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원룡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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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원룡 목사님

2009/09/27 0 4 2022.03.30 14:08

일시 : 09.8.29. 11:40-13:10
이름 : 서 원룡, 양혜원 교회 담임 목사님, 대구 공회 소속
관계 : 서 귀덕 집사님 조카, 서 천석 목사님 아들



1. 신상

1940년, 소라면 복산리가 고향
부친 서 천석 목사님(22년생)이 서 귀덕 집사님의 동생
서 귀덕 집사님의 남편은 애양원의 서무 과장이며 성암 교회의 차 종석 장로님
본적 : 복산 1012번지,
호주 : 서 정기 1877년 - 봉석 맹석 권석 재석 기석 귀덕(1913) 천석(1918)



2. 신앙

서 귀덕이 차 종석과 결혼 후 일본에 들어 갔고, 서 천석은 미혼으로 따라 들어 갔으며 그 곳에서 감리교를 다니며 믿게 되었는데 서 천석은 보통으로 다녔고 서 귀덕은 전차로 1 시간 거리를 매주 다니며 신앙 열심. 서 천석은 귀국 후 한국에서 결혼했고 신앙 중단. 일본의 교회같은 교회라면 다닌다며 불신앙 지속했고, 서 귀덕 일본에서 나온 뒤 신풍에 살면서 애양원 교회를 다니며 애양원 외부의 성암 교회 소속. 해방 후 손 양원을 만나면서 서 귀덕은 진리를 따지는 신앙 노선에도 철저한 분이 되었고, 서 천석은 귀국 후 신앙 중단했고 결혼하여 여수에서 거주하다가 김 은도 목사님이라는 분이 여수 충무동 교회 집회를 인도하는데 참석하였다가 큰 은혜를 받고 열심히 신앙 출발



3. 복산 개척

한편 신풍에서 서 귀덕이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던 중, 복산에 살던 손위 올케가 병이 들자 신풍으로 모셔 놓고 치료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복산으로 돌아 가서는 덕양 교회로 1년을 혼자 다니게 되었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병도 낫고 가정도 좋아 졌다면서 함께 믿는 분들이 많아 지게 되니까 복산에 집을 따로 마련하여 1947년 8월에 복산 교회 설립. 그 설립을 서 귀덕이 배후 지원. 교회 설립자 큰 올케의 아들이 현재 80세 서 동연 복산 교회 장로님(686-1956,016-242-2820). 복산 교회는 처음에 저수지 주변 몇 집 있는 곳에서 예배를 드렸고, 그 곳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조산 마을 마산 마을 복산 마을 3곳에 연락이 되어 교회들이 출발. 각가 자기 마을에서 초가집으로 시작. 서 귀덕이 교회들의 뿌리가 됨



4. 고려파 소속, 신풍 교회 개척

서 원룡은 40년 생이며, 초등 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2-3, 3-4학년), 신풍 고모님 댁을 자주 놀러 간 것이 3-4학년 시기인데 당시 애양원 교회는 애양원 안에 있었고 애양원 밖의 마을에는 성암 교회가 있었고, 건강한 사람들은 성암 교회로 다녔는데 초등 학교 5학년에 6.25가 발발했으나 여수는 피난민들이 밀려 오고 간 정도이지 대규모 전투가 없었으므로 전쟁 느낌은 크지 않았으며, 전쟁 후 초등 학교 5학년이나 되던 그런 시기였는데 교회가 갈라 져 나온 이야기를 듣게 됨. 총회와 고려파가 나뉠 때에 정 양순 사모님과 서 귀덕 집사님이 진리 노선 때문에 그들과 함께 갈 수 없다 하여 부산 고려파와 연락하며 성광 교회로 개척. 작은 집을 마련했는데 신풍을 가게 되면 예배는 함께 드리지 않았으나 따로 예배 드리는 사실은 기억


5. 순천 시절

1952년 순천 북 중학교 1학년 진학하고 1954년까지 3년 동안 상사에 있는 외삼촌 최 정호 집사님 댁에서 숙식하며 산을 넘어 등교. 중학생 시기에 방학 등으로 고향을 가게 되면 신풍 앞으로 기차가 지나 가게 되지만 고모 집을 들르지는 못했고 이 때는 철도 들고 잘 기억 할 때여서 이 시기의 개척은 확실하게 아님.
1954년에는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순천 고등 성경 학교 3 년 과정에 입학했으나 2학년 째 중퇴를 하게 되는데, 신풍 교회의 개척이 자신의 초등 학교 시절이라는 사실은 확실.
고모 댁에 가서 신앙 노선 때문에 한 교회로 다닐 수 없어 나오게 된 이야기를 들었고 고모부 차 종석 장로님도 직접 아내를 구박 핍박을 심하게 했다고 술회. 서 귀덕 집사님의 의지가 확고



6. 서 귀덕

서 천석 목사님보다 서 귀덕의 단호함은 훨씬 강했음. 집회 때 설교를 듣는데 옆에서 조는 사람이 있으면 살이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순간적으로 단호하게 짚어 비틀면서 ‘어떻게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잠이 올 수 있는가!’라는 일화. 집안 식구의 성격이 원래 그렇게까지 그렇지는 않았고, 조부가 한방을 한 적이 있었음

서 귀덕은 아마겟돈 전쟁으로 세상 끝이 곧 온다고 늘 준비하고 계신 정도, 집에 가면 항상 미국에서 온 구호 드럼통 2개에 쌀을 다 채워 놓고 대비하고 있었음. 아마겟돈 전쟁이 나면 세상에는 먹을 것도 없고 갈 곳도 없을 것이니 전시 비상을 항상 준비하신 분. 평소 일도 부지런하게 하시는데 그 목적은 오로지 집회 때 교인들 데려 가서 은혜 받게 하려는 일념.
당시 고려파가 교단 구원을 강하게 주장하고 나오자 그 주장 때문에 고려파 교단을 따라 가서는 안 되겠다고 하신 것.



7. 아현 교회 김 현봉 소속

박 래석 전도사님을 모시고 성광 교회로 계셨는데, 고려파가 교단 구원까지 주장하고 나올 때 고려파를 포기, 60년 초반 서울로 김 현봉 목사님을 만나서 알게 되고 은혜를 받게 되고 옳다고 확정이 되자 바로 교단을 옮김, 서울로 예배 참석을 하였으며 고려파에서는 이탈한다고 난리가 났는데 단호하게 옮김, 김 현봉 목사님 쪽으로 교회를 옮기기 전부터 백 목사님을 알고 있었음
서 원룡은 1960년에 서울 갔고, 서 귀덕은 61-62년에 김 현봉을 예배 참석 때문에 서울로 다녔고, 한 편 여수 충무동 교회에 있던 서 천석도 서 귀덕이 적극적으로 김현봉에게 인도 아현 교회 김 목사님 밑에 있게 함. 서 천석 아버지를 부르고 서울에 있던 조카 서 원룡도 아현 교회를 출석한 것이 1962년.
서 천석은 김 은도 고려파 목사님의 충무동 교회 집회에 참석하고 은혜 받은 뒤 신앙에 철저했는데, 양 진환 장로님의 여수 약방이라는 한방 조제 회사를 다니며 월급을 받으면 십일조뿐 아니라 감사 월정까지 다 하면 생활비가 없을 정도였고 교회는 충성하되 경제는 계속 어려웠던 중. 서 귀덕은 서 천석을 바른 길로 인도하려 무던히 애쓰고 결국 김 현봉에게 인도. 서울에 있던 조카를 불러 아현 교회를 소개하여 1963년부터 서 원룡도 김 현봉을 만나 1965년 돌아 가실 때까지 2 년 정도 은혜 생활



8. 창광 교회 이 병규 소속

여수에서도 경제는 어려웠고 서울에 온 이후 경제는 서 원룡이 거의 책임을 져야 했으나 식구 전체를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김 현봉 목사님이 돌아 가시게 되자, 서 귀덕은 신풍으로 동생을 불러 과수원을 맡김. 김 현봉 사후 바로 불러 신풍에서 살게 되었는데, 신풍 교회의 소속은 이 병규 계통이고 서 천석은 소속과 열심히 이 병규였고 서 귀덕은 소속은 이 병규였으나 은혜는 백 영희 계통에서
당시 신풍 교회가 비행장 때문에 이사를 하게 되었고, 이전하는 예배당 건축은 서 원룡이 맡았으며, 아버지는 너무 고지식하여 한번 옳다 인정하면 몸을 바치는 분이며 신풍에 와서도 이 병규 교단에 아주 적극적이었음.
당시 서 원룡은 이 병규 교단의 광주 유동 교회를 전도사로 담임하게 되었는데, 당시 이 병규 목사님이 결혼을 하게 되면 교단에 교역자들이 떠나게 되고 교단적으로 시험, 유동 교회는 개척한 지 세월이 지나도 부흥이 되지 않아서 교회를 비워 두니 훈련 겸하여 이 병규 목사님이 파견하게 된 것. 파송할 때에 전라도 사람이니까 교회를 가지고 다른 교단으로 넘어 가지 않겠냐고 의심을 하여 미리 다짐을 받았고 나는 만일 교단을 떠나게 된다면 교회는 주고 가겠다고 약속. 당시 그런 사람들이 하도 많으니까 다짐 받은 것.



9. 공회 소속

서 귀덕은 1970년(경)부터 8월 집회를 참석하고 있었는데 계시록 1장을 설교하던 집회를 고모가 참석하라고 해서 서 원룡도 참석했고, 백 영희 이름은 알아도 말씀은 모르던 때인데 이 집회에서 백 영희와 교리를 알게 됨. 계1:9에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라는 대목에서 너무 큰 은혜. 소속을 바꾸기로 확정. 당시 이 병규 목사님 계열로 주변에 잘 알던 사람들로는 곽 봉빈 목사라는 분이 신풍 교회에 있었고, 이 때 신풍 교회 전임자 박 래석 목사님은 신풍에서 순천의 남문 교회를 개척했고 박 목사님이 몸이 불편하게 되자 그 교회에 차 주환을 불러 두고 있었으며 서 원룡은 광주에 있었는데, 서 원룡이 백 목사님 집회에서 너무 크게 은혜를 받게 되자 3 명에게 연락. 이미 차 주환은 백 목사님을 알고 있었고 집회는 잘 참석 않았는데. 서 원룡의 권유로 서 원룡의 공회 집회 참석 다음 주간 쯤, 3 명이 함께 부산으로 금 요일 예배를 참석하러 다녔고, 신풍의 서 천석에게도 설득했으나 아버지는 철저하게 이 병규 계통이었고, 과수원 집으로 찾아 가서 소속을 바꾸자고 말을 해도 절대로 거부. 서 천석은 백 영희는 너무 신앙에 모가 나서 안 된다며 신임을 하지 않음. 서 귀덕은 서 천석이 안 들으니까 집회만 계속 참석하였는데 함께 있었고.
이후 교역자 회의도 참석하도록 해서 참석했으며 다음 집회도 참석. 당시 교역자 회의 때 십계명을 배웠는데 그때 적으라 해서 적고도 큰 은혜를 받았는데, 신풍 서 천석 아버지에게 와서 받아 적은 것을 그대로 읽어 드렸는데 그것을 듣는 순간 바로 은혜를 받고 이런 진리가 있느냐 해서 소속 결정.
3 명 교역자가 한결 같이 은혜를 받고 부산으로 가자고 의논을 모아 공회 소속을 결정하자 부산을 찾아 갔는데 백 목사님이 금 요일 예배 마치고 나서 우리가 공회 소속을 원한다 하니까 목사님은 ‘그렇지 않아도 이 병규 목사님 쪽에서 이리 온다 말이 많아서 백 목사님이 배후에서 조정을 한다고 오해를 받는데 3 교회가 온다 하면 부덕하게 되니, 올려면 교회는 두고 몸만 오라고 하심. 서 원룡, 곽 봉빈, 차 주환 3 명의 결정이며 박 래석 목사님은 건강이 좋지 않아 서울로 올라 가고 순천에도 없던 때.

신풍 교회 곽 봉빈도 당장 돌이키기로 했는데, 김 봉규 장로님이 신풍 교회에서는 이 병규 목사님의 오른 팔인데 그는 백 목사님 집회를 가지 않았고 교회의 소속 변경 움직임에 대하여 이 병규에게 연락했고, 이 병규는 당장에 불러서 배은망덕할 수 있느냐고 질책. 곽 목사님은 이북에서 결혼 전부터 이 목사님을 따라 나온 사람이고 이 목사님이 키웠는데 그럴 수 없는 관계, 그래서 서울을 갔다 온 뒤에 안 간다고 해서 돌이켰고, 그렇게 되자 교인들에게 이중 인격이 되어 공회로 간다고 해 놓고 서울을 갔다 온 뒤에 변절을 했다고 교인들의 신임을 받지 못함. 당시 신풍 교회는 8-90 명 교인 중에 60%는 부산, 30%는 이 병규, 10%는 중립 정도로 보면 되고, 교회가 양분이 되자 오전 오후를 갈라서 곽 목사님은 오전에 이 병규 목사님 계통 예배를 드리고, 서 천석은 오후 예배를 인도.
그런 와중에 언제 한번 신풍에 가서 이야기를 들으니까 수 요일 밤 예배를 인도하러 갔는데 반대 편에서 억지로 끌어 내어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여, 그런 분란으로 도저히 계속해서 안 되겠다 싶어 부산 목사님에게 교역자를 보내 주든지 어떻게 정리를 시켜 달라고 요청하자 백 목사님은 한 교회 안에서 양분 된 경우는 손 대지 않는다고 하여, 공회로 가려는 교인들은 진퇴양난에 빠짐. 백 목사님은 갈라 져서 노선이 엄격히 나뉘면 몰라도 한 교회 내의 분쟁에는 교역자를 보내 줄 수 없다는 입장이어서 손 오영 목사님을 모시게 됨.
손 목사님은 당시 이 병규 목사님의 계약 신학교를 같이 다녔고 전도사 시절은 무안 장로 교회를 맡고 있으면서 교단과 교리 때문에 교회 설립을 따로 했던 경험이 있었고 당시에는 이리 이 교부 조사님 밑에 있었는데, 서 원룡과는 신학교를 다니면서 하숙을 같이 했던 사이여서 서 원룡이 부산에서 배운 십계명을 그대로 읽어 주었더니 이런 교리가 있으면 나도 같이 다니자고 하여 부산 목사님께 교역자회에도 참석하며 말씀을 배웠는데, 교단 소속은 아직 옮길 수 없는 형편이어서 기회를 보자고 약속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 서 천석을 손 오용 전도사에게 보내서 신풍 교회 입장을 설명하니까 손 목사님이 좋다 하고 얼른 내려와서 교회를 맡았고, 한 교회 내에서 곽 봉빈 손 오용 두 분이 나뉘니까, 이 병규 목사님은 박 래석 목사님이 신풍 교회 개척 시부터 있었던 분이라는 점에서 건강이 조금 회복이 되는 때니까 파송하면 수습이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박 목사님이 중풍으로 정신 상태도 이전과 달라서 예전 박 래석 목사님이 아니니까 교인들이 더 신임을 하지 않게 됨. 박 목사님으로 도저히 안 되니까 아버지 서 천석이 상대 편에게 교회를 하나 지어 줄 터이니 나가라 했고 교인이 많은 우리가 남고 상대가 우산으로 나간 것.

한 편 광주 유동 교회는 이 병규 목사님께 약속한 대로 교회는 내 주고 나옴. 부임한 지 1년 반이 지나면서 교인이 30여 명 전도 되었고 교인들이 놔주지 않았으나 그들에게 내가 나간 뒤에 교인들이 후에 따로 개척을 하거나 따라 나온 다면 새로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병규 목사님과 약속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약속을 지킴.



10. 서울 생활

과거 1961년에 보충역 판정을 받고 군대를 가지 않고 있다가 이후 수배가 내려 졌는데, 신풍으로 수사대가 자꾸 오니까 신풍에는 있을 수 없어고 공회로 소속을 옮겼기 때문에 서울사직동 교회를 출석한 것이 1972-3년경이며 계속 있다가 잠실동 교회로 이어 진 것.
당시 정 양순 사모님이 서울로 오게 되면 사직동 교회 출석, 딸 때문에 부산을 갔다 오고, 서울에 계실 때에는 교회 오면 점심 때 서 원룡 가정이 식사 준비를 해서 사직동 교회를 2 년 정도 함께 다님,  
차 종석 고숙도 서울로 오면 과거 서 귀덕 고모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아내 때문에 많은 푸념. 서 귀덕은 신앙 때문에 매를 맞고 핍박도 많이 당했으며 아주 심각한 정도. 서 귀덕 집사님이 돌아 가면서 서울 가면 꼭 서 원룡 조카 집에 들르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며 서울에 오면 들렀고, 고모 대하여 푸념, 고모는 유언을 통해서도 남편을 이 노선 접할 기회를 만드려 했으나 고숙은 이 노선이라고 하면 아예 귀를 무조건 닫는 분, 공회 설교를 들으려 하지도 않는 분, 예배나 집회 참석도 하지 않는 분, 조카 집에 오는 것은 단순히 인인관계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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