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새21.6.21 행5:1 성령을 받고도 감정 주변에 피동되어 자기를 비판 평가 못하여 계산이 잘못되면 최종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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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새21.6.21 행5:1 성령을 받고도 감정 주변에 피동되어 자기를 비판 평가 못하여 계산이 잘못되면 최종 실패

관리1 1 227 2021.06.21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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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 초타본입니다.


210621 월새

제목 : 성령을 받고도 감정 주변에 피동되어 자기를 비판 평가 못하여 계산이 잘못되면 최종 실패

찬송 : 고요한 바다로

본문 : 사도행전 5장 1절 -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다윗 시대처럼 신앙의 통치자가 법을 가지고 칼을 가지고 강제로 세금을 거둘 때, 그런 때에는 하기 싫어도 해야 되지만 이때는 교회 오고 싶으면 오고 오기 싫으면 안와도 되는 때이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인 대제사장 서기관들이 신앙적으로 장악하고 있을 때이다. 또 헤롯과 빌라도가 예수님을 반역자로 처형을 했기 때문에 헤롯 빌라도 유대인들 전부가 다 예수님 믿지 아니하는 것을 좋아하지 믿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 아나니아 삽비라가 강제 때문에 무슨 법과 규율 때문에 마지 못해서 해야되는데 아까우니까 감추고 그러는 상황이 아니라 원하는 사람만 교회를 오고 원하는 사람이 교회를 와도 위험을 감수하고 와야 되는 그런 상황이다. 원하고 원하여 오는 것이고 강제가 들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니까, 원래 아까운 것이면 하지를 말았어야 되나 원래 이 분들이 은혜받고 좋아서 하는 그런 동기 그런 시작이었다. 그래서 팔았고 약속을 했고 그러나 처음에 생각하고 마음 먹은 것과 중간에 마음이 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부부가 다 함께 알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특별히 이 말씀을 두고 약속했으면 죽기 싫거든 반드시 연보를 하라 이렇게 이 말씀을 대개 다 사용하지만은 책임 못질 약속 할 수 없는 약속 자기 실력을 넘어서는 그런 신앙의 행위는 하나님을 상대로 구걸 하나님을 상대로 구제하는 것이니까 하나님을 돕겠다고 하는 것이니까 하나님은 만유주라 도움 받지 않는다 또 기부 받지 않는다. 마음 원치 않는데 헌신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댸문에 부족한 것은 상관 없으나 두 마음을 나누어 마음을 다 기울이지 않으면 이중은 받지 않는다. 자라 가운데 지켜는 볼 수 있지만, 모든 일에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로다. 지극히 부족하고 작아도 마음 다하고 힘을 다할 때 인격이 기울어지고 인격을 기울어야 신격의 하나님이 상대를 하신다. 강아지는 강아지라야 송아지는 송아지라야, 물고기는 물에서 놀아야 서로 노는 것인데. 하나님이 완전자며 우리를 길러가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 부족한 것은 원래 부족하게 만들어뒀기 때문에 부족한 것은 하나님께 상관이 없다.

못나고 부족한 것은 상관이 없으나 있는 마음을 나눠버리고 이중으로 연극으로 또는 하나님을 설득할고 한다던지 그러면 인격 없이 마음 없이는 중심이 틀렸기 때문에 아예 상대하지 않으신다 공연히 혼자하는 것이지. 남녀 교제에 가난한 아가씨야 재벌집 아들이 자기 있느 돈 다 동원할 것이 무엇? 용돈 조금만 쓰면 되겠지. 돈과 돈을 가지고 서로의 마음을 살피러든다면 사람은 외부 외모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또 내면을 모르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되지만은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 본 마음에 전부를 다 기울였는지, 건성 건성 그냥 대충 대충 겉을 잘 꾸며 맞춰서 인사가 되도록 보기에 좋도록 남 보기에 손가락질 받지 않을 정도로, 시어머니 모시는 며느리가 적당히 하면 되지 거기에 자기의 모든 속을 다 기울여 어찌? 친정에게는 애끓는 마음이 다 쏟아지고 시머어니에 대해서는 가족들 남편 주변에서 보기에 뭐 그냥 좋게 하면 되는 것이지, 이제 이 말이 나오다 보니까 마23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야. 하나님을 상대하며 마음도 간도 쓸개를 빼버리고. 겉을 아름답게 잘 꾸며 놓았다. 겉을 꾸민다는 말을 외식이라 한다.

여자들이 머리도 안 감고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면 될까? 본능적으로 최소한 남에 대하여 단정하게 꾸며 놓는게 맞다. 문제는 안의 것은 빼놓고 다른데 꾸민 것. 그래서 회칠한 무덤이라,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과 사람들의 죽은 뼈로 가득한데 겉은 아름다운 집이라. 겉이 아름답다고 속에 시체가 들었는데 그게 사람 사는 집이 될까 그래봐야 묘지이지. 우리 신앙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예배 출석 교회 활동 남들에 대한 평가 모든 것이 주로 교인을 향한 것이 아니고 우리 목회자를 향한 것이다. 종교 지도자인데 사진 찍고 겉을 보니까 아름다운데, 하나님이 보시면 그 외부의 활동과 꾸밈을 보지 않으시고 속에 들어 있는데. 사택 아이 아픈 것과 교인이 아픈 것과 똑같으냐? 돈벌이가 똑같이 기쁘더냐? 사택 아이 돈 버는 것은 행복하고 교이 돈버는 것은 그런가 그런가? 혹시 시기가 나지는 않던가? 부럽지는 않던가? 자기 식구 아픈 것은 속이 쓰리고 내 손가락 아프듯이 실제 아프고 교인 아픈 것은 덜 아프지 않은가? 목회자의 속을 통해 자기 가족과 교인의 애 터지는 것이 그렇게 똑같으면 교인들에게는 투박하다고 해도 하나님이 네 식구 초상 치르는 것과 같다 이리되면 굉장한 것이다.

뭐가 굉장하냐? 하나님이 동행할 수 있는 것이라. 하나님 동행이 이어지면, 사도행전 2장과 이어지는 여러 가지 표적들이 뒤따라 올 수 있게 되어 있다. 교인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전도한 식구와 내 가족과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느냐? 십분의 일이냐? 신앙이 아직도 십분의 일이다. 오십프로까지 왔느냐? 하나님께서는 아직 0점이지만은, 99점까지는 0점 처리인데, 이게 점점 나아지면은 100점과 같은 대우를 한다 5점이 10점으로 올라가면 100점이나 된 것처럼 기뻐하고 좋아하신다. 99점도 발전 없는 것이면 그때는 0점이나 되는 것처럼 그렇게 섭섭하고 화를 내신다. 하나님 앞에는 100점만 100점, 나머지는 0점이다. 단 1점이나 올라가면 그때는 100점이나 된 것처럼 기뻐하시고 기다려주신다. 이게 있어서 부족한데 어린데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 더 올라가도록 100점은 아닌데 그리 하신 것.

오늘 99점으로 한걸음 딱 내려오면 0점 대우를 하신다. 실제로도 0점이고. 그래서 우리 속을 들여다보시는 주님이, 아나니아 삽비라를 향하여 바나바와 같은 사도들 다 신앙의 은혜 받고 큰 역할하는 것 주변의 사람들이 잘 믿으면 아무리 겨울이 추워도 내 주변 사람들이 다 난리처럼 뜨끈하면 나쁜게 아니라 좋은 것이다. 그러나 내 속의 온도가 나를 따뜻하게 하지 내 몸 밖의 히터나 다른 사람 때문에 내가 도움 받는 것은 돌아설 수 수 있는 기회요 마련할 수 있는 기회잊 그 사람들 흩어지면 바로 내 모습으로 돌아온다. 신앙 있는 교회는 강팍한 나를 뒤섞어 나도 신앙의 열심의 기회를 붙드는 것이다. 그런다 남들의 뜨거움에 식은 내가 혜택을 받는 것은 10년 아니라 몇 십년이 되어도 혼자 되면 나는 원래 내 모습으로 돌아온다. 주변이 뜨거울 때에 그 속에 안주하지 아니하고 내 속을 바꾸어 내 마음이 뜨거운 신앙이 되어진 이 일에 도움을 받으면 이게 신앙 있는 교회 동지들 주변 사람들의 신앙이 좋아 내가 혜택을 보는 생명이 되나, 그런데 감정에 피동되어 저 사람 목회, 선교한다고 나도 그 사람들 따라 나를 평가하지 못하고 뒤져보지 못하고 검토해보지 옷하고 나를 비판 평가하지 말고 속 사람 있어서 헌신하는 사람들 틈에 속 신앙 없는 사람이 들어 덜렁 나오면, 귀신이 지켜보고 있다가 열이 펄펄 꿇을 때에는 내버려두고, 하와가 아담과 뜨거울 때 손 댔다가는 진 자는 이긴 자의 기회가 되어서 언제가 좋을까 기도하다보니, 아담과 하와의 속이 겉은 같은데 속으로는 떨어져버렸고 그 만큼 아담 하와가 빈틈이고 하와를 데리고 대화 할 때 아담에게 물어보러 갑니다 불러보고 얘기합시다 그러지 않을 만큼 충분했을 때에 딱 들어가서 이참에 하나님 되는 것이 어떨까 그리고 하와를 붙들어버렸다. 그러니 아담은 문 열린 집이다. 가서 들고 나오면 된다.

아나니아 삽비라가 행2장 3장 4장까지 오면서 틈을 찾지 못했으나 그 앞에 바나바의 헌신 그리고 바로 뒤에 적어주셨다. 최종 나의 결정 최조의 나의 걸음 판단은 내가 내 속을 잘 들여다보고 하나님과 나와 1대 1로 서서, 주님 때문에 제가 나섭니다. 주님 가자는 길 끝까지 걸어갈 겁니다 확정했을 때에 신앙의 최종 판단을 해야 뒤탈이 없다. 백 목사님의 수 만흔 집회 열기에 휩싸여 주님 오실 때까지 이 노선 지킨다고 큰 소리 안 친 사람 없는데 초상 치고 나니까 손바닥 뒤집듯이 홱가닥 뒤집는데 남는 사람 하나 못 봤다. 현재 우리가 몇 사람 시골에서 서로가 서로를 들여다봐도 그게 참 신앙인지 싶을만큼 부족하지만, 적어도 이 노선을 두고 우리는 모든 어려움 헤쳐 지금 이 33년 걷고 있다. 현재까지 그대로 걷는 곳은 없다. 생전에 어떤 각오였던가? 저 분이 없어도 그리고 천하에 민심과 교인들의 방향이 바뀌어도 홀로이 끝까지 갈 수 있는가 계산해보고 따져보고 살펴보고 그 다음 실제 걸어가는 것이다. 좋을 때 큰 소리 그거 하는만큼 결정적일 때 내 마음을 바꾸어 변심하게 만들어버린다.

많은 것을 생각할 때에다. 주님 오늘이라도 나를 부르시면 반가운 마음으로 갈 준비냐? 오늘 결정해야지. 큰일 생기면 금식하고 그때 기도원에 가서 연구해보자 그러지 마시고.

통성으로 기도.

Comments

승아 2021.06.25 16:40
너무 설교를 잘 하시네요~!^^ 제가 여기 다니는 오빠를 알아서 친해서 같이 갔는데 엄청 교회도 크구!! 좋드라구요! 그리고 목사님도 만나뵈었는데 기억 하실지 모르겠지만 암튼 목사님 너무 설교를 잘 하세요 그리고 시간이 되면 다음에 또 뵈올게요!!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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