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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요약-jsh
생계가 어려울 때, 죄 짓는 기회가 적음 – 끼니 해결이 우선
모든 것이 넘치는 오늘,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 계획이 많아짐
귀신의 운동 – 과거: 생계 걱정, 현재 : 노아의 때처럼 넘침
사람의 걸음은 하나님의 인도대로 감
우리를 위해 왕의 입술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 : 만물의 주권자 하나님
예시 : 예배당 문 닫게 하는 정책 – 우리에게 바른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를 묻고 계심
집권자를 통해 움직이시는 하나님 – 하나님 앞에 각자 고칠 것 찾기
왕의 입이 그릇하지 않는 이유? 하나님이 왕을 통해 일하심
간칭, 명칭, 추돌 – 저울
이사야 40:12 – 하나님의 은혜를 함부로 헤아리지 말 것. 바닷물, 하늘, 티끌
이사야 40:12절을 통해 명칭, 간칭 추정 가능 - 명칭 : 큰 저울, 간칭 : 작은 저울 –
상황에 따라 다른 저울을 사용해야 함 – 명칭과 간칭. 예시 : 남편과 대통령 실력
저울 : 판단 기준, 모든 저울은 여호와 것
모든 저울 – 모든 주변 환경 : 모든 저울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측정하고 계심
속이는 저울도 하나님 허락하신 것이므로 각자 고칠 것을 먼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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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10 금새
제목 : 나를 통치하는 환경, 나를 판단하는 기준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상대할 것
찬송 : 74장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본문 : 잠언 16장 9절 -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는즉 재판할 때에는 그 입이 그릇하지 아니하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걸어 갈 길을 아무리 계획해도 ‘진학과 진로와 인생의 앞날을 설계할지라’도 하는 말입니다. 세끼 밥 먹기가 어렵던 시절은 다른 생각을 하지를 못했습니다. 다음 밥 한 끼 먹는 것만 걱정했습니다. 그것마저 먹을지 굶을지 하나님이 결정하지, 인간이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 해도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꽃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라고 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생존이라는 것은 게으르지 않으면 별 문제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든지 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넘치고 보니까 사람의 마음에 계획이 많아져 버렸습니다. 세 끼 먹고 살 때야 그건 인간의 기본이기 때문에 죄 되는 일들이 별로야 없습니다. 세끼 밥 먹고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일반적인 활동인데, 먹을 게 넘치니까 예술을 하려는지, 여행을 하려는지, 뭔 이런 명예, 저런 계획, 얼마나 많은 것이 쏟아지는지 거의 대부분이 안 할 일을 하는 일은 시대가 되어져 버렸습니다. 생존이 어려울 때는 몸이 피곤해 쓰러지고, 누으면 저절로 잠을 잤습니다. 근로시간은 줄고 쉽고, 쉬는 시간은 많고, 공휴일도 많고, 방학도 많고, 노동자 한 주간에 이틀을 놀고도 먹고 사는 때가 되니까 남는 시간을 복되게 이용한다는 것은 이건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살다 보니 아이 낳고, 아이 기르다보니 볶여서 정신 없이 살면 죄는 덜 짓는데, 늦게 결혼해서 할 일 많지, 쉽게 일해도 먹고 살지, 생존 이상으로 쓸 돈은 생기지, 시간도 생기지, 방법도 생기지, 많은데 절제하고 많은데 자기를 관리한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옛날 귀신은 협박이었다면, ‘굶어 죽는다’ 협박이었다면, 오늘의 귀신은 한 각자를 하나님 만들어 마음껏 모든 것을 다 해 보도록 펼쳐 놓으니까 “노아 때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다가” 생존을 위해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먹어야 더 행복할꼬? 어떻게 놀아야 더 즐거울까? 그러다가 전부 다 넘침으로 홍수 속에 들어간 것처럼, 오늘이 그렇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은 하나님이 인도하게 되어 있으니 벌 생각, 딴 생각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해야 될 것 열심히 하다 보면, 나쁜 일 죄 저지를 일을 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할 일인가? 위로 주님 모시고 옆으로 한 몸으로 준 식구들 챙기다 보면 그러면 해야 될 일 하고 다른 일, 나쁜 일, 잘못된 일 저절로 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10절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다” 이 땅 위에 왕치고 좋은 왕 있었겠습니까? 인간인데 왕 노릇 해놓으면 더 나쁜 인간 되지. 그래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왕이라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집으로 가면 남자가 왕이고 나라로 가면 대통령이 왕이고 요즘같이 선거하는 때는 시장이 작은 나라 왕이고 그렇습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왕의 입을 가지고 ‘하나님이 내게 저리 말씀 하는구나!’
지난 2년간 예배당만 작정하고 짓밟는 왕이 있었습니다. 잘못된 것은 천벌 받을 겁니다. 천벌은 인간이 주는 게 아니라 놔둬도 하나님이 반드시 잡아다가 천벌 주십니다. 하나님께 맡겨 놓고 교회는 ‘왜 하나님이 생각도 못 하는 사람을 왕을 세워 예배를 이렇게까지 못 박고 있는가?’ 예배당 안에 예배드릴 자격이 없는가? 예배드릴 복이 없는가? 우리가 드린 (예배당이, 예배가, 예배당이) 예배당에 예배가 아니었던가? 돌아봐서 잘못된 예배를 회개하고 바른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하고 바른 예배를 드렸다면 더 바른 예배를 드리기로 해서 노력하는 것이 예배당 문 닫는데(닫을 때) 교회가 할 일이지, 교회가 자기는 돌아보지 않고 기독교 박해한다고 머리띠 띠고 나가서 주먹 싸움하면 하나님 상대로 전쟁하는 꼴이 될 수가 있습니다. 자녀는 아버지께 주먹으로 대드는 것은 아닙니다. 눈물로 호소를 하지. 마찬가지로 백성은 왕에게 죽창 들고 대드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정권은 죽창 들고 앞에 왕을 찔러 가지고 왕 된 사람들입니다. 그 짓을 했을지라도
믿는 우리는 좋은 왕은 세워주면 ‘평안할 때 열심히 전도하라는가 보다’ 그러면 복이고, 못된 왕을 세웠을 때는 ‘우리가 매 맞을 일이 좀 있었는가 보다. 무엇이 잘못했을까?’ 이게 믿는 사람입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은 해도, ‘지금 정권이 교회만 저렇게 증오하고 짓밟는 것은 천벌 받을 것이다’ 그 말은 할 수 있습니다. 근데 원인이 뭐냐? ‘교회 안에 맞을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우리 고칠 뜻이 뭐냐? 이렇게 돌아보는 것이 지혜롭고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왕을 왕으로 보지 말고 왕 속에 하나님이 왕을 붙들고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왕 속에 하나님을 빼 버리고 왕하고 나하고 1:1로 ‘잘한다. 못한다’ 그리고(그렇게) 상대하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을 상대해도 그렇습니다. 낮은 사람, 높은 사람, 가까운 사람, 먼 사람 할 것 없이.
왕이 “재판할 때 그 입이 그릇하지 아니하리라” 왕의 재판은 옳다. 예배당 문만 지금 막 천벌 받으려고 문을 닫고 앉았습니다. 틀렸지 않습니까? 근데 왜 옳다고 그러지요? 교회 예배당 안에 예배답게 예배를 드리지 않으니, 저런 왕을 세워서라도 예배당 문을 닫으며 하나님은 ‘한국교회 너희들 예배당 안에 예배 이게 예배냐?’ 이래 묻고 계십니다. 신풍교회 예배는 건전한데요? ‘어 그렇다’ 치고. 예배당에 앉아 있는 ‘네 마음은 옳은 예배냐?’ 이렇게까지 묻는다면 누구도 하나님 앞에 ‘저의 예배는 떳떳합니다’ 그 말은 못 합니다.
11절입니다. “공평한 간칭과 명칭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추돌들도 다 그의 지으신것이니라” 간칭, 명칭, 추돌은 다 저울을 말합니다. 저울. 조금 넘겨서 이사야 40장을 잠깐 살펴보실까요? 조금 뒤로 넘어가면 됩니다. 잠언, 전도, 이사야입니다. 1,015 페이지입니다. 1,013 페이지입니다.
이사야 40장 12절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떠보면서 바닷물이 얼마나 되는가? 세숫대야에 물 담아 놓고 손바닥으로 이렇게 재보면 50분이다 100분이 다 그렇게 나오겠지요? 3되 되는구나? 4되 되는구나? 근데 자기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퍼내며 몇 분인가? 헤아려보자.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는 인간이 머리로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다음 “뺨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한 뼘, 두 뼘 재어보자. 하늘 높이는 얼마나 높은고? 얼마나 넓은가? ‘하나님은 불교의 석가보다 많다, 높다’ 그리 말하는 거 아닙니다. 석가하고 공자는 서로 재 보면서 석가가 더 오래 살았으니, 공자가 제자가 많으니, 유교가 낫다. 불교가 낫다. 오만 걸 다 재 봐도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세계라는 것은 고개 숙이고 ‘예’하고 그냥 ‘감사합니다’ 하는 거지. 하나님은 얼마짜리인고? 그러면 안 됩니다. “땅이 티끌을” 땅의 흙이라 그러면 됩니다. 티끌은 성경에 늘 흙과 같이 썼습니다. 이 땅위에 흙이 몇 되나 되는가? 다 큰일납니다.
그다음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볼 사람이 있겠는가? 여기 보니까 명칭, 간칭 둘다 저울인데 옛날에 옛날에 저울이라 이거 쉽게 요즘 말로 해석하면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명칭으로 산을, 간청으로 작은 산을” 이렇게 보니까 명칭은 큰 저울을 말하는구나! 간칭은 작은 저울을 말하는구나! 이사야 40장을 보니까 명칭과 간칭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명칭은 좀 큰 걸, 간칭은 좀 작은 걸 재는구나! 한자만 보면 간칭이라는 것은 ‘간’ 난간, 막대기 저울을 간칭이라 그럽니다. 돼지 어깨에 메고 몇 근 나가는지 재는 거 봐 보셨습니까? 연세 많은 분들은 보셨지요? 큰 막대기에 대고 돼지를 매달아 가지고 몇 근 간다. 이렇게 재는, 그런 ‘간’ 보통 그런 걸 간칭이라 그럽니다. 잘못 읽으면 명칭의 명은 접시를 말합니다. 접시저울. 명칭은 접시저울. 조금 무거운 걸 담고, 그다음 간칭은 어깨에 메고 큰 막대기처럼 아주 무거운 걸 잘 때 간칭이라 그러는데 이사야 40장 12절의 명칭은 산들을 간칭은 작은 산들을 그런 거니까 ‘간칭이 좀 잡고 명칭이 크다고 그렇겠구나’
그리고 잠언 16장 11절 “공평한 명칭과 간칭은” 큰 걸 잴 때도 있고, 작은 걸 잴 잘 때도 있습니다. 남편을 남편이 실력을 잴 때는 작은 저울로 재야 됩니다. 제 남편 월급을 많다 적다 재는 그 눈으로 가지고, 대통령을 보면서 이번 대통령은 경제력이 있다 없다 그렇게 재다보면 실수합니다. 큰 나라를 운영하다 보면 좀 손해를 보는 거 같아도 뒤에 보면 큰 돈을 벌어되는 그럴 때도 있고 그런 겁니다. 집에 부부 살림 사는 거야 눈으로 딱 보면 보이지만, 나라 경제는 가정 경제처럼 눈으로 본다고 그게 눈으로 쉽게 파악이 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큰 걸 보는 큰 눈도 있어야 되고, 세밀한 걸 보는 작은 눈도 있어야 됩니다.
여러 가지 저울을 말합니다. 모든 종류의 저울은 여호와의 것이다. 모든 종류의 저울은 여호와의 것이다. 착한 사람이냐? 좋은 신앙이냐? 올바른 길이냐? 문제가 있느냐? 기뻐해야 되느냐? 저울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모든 저울들은 여호와의 것이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참 그 사람 사람 좋다. 사람 좋다.’ 그러면 ‘등신들 같은 것이’ 그럴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사람들이 다 그러는지’ 하나님이 저울을 통해, 하나님이 왕을 통해, 하나님이 민심을 통해, 여론을 통해 보고 계신다는 거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2년에 한 번씩 시무 투표 하는데 평소에 앙심 가진 사람이 주변 교인들을 동원해 가지고 불신임을 많이 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 투표를 당하는 목회자로서는 ‘오죽하면 저렇게 했느냐?’ 하나님이 저렇게 만들어서라도 내게 점수를 매기시니, ‘교사의 점수가 짜다 말다. 뭐 누구 봐줬다 말다’ 그러기 전에 ‘하나님이 그런 방법으로 나를 바라보고 달아보고 계신다’ 것을 느끼는게 중요합니다.
저울 장사는 저울을 속여서 다 장사합니다. ‘장사가 저울을 조작을 해서 그렇다.’ 장사는 조작을 해도 하나님이 왜 장사를 조작시켜서라도 나한테 이렇게 불리하게 할까? 요셉을 붙들고 요셉을 거둬들이는 애굽의 바로 왕은 월급을 박하게 주고 착취를 했겠습니까? 넘치게 주고 붙들려고 사정을 했겠습니까? 바로 왕은 이방의 왕인데 ‘나는 이름만 왕하고 놀란다. 네가 왕 하거라. 이름은 네가 총리고 내가 왕인데, 이름뿐이다. 실권은 네가 다 가져가라’ 넘치도록 부어줬습니다. 요셉의 그릇이 크면 원수를 통해서라도 그렇게 엎어줍니다.내 그릇이 작으면 내 편을 통해서라도 쥐 박습니다. 저울 탓 할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다 달고 계시나?’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돌아보면 맞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날 몰라 준다. 억울하다. 박하다. 세상은 너무 황량하다’ 바꿔서 ‘왜 환경을 통해 나한테 점수를 이렇게 짜게 주시나? 왜 이렇게 박하게 하시나?’ 이게 믿는 사람입니다.
1차-j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