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새22.4.19 사49:1 구약에 약속한 이방 구원선포, 세상에 속한 주변을 포기없이 돌려 세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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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새22.4.19 사49:1 구약에 약속한 이방 구원선포, 세상에 속한 주변을 포기없이 돌려 세울 것

관리1 0 67 2022.04.19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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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9 화새
 
제목 : 구약에 약속한 이방의 구원선포, 세상에 속한 주변을 포기없이 빛이 되어 돌려 세울 것
 
찬송 : 29장 (예수 나를 위하여)
 
본문 : 이사야 49장 1절 -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종,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말씀을 전하는 이 면을 가르쳐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입이 쇠의 부리 같다는 말 아닙니다. 입이라 했으니 발표,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밖으로 들어내면 말이고 말을 입이라고 그럽니다. 말을 전하는 곳, 입.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신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나에게도 남에게도 이 문제도 저 문제도 말씀은 어디를 향하던 칼이 되어 집니다. 잘못된 거 베어 내고 그리고 내속에 죽일 나의 원수, 자기 속에 암 덩어리 있으면 전부들 떼 내려고 정신없이 보호하지를 않지 않습니까? 이게 옛 사람 자기입니다. 수술의 칼, 예전에는 수술이 잘 없었으니까 나와 대적 나의 원수를 쳐 죽이는 게 칼입니다. 구약은 실제 칼을 들고 원수들을 죽이러 다녔고, 신약은 신령한 이스라엘이라 내 몸 밖의 원수를 찾기 전에 내 속에 내 인격에 내 마음에 내 행위에 날 반대하는 나의 행위는 뭐며 내 인격의 그냥 둬서 안 되는 원수는 무엇일까? 말씀과 반대되는 내 생각, 하나님의 뜻인 줄 알면서 반발하는 내 속에 잘못된 욕심 잘못된 그런 사상 그걸 말씀으로 꺾어야 되고 바꿔야 되니 그 역할이 구약으로 말하면 칼과 같고 신약은 칼이 아니라 말씀이 칼이 되어 너나 고치거라, 널 고쳐 봐야 남을 고칠 때 도와줄 수가 있다.
 
이사야는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 뱃속에 준비 할 때부터 선지자로 기르려고 하나님께서 준비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런데 왜 1절에 섬들아,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들어라 원방 백성들아 좌우에 날선 검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걸 치며 고치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이런 칼, 다윗은 쇠로 만든 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일으켜 세웠고 오늘 우리는 내 현실에서 말씀으로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될 터인데 내 생각 내 사고방식 내 속에 들어 있는 나 안에 있는 잘못된 나를 먼저 꺾고 수술하고 정리를 해야 하나님의 나라가 기반이 바로 닦일 것이고, 그리고 집안 곳곳에 숨어있는 아이는 아이다운 잘못된 것, 자라나가는 청소년의 그 과정에 잘못된 것, 청년이라고 장년이라고 힘 있고 돈 있다고 설치는 그런 면, 또 나이가 많아지면 나이 많다고 또 자기중심이 되고 말씀과 맞서는 부분, 뭐든지 말씀으로 나를 먼저 고치고 집안 곳곳을 하나씩 둘씩 말씀으로 맞추어 나가면 이게 이사야선지 같은 그런 역할입니다. 섬들은 또 원방 백성들은 이방인들인데 이사야가 칼을 들고 이걸 전부 다 도륙을 해 가지고 죽여 없애는 게 이사야의 역할인가 그건 다윗의 역할입니다. 제사장 선지자 왕 중에 왕은 칼을 들고 앞에 섭니다. 보이는 적을 차단하는 것이 왕입니다. 선지자는 말씀으로 가지고 처단하는 건데 멀리 있는 사람들, 멀리 있는 원방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데 하나님의 백성 아닌 사람들에게 선지자가 어디에 필요하겠습니까? 제사장은 하나님 백성들의 죄만 해결 하는 게 제사장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쳐 인도하는 것이 제사장입니다. 왕은 적들이 들어올 때 칼을 들고 밖을 맡고 안을 보호하는 것이 왕이라 왕은 성도 정복하고 원방 백성들도 맡고 치고 할 일이 있지만은 제사장과 선지자는 그럴 필요가 없는 내부용입니다. 심장이 펌푸 질 해 가지고 뭔 원수와 싸울 일이 있습니까? 손발은 밖을 상대하지마는 심장 이라든지 위장 이라든지 이런 것은 내안에서 나만을 위한 그런 부분입니다. 제사장 선지자는 내부용입니다. 외부용이 아닙니다. 왕은 밖에 오는 적을 맡고 그리고 안에 있는 어린 걸 붙들어 줘야 되기 때문에 안팎입니다.
 
그러면 “섬들아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한 걸 보니까 구약의 이방은 이방인데 구약의 이방을 향해서도 선지자의 말씀이 던져진 걸 보고 상대 한 걸 보니 이게 웬 말인가, 오늘도 성경은 믿는 우리를 향한 거지 중생 되지 않은 사람은 성경 봐도 모르고, 읽어도 모르고 외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뭔 호랑이한테 다이아 반지 준다고 도움이 되겠습니까, 팔겠습니까, 끼고 댕기겠습니까? 사자한테 영어책 주고 영어사전 준다고 도움 되겠습니까, 뭐 코 풀겠습니까? 되는 게 있고 안되는 게 있는데 제사장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죄를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이방인에게는 아예 상관이 없습니다. 선지자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치는데 쓰이는 겁니다. 구약에 사무엘이나 모세 같은 사람은 제사장 선지자 왕의 직을 혼자 다 가지거나 부분적으로 겸직한 경우가 있었는데 이사야 때가 되면 제사장의 역할과 이사야의 역할과 왕들의 역할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가라사대 이사야 네가 여호와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의 혈통 야곱의 여러 지파들을 일으키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붙들린 이스라엘 백성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죄 지어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나안 안에 그냥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북쪽에는 잇사갈 스불론 이런 지파들, 남쪽에는 시므온 지파들, 가운데는 에브라임 단 같은 지파들, 열두지파를 나누어 가족별로 전부 다 배정을 시켰습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는 아무데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안에서도 눈 역할 할 사람, 발 역할 할 사람, 심장 역할 할 사람, 주일에 자기가 있어야 될 위치, 월요일 날 있어야 될 위치, 아이가 있는 엄마면 아침 밥 먹기 전에 어디에 있어야 될까? 그 시간에이 아빠는 어디에서 뭘 해야 될까? 출근 준비해야 되겠지. 그냥 뒤죽박죽 비빔밥을 만들면 맛있지 않느냐, 맛있던 말든 비벼도 되는 게 있고 뒤섞으면 안되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두지파 그 지파안의 가족들로 구약은 아예 떼 맡긴 동네와 지역이 따로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시간에 따라 역할에 따라 하나님께서 어디에 배정을 하고 무엇을 맡기느냐, 구약은 그 땅에 살기만 하면 되는데 신약은 현실마다 하나님이 맡기는 위치와 사명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구약은 보이는 장소에 버티면 자기 위치 자기 사명을 지키는 것이고, 신약은 인도하심을 따라 오전이 다르고 오후가 다르고, 월 첫 주간이 다르고 4월 마지막 주간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6절에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선지자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 시키는 대로 해야 됩니다. 야곱의 지파, 이스라엘의 보전 된 자들이 있어야 될 자기 지파 자기 가족 자기 땅이 따로 있는데 룻기의 나오미 가정처럼 있어야 될 자기 베들레헴 자리를 떠나 배고프다고 이방 모압으로 가 버린다든지 알아서 흩어진 사람, 또 아람나라 나아만 대장 집에 프로 잡혀간 아이처럼 전쟁이 나서 붙들려 간 사람, 이게 말씀 생활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사방천지 엉망이 되는데 이사야를 통해 모두들 돌아오게 한다. 먼 나라에 포로 되어 갔는데 그게 과연 돌아와 질까? 공격을 하려면 보통은 3배의 힘이 있어야 공격을 한다고 그럽니다. 옆집 사람끼리 싸우는 거 말고, 남의 나라를 치고 들어오려면 공격하는 쪽이 두 배는 기본이고 적어도 세 배는 되어야 옛날에 그 먼 데서 싸들고 와서 성을 공격 한다 그럽니다. 그리고 잡아 갔는데 약해서 당했는데 약해서 당한 나라가 치고 가져간 나라에 다시 공격을 해서 빼앗아 온다? 그건 뭐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의 백성들이 흩어진 곳에서 다 돌아오게 할 것이다, 아 그건 굉장한 일인데, 참 기적인데, 과연 그리 될까? 그리 될까? 하나님이 하시니 그런 일은 쉬운 일이다, 그러면 쉽겠다. 그 다음입니다. “내가 또 이사야 너를 이방에 빛을 삼아” 이방의 빛이란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복되게 산다, 구경을 시켜주고 불신자들은 부럽게 쳐다만 보는가? 그러면 불신자 불택자들은 믿는 우리를 볼 때 부러운 것이 그림의 떡이라, 재벌 회장님 외동아들 잘 사는 것은 우리가 베낄 일입니까? 그 집에 밀고 들어갈 수 있는 일입니까? 그림의 떡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운동은 “섬들아 원방 백성들아” 그들에게는 구경거리 밖에 되지 않는데 이 방에 빛을 삼은 나의 구원을 베풀어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땅 끝까지 사방 천지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들만 데리고 오느냐? 구약은 그랬습니다.
 
구약은 “섬들아 원방 백성들아” 신약은 어디가 섬이며 어디가 원방 백성들이냐? 내 속에 들어 앉아 나는 교회를 다니는데 내 속에 과학의 지식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그건 거짓말 같은데 과연 가능할까? 학교에서 배운 과학의 지식이 성경 말씀의 창조를 이게 버티고 거부를 할 수가 있습니다. 내 속에 들어 있는데도 나의 지식 중에 과학의 지식이 섬이 될 수 있습니다. 연세 많은 분들은 그래도 뭐 나이 많은 사람이 무조건이지, 남자가 있지, 유교적인 그 사고방식이 죽을 때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건 섬입니다. “원방 백성들아” 이어지기는 이어졌는데 이게 너무 거리가 먼 소리가 될 수 있습니다. 멀리 떠난 걸 둘째 아들처럼 불러오는 구원도 있을 수 있는데 그것뿐이겠느냐? 아니면 이방나라 백성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려세워 가지고 올 수 있다는 말인가? 구약만 읽어 가지고는 멀리 끌려간 하나님의 백성들을 전부 다 찾아온다, 이렇게만 읽기가 쉬운데
 
6절에서 “흩어진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딱 잘라버렸습니다. 섬에, 원방에 포로 잡혀간 하나님의 백성들 유민들을 데리고 오는 것은 그것도 기적인데 그거는 쉬운 일이고 원방 백성들, 섬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들도 데리고 올 수 있겠는가? 그건 불가능하지 않느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데 야곱의 혈통이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데 가능할까? 구원을 베풀어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구원입니다. 그리고 신약에 주님이 오셔서 구약의 약속한 이 모든 이방의 구원까지를 직접 말씀하시고 해결했으니 이사야 때는 이 말을 해석하지 못했을지라도 주님 오신 신약의 우리들은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학교서 배운 잘못된 과학의 지식도 조상 적부터 몇 천 년 자리 잡은 잘못된 그런 구습에 속한 것도 이건 내가 죽을 때까지 그냥 가져가지 설마 뭐 이거까지 바뀌겠느냐? 그것까지도 바꿔서 회개시켜야 됩니다. 요즘 십대들이 어떤 십대들인데 요즘 십대들을 갖다가 공회 말씀으로 공회 신앙 노선에 갖다놔? 어려운 일은 사실입니다. 신앙으로 바로 커서 세월을 보낸 사람들도 점점 멀어져 가지고 이걸 끌어오기도 어려운데 그걸 끌어 온다면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요즘 십대들은 사고방식과 만들어진 이 구조자체가 아예 외계인들인데 그 외계인들을 갖다가 돌려 세울 수 있겠는가? 날카로운 입의 말씀은 그것까지도 하는 겁니다.
 
원래 주일알고 원래 신앙알고 원래 집회 알아 기본적인 신앙이 돼 있었다가 이제 뭐 집회 그러면 그냥 월요일이나 목요일 날 하루 가서 얼굴 내밀고 집회 참석 명단에 올리려고 슬금슬금 이미 한 번 그랬지, 몇 년 그랬지 이렇게 그냥 주저앉아 버리면 앉은뱅이가 되어 이제 뭐 이 나이에 다시 일어나 가지고 뭐 촐랑거리고 다녀? 이제 뭐 주일 오전에나 한번 얼굴 보고 오후에는 가족들과 함께 시내도 구경하고 신사 신앙이 됐는데 옛날처럼 뭔 주일을 갖다 온 마음을 기울이고 온 가정이 시험 치는 날처럼 그렇게? 옛날에는 그랬는데 요즘은 이제 그런 세월이 많아 가지고 다 다른 공회들은 일반교계들처럼 신사예수 다 됐고 문명예수 다 됐고 가정적인예수 된지 옛날 됐고 교계는 뭐 중인지, 절인지, 천주교인지 구별도 못 할 만큼까지 되어져 버렸고 그래도 한 삼십년 우리는 적지만은 버틴다고 옛날 모습을 보존한다고 했는데 여기까지 이제 들이닥쳐 삼십년 전에 동남아에서 결혼 해 온 분들이 강원도에 있다더라, 구례 지리산 꼭대기에 있다더라, 뉴스가 나왔다가 이십년이 되니까 율촌 소재지에 그런 분들이 계시더라, 그러더니마는 십년이 되니까 우리 교회 안에도 우리 신풍마을 안에도 외국에서 결혼해 온 분들이 다 이제 섞여서 이제는 이게 다 평범해 졌지 뭐 저 집안은 외국에서 오신 분이 계신다더라, 따로 물어볼 것도 없이 집안으로 이제 다 그리 돼 버렸습니다.
 
이제 이런 걸 보면서 세상에 그러면 뭐 그리 되는 거지, 이런 사람이 있고 외국에서 결혼 하러 온 분이 잘못돼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니, 앞집 뒷집에 조선 순종들이 가득한데 뭐 하려고 저렇게까지 비행기를 타고 멀리까지 가서 그 돈 들여 말도 안 통하는 분들을 모셔다가 서로가 그렇게 애를 먹을까? 결혼을 안 해 버리니까, 아 그게 말이 되는가? 결혼했지만 미쳤다고 애를 낳아? 아 미친 것들이 미친 소리를 하는데 멀쩡한 것들이 또 이제 미쳐갑니다. 이미 세상이 다 그리 됐으니 이제는 그런 말 잘못했다가는 맞아 죽을 세상이 됐으니까 입 닫고, 그러다가 또 그 집도 슬금슬금 다 그리 되는데 세상에 공회 우리 교회 안에까지도 이제 결혼 뭐 하려고 하느냐고 버티는 사람들이 대세가 된 거 같습니다. 이거 바꿀 수 있을까? 그거까지 끌어다가 다시 고쳐 놔야 “섬들아 원방 백성들아” 이사야의 입이 아니라 이사야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전능이라 그 말씀으로 움직이면 없는 것도 만드는데 있는 거 끌어다 놓지 못하겠느냐? 잘 믿다가 세월 속에 주저앉은 분들도 일으켜 불러 와야 되고, 펄펄 뛰도록 만들어야 되고, 믿어 본 적도 없고 세상에 나서 세상이 되어버린 섬들과 원방 백성들도 창조의 능력으로 갖다가 세워야 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그냥 세월이 그렇다고 포기하고 슬금슬금 따라가는 거 아닙니다.
 
제가 말로는 또 활동으로는 안 되는 거 치워 버리라 그러라 그러지마는 제 기도는, 제 소망은가면 갈수록 더 뜨거워집니다. 빛을 아는 사람이 어두워지고 한 밤이 되면 밤중이 되면 빛을 더 사모하지 빛을 구경 한 사람이 어두워진다고 나도 불 끄고 그냥 어두움이 되자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아, 호랑이가 아무리 배고프다고 풀 뜯어 먹으면서 요즘 호랑이들은 풀도 먹는다, 채식한다, 다이어트 한다 그러겠습니까? 호랑이의 본능 있으면 한 마리 잡아먹을 연구를 해야 그게 배가 고플수록 호랑이가 먹을 게 없어 풀을 뜯기는 뜯지마는 생고기를 먹어야 될 건데, 이래야 그게 맹수의 본능 아닙니까?
 
신앙의 본능이란 같이 믿던 사람이 주저앉았든 말았든 저걸 어떻게 해야 일으켜 세워 다시 한번 걷게 만드나? 속에 열불이 더 나와야 되고 믿어 본 적도 없다는 인간을 구경해 본 적도 없다는 저 십대들 어떻게 해야 인간을 만들어 보나? 의지가 더 불타올라야 그게 정상입니다. 새벽에 모인 우리 몇, 만이라도 천하가 다 그리 되어도 공회는 지켜졌는데 이제 공회 안에까지 슬금슬금 대충대충 아니냐? 이래서 가정마다 여기저기 밀려들어올지라도 좋은 반발식 그럴수록 더 역항력으로 더욱더 잘 믿어야지, 이를 깨물고 더 열심히 있어야 됩니다. 예전에 예배당에 와서 주무시고라도 기도하던 분들 ‘이제 나이에‘ 그러고 슬금슬금 뒤로 밀려 가면 슬금슬금 내가 어른인데 하고 물러가면 그냥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치매로 들어가는 겁니다. 연세가 많으면 예배당에 와서 좋은 방들 많으니까 주무시고라도 기도생활, 예배생활 또 주변을 다시 일으켜 남한테 너 이래라 저래라 그러지 말고 나만 그리 가면 이게 빛이 되어 전해집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1차-k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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