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교인 이야기 - 오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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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교인 이야기 - 오영만

2007.04.04 0 10 2022.03.11 11:19

일시: 07.3.29.09:30, 오영만(오복상회)씨 사택 방문
대화:

1. 방문취지
어릴 때 닭머리(중흥) 마을에서 살며 손양원목사님 가정의 사랑을 크게 받았는데
손목사님 추천으로 부산 고신교단의 지도자인 오종덕목사님께 갔다가 낙심하고 오해했던 것을
그 가족들에게라도 전화하여 풀었으면 하는 마음이며 전화 연락처를 알아봐 달라고 방문


2. 회고

- - 해방 후 애양원 밖의 일반 교인 명단
- 구암 : 이수봉, 모친, 누나/ 차진눅, 그 모친
- 장전 : 문보근, 모친, 부친, 여동생
- 우산 : 신금조, 모친, 여동생/ 이선오, 모친, 여동생
- 끝닭머리 : 최낙진, 모친, 여동생
- 닭머리 : 최병국, 부친, 모친, 큰누나, 작은 누나/그 조카 최효선/ 박종표, 외조모/오영만, 모친

- - 신앙 내력
1934년생이며
초등학교 2학년까지는 집에서 사친회비(육성회비)를 냈으나
3-6학년까지는 가정이 어려워 손목사님이 대신 내주셔서 율촌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음
주로 손목사님 사택에서 놀았는데 늘 목회자가 되라고 말씀을 해주셔서 평생 귀에 쟁쟁하였으며
당시 애양원은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었고 학서 공제동 등은 마을이 없었고 구암과 닭머리 뿐이며
일반 동네에서 교회를 다니는 분들은 다음이 전부

중학교를 진학할 형편이 되지 않아서 여수시내의 야학을 2년 다녀 졸업하고 손목사님께 가자
4-5장 정도로 기억되는 편지를 적어 봉투에 넣고 부산으로 가서 오종덕목사님을 찾아가라 하며
같은 오씨 종씨니까 잘 돌봐 줄 것이라며 그곳에서 시키는 대로 심부름도 하면서 공부를 하라고
보냈으며 당시 15세로서 부산으로 출발

여수와 부산을 오가는 당시 여객선 2대 중 금양호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을 했는데
배에서 내리니까 4-5명이 웅성거리다가 불러서 따라가니까 보따리와 몸을 다 뒤졌고
편지를 찢어서 1-2장을 읽은 뒤 그 봉투 전체를 찢고 바다에 버리면서 때리고
'전라도 새끼가 어디 감히 여길 와! 때려 죽이기 전에 돌아가!'라고 했고 얼마나 억울했는지
영도다리 위로 올라가서 죽으려고 뛰어내렸는데 마침 지나가던 배가 건졌고
동광파출소로 보내지고 그곳 소개로 파출소 옆의 성당으로 인계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장신부 백신부 박테레사 수녀 등 3명에게 신세지고 심부름하며 건국상고를 졸업

당시 오종덕목사님 편지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여
평생 고신이나 오종덕 손양원 경상도에 대한 미움을 마음에 안고 살아왔는데
나이가 들어서 생각하니 손목사님 부부께 너무 감사할 일이 많았고 오목사님에 대하여서도
이제는 섭섭한 마음을 풀어야 할 때라고 생각하여 한번 전화를 해서 그 자녀들에게라도 통화하고
이런 심정을 전하고 싶었던 차

수 년 전에 애양원의 손목사님 50주년 행사에 손목사님 딸이 왔다간 소식을 차쌍덕집사님께 듣고
전화를 하게 되었는데 자신의 말은 들을 기회를 주지 않고 유쌍조씨 안부만 묻고 대화가 중단


- - 신풍교회 내력

정양순사모님이 박내성목사님을 모셔서 돌을 쌓아가며 예배당 건축을 하고 있었는데
애양원교회 김원석장로님이 신풍교회 바로 옆에 예배당을 건축하자 하였고
모두들 덕이 안 된다고 반대를 하는데도 기어코 강행
유리하여 신풍교회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공항공사 때문에 다시 예배당을 이전하게 되자 신풍교회가 외부 삼거리로 먼저 나갔는데
성암교회는 또다시 김원석장로님의 고집으로 신풍교회 바로 옆에 예배당 건축

성암교회는 애양원을 통해 나오는 구호물자 외부의 지원과 병원 등에 취직까지 겹쳐 유리했고
신풍교회는 어려워져서 박내성목사님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게 되자 벌꿀사업을 해서 꿀통이
10통 정도가 되었으며 또 옷장사도 하게 되어 시비가 발생한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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