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진후 면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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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진후 면장님

2009/09/27 0 1 2022.03.30 14:07

일시 : 09.9.6.16:50-17:40
이름 : 차 진후, 신풍리 160-1
관계 : 차 양자 선생님의 큰 아버님



1. 신상

1923.1.18. 계해년 생, 87세
차 양자 선생님 큰 아버님
1945.7.5. 애양원 직원, 일본인 안도 원장 시절 1명 선발에 8명 지원
당시 직원은 반공반민(신분이 공무원과 민간인 반반)



2. 애양원

- 조직
원장(일제 안도, 해방 보이열)  
총무과장(차 종석)
서무계(류柳 지형, 산곡이고 고향은 신산), 재무계(차 진후, 구암), 교도계(유劉 재령, 산곡)  
차량 기사 신 용식(삼일면), 조수 김 윤선. 사무실 옆 보육원 여교사 2명, 남자 1명
해방 전에는 직원 20명까지

- 예산
선교부 - 직원 선발 월급, 보사부 - 의약, 농림부 - 양곡(군청 경유), 재무부 - 환자 경비
해방 후 1,350명까지 기억, 경증 중증 환자 포함, 인원 보고하면 원생수 따라 경비 지출

- 형편
일제 때나 해방 후 사회 전체가 극히 어렵고 굶을 때도 애양원 안에 일단 들어오면 먹고 사는 것은 염려 없었고, 얻어 먹으러 다니거나 일을 해야 먹고 사는 것은 아니었음.



3. 교회

- 차 종석
결혼했고 일본에 갔다 온 뒤에 일제 때부터 총무 과장을 했고 초등 학교는 했고 그 이상은 모르겠고 구암에 서당이 있어 서당 공부는 많이 했고, 서 귀덕은 정 양순 사모님과 아주 하나였고, 내가 면장 나설 때에는 양 일만 과장이 광양 사람인데 데려다 놓았고 차 과장은 경상도 쪽으로 보냈고(함안? 거창?) 뒤에 양 과장을 매산학교 총무 과장으로 보내고 차 과장을 다시 부름.

- 성암 교회
해방 전에 김 응규 목사님이 애양원 교회를 맡고 있을 때 성암 교회가 있었다가 그 뒤에 없어졌고 해방 뒤에 직원 중심으로 다시 생겼고

- 손 양원
인민군들이 내려 온다는 소식을 듣고 직원들이 피난을 가려고 배를 구해놓고 목사님을 모시려고 해도 안 되어 묘도 부근까지 갔다가 닻을 내려 놓고 2일 밤을 지내며 작은 배로 직원이 손 목사님을 모시러 다시 갔는데도 교회를 지키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그냥 왔는데 저 멀리 무슨 배가 다가 오고 있었고 그들이 배에 올라 왔는데 경찰과 군인 패잔병들이었다. 밥을 달라고 해서 먹더니 우리들에게 묘도에 다 내리라고 해서 내렸고 그들은 그 배를 타고 가버림. 할 수 없어 다시 애양원으로 돌아 와서 애양원 끝에 집 하나를 소독하고 숨어 있었는데 손 목사님과 경찰 하나를 묶어서 갔고 우리는 애양원 안에서 라디오가 있던 때여서 늘 숨어서 라디오를 들었는데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했다고 했고 해방이 되었다.

- 성광 교회
처음 초가로 시작한 집이 차 순철이라는 사람의 집인데 처가가 부산 쪽의 마산이었고 그 바로 옆에 붙은 밭이 차 상렬 밭일 것. 당시에도 말 없이 집을 짓는 사람은 그렇게 짓고 또 지목 변경해서 짓는 사람도 있고 또 등기 하는 사람은 했으니까 사모님이 구입한 그 집은 기록이 있을 것 같고, 교회가 있던 곳은 6-700번지 정도 될 것.


4. 면장

1958년 애양원 직원으로 있던 중 자유당 시절에 지방자치법으로 초대 민선 단체장을 선출할 때 율촌 면에 장천 교회 장로님들과 지역 유지들이 면장 선거에 나서도록 수 차례 권면했고 이 시기에는 차 종석 과장님을 원장에 의하여 다른 곳에 가고 양 일만 장로님이 과정을 할 때인데 과장님이 차 진후씨를 불러 출마를 권하여 결정. 당시 자유당 여천군당의 재무 책임자였고, 면의 인정을 받을 때여서 압도적 표차로 당선.
1960년 3.15 부정 선거 때문에 4.19. 혁명이 일어 났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 서자 민주당 이 봉영 장로님이 6월 20일 군수로서 면장에게 일은 잘했으나 정권 교체를 고려해서 사표를 내 달라고 했고, 차 면장은 임명이 아니고 면민 투표였으므로 주민 의사 없이는 안 되겠다고 거절. 이 후에 김 수평 여수 국회의원이 민주당으로 중앙의 부흥부 장관을 할 때인데 자기 미평의 집에 민주당 모임에서 율촌 면장의 사표 거부와 군수가 사표 받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백 남복 군수를 통해 압력, 군수가 읍면장 전부를 불렀고 군수 내무 과장은 인사말만 하고 나가고 행정 과장이 미안하다며 사표를 요구해서 9 면장 전부가 사표, 도청에서 사령장이 7월 5일 발부.
1958년 초대 면장선거에 38살에 당선 되었고 60년 3.15 부정선거로 4.19 혁명이 일어 났고  후에 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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