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 - 진행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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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역사 - 진행중

2007.10.13 0 13 2022.03.11 11:45

일시: 97.
인물: 김종화, 예배당 두번째 골목 중간집

돌아시던 해 교회 개척 시절 술회
십대 때 손목사님 사모님 따라 나왔고
장년반은 사모님, 서귀덕, 계란 장사하던 남집사님, 공정엽이었고
나머지는 십대 학생들 학교 못가고 있던 청소년
성암교회보다 신풍교회가 먼저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는데 경제가 어려워 밤에 모두 열심 노력
돈이 모자라면 사모님이 부산으로 가서 고신 교회 다니며 연보 거두어 와서 다시 시작하니까
중단하다 다시 시작하는 반복으로 3년을 걸려 예배당 완공
성암교회는 애양원병원에서 지원을 하니까 우리보다 훨씬 늦게 시작해서 앞에 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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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07.10.12.
인물: 교회 뒷집 최순규씨 대화

교회 뒷집 사용 중단해야 하므로 다른 세입자 알아보겠으며 예배당 뒷창고가 이웃에게 불편 끼쳐 죄송. 최근 공회 전체 교회 운영 방향이 이웃과 사회에 덕스럽지 못한 것을 정비하므로 우리 교회는 2건이 문제 된다는 배경 설명

설명 과정에서
최순규씨는 올해 74세이며 당신이 17-8세 시절 학서에 있던 우리 교회 원래 예배당 건축 때 손목사님 사모님 밑에서 돌을 나르는 일을 한 기억 말씀.

1934년생이면 1952년 18세가 되고 2007년 74세가 되므로
교회 설립일이 1952년으로 추산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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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07.10.15.
인물: 구선모, 예배당 두번째 골목 첫집

현재 70세 일할 때가 20세로 기억하고 예배당 건축은 50년 결혼 23세이며 결혼 전에 일한 기억
최순규씨 기준 55년 전이면 자신은 15세가 되는데 그 나이에 그 일을 할 수 없음으로 분명 착오
김종화씨는 71세이고 군을 갔고 그 전에 공사했으며 구목수님은 군면제
예배당은 돈이 없어 손목사님 사모님이 연보 얻어 짓느라고 3년 걸렸으나

돌은 공제동 쪽에서 쪘고 1년 정도 나르고 창문 위에 가로지르는 돌은 무거워 직접 져날랐고
교회를 다니지 않던 집의 장형이 도와준다고 함께 일했고 낮에 자기들 일하고 밤에만 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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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99.5.2.
인물: 성암교회 75년사

성암교회 건축이 56년 3월-10월이라면, 기억이 가장 정확한 김종화씨의 말과 비교해 볼 때 54세에 건축하기 시작하고 55년까지 1년이 지나면서 뼈대만 만들고 이후 지체 되고 있는 상태에서 성암교회는 56년에 완공하고 신풍예배당은 57년에 완공한 것으로 본다면 3년 걸렸다는 말과 성암교회 건축과 같이 진행된 것으로 파악 가능

예배당 건축에 앞서 백동학집사님 집에서 예배를 본 기간을 계산해야 할 것

차종석 서귀덕의 출교는 55년 4월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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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기록
신풍교회 원주소: 율촌면 신풍리 297번지 - 2004년에 주소 정정신청으로 현재의 1017-13





(*참고자료)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 손동희권사님 저, 07.4.16.개정2판

p324
'어머니는 애양원에 남아 나환자들이 손수 지어 준 방 두 칸짜리 아담한 집에서 생활했다. 그리고 신풍리에 신풍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모금을 하러 다녔다. 한상동 목사님이 어머니에게 소개장ㅇ르 써주었고, 어머니는 그 소개장을 들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이렇게 어머니의 눈물 겨운 노력으로 신풍교회가 설립되었다.'



'성암교회 75년사, p46-47'

박창호전도사 재임은 54.2.3.-55.3.말.
박창호 전도사가 일하던 때 교회 안에 여러 갈등의 조짐이 보이더니 교회분열로 상당수의 교우들이 교회를 떠났다. 서귀덕집사는 교역자를 공경하고 교회의 형편을 돌보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고신측 교단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정양순사모는 몇몇 사람들에게 요청하기를, 신앙이 두텁고 환난에서 절개를 지킨 고신측으로 성암교회를 합하자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암교회가 선교기관인 애양원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손양원목사의 바램을 성도들이 잘 지키려고 노력하여 통합측 교단을 유지하게 되었다.33)
성암교회는 교우들이 애양원 직원들과 인근에 사는 주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서귀덕 집사가 중심이 되어 '고신측' 교단을 지향하겠다는 의견으로 교회가 분열되었다.34) 성암교회를 떠난 교우들은 백동학 집사 집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 정양순 사모는 당시 주일예배를 인도하며 성암교회를 돌보던 정인권 목사로부터 '교회를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권고를 받았다. 이 일로 인해 서귀덕 집사의 남편 차종석 집사는 애양원에서 면직되었다. 성암교회는 차종석, 서귀덕 등을 출교하였다.35) 이때 차종석 집사는 성암교회에서 장로로 피택되어 순천노회에 서현식 목사의 청원으로 장로 장립을 허락 받은 상태였으나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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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지금의 신풍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 한국총공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35) 서귀덕 집사는 정양순 사모와도 교제가 있었고 성암교회에서 그 누구보다 고신측 교회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정양순 사모는 부산에 있으면서 성암교회를 자주 방문하여 여러 차례 오인덕 사모와 서귀덕에게 고신측 교단을 소개하였다.


'p50-55'

제5대 교역자 장중식 강도사는 1956년 1월 5일 부임하였다. ... 교회를 신축하려는 계획은 이미 1955년부터 수립되었으며, 다음해 2월 제직회 의결을 거쳐 건축하기로 결정하였다. 교우들은 합심하여 기도하였고 순천노회의 지원 요청하였다. 26세의 젊은 목회자는 석조건물의 완성을 위해 일꾼을 독려하였다. 교회의 주축을 이룬 사람들이 애양원에 근무하였기에 세밀한 동참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또한 교회 안에서 교우들의 관계를 조화롭게 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였다. 1956년 3월에 애양원의 도움으로 교회 건물을 착공하기시작하여 그해 10월 43평 석조 건물을 완성하였다.
... 교회 분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차종석 장로가 1957년에 돌아옴으로 교회는 다시 평온을 잃어갔다.  부인 서귀덕 집사는 남편보다 조금 늦게 성암교회에 합류하였다. 차종석 장로의 직책이 애야원 총무과장이었기에 원장 보이열 목사님 뜻을 거부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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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학집사님

대화: 오도일, 성암교회 장로님, 682-7784
일시: 07.10.29.


심성 좋은 분
집집마다 뭘 사러 다니고 오가는 장사를 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잘 알고 지냈고
신풍교회 중심 교인이지만 원래 동네 사람이 아니어서 동네에 아는 사람 없을 것
왜 교회를 나누느냐고 하니까 고구마 가마니에 한 개가 썩으면 고구마가 다 썩는 것
오도일장로님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 썩도록 놔두겠느냐고 함께 웃으며 조용히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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