게 원숭이가 되고 살아 갈 가능성이라도 있겠지. 별도 수많은 별 대충 살 수가 없어 천차만별인데, 지식이 대충대충 신앙의 노선이 대충대충. 그런 거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사야의 입을 날카로운 칼로 만드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지식을 예리하게 정확하게 자꾸 배우고 연구를 시켜, 날카로운 칼로 가족, 주변, 다른 교단 찔러 쌓는 게 일이 아니라 내 속에 신앙이 이게 바로 잡혀 있고 바로 걸어가고 있는가? 자기를 들여다보면 그 참 남을 참고하려고 보지, 이거 수술 안 하면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그래서 보지, 나 살피기가 바쁩니다.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든 내 입을 하나님이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칼이란 날카로워야 칼입니다. 칼이 날카롭지 않으면 칼이 안 되는 겁니다. 못이 뾰족 해야 못이지, 못이 뾰족하지 않으면 못이 아닙니다. 날카롭기 때문에 이걸 꺼내들고 아무데나 휘두르면, 가는 것 마다 다 절단이 나버립니다. 그래서 칼은 칼집에 넣고 쓰는 겁니다. 필요할 때 꺼내서 찌르고 자르고 쪼개는 거지, 평소 때는 칼은 칼집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되는 선지자의 날카로운 입은, 여호와의 손 그늘에, 하나님의 손이다 하나님의 처리, 하나님의 인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꼭 처리해야 될 때, 하나님이 손을 움직여야 될 때, 그럴 때에 조심스럽게 순종하며 쓰는 거지. 말씀 하나 교리 하나 성구하나 외웠다고 여기저기 아무 데나 써먹고 돌아 댕기면, 면도칼로 지하철에서 그냥 아무데나 이렇게 허공을 휘두르는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뭐 잘못 돼서 감추는 비겁한 거 아닙니다. 남 죽든지 말든지 수술 해 줄 거 있나 몸 사리는 것도 아닙니다. 치료의 칼이며 옛사람은 죽여야 되는 칼이며, 새사람은 살려야 되는 이런 방어며 공격에 귀한 무기니, 하나님이 쓰려고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처분이 갈 때 이게 가야지, 아무나 대고 그냥 여기저기 찔러대면 안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나한테 해야 됩니까? 옆집 해야 됩니까? 옆집에 불 질러 놓고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불을 질러도 웃으십시오. 너희 집 불탈 때는 너나 그 말해라. 많이 배울수록 말만 늘어가지고, 자기는 남을 공격해 놓고 그다음 뭐라 하면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이거는 회개도 못 하는 죄로 갈 수 있습니다. 성령훼방 죄라 그렇습니다. 말씀은 말씀으로 나를 먼저 들여다 볼 때 복음이 되고, 그 말씀으로 남한테 먼저 적용시키면 율법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하나님 자리에 대신 앉은 희망 없는 사람 됩니다. 하나님의 처분, 하나님의 처리, 하나님의 역사가 움직일 때 그때만 움직이는 게 순종하는 게 선지자의 날카로운 말씀입니다.
그 다음 나를 날카로운 말씀의 선지자로 만들어 쓰실 때 쓰시려고 하시고, 두 번째는 이사야 선지자 “이사야라는 나를 마광한 살을 만드사” 따라 하십시다. 마광한 화살(마광한 화살), 마광이라는 것은 갈아버리는 걸 마광이라 그럽니다. 화살을 쏘았는데 끝이 뭉퉁하면 한 개 쥐 박고 마는 게 됩니다. 화살촉을 갈고, 갈고 바늘같이 잘 갈아서 쏘면 이게 한쪽에 들어가면서 치명이 되는 겁니다. 칼은 찌르든 베든 휘두르던 좀 이렇게 범위가 큰 걸 말합니다. 화살은 딱 한 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갈고 닦고 갈고 닦는 겁니다. 화살촉을 갈면 마광한, 칼이나 화살이나 같습니다. 성전이나 전이나 같은 것처럼 성전을 줄이면 전, 늘리면 성전,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다 같은 말입니다. 한자로 줄이면 살, 두자로 늘리면 화살, 마광한 화살로 만드사 그 전통에 숨기시고, 화살은 화살대로 쓸데가 있는데 이거 휘두르고 그냥 아무거나 이렇게 하면, 부러지기도 하고 그다음 앞이 마모가 되면 못 씁니다. 끝이 조금 삐뚤어지면 화살을 쏘면 가다가 엉뚱한 데로 갑니다. 칼은 날카롭기 때문에 칼집에 숨겨 두듯이, 여호와의 말씀은 수술의 생사를 좌우하는 생명의 말씀인데, 이걸로 가지고 장난삼아 이렇게 저렇게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되니까, 하나님의 처분 하나님의 처리 아래에 순종하고 사용 하거라. 네 멋대로 그거 휘두르지 말거라. 그리고 선지자란 그 선지자를 하나님 나라에 보내면 하나님 나라에 맥을 잡고, 하나님 나라에 중요한 핵심적인 적을 암살해 버리고 귀하게 쓰이는데, 이것도 밖에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화살을 담는 통, 화살을 담는 통 2절 끝에 다 같이 뭐라고 그러지요? 전통이라고 그럽니다. 전통. 전 자가 화살 전 자일 겁니다. 한자로는 화살 전, 우리말로는 빗살, 창살, 살, 쪼개진 낱낱을 살, 화살, 전통, 화살을 담는 통, 그래야 이게 곱게 날카롭게 쏠 때 딱딱 바로 갑니다.
하나님의 종은 귀하게, 바르게, 옳게 잘 관리를 해놨다가, 그리고 외칠 때 외쳐야 이게 똑바른 말씀으로 똑바로 가는데, 친구 따라 휘청, 돈에 휘청, 그래 가지고 나중에 화살을 날릴 때 턱 날리면 이게 목표를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다가 원수한테 가고 엉뚱한데 가가지고 엉망이 되어 버립니다. 계시록 6장에 첫 번째 나오는 말이 흰말 백마운동입니다. 계시록 공부 했었지요? 2020년 5월이던가요? 백말운동, 흰말운동, 말씀으로 죄를 깨끗케 회개시켜 거룩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복음 운동이다. 말, 말은 운동입니다. 흰말을 탄자가 화살을 가졌더라. 화살이란, 복음운동 하나님의 말씀이란 쏘면 직진만 하지 가다가 우회전 좌회전 후진 또는 쉬고 가고 그러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목표를 맞출 때까지는 끝까지입니다. 목표달성 후에 그만두지. 히스기야왕에 잘못이 있을 때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제일 귀한 왕이고 다윗과 나란히 놓을만한 히스기야인데, 그 히스기야의 잘못됐을 때 이사야를 보내 한 마디 딱 해버립니다. 이럴 때가 바로 화살 같은데 이게 직접 목표를 향해 바로 가야지, 저 왕이 화나놓으면 큰일 나겠는데? 이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명운동으로 가야 되겠는데 가다가 슬쩍 피해 간다든지. 지 고집대로 하라는 말 아닙니다. 지 억지대로 하라는 말 아닙니다. 편협 되고 잘못되고 왜곡된 자기의 삐뚤어진 인격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삐뚤어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말씀에 맞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구원 운동의 옳고 바른 “전통에 감추시고” 쓸데가 있어 그렇습니다.
3절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이사야 너는 나의 종이요. 하나님이 칼로 하나님이 화살로 원방이든 섬이든 이사야라는 사람을 하나님이 필요해서 만드셨고, 그에게만 해당되는 사명을 따로 맡겨 놓았습니다. 그때는 이사야고 오늘 내 현실에 이사야는 다 같이 누구라고요? 내가 내 현실에 이사야입니다. 우리가정 우리 가족들에게는 나는 뭔 말을 칼처럼 한 번씩 해야 되겠는가? 언제는 이런 말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날려야 되겠는가? 화살을 대나 개나 그냥 허공에다대고 날리면, 화살도 떨어지고 필요할 때는 못 씁니다. 잘 나가다가 몇 년 만에 한 번씩 그냥 삼천포로 빠지듯이 딱 그럴 때에, 이건 사람이 양심이 있지 이래서는 안 된다. 뭐 말하자면 화살이 되는 겁니다. 말씀으로 도려낼 부분도 있는 겁니다. 한 가족의 숫자가 많으면 아무리 한 편이라도, 이집 저집 뭐가 안 좋아서 이렇게 패싸움을 할 때, 아무리 밖에 가서 패싸움을 해도 우리끼리 돌아앉아서라도, 아 이건 좀 우리끼리라지만 이건 좀 너무 심한 거 같다. 안에서도 좀 야당이 나오고 옳은 소리가 나와야 되는데, 우리끼리 뭉쳤으니까 이판사판 그냥 끝을 보고 끝까지 가는 거다. 평소에 별 것 아닌데 자꾸 그런 말을 하면 중요할 때 못 써먹습니다. 아주 요긴할 때 마광한 살을 준비했다가, 제대로 날려 한 가정에 시도 때도 없이 돌아다니는 생쥐 한 마리 잡아버리든지, 또는 암 덩어리 수술해서 내버리든지 교회도 시대도 다 필요합니다. 이사야를 통해서는 시대를 그렇게 했고 오늘 우리는 우리 현실에 그런 부분을 지금 보고 있는 겁니다.
“너는 나의 종이요”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 마음대로 하나님 하고 싶을 때에, 이게 조건이 붙어서 말씀이 칼 되고 말씀이 화살이 되어야 되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써버리면, 말씀을 썼는데도 그건 자기중심이 됩니다.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의 영광, 내 영광 말고 내 영광 말고, 배고플 때는 먹고 사는 게 문제고 배부르면 뭔가 해보려고 난리고, 뭔가 해 보고나면, 마지막에는 전부 다 명예심에 뭐 한 자리 하려고 플래카드 써 붙이고 모두들 난린데, 그 인간에 한 걸음씩 걸어가는 일들입니다. 아이 때는 아이 일하고 청소년 때는 청소년 그런 혼령기 오고 또 어른이 되면 어른 노릇 하는 것처럼, 그 낳아 놓으면 이게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이 안 되지 않습니까? 이게 10년 20년 가면서 뚜렷하게 나눠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서로 할 일이 다르지 않습니까? 마지막 하나님이 불러 갈 때는 뭐 또 마찬가지입니다. 이거나 저거나 마지막에 갈 때쯤 되면 똑같지 뭐가 그리 다르다고. 이런 과정이 있고 하나님의 인도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제가 그러지, 그런데 보니까 속에는 지 영광인지, 아마 뭐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뭔 선거에서 당선 되고 싶은 사람들, 제가 시민들에게 종이 되겠습니다! 요즘도 속고 있나요? 제가 백성을 위해서 머슴이, 요즘도 속고 있습니까? 그만 한 10번 속았으면 말고 한 20번 속았으면 말지, 백 번을 속아도 이 사람은 뭐, 우리 머슴 되기로 했으니 이 사람은 머슴 될 거야. 네 남자는 네 머슴 되더냐? 네 여자는 네 머슴 되더냐? 네 자녀는 너한테 머슴이 되더냐? 부모나 자식 머슴이 되면 되지.
목회자가 교인 교회 다 해 먹을 때는, 주의 영광을 위하여 떡 갖다 붙이고, 뒤에 보니까 지 영광, 지 머리 내대고 흔듭니다. 개척하는 교회 아직까지는 하나도 예외 없이, 만세전에 하나님이 이 자리에 개척을 작정하고 출발했습니다. 뭐 불신자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그러는데, 기독교 개척은 만세 전을 다 갖다 팝니다. 영원 전을 다 갖다 팝니다. 그러다가 장사 안 되면 개척하다 넘기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고, 아니, 이 자리가 뜻이었다며? 그 몇 년 가지 못할 그런 큰 소리, 낯짝이 있으면 함부로 못하기 때문에 그 말이라도, 여기가 주위에 뜻이 아닌가, 출발은 합니다마는 부족하여 함께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뭐 별로 불편할 건 없을 것 같은데, 막 빵빵 큰소리 있는 대로 여자 앉혀놓고 그냥, 너 나 따라오면 출세한다고 남자들이 꼬여 먹을 때 온갖 부도 다 내듯이, 선거 때마다 뭐 작은 선거든 큰 선거든 오만 큰소리 다하듯이, 애들 앉혀놓고 학교 교사들 뭐 저것들은 도둑놈 아닌 것처럼 온갖 소리 다하듯이,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이건 성경인데,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신풍교회 예배당을 한 5층은 지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왜 5층이 필요하냐? 아 시골에 5층 지어 놓으면 이 교회 목사 누구인가? 목사 찾지 하나님 찾겠냐? 예배당 5층 지어놓으면 지나가다가 얼마나 교인들을 착취해서 이놈의 시골에도 이렇게 짓나? 이리 하나님을 욕을 하겠냐? 불신자 따라 또 휘청거리는 것도 바보지만은 내면으로 냉정하게 따져, 공간이 좁아 더 이상은 어깨가 부딪혀 그래서 넓힙니다. 넓힐 수 있습니다.
공회교회 건축의 원칙은 좁으면 넓힌다. 안 좁으면 예배당이 무너져 죽을 안전문제 아니면 천년만년 가도, 뻰끼는 칠해도 예배당 건축 안 합니다. 소재가 새로 나오든 뭐, 뭐 뭔소리를 하든. 요즘 예배당은 모양이 이래야 됩니다. 저래야 됩니다. 그러든지 말든지 좁은 건 할 수가 없는 거고. 아이가 커 나가면서 옷이 작은데 어떻게 어린 세 살짜리 옷을 대학 가는 애한테 입혀 보내겠습니까? 그건 키워야지. 그건 발전입니다. 떨어져서 몸을 보호 못하면 그때는 할 수 없지. 예전에는 기워 입었고 지금은 기워 입어놓으면 전부 쳐다보다가도, 다른 문제가 생길까봐 그냥 무난히 지나가는 거지. 너는 나의 종이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이랬는데, 하나님이 나를 치켜 업고 고생을 해서 내가 하나님 덕분에 내 영광을 내고 싶습니다. 이거 피하는 거 목사가 어렵습니다. 목사 어렵다는 말을 할 때는 교인은 더 어렵다 그거 잊지 마셔야 됩니다. 흔히들 교인들이 목사와 교회 욕할 때, 목사 저것들 이름 내려고 온갖 욕을 다 하는데, 그럼 교인은 자기 이름 내려고 안 합니까 다? 누구든지 돈 벌고 싶고 누구든지 예쁜 거하고 데리고 살고 싶고 편히 살고 싶고 다 그렇지. 목사만 그렇습니까? 다 그렇지. 목사도 저 정도니 일반 교인 나는 명예문제 생기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겠구나. 이런 것 좀 아셔야 됩니다.
저 뭐 다 해결 하셨을 테니까 한 말씀 또 예를 들어야 구체적이 되겠지. 1년에 한 번씩 교회 결산보고를 하다가 보고를 하다 보면 이게 숫자가 틀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풍교회 결산은 항상 숫자가 틀릴 수 있으니까 확인하시고 맞춰 보셔야 합니다. 일단 이정도입니다 이렇게 발표를 하다가, 숫자가 하나 틀리니까 어디 내 명예를 갖다가 그냥 온 교인들 있는 데서 실수를 했다 그러냐고 그냥, 주일 예배시간에 악을 악을 쓰는 것도 한 25년 전이니까 요즘은 뭐 한 25년 안 그랬으니까 다행입니다. 그 그러는 거 아닙니다. 한 25년 전 쯤의 일입니다. 25년 참았다가 지금 얘기하는 겁니다. 목사도 틀리면 설교 중에 이거 틀렸습니다. 게시판에 떡칠을 해 놓는데, 예수님 부활에 첫 마리아가 막달라 마리아인데 그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 일곱 들렸던 더러운 여자를 깨끗 게 했는데, 그 더러운 여자를 깨끗 게 했다는 그 말씀 때문에 귀신 일곱은 빼버리고, 간음 중에 붙들린 여자가 더러운 여자니까 이렇게 한 번씩 실수를 합니다. 그런 걸 딱 찍어 주면 목사도 게시판에 우리 교회 목사 어느 설교에 이런 거는 실수였습니다. 실수? 그냥 실수 그러면 쉽게 생각하거든요. 혈액 안에 핏덩어리가 하나 혈관을 타고 다니면 보통은 녹아서 없어지는데, 이게 심장이나 뇌에 가서 덜컥 걸려서 막아버리면 심장마비 아니면 뇌졸중으로 즉사 해버립니다. 그 성경 해석의 잘못은, 중요한 교리의 잘못은, 또는 교회의 신앙의 노선의 판단에 중요한 실수는, 실수 하나가 지나가다 남 어깨를 툭 쳤다든지 남의 차를 갖다 천만 원어치 긁었다든지, 그 정도 하고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근데 뭐 교회 서기가 적다보면 이래 적을 수 있고 저래 적을 수 있고 예사로 해선 안 되지만은, 시골이라 회개들이 글을 모르고 계산을 몰라가지고 뒤죽박죽 하다 보니까, 자기 집에 돈을 교회 갖다 놓을 사람이지, 교회돈은 목숨 걸고 일원짜리도 손을 안 댈 사람만 회개를 시키는데, 계산을 하다가 잘못되면 계산하다가 잘못되었는가 보다. 남이 오해할까봐 다시 좀 바르면 좋겠습니다. 이 정도 하면 될 건데 그걸 딱 찍어가지고 돈 떼어 먹었냐 악 쓰는 사람, 그래! 날 보고 돈을 떼어 먹었다 그랬냐? 악을 악을 쓰는 사람, 주일날 예배시간에 그러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러지 말라고 교인 야단치기 전에 목사 실수 있으면 자꾸 발표를 하는 겁니다.
목사도 틀리면 자꾸 회개합니다. 많이 보시고 그리고 교인도 틀렸을 때 자존심 있는데 버티면, 여호와의 영광이 아니라 넌 너의 영광을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영 짓밟는구나. 이리 되어버립니다. 실력은 없어도 이 정도는 피해야 될 겁니다. 이 말씀 참 하기가 어려운데 이런 말씀을 드려놓으면 장로님은 또 저한테 전화를 합니다. 제가 죽어 드릴까요, 또 뭐 언제 어디 뛰어 내릴까요. 사표를 10번 낼까요. 다른 사람 때문에 한번 얘기를 하면 또 장로님은 다 내 잘못이라고 그래 싸니, 그래 그 말 안 듣기 위해서 또 말을 하려다가 참고참고 참다가 또 뭐 전화가 오든지 말든지, 요즘 장로님 전화 저한테 연결 못 시키도록 지금 사무실에 부탁을 해놨습니다. 주일학생 야단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해도, 제가 죄인이라 제가 죽어 드리겠습니다. 그러지. 장로님인들 뭐 저처럼 실수가 없겠습니까마는 그냥 우리가 아는 대로 다 알고 있으니까, 제발 좀 그것도 지나친 것도 탈입니다. 근데 또 장로님 같은 사람 또 하나 더 있습니다. 여기 아시지요? 장로님은 연세가 많아서 그래도 좀 덜 하는데, 이제 인생 출발하면서 뭐 또 장로님만큼 그래 출발하는 사람 그래도 또 하나 있습니다. 저 김희락 선생님. 이거 좀 문제입니다. 그러면 아이고 내가 죄인입니다. 죄인 소리를 갖다 천번 만번 해버리니, 두 분 얘기하다 우울증 걸려 탈날까 싶어 말도 못 하게 이래 만들어 버립니다.
저도 실수하고 여러분들도 실수는 하는데, 너도 실수한 번 했고 나도 실수 했으니까 같이 술 한 잔 먹고 같이 묻어버리자. 이건 술꾼들이고. 목사도 실수 있는데 실수 안 했다고 딱 잡아떼니까, 교인도 눈치 보고 자기 명예 때문에 안 했다고 딱 잡아떼면 이거는 사기 집단이고, 실수는 하는데 어떻게 해야 이걸 줄일까? 고민을 하는 것이 신앙이고 발전인데 그 고민을 하면 귀신이 다 쫓겨나가야 되니까, 그럴 땐 귀신이 딱 붙어 가지고 그래 회개는 좋은 거다. 회개는 좋은 거다. 회개를 더하거라. 더하거라. 더하거라. 영 죽어버려라. 우울증 환자를 만들어 버립니다. 그건 절망의 죄가 됩니다. 아무리 잘못해도 믿는 사람은 돌아서서 좋아지는 소망이 있고 소망 때문에 첫 출발을 씻고 출발 하는 겁니다. 그 뭔 잘못이 있어도 잘못 하나를 상대하는 자세와 표현도 지금 다 담아 봤습니다.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때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이 좋으면 나는 헌신하는 겁니다. 묻어버리는 겁니다. 날 위해서 하나님과 교회와 교인과 남들을 다 갖다 묻는 것이 아니라, 반대입니다. 4절 그러나 이사야 나는 말하기를, 아무리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극진하게 좋게 말씀하셔도,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뭐 지난날 봐봐야 아합 때 엘리야처럼 이제 넉넉하오니 데려가옵소서. 처럼 이사야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은, 내가 그동안. 이사야 선지자는 좀 강하게 외치는 선지자입니다. 아무리 강하게 애 터지게 외쳐봐야 평생에 예언한 것 전부 헛일입니다. 헛되이 수고하였고 “무익히 공연히” 있는 힘은 다 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평생 가르쳐 봐야 뭔 알아듣는 사람 하나도 없고, 정녕히 나의 애원 나의 신원, 나의 애 터지는 이 기도를 여호와 하나님만 들어 주실 수가 있는데, 그리고 마지막에 모든 처리는 하나님께 있는데 이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망해가니, 이사야가 아무리 외치고 가르쳐 봐야 헛일이니, 여기까지가 4절입니다. 시대에 대한 탄식. 이사야는 시대에 대한 탄식 오늘 우리는 내가 내 속을 들여다보며, 참 평생 믿어도 나는 이게 잘 안 고쳐지더라. 참 평생 믿어도 영 신앙이 안자라 참 애가 탄다. 자기를 들여다보면 됩니다.
5절 그런데, 무익하고 필요 없어 보이나 5절에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 보시기에, 인간들은 몰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존귀한자라. 하나밖에 없는 이사야입니다. 우리는 못났지만은 나밖에 없습니다. 날 고쳐 쓰지 나 아니면 다른 걸로는 대신 못합니다. “존귀한 자라”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셔서 나를 붙들고 하나님의 혈통 야곱을 돌아오게 하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전부 나를 통해서 모으시려고,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라는 존재는 그렇게 구별하셔서 하나님의 종을 만드셨다. 그리고 내가 내 속을 들여다보면, 할 일이 많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나에게 구원이 되는 일이 꽉 찼습니다.
6절 “그가 가라사대” 하나님께서 이사야 네가 하나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주저앉았는데, 그리고 이스라엘 중에 아직도 가능한 것들을 모두 불러 세우고 돌아서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 야곱의 족속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다시 나라를 이루고 일으켜 세울 것이라. 아 포로 되어 갔는데 사방에 흩어 졌는데 가능할까? 그럴 것이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여기다 대고 야곱의 혈통, 하나님의 백성들뿐이 아니라 네가 네 속에 그래도 과거에 신앙이 있던 마음이 일깨우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고, 옛날 은혜 받고 펄펄 뛸 때도 나의 이 단점은 이거 고치겠나 싶어 포기했던, 내 속에 섬 같고 원방 백성들과 같은 나의 구조적으로 이거 희망 없어 보이는 이런 일까지, 그런 요소 그런 것까지 전부 이방의 빛을 삼아, 그런 것까지 전부 구원을 베풀어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리되어지면 이제 7절부터 저 끝까지는 좋은 일만 펼쳐집니다.
세상의 왕들이 허리 숙여 우리의 티끌, 우리에게서 떨어진 티끌하나 핥으려고. 몇 절에 그 말씀 있지요? 왕들이 너의 티끌을 핥을 것이라. 못 찾으셨습니까? 23절, 열 왕은 양아버지가 되어 내 친아버지는 아닌데 아버지 노릇을 하며, “왕비들은 내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라” 열 왕이 이 땅위의 위대한 사람들이 그 왕비들이, 이사야의 신앙과 같이 자기를 회개하며 하나씩 둘씩 고친 이 끝자락 거기서 떨어진 혜택 하나에 혀를 핥을 것이라. 요즘 우리나라 정신 차리고 한 번씩 여기저기서 나오는 말 자유민주주의. 국회 뭔 이런 제도 삼권분립, 이런 거 다 오백 년 전에 칼빈의 종교개혁 와중에 떨어진 티끌입니다. 그 티클 하나 들고 오늘의 미국을 만들었고 욕을 해 싸도 오늘 미국을 따라가는 세계가 되었고, 우리나라 이런 나라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걸 속으로는 미워해도 겉으로는 부정 못하고 있는 이런 거. 의회민주주의, 우리 신풍 분들이 투표해 가지고 3분의 1을 몰아주니까 막 마음대로 휘둘러서 모두 요즘, 이제 좀 속이 좀 잘 내려가고 다 그러시지요? 그걸 의회민주주의라 그럽니다. 두목 하나한테 맡겨 놓으면 그 윤 머시기처럼 나쁜 짓을 할 테니까, 3분의 2 우리가 밀어준 국회의원이 윤머시기 멱살을 딱 거머쥐고 그냥 죽어라 이놈하고 비트니까, 뭐 요즘은 이제 좀 어 좀 마음도 풀리시고 이제 병원도 안가시고 그러시나요? 그걸 의회민주주의라 그럽니다. 왕이라도 의회가 있어 견줘야 된다. 그 의회민주주의를 500년 전에 장로교를 만든 칼빈이 천주교에서 나오면서, 교황 저 인간 하나보고 맡겨 놨더니 만은 기독교를 천년 다 말아 먹으니, 교회 장로님들을 좀 세워 가지고 목사가 교황 흉내 내지 않도록 결제를 해야 된다. 교회 안에 장로님들로 당회를 만든 것이 세계적으로 의회민주주의 시작입니다. 세상 학교에도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게 되는 나라는 독재를 못합니다. 여기다 대고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가 들어가면 배가 불러 버립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다 따라가는 겁니다.
이 세계 200개 나라들이 의회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를 통해 독재자 없이 발전되며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아프리카 보다 더 거지같은 남한이 세계 최고의 나라가 됐지, 이게 어디서 나왔는고? 이게 의회민주주의 때문에 그렇다. 자본주의 때문에 그렇다. 이게 다 500년 전에 장로교에서 시작한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찌끄러기 하나 떨어진 거, 왜 찌끄러기라 그러냐? 그건 교회운영에 쓰려고 만들었는데 그걸 불신자들이 창문 틈으로 보고, 그 우리 세상 움직이는데 써 먹으면 좋겠다. 해 가지고 그렇게 가져 간 것이라. 발에 티끌을 핥으리라 그 말입니다. 오늘 아마 공회에 교리와 공회의 신앙의 노선도 눈치 있는 사람들은, 칼빈이 500년 세계를 발달시킨 이 현대 사회의 끝에 나온 모든 구조적인 문제는, 공회 노선과 공회 교훈으로 해결하면 해독이 다 되겠구나, 아마 그렇게 눈치를 채실 분들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발에 티끌을 핥을 것이라. 한 15년 20년 전에 우리 신풍 교회에 안 믿는 사람들이 무던히 찾아와서 제가 그냥 시간이 아까워 아쉬울 때가 있었습니다. 이 나라 각계 각 분야에 나름대로 왕들이고 왕비들이고 다 잘난 사람들이, 신풍교회 뭐 제 설교 들으러 왔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 하다가 아이 낳고 돈이 없어 시골에서 그냥 독학하고 그러다가, 이런 거 저런 게 나오니까 그 소식을 듣고, 외무부장관, 유엔대사, 미국에 보내놓은 자녀들 하고, 서울에 몇 손꼽는 재벌들 집에 자녀들 하고, 신풍교회 학생들하고 서로 방학이 되면 한 팀을 만들어 국내로 세계로 이렇게 어울려 친구를 만들면, 신앙과 인격은 신풍 식으로 하고 세상을 운영하는 잘난 것은 그런 사람들로 엮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두 분이나 여기까지 찾아와서 하도 신풍까지 찾아와서 부탁 하는 바람에, 성의 때문에 한번 서울에 어느 유명한 신학교 1시간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두 번 더 갔다가는 아예 그냥 친구가 될까봐 한번 갔다가 그다음 딱 잘라버렸습니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은 제대로 된 복음은 한걸음 두 걸음 걸어가다 보면, 복음만을 위해서 걸어갔는데 피치 못하게 접촉하는 세상이 여기에서 떨어진 티끌 하나를 보며, 와! 이거 엄청난데? 오히려 교회 안에서 그게 뭔지도 몰라서 모두들 쥐 박지만은, 아는 사람은 밖에서 먼저 아는 사람도 있고 그런 겁니다. 이거 다 얘기하려면 이런 얘기가 100개가 넘고 1000개가 넘습니다. 근데 여기 아는 사람 없지 않습니까? 없으니까 손님이 없어 가지고 이렇게 자리가 텅텅 비지. 돈 벌러 지금 나간 사람이 몇 십 명은 되는 거 같은데, 이사야 49장 시대를 대한 탄식을 담았습니다. 오늘 자기가 자기를 들여다보는 탄식이 되며 다시 차분하게 살펴보면. 세상이 이렇게 어렵기 때문에 그동안 우리가 조용하게 싸우고 배우고 걸어 온 이 길에 효력이라는 것은, 하늘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신앙에 말할 것도 없고 두고 갈 땅에도 좋은 것은, 한 개 열 개가 그렇지 않은데 그 세상에 티끌 하나 얻으려고 하나님과 교회 다 내버리고 그냥, 땅 끝까지 섬까지 가가지고 세상에 떨어진 부스러기 하나 주워 먹느라고 애쓰는 우리 청년들, 그런 분들을 보면서 아이 집 안에 뭐 금은보화가. 저 동천교회 어느 집사님이 그래요. 아니 이 안에가 그냥 금 바닥인데 여기가 금광석인데 뭔, 돌밭에 가가지고 잡석 캐느라고 저럴까? 그 동천에서 그래도 제일 잘 나가는 분이 그 말씀 하시 길래, 아이 그 분은 보는 눈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몇 분이나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돈 놓고 돈 먹기라고 하나 잘하면 복을 딱 주고, 하나 잘하면 돈을 딱 주면 좋다하고 모여들고. 좀 크게 길게 만들기 위해서 1년 10년 이렇게 조용하게 인도하면, 뭐 따라 가봐야 필요도 없네. 이렇게 그릇이 작으면 13년을 기다리고 평생을 기다린 요셉과 다윗 같은 큰 복을 받지를 못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크게 보고 멀리 보십니다.
1차: K.Y.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