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창호 목사님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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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창호 목사님 부부

2009/10/09 0 3 2022.03.30 14:10

일시 : 09.10.5.
이름 : 박 창호 차 금아 부부(성암 교회 2대 목회자)



1. 신상

1925년 12월 7일, 광양시 골약면 출신이며 손 활인 목사님과 동향
1932년 생 차 금아 사모님(농민 상회 김 윤선 장로님의 처제), 전쟁 때 19세, 결혼은 51년

- 박 창호
고향에서 공부를 하고 싶어 일본까지는 가지 못하고 함경도 아오지로 가서 일하며 공부를 했는데 해방이 되어 소련군들이 밀고 들어 올 때 걸어서 아오지에서 해령으로 오다가 중간에 해방을 맞았고 고향에 오니까 해방 직후여서 혼란기.

- 차 금아
고흥군 금산면이 원래 고향, 7남매에 오빠 밑으로 딸 6명의 막내이고 애양원 직원으로 있었던 김 윤선은 3째 언니 차 쌍덕과 부부. 고흥의 한 동네 김 윤선 청년이 착실하고 좋다 하여 친정 모친이 우겨서 결혼. 언니는 천성이 좋기만 해서 신풍에 살면서 동네에 정신 없고 얻어만 먹고 다니는 성배라는 사람이 언니 집에 와서는 기차 시간 바쁘다고 제 밥 먹듯 소리치는 정도.
아직 일제 시대였고 일본인 원장이 있던 시절, 언니 결혼 후 모친이 애양원의 차 장로님이 같은 연안 차 씨라는 인연으로 사위 취직을 부탁했고 이 시기 친정은 여수에 있었으며 몇 번 부탁 끝에 처음에는 잡일하는 사람으로 들어 갔다가 사람이 성실하여 인정을 받게 되자 애양원에 있던 차량의 조수로 물건 실어 나르는 직원으로 업무.

- 자녀
3 남 2 녀, 3 명 아들은 미국에 있고 큰 아들이 총신 졸업 후 안수와 박사 학위 받고 현재 아주사 대학에서 석 박사 학위 논문 지도 교수로 있고 교회도 맡아 있는데, 뉴올리안즈에 있을 때 카트리나 피해 입고 캘리포니아로 이주



2. 신앙 출발

- 박 창호
일본에서 돌아 온 친구 손 활인이 일본에서 원폭에 부인 사망, 이후 귀향하면서 책을 많이 가져왔는데 그에게서 책 한 권을 빌려 보고 믿게 됨. '그리스도니 도라와래시 새이마스(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청솔)‘이라는 책, 일본인 목사님 성함이 세이마스(靑率). 아직 확신과 열심은 아니었으나 믿게 된 동기는 확실. 동네에 교회가 없어 30리를 걸어 광양읍 교회로 다녔고 선(宣) 재련 목사님께 점심 얻어 먹고 오후 예배 후에 돌아 오는 생활.

- 차 금아
언니 부부가 애양원 직원으로 신풍에 가자 자주 언니 집을 드나 들었는데 언니 집이 애양원의 사택 바로 옆에 있어 믿게 되었는데 친정은 모친이 불교에 보살이었고 아버지는 더 심한 정도. 그 때 절은 산을 몇 개 넘어야 했는데 절에 행사가 있으면 밖에 단을 차리게 되고 돌 부처 밑에 방석을 겹겹이 쌓는데 그 방석 다 갖다 바치는 정도. 예수님을 믿겠다니까 선영 떠난다고 절대 반대. 여수읍 교회를 몰래 다녔는데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 하늘처럼 좋았고 존경했지만 집에서는 신앙 자유가 없으니까 신풍 언니 집에 도와 주러 간다고 핑계대고 가면 신풍에서는 신앙 자유가 있어 내 세상이라, 아이가 8 남매여서 실제 도움이 필요한 상황.



3. 손 양원 가족사

- 손 양원 목사님
순천 성경 학교에 경건회 인도를 오셨는데 그 때 기도를 했고 그 기도에는 능력이 있었고 대단했으며,
소록도 6천 명을 모아 놓고 가운데 서서 설교할 때 마이크가 없어도 쩌렁쩌렁한 소리에 앞 사람이나 제일 뒤 사람들이 꼭 같이 들렸다는 정도

- 정 양순 사모님
해방 후에 손 목사님을 뵙게 되었고 목사님은 신앙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매사 빈틈이 없었으며 사모님은 신앙 하나는 정말 철두철미했으나 일반 생활 면에는 대대한 편. 해방 후 손 목사님이 옥중에서 나왔지만 사모님에게 연락이 갔는데도 사모님은 남해에서 산 기도 20일을 작정하고 갔는데 아직 날자가 되지 않았다고 하나님 앞에 약속을 다 채우고 내려 온 정도. 서 귀덕 집사님이 참으로 목회자를 잘 받들어 섬겼는데 서 집사님이 사모님을 두고 평가할 때 다른 것은 볼 것이 없어도 신앙 하나를 본다고 말하는 정도. 서 귀덕 집사님은 정말 보통 여자가 아니었음. 손 목사님 사후 애양원에서 기와집 하나 잘 지어 드렸음.

- 아들들 장례식
동인이가 학생 회장을 했고 훌륭했으나 동생이 형님보다 더 나았음. 나는 반란 사건을 여수에서 겪고 나서 차가 막 내왕할 때 신풍에 갔는데 장례식 하는 것은 볼 수 있었음. 둑섬에 장례를 치렀는데 형과 동생의 형상 2 개를 만들어 줄을 묶고 1,100명 온 교인들이 다 따라 갔는데, 사모님도 울고 나도 옆에서 함께 울었고, 손 목사님 돌아 가신 뒤에 나 환자들이 다 장로님인데 장로님 한 분이 설교를 하면서 그 때 모두가 '고생과 수고 다 지나고 광명한 천국에' 그 찬송을 부르는데 장로님이 찬송을 부르려고 해도 울음이 나와서 도저히 못 부르고 있었는데 손 목사님은 무덤 갈 때까지 계속 부르고, 찬송 소리가 나지 않아서 옆에서 딱해서 함께 부르려 하면 또 통곡이 나서 부르지를 못했다는 말을 하면서 예배 인도하는 장로님도 울고 교인들도 다 울고,

- 손 목사님
손 목사님 돌아 가셨다는 말을 듣고 환자들이 당가를 만들어 모시러 갔는데 갔다 와서 땅에 10일이나 묻어 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장례, 고려 신학교 학생들과 부산 목사님들이 다 와야 하니까,



4. 환란

- 반란 사건
총 소리가 나고 다급하게 되자 성경 학교 안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도망을 갔고, 우리는 문간에 있었는데 우리 머리 위로 총탄이 날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끌려 인민 재판하던 경찰서로 갔는데 그 때는 믿음이 약했으며, 반란군이 우리를 모아 두고 총검으로 사용하는 칼의 옆 부분이 무딘데 그것으로 학생들을 때렸고, 나는 맞지 않았으나 김 백수라고 같은 반에서 공부한 분은 졸다가 맞고 박 춘식이라는 분은 나중에 고려 신학교에 와서 공부했는데 성경학교는 안 다녔고,
김 경석 전도사라는 분은 1회고 나는 3회인데 그 분이 옥에 갇혔을 때 아침에 총소리가 나고 감옥에 연기가 가득 차고 난리가 난 상태에서 3학년이던 그는 믿음이 좋아서 내 손을 잡고 우리는 하늘 나라 가니까 걱정 마라 위로. 그 분은 믿음이 좋았는데, 그 날 아침의 난리는 알고 보니까 진압군의 진격이었으며 곧 해방.

- 전쟁
성경 학교 2학 년 때로 기억, 학생 중에 손 두환이라는 분은 황해도 출신인데 6.25 전쟁 때 눈물로 기도한 기억



5. 신풍 시절

- 성암 교회
서 현식 목사님이 동청을 빌려서 교회를 좀 하다가 손 목사님 사후 후임. 원래 성암 교회를 시무하던 중 고려파와 갈라 지면서 성암 교회가 순천 노회에 들어 갔고 그 뒤에 중앙 교회 목사님들이 번갈아 가며 성암 교회를 다녀 감. 나는 54년에 성암 교회 부임하여 전도사로 있으면서 고려 신학교를 다녔는데,

- 신풍 교회 개척
정 양순 서 귀덕 차 쌍덕 백 동학 그리고 박 창호 전도사 부부가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이 교회 시작이며, 사모님이 그 예배를 드릴 때 이제 나는 성암 교회에서 주동을 했다고 책벌을 받을 것이다, 내가 가서 책벌을 받겠다고 했고 내가 아이를 업고 주일 학교를 좀 했음.

- 보 이열 선교사
이 사실을 보 목사님이 알자 차 종석 과장님과 김 윤선 직원에게 당장에 직장 목을 뗀다고 하자 서 귀덕 차 쌍덕은 바로 성암 교회로 돌아 감. 김 윤선은 특히 성격도 괄괄하여 때려 죽인다고 난리.

- 백 동학 집사님
원래 경상도 사람인데 해방 후에 잘 믿겠다고 해서 손 목사님이 계신 신풍으로 온 사람이며 사람이 참 좋았으며 애양원 앞에 와서 사모님 사택에서 사환처럼 있었고 사모님이 중매를 해서 순천 여자와 결혼시킨 다음 살림을 내 주고 그 집을 구암리 넘어 가는 꼭대기에 집을 지어 줬는데 그 집에서 개척이 시작 된 것. 그 예배 시작을 성암 교회 박 창호 목사님이 인도한 것.

- 서 귀덕 집사님
교역자 섬김이 특별했고 신앙도 좋고 그렇게 강한 분이었으며 나중에믿는 문제로 쫓아 낸다는 말까지 나온 정도.

- 박 창호 신앙 노선
(성암 교회 부임하기 전인 52년경일 듯) 여수읍 교회에 김 상도 목사님이 목회하실 때 박 윤선 목사님이 노회 강사인지 사경회를 인도하셨는데 목사님들이 계시록에 대하여 질문을 하자 다른 사람 같으면 모르는 질문에는 말을 빙빙 돌리는데 박 목사님은 바로 모른다고 말했고 솔직한 면을 보고 좋다고 생각. 그가 고려 신학교 교수라고 해서 고려 신학교를 지원하게 된 것이며 박 윤선 목사님이 좋아서 갔지 고려파 생각은 없었다가, 순천 성경 학교에 문 재구 목사님이 강사로 가르치면서 공부 시간에 학생들에게 말하기를 ‘오해 하지 말고 들어.... 어.. 어.. 어.. 고려파가 잘려 나갔는데 그 것은 억울하게 잘려 나간 것이지...’ 이렇게 말이 날까 봐서 문제가 될까 봐서 조심해 가면서 말을 했는데 이 말을 듣고 ‘그렇다면 나는 고려파 갈란다.’고 하니까 목사님이 ‘오해하지 마... 어.. 어..’라고 황급해 한 적이 있었음.



6. 신학
- 순천 고등 성경 학교
손 활인은 순천의 고등 성경 학교 1회이고 박 창호는 순천 성경 학교에 3회

- 대한 신학교
고등 성경 학교 졸업 후에는 부산의 칼빈 학원에 합격했는데 입학까지 1개 학기가 비기 때문에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 와 있던 대한 신학교에서 1 개 학기 공부

- 칼빈 학원
4 년 과정을 정식으로 다 밟아서 2회로 졸업.

- 고려 신학교
본과 1학년에 합격하여 1학기를 공부하고 2학기부터는 박 윤선 목사님이 개혁 신학교를 시작하여 옮김

- 개혁 신학교
김 진홍 목사님이 박 윤선 목사님과 함께 개혁 신학교를 했고 2 명만 교수였는데 김 목사님이 오겠냐고 해서 갔고, 그 시기는 영동 중앙 교회 전도사로 근무하면서 공부했으며, 개혁 신학교에서 독립파 백 영희 목사님의 동생들과 함께 공부했으며, 공부한 장소는 홍 근섭 목사님이 계셨던 내수동 교회

- 총회 신학교
박 윤선 목사님이 사당동 총신 신학교로 들어 갈 때 함께 들어 가서 사당동 총신대를 졸업했는데

- 안수
총신대를 졸업할 때는 환원이 있어 과도기였으므로 총신대 졸업생도 고신에서 강도사 고시를 허용했고, 석 원태 목사님이 함께 시험을 치렀는데 고신 내에 야당 기질이어서 그를 떨어 지게 하려고 시험 문제를 일반적으로 제출하지 않는 조직 신학의 서론 부분을 내서 탈락 시킴. 안수는 서울 노회에서 윤 봉기 남 영환 목사님이 주동

- 성적
서 철원 목사님이 교수였는데 미국에서 공부했고 학적으로는 대단했고, 나는 영어를 못해서 백지를 냈으나 성경 점수가 좋아서 합격. 고려 성경학교에서 성경 점수가 98점이어서 교수가 인정한 정도.



7. 목회

- 금천 교회
박 창호 전도사님은 차 종석 장로님과 동서였기 때문에 성암 교회 초대 목회자로 부임하게 추진을 하고 있었는데 애양원의 서 현식 목사님이 손 활인 전도사님을 선호하여 손 조사님을 성암 교회로 부르기 위해 박 창호 전도사님을 손 조사님이 계시던 돌산의 금천 교회로 파송.
손 목사님이 개척자로 신풍에 부임하면서 내가 금천 교회 부임했고, 교인이 몇 되지 않았는데다 흉년이 들어 성미 좀 들어오면 보리쌀을 맷돌에 갈아서 소금을 타서 풀처럼 끓인 다음에 설탕이 없으니까 사카린을 조금 넣어 마시고 목회. 큰 딸은 그 곳에서 출산

- 진목정 교회
차 남진 목사님 소개로 진산 중앙 교회 정 목사님이 당회장인데 그리로 가서 진목정(진막정) 교회와 망정 교회 2 개 교회를 맡음.

- 성암 교회

- 유천 교회
칼빈 신학교를 하면서 거제도에서 유천 교회와 평지동 교회를 함께 맡아 3 년을 있었고 칼빈 신학교 졸업할 때에 유천 교회 권사님이 함께 동행, 그 후에 칠천도 교회에 1 년 근무.

- 영동 중앙 교회
부임했을 때 예배당은 짓고 마루가 없어 가마니를 깔고 예배 드릴 때였으며 사택도 짚으로 임시 조처한 정도, 부임하면서 바로 고신에서 연보를 얻어 마루를 깔고 사택 방을 넣음. 장로님을 세웠고 영동에서 환원이 있었고,

- 강릉의 교회
김 진홍 목사님이 관동 대학으로 교수를 하면서 그 쪽에 교회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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