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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04 금밤
제목 : 성령 감동 대신 하나님 감동, 하나님 사람을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완전 역사
찬송 : 80장(인애하신 구세주여)
본문 : 디모데후서 3장 16절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다 같이 묵도 드림으로 예배 시작하겠습니다.
(기도)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사람이 노력을 해도 완전 자 하나님이 미리정한 절대 예정을 따라, 세상도 저희도 저희 주변도 운영이 되고 있는 것이오니, 파수꾼이 지키며 조심하며 우리도 건설하고 투자하고 아무리 애를 태워도, 만유 주 하나님의 주권으로 만사가 운영됨을 깨달아, 성령으로 주신 말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정확한 말씀, 이 말씀 속에 성경을 기록한 성령의 인도와 감화와 감동에 따라, 좌우 돌아보지 아니하고 주님만을 따라 끝까지 걸어가는 이 밤에 저희들 되게 하시고, 혼란한 시대에 말씀 속에 역사하는 성령의 감동만을 빛으로 삼아, 끝까지 걸어가는 흔들림 없는 저들이 되도록 멀리 두신 자녀들 해외, 또는 바다 위 군무에 있는 아들들 입원 중에 있는 자녀들, 요양 중에 노년의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우리 모든 어른들, 또 이 자리 천하를 모르고 세상을 모르고 좋은 줄만 아는 방심하는 마음까지 두루 모아, 주의 주권 소망함으로 순종만 찾는 이 시간 되게 해주옵소서. 교회 안팎의 신앙으로 세상으로 건강으로 방역으로 화재로, 교통과 각종 안전사고와 사람이 알고모르는 별별 일정과, 좋은 일 위험한 일 전부를 놓고 주의 은혜만 구하는 저들 되게 해주옵소서. 어떤 일이 있어도 돌아보면 더 감사하고 온전을 향하여 자라가는 저들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동네에 격리하는 분들 때문에, 예배당에 들어오지 못하고 주차장에 차량 예배드리는 분들이 좀 많습니다. 남반에도 될 수 있으면 좀 떨어져 앉으시고, 또 집이 예배당과 가까우면 부속건물이나 집이나 별 차이가 없지만은, 예배당 아니면 될 수 있으면 예배당 마당에 차 안에라도 나오시는 것이 조금 낫습니다. 무리하지는 마시되 신앙을 향해서는 한 걸음 더, 세상을 향해서는 한 걸음 뒤로 이게 신앙의 기본 원칙입니다. 에스겔 40장에 보면 구약에 한 자 두 자, 자 재는 자가 나옵니다. 구약에 자는, 팔을 앞으로 내밀었을 때 무릎에서 손끝까지, 무릎에서 손끝까지를 한자로 이렇게 잽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근데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에 잴 때 바칠 때 계산할 때는, 팔꿈치에서 손끝까지 일반적인 한자에 손바닥 넓이를 이렇게 더해서, 자를 좀 넓게 잡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경상도 쪽은 적다보니까 큰 됫박으로 쌀을 재려고 그러면 양식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경상도 됫박은 됫박이 이렇게 작습니다. 소두라 그럽니다. 또 여기 우리 전라도 됫박은 됫박이 큽니다. 신풍계시는 분들은 뭐 됫박 똑같은데 그러시는데, 여기는 들이 넓어 곡물이 많으니까 됫박도 크게 되어있습니다.
성전에 모든 자는, 성경에 재는 것 모든 기준은 자가 좀 넓습니다. 넓다 말은 편하게 믿으라. 그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칠 때는 좀 더 기울이라는 말입니다. 건강하면 앉아 기도하는 것보다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이 더 낫고, 무릎을 꿇었는데 무릎이 아파서 기도가 잘 안되면, 편안하게 앉아 기도를 더 잘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자세는 건강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 다른데 하나님 앞에 향할 때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좀 더 기울여 볼까? 그리고 각자 알아서 하면 됩니다. 세상을 향할 때는 돈을 번다던지 옆집과 이해충돌이 생긴다던지, 세상에 자기의 포부와 그런 야망이 있을 때는, 이왕이면 좀 더 넓게 많이 가 아니라 조금 줄여 갖는 것이 그게 지혜롭습니다.
마치 지혜로운 집에 가정주부들은, 많이 먹을 쌀이 있어도 조금 아껴먹는 것이 훗날을 준비하는 겁니다. 아이들에게 용돈을 좀 푹 많이 줄 수 있어도, 못줘 그런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간이 커 놓으면, 그 자기도 불행하고 주변도 불행하게 만들고 세상을 거덜 냅니다. 그래서 많이 있어도 건강에 문제없으면 큰 문제없으면 아끼는 것이 좋은 거다! 너무 아껴 주저앉고 너무 아껴 튀 나가면 그건 잘못입니다.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그건 가정마다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세상 공부는 좀 줄이고 성경 읽는 것은 좀 더 넓히고, 세상 공부를 줄였는데 남는 시간에 노느라고 나쁜 짓 하느라고 게을러지면, 그 게으른 죄는 죄 중에 제일 큰 죄라 그거는 안 되지만은, 성경을 한 장 더 읽기 위해 그것 때문에 공부를 줄인다면 그건 좀 줄이는 게 좋습니다. 만사 하나님 앞에 기본자세가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백점 만점에 일점짜리가 이점으로 발전하면 하나님은 의인으로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 99점인 저 같은 목사가 98점으로 하나 내려오면, 아 2점짜리 교인들이 많은데 저는 98점이 아니냐? 하나님은 99점해도 되는데 98점으로 1점 내려왔느냐? 넌 방향이 후퇴다 방향이 죄다 죄인으로 보십니다. 1점이 2점 3점으로 올라가는 의인이 99점 98점 97점 내려오는 것보다, 세상과 달리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의인과 죄인의 방향이 바뀐다는 것 기억하셔서, 어쨌든지 한 걸음씩 주님 앞으로 더 나아가기를 늘 노력하는 것 잊지 마십시다.
혹시 격리 문제가 있어도, 침대 위에서 그냥 누워서 화면 보는 것 보다 어지간하면 기대앉아도 앉으시고, 또 침대 위에 기대앉는 것 보다는 침대에 걸터앉아도 걸터앉는 게 좋고, 그거보다는 의자에 좀 예배당처럼 앉을 수 있다면 그리 하시고, 화면에 방향이 어려우면 할 수가 없지만은, 이왕이면 예배당 쪽을 향하여 화면을 돌려놓을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님 앞에 시공을 초월하여 그 예배당은 형편 때문에 못나오지만은, 그 마음과 그 자세가 참 예쁘다 곱다. 그 참 복 받아도 되겠다. 그 불신자가 옆에서 봐도 그럴 겁니다. 절에 중들이 4월 초파일 아니면 교도들이 안보이니까, 법당 앞에 드러누워 삼겹살 구워대도 누가 할 말은 없겠지마는, 불신자가 지나가다가도 그 꼴을 보면 그 중들 그러니까 땡 중 돌중 소리를 듣지, 저거 신이 있다면 한 개 쥐 박아 버리지. 그 안 믿어도 그럽니다. 그 불교 욕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이야 어디 두드려줄 부처나 있습니까? 하나님이 굽어보며 그 나이에 그 신앙에 그 형편에 그 참 곱다. 어떻게 저렇게 마음 쓰는 것이 하나하나 참 아름다울까? 항상 이게 제일 중요하고, 그리고나서 남을 고려해서 하나 더 신경 쓴다면 뭐 참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이 강단 위에 서는 분들은 남들 볼 때는 번듯하나 가족이 가정에서 들여다볼 때, 에! 저 가짜배기! 강단위에 올라가면 천사고 집에 오면 귀신 사탄이고 이래놓으면, 명함에는 복음전도인 입니다, 이리되고. 아는 사람은 귀신들은 저건 내 수하다 그리되어집니다. 항상 마음과 자세를 하나 참고해 보십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베드로후서 1장에서는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 지난 몇 시간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성령으로 나올 때는, 우리 마음을 감화 감동으로 달래며 기다려준다. 이런 뜻입니다. 성령을 빼고 그냥 하나님 할 때는 절대자 완전 자 그 좀 두렵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감동으로” 뒤에 감동이 붙은걸 보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적어야 되는데 왜 하나님의 감동으로 감동이라고 했을까? 완전 자 절대자 하나님이 감화와 감동으로 우리를 하나님처럼 온전하게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목표를 하나님 이름에 두신 겁니다. 가르치는 분이, 가르치는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 강사다 그러면 학원인가보다! 교사다 그러면 초중 고등학교인가보다 이럽니다. 똑같이 가르치는데 가르치는 분이 교수다 그러면, 아 대학에 아주 굉장히 전문적인 것을 가르치는가보다! 강사든 교사든 교수든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말입니다. 근데 강사 교수 교사에 따라 좀 의미가 다르지요? 또 똑같은 선생님인데 스승이다 이럴 때는 지식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격도 본받을만하고 그 걸음걸이도 보면 그 참 감동이 된다. 그 인격적이 더해질 때, 가르치는 학습에 인격이 더해질 때 이럴 때는 스승이다. 그런 말을 합니다.
스승? 선생님? 그 다음 하나 더 밑으로 내려가면, 돈 받고 직업으로 가르치면 되지 뭐, 그건 교사라 그럽니다. 돈 받고 직업으로 가르치는데 거기다대고 좀 욕을 갖다 붙일 때, 혹시 옛날에 교사를 뭐라고 그랬는지 기억하십니까? 접장이라 그랬습니다. 떡 한 개 주면 가르치는 뭐 강아지 같은 것, 이렇게 좀 천하게 볼 때 서당 접장, 접장 질 그럽니다. 똑같이 가르치는데도 스승, 선생, 교사, 접장 이게 좀 달라지지요? 스승, 선생, 교사, 접장, 접장 밑에는 뭔지 요즘 새로 나온 단어가 있는데 아십니까? 전교조입니다. 우리는 노동자다 우리는 그냥 교사가 아니다. 노동권을 쟁취하겠다. 이제 이정도 되면 제일 바닥으로 가는 겁니다. 근데 역사가 발전되면 자꾸 나아가야하는데, 옛날에는 골짝마다 스승이 많았습니다. 그 어느 날 세월이 지나다 보니까 스승은 없어지고 선생님정도만 많았습니다. 세월이 지나가다 보니까 선생도 없고 교사만 가득 찼습니다. 세월이 더 지나가다 보니까 1980 그때가 8년9년 그럴 때인데, 우리 전교조다. 우리 먹고사는 노동권 쟁취를 하겠다. 아 그러고 나서는데 보니까 아 이 분들이 스승 선생 교사, 그 다음 밑바닥까지 그냥 떨어진 겁니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하나님께서 “해아래 새것이 없나니” “낮아지면 높아지고 높아지면 낮아지고” 이렇게 변화 변동을 통해 우리에게 비교를 해 보거라. 큰 병이 걸린다면 건강할 때와 병 걸려보니까 참 건강이 이렇게 소중하구나!
요즘 뭐 병치고 그 뭐 감기밖에 안되는데 국가에서 격리! 해서 가둬버리니까, 아 문 열고 좀 자유롭게 다니던 것이 얼마나 좋았는데, 자유를 뺏겨보고 문을 닫고 들어앉아보려니 이게 참 죽을 지경입니다. 이럴 때 자유와 격리를 비교하면서 그 다음 사람이 자라가는 겁니다. 건강도 모든 명칭도 그렇습니다. 하물며 “여호와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아라” 3계명에 엄명을 해놓은 하나님의 이름을 디모데후서 3장에서는 하나님? 베드로후서 1장에서는 똑같은 말씀인데 성령? 왜 하나님과 성령일까? 완전을 강조하고 절대를 강조할 때는 하나님, 내 속에 일일이 들어오셔서 이거다! 이건 아니다! 이렇게 할 때는 성령. 베드로후서 1장에서는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기록을 했다. 하나하나 애가 타도 기다려주며 그렇게 기록했다 이걸 그 과정을 강조하는 것이고, 디모데후서 3장에서는 감동으로 기록을 했는데 감동으로 기록을 한 다음 그렇게 감동을 시켜 도둑을 만들 거냐? 돈벌이를 시킬 거냐? 뭘 할 거냐? 완전 자 하나님을 향하여 닮아가도록 한다. 완전 자가 기록했으니 완전한 말씀이고 완전한 말씀을 감동으로 기록시켰으니, 이 말씀을 읽고 이 말씀으로 자라가는 우리를 감동으로, 한번 따라하십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온전케 하며),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을 아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쓰셨구나!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을, 완전 자 하나님이 완전 자 하나님의 사람을, 완전 자 하나님을 닮도록 그렇게 방향을 잡으셨구나! 목표를 정하셨구나!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때도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돈쓰는 것도 대화를 하는 것도 집을 짓는 것도 이사를 가는 것도, 취업을 하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이 사람 저 사람이 서로 의견이 달라 생각이 다를 때, 안내하고 조정하는 것도 그 참 그 양쪽을 두고 이렇게 대화하면 마지막에 결론으로 끌어가는 것을 보니까, 그 참 점점 나아가도록 하는구나! 아이 괜찮은 사람을 공연히 싸움 붙여 양쪽에 충돌을 해서 깨버리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보다는 자꾸 고쳐 자꾸 온전하게 나가는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주일 오전에 나눠드린 교안 가지고 계시면 보시고 전체 정리를 한 번 하고 가야 되겠는데, 성경은 하나님이 감동으로 기록하셨다. 성령을 기록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특별히 성령이라 그럽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도 쓰지만은 성령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활동은 항상 감동으로 활동합니다. 성경을 두고 하나님의 첫 번째 활동은 기록영감입니다. 기록 영감. 기록한 말씀 속에 늘 성령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말씀 속에. 내재 영감이라고 그럽니다. 성경 말씀은 어느 말씀이던지 그 말씀을 기록한 성령이 직접 가르치려고 대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무너진 이야기를 들을 때 불안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런데 아파트를 설계하고 건축한 책임자가 공장장, 현장에 현장 책임자를 김 행렬 선생님 뭐라고 그러던가요? 예? 현장소장, 그 현장소장이라고 아파트 공사장에 현장소장이 아파트 이사 갈 때부터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늘 수위실에 앉아서, 이 배관은 이렇고 저렇고 이렇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늘 관리해 준다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큰 회사에서 크게 해서 몇 천억 벌어가고 뒤에 이제 관리업체 맡겨놓으니까, 이 사람들은 청소나 하고 급하면 전화할 줄 알지, 뭐 어떻게 만들었는지 뭘 조심해야 될지 몰라놓으니, 오갈 데 없는 사람들 아파트 경비 나와서 그냥 급하면 전화나 할 줄 알지 아무것도 모르니, 아파트를 만든 제작 업체가 현장 소장이 기술자가, 직접 관리사무소에 늘 대기한다면 그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그 자체로도 얼마나 잘 지었으면 저렇게 자신 있을까? 그러겠지요? 우리나라도 후진국이던 시절에는 다리도 무너지고 집도 무너지고 하도 사고를 내 싸니까, 고속도로부터 아마 그랬을 건데 고속도로 건설 구간마다, 현대 건설 대림건설 엘지건설해서 고속도로 책임진 업체 이름을 갖다 전부 다 배겨놨습니다. 고속도로 가다가 땅이 갈라지고 뒤 비지고 뭐 문제가 생기면, 그 옆에 현대건설이라 대림건설이라 표를 붙여놓으니까 뭐, 그리고나서는 그냥 그리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성령이 잘 기록해놨으니까 알아서 읽고 혼자 공부하고 살아라. 그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기록해 놓으시고 그 모든 말씀 속에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 내재영감입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접하는 말씀, 필요한 말씀을 접하게 되면 내 마음까지 밝혀주십니다. 성경을 읽고 배우는 우리의 마음을 밝혀주는 조명, 무슨 영감이라고 그럽니까? 조명영감이라고 그럽니다. 기록영감. 안 여원 선생님 기록영감 두 번째는요? 내재영감, 조명영감, 그 다음 참 읽어보니 그렇구나! 알았다. 이제 이대로 결심하고 살아보겠다. 그럴 때에 이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살 수 있도록 내 손을 붙들고, 밀어주시고 도와주시고 보호해주시는 하나님 성령의 역사. 말씀대로 실제 살아갈 수 있게 한다할 때 역사 영감이라고 그럽니다. 이런 4가지는 늘 마음속에 기억하시면 좋습니다. 또 한 번 기억해 보시지요. 기록, 내재, 조명, 역사(기록 내재 조명 역사) 기록영감, 내재영감, 조명영감, 역사영감. 앞에 세 가지는 안심하라는 말입니다. 염려마라. 이 어려운 걸 이 어려운 세상을 아 그리 생각하지 말아라. 안심해라.
마지막에 네 번째 역사영감은 쉬운 말씀은 내가하면 되지 이리 생각하는데, 쉬워보여도 네가 한 것은 필요 없다. 성령이 하게 도와주실 때 붙들려 한 것만 구원입니다. 네가 그린 것은 필요 없다. 네가 한 것은 필요 없다. 네가 만든 것도 필요 없다.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해놓은 것은 전부 하늘나라 들어가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3장,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인간이 만든 것은 4계명을 지켰든 뭐 1계명을 지켰든 뭔 말씀을 어떻게 지켜도, 인간이 만든 것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이거는 세상 겁니다. 하늘나라 가져가지 못합니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중생된 영도 성령이 만들었고, 육으로 된 우리 심신이 말씀으로 살려고 할 때, 성령이 내 영과 함께 내 물질인 심신을 실행하게하고, 보호하고 인도하고 그렇게 마무리 지을 때, 겉은 인간의 충성이고 노력이나 속에는 하나님이 다 하신 겁니다.
여기 강단만한 돌이 있으면 아마 1톤이나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500킬로는 넘을 거고 이 탁자만한 돌이 있으면 1톤 된다 치고, 다섯 살짜리 아이가 이걸 밀면 꿈쩍도 안합니다. 다섯 살이 민다고 도움도 되지를 않습니다. 근데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1톤짜리 밀어봐라 할 때 예 밀어라니 밀겠습니다. 이게 순종입니다. 그 순종 속에 들어있는 걸 믿음이라 그럽니다. 10 킬로짜리 쌀 포대도 못 드는데 1천 킬로 1톤짜리 돌을 밀어라니, 이게 마음속에 들어가면 이게 믿음이 아닙니다. 뭐 지구든지 1톤이든지 밀라면 밀겠습니다. 자세가 이리되면 속에는 믿음입니다. 정말로 그 믿음 그 마음이 들어갔으면, 1톤짜리를 밀라 그러면 세 살짜리가 민다고 와서 밉니다. 그런데 밀어도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밀어란다고 세 살짜리가 와서 밀었는데 이게 움직였으면, 얘가 움직인 것이 아니고 얘가 움직여서 도움 된 게이 아니고 어른이, 얘가 순종할 때 순종을 가르치기 위해서 어른이 민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나님이 역사를 할 때 우리가 예 알겠습니다. 순종하는 순종의 결합입니다.
이백여 만 명이 출애굽을 하고 앞에는 홍해바다가 가로막고 있는데, 이 홍해바다를 열고 통과를 해야 되겠습니다. 바다를. 모세야 너 팔을 위로 들어라! 드나마나 이거 들고 뭐 한다고 홍해바다가 열리고 마는데 도움이 됩니까? 그 왜 저걸 시키지? 들어봐야 뭔 소용이 있다고? 그리고 들었으면 믿음은 아닙니다. 인정하지 않은 순종은 죽은 믿음입니다. 마음속에, 참 인간으로는 택도 없다. 그러나 홍해바다를 없는 가운데서 만드신 하나님, 순식간에 이걸 없앨 수 있는 하나님, 하나님이 바다를 향해 손을 들라 할 때 하라 시니 인간으로써는 아니지만은, 창조주 구원의 하나님이 손을 들라 하시니 뭔가 하시려나보다. 이렇게 마음먹으면 마음이 믿은 겁니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바다위로 손을 들 때 손을 들면 이게 순종입니다. 바로 왕이든 일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 믿음이 뭔지를 모르니까 구경만합니다. 바로의 철병거가 들이닥치지, 앞에는 바다가 막고 있지, 그 사이에 이백여 만 명의 남녀노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준비 없이 그냥 갇혔지, 그런데 모세가 떡 손을 드니까 바닷물이 척 갈라집니다. 아! 모세의 손이 그냥 굉장하구나! 아 저 손으로 나를 한번 치면 죽어버리겠구나! 모세가 손을 들 때 팔을 들 때 홍해 바다 갈라진 것만 본 사람은, 불신자도 그건 보면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이거는 보고도 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모세가 기도하고 손을 들고 바닷물이 갈라질 때 믿음의 경험을 가진 사람은, 저건 모세의 힘이 아니다! 저건 보이지 않는 무슨 수력 발전을 어떻게 모터를 돌려 그런 것도 아니다! 저건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저 능력을 모세가 순종할 때 베푸셨구나! 모세는 손을 팔을 바다위로 내밀고, 하나님은 바다를 찢어 나눠버렸습니다. 아 그래도 모세가 팔을 들으니까 뭐 그냥 바람이 좀 날려서 파리 한 마리 쫓아내듯이, 물 한 방울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았겠느냐? 그 물은 도움이 돼봐야 이 물이 여기에 가서 떨어져 그 물이 그 물 됩니다. 바닷가 물을 한 바가지 퍼 다가 해변에 옮기면, 모래 바닥에 들어간 물이 내나 밑으로 또 바다로 들어갑니다. 나 보기에는 뭐 한 바가지라도 도와줬지 않느냐? 그 도움 되지를 안합니다.
성경이 하라 한 것, 성경이 하지 말라 한 것, 성경이 하라하기 때문에 예하고 성경이 하지 말라하는 바람에 안할 때, 마음속에 안해야지 안하는 게 맞지, 뭔가 몰라도 하나님이 하지 말라면 예 그러겠습니다! 마음의 자세가 이리 될 때 그걸 믿음이라 그럽니다. 이걸 두 글자로 줄이면 인정. 믿음은 첫째는 알고 시키는 걸 알고 그 다음 마음속에 인정, 하라니 예 알겠습니다! 하지요. 어찌될지는 몰라도 하나님이 하라 시니 알겠습니다!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팔을 들라면 팔을 들고 걸어가라면 걸어가고, 뭐든지 그 다음 이제 풍랑 이는 바다 위 배의 안에서도 빠져 죽을까봐 떨던 베드로에게, 배에서 뛰어내려 바다 위를 밟고 걸어오너라! 주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베드로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습니다. 배에서 뛰어 내리랍니다. 그리고 물 위를 걸어오랍니다. 알아듣고. 걸어오라 했으니 나는 걸어가겠구나! 그게 인정입니다. 이게 확실하게 인정되면 그 다음 뛰어내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바닷물을 지근지근 밟고 걸어갔습니다.
그날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걷는 모습을 제자들이 보고, 아! 간 크다! 뭐 이판사판 죽거나 말거나 그냥 저질러버리니까 뭐, 정주영이 그냥 부자도 되고 누구는 주식해서 부자도 되고, 죽기 살기로 그냥 한번 전쟁터를 뛰어다니다 보니까 안 죽으니까 영웅도 되고, 아이 시골에 저것이 뭐 대통령이 되었는데 어떻게 그냥 내다질러 보니까 대통령도 되고, 옳지! 베드로도 그냥 한번 죽지 두 번 죽냐? 하고 그냥 휙 해버리니까 저렇게 되는구나! 그래가지고 된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니 알아들었습니다. 알고. 주의 말씀이니 말씀대로 될 줄 알겠습니다. 이게 인정입니다. 알고 인정하고 그 다음 배 위에서 그냥 바다 위로 주의 말씀대로 될 것이니, 뛰어내릴 때 물에 빠지지 않고 바다를 밟았습니다. 죄악 세상을 밟았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현실은 전부 타락 후 세상에 죄악 바다인데, 인간은 아무리 착하게 살고 말씀대로 살고 죄 짓지 않으려 해도, 죄악 세상 안에 인간은 중생된 교인이라도 죄악 바다 죄악 세상에 죄 안 짓고는 못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순종하라했고 인정하고 그대로 살아버리면 말씀 속에 성령이, 내 속에서 내 밖에서 날 인도하시고 책임진다 했으니 알겠습니다. 그리고 걸어버리면 그리고 하루를 살면 하루를 건 것이 되고, 한 주간을 그렇게 계속 나아갔으면, 그게 죄악 바다를 밟고 초월하여 짓밟고 걸어간 행위가 됩니다. 사람이 볼 때는 사람의 담력이고 사람의 순종인데, 그 속에는 명령하신 성령이 순종하는 베드로를 붙들고, 베드로와 물과 천하 만물을 딱 틀어쥐고 걸어가게 한 겁니다.
인간이 볼 때 안 될 것도 마찬가지이고 인간이 볼 때 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아침 밥 먹는 거야 뭐 성령 없다고 못 먹고 뭐, 안 믿는 사람은 아침 밥 다 못 먹습니까? 다 먹지. 똑같은 아침 한 끼를 먹어도, 아침밥을 잘 먹고 오늘에 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위치에서, 나 할 일을 열심히 하는데 이 아침밥이 내게 힘을 주는 것이 맞다! 이게 말씀이고 이게 성령의 인도다! 이 마음으로 아침밥을 먹는 사람은, 한 밥상에 똑같이 밥을 먹어도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아침밥 먹는 사람이고, 그 사람의 밥 먹는 것과 모든 소화는 성령이 소리 없이 믿음에 쓰는 이런 육체의 힘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똑같이 밥 먹고 살면서 성령으로 사는 사람 있고 똑같이 제 밥 먹고 살면서 성령 빼버리고, 인간이 인간의 노력으로 사는 인적 행위로 끝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 빠진 인적 노력은 모조리 전부 다 두고 가야되고 그건 지옥으로 갑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이든지 성령에 기록한 말씀 때문에, 그 말씀을 조명시켜주는 성령의 깨달음 때문에 그리고 그 성령에 순종하는 나를 책임질 것이니, 이걸 마음속에 가지고 그 다음 순종하면 아침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하루에 돈을 벌고 공부하는 것도 남들이 볼 때는 이 땅위에 안 믿는 사람의 행위와 똑 같으나, 그 속에는 보이는 인간 속에 전부 제작자는 하나님이고, 제작 되어진 것은 성화라는 하늘나라 갈 신적요소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 하나님이 손댄 것,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그건 사선을 통과합니다. 왜 이렇게 감동의 방법으로 인도를 하시느냐? 전체를 보면 절대 주권으로 흘러가도록, 근데 내용을 보면 절대 주권의 성령이 우리에게는 반드시 감화와 감동의 방법으로, 시계바늘이 톱니바퀴 두 개 맞물려 돌아갈 때는, 생각 없이 하나가 돌아가면 하나는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걸 기계적인 순종 기계적인 영감이라 그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순종시킬 때는 달래가며 기다려가며 그리고 한걸음씩 인도를 하십니다. 이건 감화와 감동이라 그럽니다. 하나님 원하는 대로 되기는 되어 집니다. “기록된 대로 인자는 가게 되어있다. 파는 자만 불행하게 된다.” 에스더 4장 “죽으면 죽으리다.” 에스더 4장이던가요? 예 에스더 4장 16절 “죽으면 죽으리다.”
절대 주권의 역사가 에스더가 왕 앞에 아하수에로 왕 앞에 나가게 되면 허락 없이 나갔다가는 죽는 법인데, 죽게 되면 아하수에로가 죽이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죽게 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걸어가다가 죽으리라. 나는 나아가는 게 순종이고 하나님의 예정은 나아갈 때 죽여 순교로 받으실는지, 아하수에로 왕을 붙들고 구원의 역사를 하실는지 그건 하나님의 주권이고 나 할 일은 순종이고, 근데 이 주권과 순종 사이가 감화와 감동이라야 되기 때문에, 가정에 부부에 가정 운영도 감화와 감동으로 서로 대화적이며, 서로가 오고가며 한쪽이 묻고 한쪽이 듣고, 한쪽은 말하면 맨날 한쪽은 따라만 가면은 이건 기계입니다. 한쪽이 말을 하면은 들은 쪽에서 그냥 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질문을 해야 그게 부부지. 옛날에는 남자가 짖으면 여자가 따라오지? 가운데 줄에 연세 많은 우리 장년 반들만, 남자가 말하면 여자는 따라 짖지, 그걸 뭐라고 그러지요 네 글자로? 그것을 부창부수라고 그랬습니다. 남자가 큰 소리 치면 여자는 따라하지 뭔 소리야! 부창부수. 이렇게 몇 천 년 여자들을 억눌려놓으니까 요즘은 여자가 말하면 남자가 따라오지 어디다 대고 말을 해? 여창부수가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옛날도 지금도 성경을 기록할 때도 성경으로 사는 오늘 우리에게도, 아 이건 이런데 그럴까요? 그 생각해봐라 아! 그렇겠습니다. 깨닫겠느냐? 예. 모세에게 창세기 1장 1절을 기록하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거야 뭐 얼마나 쉽습니까? 모세에 마음에 세상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비추어 주시면 모세는 모든 것은 시작이 있겠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낳아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낳아 시작했습니다. 그 위로 그 위로 그 위로 끝까지 올라가니까 제일 처음에 제일 처음, 이걸 뭐라고 해야 되겠나? 시작의 시작 제일 첫 시작을 태초라 그럽니다. 제일, 제일 처음 태초에, 아 태초가 있었겠습니다.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니까 태초가 있었겠습니다. 그 태초에 누가 있었겠느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래 태초에 하나님이 어떻게 했겠느냐? 모든 것을 다 만들었겠습니다. 그리 말고 어떻게 표현해야 네가 기록한 말씀을 평생, 네가 기록한 말씀을 이 땅위에 모든 믿는 사람이 간단하게 포함해서 듣겠느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그렇다! 맞다! 정확하다! 어떻게 했다고? 창조하시니라. 예, 없는 가운데 만들었겠습니다. 말하자면 묻고 대답하고 모르면 질문하고 반론이 있으면, 이건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 이렇게 기회를 주며 설명이 있고 늦어도 이렇게 되어져서 속으로 알고, 그렇겠구나! 그렇겠구나! 아 그렇겠구나! 그리되어가지고 그 다음 결심이 생기면 인간은 무섭습니다. 실력 열배 백배 발휘가 됩니다.
아 송아지 코 꿰서 질질 끌고 가다가 그냥 잡아먹던지 팔아 버리던지, 아이를 갖다가 그냥 이렇게 어릴 때는 마음대로 데리고 놀다가, 좀 알아 들을만하면 쥐 박아서 어른들 마음대로 쥐 박아서 휘잡다가, 이래 놓으니까 십대 후반이 되면 이제 덩치로 해볼 만하면, 당연히 맞서게 되는 거지 누가 맞서게 가르쳐 놨습니까? 부모가 가르쳤겠지. 하나님도 사람을 그리하지 않고 기다리시는데 또 하나님이 부모만큼만 합니까? 완전 자 하나님이 흙 한주먹으로 만들어놓은 날 붙들고도 가르치고 이해를 구하고 기다려주고, 그것도 한 번 연습해봐라! 안되겠습니다. 한 번 더 해봐라! 두 번 더해봐라! 세 번 더 해봐라! 자꾸 하니까 나아지지? 육체의 연습도 유익이 있지? 경건의 연습은 범사에 좋은 거란다! 성경에 기록도 그랬고 성경을 가르칠 때도 그랬고 성경으로 실행할 때도 그러시고. 뭐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했다면 나도 나 주변에 가족들 신앙의 식구들과의 관계는, 불이 나서 타죽을 정도 아니면 웬만한 손해는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감화와 감동으로 자꾸 자꾸 나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근데 이 과정에 사사로이 풀면 큰일 난다. 성경을 가지고 신앙을 가지고 네 멋대로 데모하는데 가고, 네 멋대로 사업하는데 가고 네 멋대로 복지하는데 가고, 네 멋대로 구제사업 하는 대로 가고 놀러 가는데 가고 그러지 말아라! 말씀은 네가 감화 감동으로 순종하여 실행하는 대상이지, 말씀을 네가 무기로 삼아 이리 써먹고 저리 써먹고 희약하고 그러는 것 아니다! “사사로이 풀지 말아라.” 하나님께 받아 말씀 하나하나를 절대 주권을 순종하므로 걸어가라. 한 주간 그 앞에 두 주간 합해서 3주 4주 이어지는 말씀에 1차 결론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마스크만 야물게 쓰면 한 가족끼리도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답니다. 예배 위해서 그냥 마스크 벗고 그냥 오천만 명이 한번만 섞어 버리면 하루아침에 끝날 걸, 이 의사들이 들어서 뭘 노리는 것들이 들어서 이렇게 2년을 세계를 골치 아프게 해놨는데, 그거가지고 세상하고 싸울 것은 없습니다. 어쨌든 마스크 쓰면 웬만하면 해결되니까 불편해도 마스크 쓰셔서, 교회 불편 예배 불편은 나 때문에 있으면 곤란 하겠다! 이 생각이 들어가면 교인이고 마스크 안 써가지고 내 돈벌이 안 되면 큰일 나는데, 그건 교인은 아니고 사업가입니다. 예수도 돈 되면 팔 사람입니다. 교회 확진 때문에 우리 애 다치는 것 아냐? 그것은 모성애는 있는데 교인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은 급하면 교회부터 생각하고 예배가 먼저 입에서 나와야 됩니다.
1차: K.Y.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