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지역 선교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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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지역 선교 역사

2011.07.27 " 0 2 2022.05.10 18:11

우리 교회는 상관이 없으나 우리 호남 지역은 미국의 남 장로교회 선교권이어서 우리 주변 교회를 파악하는데 필요한 자료입니다. 언젠가 우리 교회에 관련 된 '자료' 게시판이 따로 있어야 하겠는데 당분간 사무실에 올리겠습니다.





보이열 목사님  

2006/04/03
http://blog.naver.com/bautai/60023159451



보이열 목사님과 울 외조모님의 아버지 김주혁장로님과 선교를 다녔다고 하여 찾아본 보이열 목사님의 자료임.







제 1편 요람기의 오정교회

 제 1장 오정교회의 창립

    1. 기독교의 전래와 역사적 상황

오정교회의 창립과 깊은  관계가 있는 남장로교의 전래만 주로 언급하겠다.

미국 남장로교 세계선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한 것은 1892년의 일이다. 이 때 이미 미국의 북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사는 한국에 파견되어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미국 남장로교 세계선교회가 한국 선교를 하게 된 계기는 미국 북장로교 한국선교회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의 귀국 보고 연설이었다. 1891년 10월 미국의 동남부에 위치한 테네시 주 네쉬빌에서 전국 신학교 해외 선교연합회(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의 모임이 열렸었다. 때마침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와 있던 언더우드(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1885년에 내한)는 이 모임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의 실정과 선교활동을 보고하면서 ‘은자의 나라’ 한국이 얼마나 귀한 어장인가를 역설하였다. 이 때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에 유학 중이던 윤치호도 “은자의 나라”라고 미국에 알려진 한국에 대해 설명을 덧붙였다. 이 강연을 듣고 있었던 테이트(Tate, Lewis Boyd; 최의덕; 시카고의 메코믹 신학교 졸업반), 존슨(Johnson, Cameron; 리치몬드의 유니언 신학교 졸업반), 레이놀즈(Reynolds, William Davis; 이눌서; 존슨의 동급생), 이 3인은 큰 감명을 받았다. 이 가운데 맨 먼저 최의덕이 한국 선교를 지원하였다. 따라서 그는 한국의 첫 남장로교 선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좀 난관이 있었다. 그것은 미 남장로교 해외선교 실행위원회는 은자의 나라(the Hermit Nation)라고 알려진 한국에 대해서는 별로 안 바가 없었고 재정적인 이유도 있어서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할 계획이 없었으므로 그에게 다른 나라로 갈 것을 권유하였다. 존슨과 이눌서도 동급생인 전킨(Junkin, William McCleary; 전위렴)과 함께 한국 선교사를 지원했으나 최의덕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에 낙심하지 않고 한국 선교를 지원하여 주요 교회 지도자를 순방하여 설득하고 선교잡지에 한국 선교를 주장하는 논설을 싣는 등 매우 열성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기도를 응답하시기 위해서였는지 선교부는 그 때까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던 그리스에 그 나라의 반대로 선교사를 파송할 수 없게 되었다. 또 선교헌금이 부족하여 한국 선교를 할 수 없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 선교를 위한 지정헌금들이 들어 왔다. 뉴욕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언더우드의 형이 $3,000을 기증했고 선교사로 와 있는 언더우드도 $500을 추가해서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남장로교 해외 선교 실행위원회는 1892년 마침내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하고 그해 4월에 최의덕, 전위렴, 이눌서 3인을 초대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어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던 여성 4인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마티 테이트(Tate, Mattie Samuel; 최마태; 최의덕의 누이동생), 데이비스(Davis, Linnie Fulkerson) , 팻시 볼링(Potsy Bolling), 레이번(Junkin, Mary Leyburn; 전위렴의 부인)이다. 이들 7사람은 1892년 9월 7일 미조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의 중앙장로교회(The Central and Grand Avenue Presbyterian Church)에서 파송예배를 드리고 최초의 남장로교 한국 선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제일 먼저 한국에 도착한 선교사는 데이비스로 그녀는 세인트루이스의 주미 한국 공사 이채연(李采淵)의 아내와 제 일진으로 출발하여 10월 18일에 제물포에 상륙했고 나머지 일행은 같은 해 11월 3일에 같은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렇게 최초로 한국에 도착한 선교사들을 후에 “7인의 선발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서울애서 이들은 공식적인 선교부를 조직하여 이눌서는 회장, 최의덕은 회계, 전위렴은 서기 직을 맡았다. 이들은 한국어를 배우고 여행을 하면서 선교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한국에는 이미 각 교파의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와 있어서 선교활동의 중복과 무모한 경쟁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불필요한 노력과 대립을 피하고 상호 협조를 통한 선교를 위해 각 교파의 협의체를 구성하게 되었다. 입국과 동시에 선교부를 조직한 남장로교는 이듬해(1893) 1월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와 협의체를 구성하였다. 장로교 치리기구 준행 선교위원회(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라고 부르는 기구가 그것인데, 장로교파 선교사 전원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 협의회는 개혁신앙과 장로교 치리형태를 채용하는 한국 교회를 조직하는 것을 목적으로 각자 소속하는 선교부의 자문에만 응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지만 사실상 한국 장로교의 조직이 확립될 때까지 전권을 가지고 치리한 유일한 기구였다.



이 협의체의 중요업적은 선교지역의 분할 배정과 네비우스 방법의 채택과 이를 토대로 한 선교 정책의 채택이었다. 예양협정(禮讓協定)이라고도 불리는 선교 지역의 분할 배정은 각 선교회가 사업의 중복과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기 위해 맺은 협정이다. 이 협의회의 첫 모임에서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을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의 선교 구역으로 결정하였다.

네비우스 방법(Nevius Method)은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내한하기 이전에 중국에서 오랜 기간 동안 선교활동을 해온 노련한 북장로교 선교사 네비우스를 초청하여 마련한 한국 선교에 대한 원칙과 방법을 말한다. 이는 자립선교, 자립정치, 자립보급으로 집약 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남장로교가 이를 토대로 추가 확대한 선교정책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전도 대상은 노동계급에 두며, 부녀자와 청소년 교육을 중요시하며, 기독교 교육자와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해 지방과 도시에 초등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며, 성서를 조속히 번역하여 출간하고, 종교서적은 순 한글만 사용하며, 의료선교사들은 치료와 환자 관리를 통하여 전도효과를 높인다는 것 등이다. 네비우스 방법에서 비롯된 이 선교정책은 내용에 대한 비판도 있고 시행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나, 스스로 전도하고 치리하며 자립할 수 있는 한국 교회 창립의 기초가 되었고, 한국 장로교회의 체질 형성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남장로교 선교회는 선교지역으로 배정된 호남지역의 전도를 시작하기 위하여 1893년 초에 한국인 신자였던 정해원을 전주에 파견하여 토지와 가옥을 사들였다. 1894년 2월, 남장로교 선교회의 재2차 연차대회에서는 최의덕과 그의 누이 최마태를 전주에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1894년 3월 19일 최의덕 선교사 남매는 나귀와 가마 편을 이용하여 전주로 향했다. 그러나 동학 농민 전쟁이 일어나서 이들 남매는 전주에 간지 6주 만에 다시 서울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남장로교 선교회는 동학농민 전쟁과 청일전쟁의 태풍이 지나간 1895년, 전주의 완산 언덕에 새로 토지와 가옥을 구입하여 선교거점을 개설하고 최의덕 남매를 다시 파송하였다. 그해 11월과 다음 해 가을 사이에 하위겸(Harrison, William Butler;해리슨), 이눌서, 잉골드(Ingold, Matti B., 1905년 최의덕과 결혼) 등이 전주에 내려가 최의덕 남매와 합류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의 선교활동은 이후로 주로 전라도의 중요 도시를 중심으로 점차 확대되어 갔다.

전주 지회가 튼튼하여지자 선교회는 전위렴과 드루(Drew A. Damer)를 군산에 파견하여 거기서 제2 선교지회를 개설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선교회의 결정에 따라 1895년 군산에 내려가 토지와 가옥의 매매를 겸한 답사를 마쳤으며, 1896년에는 군산에 이주하여 정식으로 선교활동을 개시하였다. 뒤이어 부위렴(Bull, William Ford;불)과 알비(Alby, Libbie A.; 1902년 부위렴과 결혼)가 군산 선교지회애 합류하여 전도와 의료사업을 도왔으므로 군산의 선교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어 갔다.

목포에 제3지회가 개설된 것은 1898년의 일이다. 원래 나주에 개설하려 했으나 보수적인 나주 주민들의 맹렬한 반대로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1897년 10월부터 목포가 개항장이 되어 외국인의 거주가 자유로워지자 선교지회 후보지로 나주 대신 목포를 선택하게 되었다. 목포에서는 배유지(Bell. Eugene;벨)가 선교사업을 시작하였으며, 뒤이어 오기원(Owen, Clement Carrington;오웬) 선교사 등이 합류했다.

제4 선교지회는 1904년 광주에 개설하였다. 이 지회는 목포에 있던 배유지와 오기원이 책임을 맡고 설립 후 광주 지방의 선교에 헌신하였다. 그 결과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으나 우기원은 과로로 인하여 1909년 목숨을 잃었다.

제5 선교지회는 순천에 개설되었다. 순천에는 선교지회를 개설하기 전부터 광주에서 일하던 오기원의 손에 의하여 선교활동이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오기원의 사후에는 목포에서 순천으로 이거해 온 변요한(Preston, John Fairman)이 열심히 활동하였다. 변요한과 고라복(Coit, Robert Thomwell)은 순천에 와서 토지를 매입하고 1913년 그들이 순천에 이주함으로 명실 공히 순천지회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남장로교 선교회가 고등교육에 첫 발을 들여 놓은 것은 1912년 3월, 평양의 숭실학교 운영에 참여함으로써 비롯되었다. 남장로교 선교회는 1913년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관련을 갖게 되었으며, 1915년에는 연희대학의 운영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장로교 선교회는 다른 선교기관에 의해서 설립된 고등교육기관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자체 교육기관을 갖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대전에서 고등교육기관을 세우기로 1954년 전주에서 열렸던 제 8차 연차대회에서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남장로교 선교회는 선교사의 수가 늘어나고 자녀들이 많아지자 자녀들의 교육과 한국인 목회자의 양성을 위해 대전에 교육 중심지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1949년 2월 고등교육기관을 위한 임시위원회가 인돈(린튼)과 타마자(탈미지)목사를 토지 구매 협상  대표로 임명하였다. 그들은 오정리 안골의 야산을 구입하려 했으나 부락 주민들과 토지 소유자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오정리 안골의 토지는 그곳 주민들의 택지였지만 일부 농토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대전의 토반(土班)인 김노원(金魯源)과 그 종중인 경주 김씨의 소유였다. 김노원은 원래 경제적으로 유복한 형편으로 오정리의 땅은 그 문중의 땅이어서 쉽게 팔려고 하지 않았다. 한편, 군소 지주인 주민들도 작지만 자기 소유의 땅을 외국 사람에게 쉽게 팔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교회는 백방으로 노력하여 설득하였다. 특히 당시 대전 시장이었던 손영도(孫永道)와 후에 한국은행 총재와 주영대사를 지낸 배의환(裵義煥)씨 부인은 김노인의 부인과 이화여전 동창 관계가 있어 설득에 큰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드디어 김 노인으로부터 평당 7원이란 가격으로 10여만 평의 땅을 구입하는데 성공하였다.

남장로교 선교회가 김 노인으로부터 토지 매수를 끝낸 것은 1949년말이었다.

이듬해 1950년 3월 14일 충남 노회 제 6차 총회에 보이열 목사는 대전에 충남고등성경학교를 세울 수 있도록 청원하여 허락을 받자 남장로교 선교회는 초대 교장에 보이열 목사를 그리고 초대 부 교장으로는 이자익 목사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자익 목사로 하여금 대전으로 이전해 오도록 요청하였다. 이 목사는 바로 대전으로 이주해 오고 선교부에서 매입한 토지를 관리해 줄 것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잔금을 치루기 전에 6·25 전쟁을 맞게 되었다. 그래서 토지 문서를 항아리 속에 넣어 땅 속에 묻어두고 후퇴하는 소동을 빚은 뒤 수복 후에야 토지 매수는 서류상 완결되었다. 토지 매입이 끝나고 전란도 숙으러들자 대전 지회 설립의 책임자였던 인돈은 지회 설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먼저 선교사 사택을 건축하고 매입한 농토를 관리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지난해부터 이미 대전으로 이주해 부 교장으로 있던 이자익 목사는 자기가 가르치던 고등성경학교 학생들로 하여금 대전 선교부지의 산에는 소나무를 심고 농토에는 노동력을 제공하여 학비를 벌게 하면서 토지를 관리하였다. 따라서 현 하남대학교 뒷산에 심어져 있던 소나무들은 이 신학생들의 손때가 묻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목사가 두 가지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없게 되자 충남 고등성경학교 교장인 보이열 목사는 최복락에게 선교부지 관리를 부탁하게 되었다. 최복락 장로는 1912년 전북 익산군 성당면 부곡리에서 태어났으며 부친 때부터 독실한 신앙 가정에서 성장했다. 20세에 결혼한 그는 마을 이장으로 부락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으며 부친이 돌아가신 뒤로는 1950(38세)년에 장로로 장립을  받아 부친이 세운 부곡 교회를 보살폈다. 전라도 순회 선교사로 부곡 교회의 당회장을 지내기도 했던 보이열 목사( Rev. Boyer, Elmer Timothy)는 그를 신임해서 전주의 기전학교를 졸업한 아리따운 처녀를 소개하여 결혼 주례를 했을 뿐 아니라 대전 선교부지의 관리를 부탁하게 된 것이다. 최 장로는 동란 후 1951년 졸망졸망 딸려 있는 6남매를 거느리고 대전으로 옮겨와 선교사 사택 입구 쪽에 집을 짓고 대전 선교회의 토지 관리를 하게 되었다. 이것이 오정교회가 태동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2) 교회의 시작

최복락(崔福樂) 장로는 충남 대덕군 회덕면 오정리(현 한남대 위치)로 이사를 오자 이곳에서 가까운 삼성 교회에 출석했다. 삼성교회는 대전제일교회가 2번째로 개척한 교회로 대전제일장로교회의 민영호 장로가 1947년 11월 14일 교인 10여명과 함께 창립예배를 드리고 대전3교회(대전2교회는 현 합동측 중앙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교회였다. 이 교회는 1949년부터 교회 명칭을 삼성교회로 변경한 교회이다. 최복락 장로는 부친 때부터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던 분으로 다시 교회를 개척하고자 하는 열정이 생긴 것 같다. 1952년 7월 9일 삼성 교회에 출석하던 교인 10여명과 함께 자기 집 감나무 밑에 앉아서 새로운 교회를 창립하자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이달 27일 안광국 목사의 집례로 최복락 장로의 자택(충남 대덕군 회덕면 오정리 186번지)에서 창립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당시 참석한 사람으로는 최봉락 장로 내외(부인 김망분), 김한옥씨내외(부인 송일례), 김재형씨 내외, 김시역 장로, 최성녀(현 장점덕 집사의 시어머니), 김용선 집사 내외, 김덕년씨 내외(부인 안옥년), 이기화씨 내외(부인 금대경), 김봉조씨 내외(부인 박금옥) 등이었다(김한옥 장로의 증언).

1952년 7월 27일 교회 창립 예배를 드리자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남장로교 선교부,이자익 목사, 안광국 목사, 양성은 목사와 여러 성도들의 도움을 받아 1953년 3월에 35평의 건물을 짓게 되었다. 특히 충남고등성경학교의 교장이었던 보이열 목사는 전후 군산 기지에 남아 있던 지붕, 유리, 문 등을 직접 자기 차로 싣고 와서 건물을 짓는 것을 돕기도 하였다.

한편 이렇게 교회가 세워지기 전, 대전노회는 처음으로 충남 노회에서 분립하게 되었다. 당시 대전 근교에는 교회는 20개처 당회 8, 목사 7, 교인수 700명이 되어서 충청노회에서 분립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들이 많았었다. 따라서 1952년 3월 11일 장항교회에서 소집됨 제8회 충남노회에서는 대전노회 분립 연구원을 선정하여 위원장에 양화, 서기 노승익, 임원 임일준, 오진문, 김만제 조원동 제씨를 지명하고 노회 명칭을 '대전노회' 분립지역은 대전, 대덕, 연기, 논산, 공주 지역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1952년 제 37회 대구총회에서 허락을 받게 되었다. 이에 1952년 5월 20일 대전 제일교회당에서 소집장 이자익 목사의 사회로 회집하여 초대 노회장에 이자익 목사, 부회장 양화석, 서기 계창봉, 부서기 김만제 목사 등으로 대전노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이 때 오정교회가 창립된 것이다. 따라서 오정교회 설립 청원을 대전 노회에 하게 되었다.

       
1952년 12월 9일 대전 중앙교회에서 대전노회 제2회 총회가 열렸는데 노회장으로 임사부장을 겸하고 있던 이자익 목사는 오정리 교회 신 설립을 청원했는데 이는 허락되었으며 오정교회의 당회장은 중부 시찰에 일임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중부 시찰장도 이자익 목사였다. 드디어 오정교회는 노회의 승인을 받고 1953년 10월 이자익 목사를 초대 오정교회의  당회장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그리고 최복락 장로는 대전노회 제3회 총회(1953년 6월 9일)에서 장로 1안 가택을 청원하여 허락을 받고 1953년 10월 18일 장로로 취임하게 되었다.




초대 오정교회의 당회장이 된 이자익(李自益) 목사는 경남 남해군 이동면 탑정리에서 부친 이기진과 모친 박정근 사이에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님이 흑사병으로 병사하여 조실부모(6살 때)한 후에 친척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친척 집도 어려워 더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육지로 나오게 되었다. 경남 하동을 거쳐 남원을 지나, 전북 전주를 지나 도착한 곳이 금산사 입구인 김제군 금산면 두정리 부락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제일 갑부인 조덕삼씨 댁에서 머슴조덕삼은 이곳에서 비단장사와 금광 사업으로 돈을 모아 땅을 많이 가진 갑부였다. 일자무식이던 이자익은 여기서 한문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주인 조덕삼의 아들인 조용호가 독선생을 모시고 천자문을 배울 때 밖에서 들으면서 천자를 떼었다고 한다. 그래서 천자문을 외우라고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외웠으나 보여 주고 읽어보라고 하면 읽지를 못하였다. 그는 머리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당시 전주에 선교지부를 두고 활동하고 있던 최의덕 목사(Tate, Lewis Boyd;테이트; 1892년 여동생 최마태와 함께 내한, 전주에서 활동)는 김제, 정읍 지역을 순회 선교하고 있었는데 가끔 주말에 모악산 밑에 자리 잡은 두정리 마을에 말을 맡기고 사냥을 즐겼다고 한다. 모악산은 산세가 수려하고 아름드리나무가 울창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짐승들의 천국을 이루고 있었다. 이때 이 파란 눈을 가진 외국 사람이 조덕삼의 눈에 띄게 된 것이다. 조덕삼은 호기심도 있어서 이 외국인을 자신의 사랑채에 불러서 그 일행을 대접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최의덕 선교사는 평소에 이곳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기도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고 전도하게 되었다. 뜻밖에 조덕삼은 자기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허락했다. 외국 사람으로 우리나라 말을 너무 유창하게 말했기 때문이었다고 하나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매 주일 조덕삼의 사랑채에서는 찬송가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었고 조덕삼과 이자익은 최초로 예수를 영접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최의덕의 조사로 있었던 최중진이 이 마을에 와서 거주하며 열심히 노력해서 점차 교세가 확장되어 갔다. 이렇게 되자 최의덕 선교사는 교인들의 학습문답을 하게 되었는데 1차로 조덕삼, 이자익, 왕칠순 이 세 사람이 문답에 응하였다. 그러나 학습문답은 한글을 모르면 응할 수 없으므로 교회에서는 야학운동을 전개하여 문맹자를 따로 모아 한글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자익은 한문과 한글을 배우게 되고 후에 신학교에 갈 기초를 닦게 되었다. 드디어 조덕삼, 이자익, 왕칠순은 학습을 받았고, 1900년 10월 11일  세례를 받았으며 후에는 집사 임명도 받게 되었다. 5년 후에는(1905년) 농사일과 집안일을 잘하는 것을 본 동네 김선경씨 집안에서 이자익을 사위로 맞기도 했다. 1906년 4월 10일에는 최의덕 선교사의 선교지역이 넓어지자 최 선교사는 이자익을 두정리 교회 초대 조사로 임명하였다. 더욱 교회가 성장하자 교회에서는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다. 그런데 주인인 조덕삼은 뽑히지 않고 이자익이 장로로 뽑혀 이자익은 1908년 3월 5일에 장로 장립을 받게 되었다. 조덕삼은 훌륭한 인격자로 이런 일에 불평을 하지 않고 그 해에 그곳에 최의덕 선교사를 도와 유명한 “ㄱ” 자 교회를 세우는데 크게 도왔다. 당시는 남녀 부동석이기 때문에 강대상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ㄱ”자로 길게 방을 만들어 남쪽좌석은 남자가 앉고 성경구절은 한문으로 썼으며 북쪽 좌석은 여자가 앉고 성경 구절은 한글로 썼다.   지금 이 교회는 1997년 7월 18일 전북문화재 자료 제136 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자익은 1908년 4월 1일 전라대리회의 추천을 받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915년 3월에 신학교를 8회로 졸업하여 8월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해서 1915년 9월 20일 에는 본인이 성장한 금산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1924년 13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47,8년 33대 및 34대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장로교 역사상 처음으로 총회장을 3번이나 역임한 분이 되었다. 대전노회에서는 대전노회를 창설하고 초대 노회장으로 수고하신 이자익 목사를 공로목사로 추대하는 식을 거행했다. 이 식은 1954년 12월 8일 제6회 정기노회 중 오후 6시 30분에 대전시 중동 제일 교회에서 거행되었으며  서울에서 영락교회 당회장인 한경직 목사 등 많은 내빈이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그는 이로부터 4년 뒤 1958년 10월 7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하였다. 그러나 공로목사 추대 시 오정교회에 헌납한 종은 오랫동안 종탑 위에서 교인들을 새벽기도에 불렀지만 1992년 교육관 건립과 동시에 가취를 감추게 되었다.



제2장 교회의 발전과 변화


  1. 백낙봉 목사의 취임

1953년 10월 오정교회에 취임한 이자익 목사는 당회장으로 오래 교회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아마 교회가 요람기이고 너무 약했기 때문에 보수도 받지 않고 당회장으로 봉사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1954년 6월 8일에 개회된 대전노회 제5회 총회에서 김만제 목사는 고등성경학교가 아닌 야간신학교의 설립을 청원하자 그 추진위원 7인을 공천부에서 이자익, 양화석, 백응수, 정기환, 김만제, 임한상, 백인숙으로 선정하였다. 따라서 이자익 목사는 야간 신학교를 설립하는 일이 바빠져서 오정교회를 사면하고 당분간 양성은 목사가 당회장직을 대행했다. 한편 야간신학교 추진은 발 빠르게 진행되어 1954년 8월 20일 이자익 목사는 제1대 야간 신학교(현재 대전신학대학교) 교장직을 수락하여 취임하고 이 학교의 개교일은 동년 8월 25일로 하였다. 그리고 이 때 강사진은 정기환, 이자익, 양화석, 백낙봉, 양성은, 김만제, 김영생이었다. 오정교회는 다시 당회장을 모셔야 했다. 이 때에 54년 4월 16일  대전노회 제 4회 임시 노회에서 충북노회에서 대전노회로 이명해온 백낙봉 목사에게 당회장 직을 맡아 줄 것을 청원하게 되었다.

백낙봉(白洛鳳) 목사는 평북 의주가 고향으로 월남 후 충북 보은교회에서 계속 목회를 해오다 대전으로 자녀 교육 때문에 옮겨온 분이었다. 대전 선교지회와 연락이 되어 신학교 강사로 교섭이 되어 대전으로 오게 된 것 같다. 그는 대전으로 와서 큰아들(후에 대전 광명 안과 원장)을 대전 고등학교에, 둘째를 대전 중학(현재 서울 대학교 보건대학원 원장)에 보내고 있던 백낙봉 목사는 오정교회 당회장 직을 수락하였다. 평양의 숭실대학에 특별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수업을 받던 백 목사는 숭실대학의 교장이었던 윤산은 선교사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아이오아 주의 듀북대학(University of Dubuque)에서 교육학 학사를 마치고 시카고에 있는 노스파크 신학교(North Park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사를 마쳤다. 당시는 한국과 미국을 왕복하는 비행기가 없어 한달 여에 걸쳐 도미하여 고학으로 대학을 마친 근면과 의지의 학자였다. 1933년에 귀국한 백 목사는 평안북도 의주지역 관리교회 목회를 하다가 해방과 함께 평양신학교에서 강도학 강의를 하였으며  1947년 남하하였다. 백 목사의 차남의 증언에 의하면 오정교회에서도 아마 무보수로 봉사하셨을 것이라고 했다. 주로 야간 신학교에서 강의도 하면서 오정교회의 당회장을 겸하고 있었다. 그의 정식 부임은 1954년 10월 24일 1954년 10월 19일의 제5회 대전 임시노회에서 오정교회 당회장 양성은 목사의 시무 사임이 접수되고 백낙봉 목사가 당회장으로 가결된 뒤의 일이다. 그가 당회장으로 있는 동안 54년 12월 8일 제6회 대전 정기노회에서 장로 2인 가택 청원을 하여 1955년 4월 10일 오경신 이영성 제씨가 장로로 안수 받고 취임하기도 했다.

이 때, 인동교회의 백인석 목사가 위임 목사 사표를 제출하고 대동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그러자 인동교회는 백낙봉 목사를 추대하기 위해 물밑 교섭을 했던 것 같다. 인동교회는 1949년에 창립예배를 본 교회로 교세가 오정교회보다는 월등하게 강한 교회였다. 그리고 백인석 목사가 1951년부터 55년까지 꾸준하게 교인을 가꾸어온 교회였다. 1954년도 노회 상납금을 보면 제일교회 50,000원 중앙교회 50,000원 인동교회 12,000원 오정교회 1,000원으로 되어 있다. 1955년 6월 7-9일에 인동교회에서 열린 제7회 대전노회에서 인동교회 당회장 백인석 목사의 시무 사면은 임사부로 넘겨져 받기로 하고 백낙봉 목사의 위임 청원도 허락하여 백 목사는 1955년 인동교회로 옮기고 동년 11월 4일 백낙봉 목사의 위임식을 이인규 장로의 장립식과 겸해 갖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백낙봉 목사의 차남 백남원 원장(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원장)과의 일문일답으로 짐작코자 한다.




문:. 목사님께서 대전노회에 이명하신 것은 54년 4월 16일인데 왜 그때 보은 교회를 그만 두고 일찍 대전에 오셨는지?




답: 1947년부터 계시던 보은교회를 떠나신 것은 54년 4월 이전이었습니다. 아마 1-2월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버님은 월남하신 후 당시 초대 충북 지사셨든 윤하영 목사님께서 몇 곳을 소개하셨고 교회 외에 고등학교 교장자리도 소개하셨으나 아버님께서는 "목사는 목회를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시골인 보은교회(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 로 부임하였습니다. 당시 상황으로는 곧 김일성이 물러나고 길어야 1년 내에 통일될 것으로 생각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잠시 보은에 계시다가 통일되면 다시 북한으로 가실 생각이셨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아이들은 자라고 보은에는 농업고등학교밖에 없었습니다. 보은에서의 목회생활은 제가 기억하기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교회는 하루가 다르게 부흥했고 매주일5-10명의 결신자가 생겼습니다. 아버님과 온 교우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전도/봉사하셨습니다. 아마 좀 더 계셨으면 보은 전체가 그리스도화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번은 도시의 큰 교회에서 초빙이 왔으나 온 교우들이 저의 집에 와서 밤 새 울면서 말리는 바람에 아버님은 옮기시기를 포기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형님이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저는 초등학교 졸업) 할 수없이 대전으로 옮기셨습니다. 형님은 대전고등학교, 저는 대전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장로님들은 자녀들 하숙비/교육비를 부담하시겠다고 하시면서 떠나시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교우들에게 부담을 주시지 않기 위해서 떠나셨습니다. 아버님께서 보은교회를 떠나신 것은 자녀교육 때문이었습니다.




문: 54년 8월 25일 대전 야간 신학교가 개교해서 강사로 계셨는데 그것 때문에 빨리 나오셔서 대전에 주거할 집을 사셨는지? 혹 오정교회에서 사택 같은 것을 드렸는지? 원장님은 어디 사시면서 학교에 다니셨는지 기억이 안 나십니까?




답: 1955년 대전인동교회로 부임하시면서 오정리를 떠나 인동교회사택으로 이사하셨습니다. 후에 대전야간신학교에는 part-time으로 강의를 하셨습니다. 대전야간신학교 학생들은 형편이 어려워 등록금을 제대로 내지 못하였고 강사료도 거의 없었습니다. 건물이 없어서 대전제일교회를 빌려 쓰다가 제일교회에서 나가라고 해서 신학교의 존폐가 어렵게 되었을 때 아버님이 인동교회로 신학교를 옮기셨고 다행히 인동교회 청년들이 힘을 합하여 별관을 건축하여 신학교에서 사용토록 했습니다. (정봉학 목사님이 잘 아실 것입니다.) 오정리에 있을 때는 성서학원에서 생활비와 사택을 제공했습니다. 오정교회에서 사택을 제공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또한 당시의 오정교회는 전임목사님을 모실 형편이 되지 않았고 아버님은 무보수로 시무하셨을 것입니다. 성서학원과 사택의 위치는 오정리 (지금 한남대학교 자리)였습니다. 시내버스가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저는 오정리에서 대전중학교까지 약 10리(?)를 매일 걸어 다녔습니다.




문: 54년 10월 24일 오정교회에 취임하셨습니다. 그 뒤로 떠난 날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55년 6월 8일 인동교회에서 위임 목사로 노회에 청원했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답: 오정리 성서학원에 계시면서 다니시던 교회가 오정교회였고 아버님께서는 10월 24일부터 겸직으로 시무하셨다고 생각됩니다. 오정교회를 떠나신 날짜와 인동교회에 부임하신 날짜는 거의 같을 것입니다. 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아마 정봉학 목사님은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인동으로 이사하여 1964년까지 시무하시고 은퇴하셨습니다. 그 후 신흥교회에서 무보수로 봉사하셨습니다.




문:  어떻게 일찍부터 어려운 미국 유학을 가셨는지? 가정이 부유했는지, 또는 그곳에 연고가 계셨는지,... 별로 한국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이오아 주에서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좋은 대학이라고 홍보하고 있더군요. Dubuque는 우리말로 '드부크'라고 발음하면 맞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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