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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4 월새
제목 : 사죄를 넘어 칭의 말씀 순종에 발견되는 자기 부족 채우려는 노력 *성수주일 차원
찬송 : 82장 (못 박혀 죽으신)
본문 : 열왕기상 19장 10절 -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신앙의 길은 마지막에는 혼자 가는 길이라 했었습니다. 둘이 함께 가고, 또 열 명의 동지가 함께 하고 백 명, 천명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는 한데, 신앙의 특성이라는 것이 이게 그렇지를 아니합니다. 먼저 성경의 말씀만 가지고 말하면 모든 믿는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말씀이라 나는 모르지만은 그 어디에 말씀으로 꼭 살고저 하는 그런 교회 그런 교인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나만 남았나이다” 나 알기로는 “나만 남았나이다” 그렇지 어디든 더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전부가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 말씀 속에 내게 대한 성령의 인도가 따로 있기 때문에 말씀 지켰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지킬 때 말씀 안에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내 현실, 내 생활, 내 생각 안에까지 들어오셔서 뭐 주일로 예를 들면 돈 벌지 않으면 된다, 일 하지 않으면 된다, 또 세상의 오락을 구치 말아라, 일반적으로 한 세 가지 정도를 금해놓았습니다. 그러면 주일날 꼼짝하지 않고 그냥 예배드리고 그리고 별일 없이 보내면 그러면 다 지킨 것 같습니다. 이게 성경을 말씀으로 지키는 1차고, 그 안에서 월급 받는 목사가 주일날 뭐 내가 돈 벌러 갔나? 또 마트 다녔냐? 또 어디 뭐 친구가 왔냐? 그렇다고 목사, 주일로 그것이 백점일까? 주일학생도 해당이 될 건데. 당연히 목회자의 주일은 그런 것은 두말할 것 없고. 주일의 예배 인도가 어찌 되었느냐? 이거는 일반 교인 빼놓고 목회자에게만 성령이 감화와 감동으로 물어볼 겁니다. 요즘처럼 인터넷에 자료 넘치는데 뭐 이거 저거 섞어 한 두 시간 말 하는 거야 뭔 말을 못하겠습니까, 할 말이 없어 못하겠습니까? 너 교회에 필요한 말씀, 수많은 말씀 중에 신풍교회에 오늘 주일에 필요한 말씀을 바로 찾았느냐? 이렇게 되면 이게 목회자의 주일이면 남 볼 때는 주일을 지켜도 성령이 목회자 마음속에 들어가 이번 주일에 신풍교회에 필요한 말씀은 뭐라고 생각을 하느냐? 이건 뭐 그냥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귀를 기울여야 될지 모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세가 이렇게 험악하니 옆 돌아보지 말고 홀로이 믿어갈 연구를 하거라, 최근에 전도서 3장 말씀이나, 또 여기 열왕기상 19장의 말씀이 주변 돌아보지 말고 한 길, 시대가 어려우나 이 길 걸어가라, 방향은 그렇게 잡고 있습니다. 이게 맞다고 쳐도 그 방향에 필요한 말씀을 바르게 전했는가? 이 숙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늘 공무원 비판하기가 쉬운데 출근해서 퇴근까지 별일 하지 않고 그냥 딱 자기 지키고 자기 할 일 하고 왔으면 공무원으로는 백점입니다. 그런데 네가 맡은 그 업무를 관계있는 민원인을 위해 있는 힘을 다 했느냐, 최선을 다했느냐 이렇게 물어본다면 공무원 하다 죽어버리지 거 누가 공무원 하겠습니까? 그냥 그토록 별일 없이 슬금슬금 넘어 가면 되는 거지. 그거처럼 목회도 그렇게 한다면 별일이야 있겠습니까마는 이번 주일 그 교회에 정말로 필요한 말씀을 바로 찾았느냐? 이건 성경 66권을 다 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에 필요한 말씀이 이번 주는 뭘까? 이건 예배 시간 전까지 마음 졸이고 긴장해야 되는 말씀입니다.
전하는 말씀 전부가 교인들에게 필요한 말씀이냐? 교인이 필요한 말씀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그 내용을 전했는가? 이렇게 되면 어떤 설교가도 설교가 끝나고 나면 방향까지는 몰라도 전할 내용을 다 전했느냐 이 앞에는 뭐 50점도 어려워 참 떨어야 되는 문제입니다. 예배 마치고 나가는 교인들 인사는 목회자가 기본적으로 해야 될 일인데, 안하는 이유는 꼭 한가지입니다. 설교가 설교한사람 자기 마음에 오십 점이 안 되는데, 참 낯이 없어 교인 얼굴을 못 보는 겁니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나면 참, 참 이것도 설교인가? 늘 그런 부족한 마음. 교인이 잘했다 해도 채점은 교인이 매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채점을 매기니 기준을 그렇게 잡으면 설교 끝날 때마다 참 부족하다, 그래서 항상 저보다 설교를 잘할 수 있는 분만 계신다면 공회 밖은 노선이 틀려 모시지 못하지만은 공회 안에 그런 분 계시면 바로 모시는 것만이 답입니다.
공무원이야 내가 들어간 자리 내 가족위해서 날 위해서 들어갔는데 누구한테 양보합니까? 잘릴 때까지 끝까지 버티는 거지. 목회자가 공무원입니까? 마지막 하나님 앞에 서면 전부 계산이 다 나올 건데. 바로 전하면 전할수록 좋은데, 바로 전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교인이 강단 서는 것은 목회자가 부탁을 해서 서는 거니까 부담이 없는 거고. 또 미리 준비하고 전하면 되니까 교인이 강단에 서서 전하는 것은 백 점이 어려워 그렇지, 적어도 칠십 점에서 구십 점 사이는 오르내릴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제일 앞에 나선 목회자는 늘 예배 때마다 새 말씀을 전해야 되기 때문에, 교인이 강단에 설 때는 앞서간 목회자 뒤를 따라가면 되기 때문에 길이 나 있는데 뒷길을 따라가기 때문에 그래서 쉬운 겁니다.
교인은 목회자를 앞서 새로운 말씀을 전하면 안 되는가? 당연히 더 좋습니다. 아 그리 되면야 얼마나 더 좋겠습니까? 눈길에 앞서 눈길 산 길 어려운데 앞서 길을 만들어놨는데 뒤따라가는 것도 어려운데 앞서다가 잘못 넘어져놓으면 낭떠러지 굴러 죽으면 어떡할 겁니까? 그래서 목회자가 앞서 걸어가며 만들어 놓은 길을 조심해서 따르시며 이렇게 부탁이 되기 때문에 이 부탁의 제한 때문에 교인의 설교라는 것은 못해도 칠십 점은 넘는 것이고 거의 구십 점까지 되는 게 그게 정상입니다. 문제는 실력에 상관없이 목회자란 그 교회 새 날, 새 주일, 새 예배 때마다 가장 앞서 걸어 가보지 않은 평생에 새로운 길을 또 한 걸음 나아가야 되니 그 뭐 찢어지고 넘어지고 애를 먹는 것이 그게 정상이고 그렇게 애를 먹고 했다고 그게 또 되기나 잘 되면야 보람 있는데 되돌아보면 이왕이면 길은 맞지만은 이 길이 포장이 이렇게 되고 이렇게 정리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리 생각해보면 이게 죄책감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몰래 술 먹다가 들켜서 죄책감이 아니라 가야 할 길을 바로 걸어갔는가? 얼마나 바로 걸어갔는가? 이게 사죄가 아니라 이게 칭의의 걸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죄의 걸음이란 십계명과 말씀이 금지한 걸 얼마나 어겼느냐 이 문제라면 칭의의 문제가 되면 죽도록 충성하라 했는데 얼마만큼 충성했냐? 이건 살아 있는 자체가 죄송한 거고 잘한다고 했습니다, 그건 쉬운데 잘한다고 했는데 얼마나 잘했느냐? 결과를 보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새로운 신시가지나 도로를 많이 만드는데 68년도인가 경부고속도로 처음 만들 때 세상에 이런 좋은 길이 있냐? 전부 놀래서 깜작 놀랬었지요. 몇 년 지나니까 뒷골목만도 못했습니다. 뒷골목만도. 새로 짓는 도로를 보면 참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또 새로 짓는 도로를 가보면 신도시도 그렇잖습니까? 울산 포항에 공단 만들어놓고 공단에 바로 붙여서 신시가지를 만들어 놓고 얼마나 전국에서 와 보고 놀랬는지 그리고 나서 다시 만든 게 여천공단에 여천시를 만들었습니다. 이거는 공단 붙여놓으면 공장안에 기숙사 된다고 산 넘어 십리를 띄워놨습니다. 얼마나 이상적으로 만들어놨는지. 지금 여천 신도시 들어가 보면 아, 구도심도 이렇게 갑갑한 구도심이 없는 왜 이렇게 집을 다닥다닥 지어놓고 왜 이렇게 골목을 좁게 해 가지고 차가 비껴나가지 못하도록 했을까 이리 됩니다. 신도시 만들 때마다 이전에 걸 비교하면서 더 잘하고, 더 잘하니까 갈수록 더 좋아집니다. 끝없이 좋아질 겁니다. 지금 우리 교회 34년 된 소나타, 처음 나올 때 굉장했습니다. 엄청 좋은 차라고. 지금 그 소나타 한번 안을 들여다보시고 겉을 봐 보십시오. 그것도 차인가? 화물차지. 이게 칭의의 세계입니다.
사죄의 세계는 뭔 죄를 지었냐? 회개를 했냐? 칭의의 문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길을 바로 잡았느냐? 얼마나 충성을 했느냐? 그래서 어떻게 바르게 걸어갔느냐? 이걸 물어보는 겁니다. 사죄의 길을 학생으로 말하면 학교 가다가 어디를 도망갔냐? 수업시간 몇 번 빼먹었냐? 이 문제가 사죄의 기준이라면, 칭의의 문제는 오늘 뭐 배웠지? 물어봐서 뭘 어떻게 배웠습니다, 졸졸졸졸 이게 다 나와야 이게 칭의의 기준에 맞는 겁니다. 이게 쉽습니까? 한 시간 듣고 그 자리 앉아서 배워서 뭘 배웠다고 이게 술술 나오면 전교 일등이나 천재지 일반 학생이 노력하고 필기한다고 그게 되어 집니까?
주일 문제 하나를 두고, 새벽예배를 참석하는 분들은 주일을 뭐 어겼냐 말았냐 이런 것은 옛날 일이고 다른 날처럼 주일을 보내기는 보냈는데 오늘은 말씀의 은혜를 얼마나 받았으며 오늘은 주일 속에 한 주간에 필요한 은혜를 무엇을 받았는가? 여기에는 의무가 하나 더 더해지는데, 설교를 못했을지라도 너는 은혜를 얼마나 받았느냐,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세상 공부는 선생님 강사 교수가 잘못 가르치면 아예 학생 탓을 못합니다. 그런데 신앙과 예배라는 것은 목회자에게는 넌 주일날 전할 말씀을 바로 전했냐, 얼마나 바로 전했느냐, 그래서 교인들이 얼마나 주일 예배를 통해 바르게 고쳐졌느냐 여기까지를 물어보는데, 교인들에게는 설교를 잘했고 못했고를 떠나 너의 주일은 네 마음속의 성령이 널 지켜봤으니 설교를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설교 속에 은혜를 받으려고 네가 마음을 기울였다면 너의 정성과 그 자세를 보고 목회자와 다른 교인들은 주일을 빈껍데기로 왔다갔지만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물이 없는 가뭄이었지만은, 너 심령 너 신앙에만은 단비를 내려 차고 넘치는 은혜를 주실 수 있었는데 넌 어떠하냐? 이렇게 되어 집니다.
목회자에게 요구하는 칭의의 기준과 교인에게 들어가는 칭의의 기준이 각각 다릅니다. 그러니 모두들 남 볼 것 없이, 자기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참 부족하다, 어떻게 좀 더 나아져야 되는데, 늘 이 면으로 주님 때문에 볼 수 없는 주님 앞에 뭐 해결은 저 밖에 없습니다, 제가 잘 해야 되는데 내가 은혜 받아 은혜가 넘치면 주변으로 넘쳐 흘러갈 건데, 내 속에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넘쳐 옆으로 번져가고 흘러가면 나 가는 데는 주변이 다 성령의 단비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너 속은 어떠하냐?
열왕기상 19장 아합 때에 엘리야에게는 시대와 하나님의 나라 전체를 다 보게 했고 오늘 우리에게는 일단, 넌 너 속이 어떠하냐? 이것을 물어봅니다. 어느 누구가 제 한 신앙만은 든든합니다, 그러겠습니까? 그래서 또 하루를 새로 주시는 겁니다. 어제 받지 못한 은혜, 어제 부족한 면을 오늘을 통해 다시 채우라는 기회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깊이 나를 돌아보고 또 깊이 나를 한 번 더 돌아보고 내가 책임 맡은 내 가족을 돌아보고 어떻게 해야 나를 봐서 우리 가족들을 신앙으로 하나님이 은혜 더 주실까? 어떻게 해야 이 갑갑한 신앙이 좀 능력을 받아 변화를 받을까? 늘 끝없이 이 연구로 매진하다보면 시대적인 어려움은 언제 넘어갔는지 아득하게 그냥 쉽게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1차-kh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