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상희 권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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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상희 권사님

2009/09/27 0 1 2022.03.30 14:06

일시 : 09.9.25. 11:05-13:30
이름 : 차 상희
관계 : 공 정엽 권사님 딸, 안 재남 목사님 처형



1. 신상

- 가족
父 차 균석 1915
母 공 정엽 1915
子 차 상희 1938

- 본인
1938 출생
1959 결혼, 22세 성탄절 경, 박 래석 전도사님 시절, 남 영환 당회장의 예배당 주례
1961년 8월, 첫째 출생, 결혼 후 친정에서 2 년 생활, 출산 3주만 시댁 생활



2. 집안

- 차 종석 : 부친 차 균석과 사촌, 차 씨 두 파 중에서 부유한 집안이고 다른 차 씨는 가난

- 차 균석 : 균석의 부친이 부유하여 작은 사람들이 여럿, 균석 형님도 작은 살림
               마을 내려 가면 논이 쭉 늘어 섰고, 골목 기침 소리 내면 모두 숨을 죽인 정도



3. 부모 신앙

- 일본
중학 공부하여 유식했고 결혼 전에 일본에서 회사 생활
한국에서 결혼하고 부부가 함께 들어 가서 동경 대판 등지에서 생활
일본에서 신앙 생활, 귀국 후는 중단, 술을 먹어도 '나의 죄를 씻기는' 찬송 부르는 정도.
공 정엽은 일본에서 믿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며, 1942년 5세 때 귀국

- 애양원
일본 포장길 기억, 신풍에서 사촌 언니가 샘 울타리로 데려 갔고 떨어질까 두려웠던 기억.
어릴 때 교회를 다니기 전의 애양원은 가 본 적은 없고 그냥 애양원 이름과 나환자 이야기만 들었던 정도인데, 학교를 가려면 신산 앞의 다리 밑에 나환자들이 무서워서 그 쪽에서는 죽으라고 달음질한 기억.

- 손 양원
한국에 나와서 어머니가 잠깐 애양원 교회를 다닌 기억. 어머니 따라 애양원에서 예배를 드려 봤는데 환자들은 일반 좌석이고 강단은 높았고, 그 강단 뒤에 바깥에서 온 몇 사람은 목사님 뒤에 의자 없이 그냥 앉아 예배. 목사님 키가 적고 버선에 두루막 입고 설교를 하면서 작은 사람이 강단을 잡고 펄펄 뛰면서 설교하심. 교인들도 뛰고 나환자들이 손도 없는 사람은 몽당 손목으로 박수를 치고 손조차 없으면 발로 치면서 지상 낙원, 천국이었음.

- 어머니
어머니가 교회를 좀 다니자 차 계철 큰 아버지가 아주 고지식한데 제수가 교회 다니는 것을 막아서 모친은 다니지 못하게 되었고



4. 주일 학교

- 첫 출석
1949년 12세에 교회 첫 출석. 동네 동각에서 열린 주일 학교를 다닌 것이 교회를 자발적으로 다닌 첫 기억 확실.

- 동각
노인들이 놀고 쉬고 저 쪽에 앉아 있는 모습이 기억 되던, 요즘 마을 회관 역할 하던 장소
동각 예배는, 어른들 예배나 모임은 전혀 없고 오직 주일 학생들만을 위한 임시 운영
주일 학생은 학교 다니는 학생이 별로 없었으니 당시는 학교를 못 가고 집집마다 집보고 아이보고 일하고 게끝하는 것이 아이들이 많았고 그런 학생들 소수 모여 예배, 요즘처럼 교회 학생은 전부 학교도 다니는 학생이 아니므로 그냥 동네 아이들 대상의 주일 학교
동각의 위치는 학서와 구암의 중간 지점 쯤이고 학서에서 볼 때 구암은 언덕을 넘어야 했으므로 ‘너머동네’라고 했는데 너무동네쪽에 구암 뒤의 당산 나무 조금 밑.

- 예배
그 동각을 주일에 빌렸고 손 목사님이 직접 오셔서 가르쳤고 어떤 여 선생님이 동화 찬송 율동을 가르쳐 주어서 재미 있게 했고, 서 현식 목사님 사모님이 몇 번 가르쳐 준 기억. 아주 열심히 다님. 재미 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재미 있게 운영하니까 그냥 갔던 것.딸만 나가게 된 것. 함께 다닌 사람은 문 숙자와 순자. 순자가 토끼 띠로 한 살 밑.



5. 학교

율촌 초등 학교를 입학하여 다니다가 일본 선생님과 한국 선생님이 바뀐 분위기가 기억
학생들이 수군거렸고, 머리 길렀던 한국 여선생님 기억. 입학 때는 아직 일본 선생님



6. 전쟁

6.25 전쟁은 잘 기억에 없고, 반란 군 때는 확실하게 기억
부친이 면 직원도 했고 반란 때는 이장을 했는데 아버지가 도망을 가다가 학서 앞에 큰 대밭이 큰 집 것이었는데 그 대밭에서 발을 찔렸고 움직이지 못하게 된 적이 있었고(차병용 대밭은 적고, 우리 큰집 차 계철 대밭은 엄청 컸고, 두 밭은 연결). 어머니가 애양원에 아버지 약을 지으러 다녔는데 반란군들은 어머니가 애양원에 사람을 숨겨 놓고 밥을 나른다고 족침. 어머니가 장농 뒤에 숨겨 놓았는데, 반란군들이 총대 위에 붉은 기를 달고 부친을 잡으러 집에 몰려 들고 바깥 울타리에는 세 겹으로 둘러 싼 상태. 어머니가 집에는 없다고 하면서 만일 있다 해도 이미 발을 다쳐서 데려 갈 수도 없으니 나를 데려 가라고 해서 돌아 감.
6.25 전쟁은 별 기억도 없으나, 저 쪽 대로 쪽으로 차들이 몰려 다니고 총소리가 난 기억이 있고, 아버지가 피난을 가야 한다면서 갔다 올 때를 생각해서 양식을 장독에 담아 부엌 모때기에 묻고 달섬으로 갔다가 2일 정도 자고 돌아 온 정도, 심하지 않았으므로.



7. 성암 교회

손 목사님 사후 애양원으로 가서 예배 드린 기억은 없고, 전쟁으로 교회가 한참 없어졌는데, 어느 날 성암 교회가 시작했는데 마을의 첫 교회로 기억. 예배당은 일반 집처럼 지었고 종각도 따로 있었고, 열심히 출석. 집에서 다니려면 공동 묘지를 지나 가야 하는데 6월 장마 때 수 요일 밤 예배를 가면서 길로 가려니까 묘지가 무서워 질러 가는 집의 논둑으로 가면서 모심고 논둑이 찰지게 빚어 놓아 네 발로 기어서 논둑을 타고 교회를 간 기억.
모친 공 정엽은 여전히 아버지에게 붙들려 있었고, 나도 나이가 들어 가니까 교회를 못 가게 잡기 시작. 교회 가면 연애한다고 막은 것.
성암 교회를 처음 나갈 때는 어른 예배 참석했고 그때는 아이들이 없어서 주교가 없었고 어른 예배뿐. 주일 학교 개념이 없었음. 어른들 예배에 주교생이 앉아 있는 정도, 몇 안 됨.
동각 시절은 완전히 주교, 성암 시절은 목회자가 일반 예배를 인도하신 기억. 성암 교회를 다닌 것은 동각에서부터 주일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교회를 가고 싶어 열심히 다닌 것. 성암 교회 시절 사모님 기억은 전혀 없음.
목회자 손 활인 전도사님은 잘 기억. 신풍에서 오래 계셨던 기억 있고, 순천에서도 손 조사님의 장천 교회 출석



8. 신풍 교회

- 교회 변경
성암 교회에서 서 귀덕 집사님과 함께 다닌 기억이 없고 대신 언제 서 귀덕 집사님과 정 양순 사모님이 고려파니 뭐니 하면서 심각하게 말씀하는 것은 들은 기억. 절대로 합할 수 없다면서 서 귀덕과 사모님이 둘이서 가야 한다는 말씀. 사모님이 살던 병원 앞의 문간방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고.

- 첫 기억
신풍 교회가 출발하면서 우리 집 앞에 있는 사택에 살러 온 기억. 손 목사님 돌아 가시고, 수양 딸인 양근이가 1935년생으로 함께 살았고, 그 집이 백 동학 집사님의 집이었던 것 같고, 그 집에서 예배를 보고, 그 다음 교회를 지어서 옮김. 이 때부터 부친은 교회 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았으나 어쨌든 동각에서부터 성암과 신풍으로 신앙 생활은 열심.
백 동학 집사 집을 사택으로 삼아 예배를 드린 것 같고, 고신으로 개척을 나온 것이고 서 귀덕 집사님이 숙모니까 무조건 따른 것이고, 교인은 사모님과 서 귀덕 차 수예(6촌 언니) 차 상희 등 몇이 둘러 앉았고 예배는 사모님이 인도하시는데 늘 머리를 한 쪽으로 조금 기울이는 특유의 모습, 예배가 끝나면 말씀들을 하느라고 시간이 가고 앉아서 이야기 하고 놀기도 한 기억.
그렇게 하다가 몇 전도사님들이 오고 간 기억이 있는데, 확실하게 얼굴이 기억 나는 분은 얼굴이 납작하고 키가 적고 몸 집이 있는 오 전도사님’ 당시 교회를 죽자고 다닐 때.

- 교인
함께 다닌 사람들은 차 상길 목사님 되었고, 차병용 병남 교회를 나왔고, 닭머리에서 김 종화, 구 선모, 문 숙자, 순자, 유 완종, 유 점자, 유포례(밭에 교회 짓고 나서는 수예는 뒤에 다닌 것)

- 결혼
결혼은 박 래석 조사님이 오신 다음에 했고 주례는 남 영환 목사님, 남편은 결혼하려고 믿는다고 한 정도. 주교를 다닌 적이 있는데 세례를 받아야 주례 선다고 하니까 여수까지 다니면서 학습 세례 공부를 했고 결혼하면 원하는 대로 신앙 생활 다 해준다고 했는데, 결혼해서 가보니까 불교 골수. 친정이 잘 사니까 결혼하고도 2년간 신풍 생활, 다른 사람들은 가난하면 1년 정도 처가살이

- 김 현봉
언제부터 머리 깎은 목사님들이 자주 왔는데, 순천으로 갔다가 친정을 왔을 때인지는 기억 없고.

- 류 우열
류 전도사님이 오셨는데 그 전까지는 사택의 큰 방에 사모님이 사용하다가 교역자가 오니까 큰 방을 내 드리고 작은 방을 사용. 언제 보니까 그 때는 콩 나물을 10 원어치도 줬는데 한 움큼 사와서 다듬고 있었는데 좋은 부분은 교역자 드리고 나머지만 추려서 가져 가기 때문에 물으니까 주의 종은 이렇게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침.

- 사모님
사모님이 신풍을 떠난 것은 결혼하기 전에 떠났고, 그 때 사모님이 어렵게 사는 줄은 전혀 몰랐음. 만일 알았다면 우리 집은 잘 살 때여서 쌀이 넘쳤고 얼마든지 쌀을 갖다 드릴 수 있을 때. 사모님이 우리처럼 잘 살고 풍족한 줄로만 알았다.

- 김 현봉
목사님이 신풍에서 집회한 기억. 2 회 정도 신풍 교회 왔고, 고향 떠난 뒤에는 참석 없었고,
백 목사님의 신풍 집회는 애양원과 신풍 교회 전혀 기억 없고. 결혼 전에도 기억 없고.

- 박 래석
신풍을 떠난 다음 다시 성광 교회로 돌아 왔다가 돌아 가셨다는 말을 들었고, 처음 오셨을 때는 기도하고 목회하고 열중했고 설교도 너무 잘하고 젊고 멋있고 좋았는데, 뒤에 문제가 있었다는 말 들은 기억

- 예배당
사모님이 항상 어디 가서 돈 구해 오면 좀 짓고, 또 좀 짓고 했는데
동네 안 믿는 사람들이 전부 나서서 주변 밭에 세멘으로 블록을 찍어서 여다 날랐고, 그 나르던 모습이 개미들이 줄 지어 나르듯 그런 광경. 동네 청년들이 나서서 안 믿어도 도와 주자는 분위기.



9. 정 양순

사모님 딸들은 공부하러 외지에 나가 살았고, 동연은 언니고 동림이 막내 딸인데 동갑 정도였고, 동장이라는 아들은 교회 출석 거의 없었고,



10. 순천 생활

22세 1959년에 결혼하고 2년 있다 순천 시댁으로 갔는데, 손 활인 목사님이 나를 찾아 집으로 오셔서 고향에서 은혜 받고 다녔기 때문에 좋아서 남편과 장천 교회를 출석, 경찰서 밑에 살다가 그 경찰서 옮기고 그 바로 밑에 고려파 교회가 있다 해서 찾아 갔으나 그 교회가 이사를 갔던 차인데, 손 목사님이 오셨기 때문에 출석. 그 때가 고신 장로교가 합할 때인데 얼마 있다 보니까 고려파와 장로교가 합했다가 다시 헤어지면서 손 목사님은 고신파 목사님이니까 장로교에서 목사님을 내보내어서 사택에 가니까 이불 보따리 하나 싸놓고 살림살이라고 냄비 몇 개 싸두고 있었던 정도. 목사님은 쫓아내고 대신에 교인들은 몇 사람 되지 않으니까 교인을 붙들려 했고, 고신측을 좋아하는 교인은 청년들이고 나도 결혼해서 아직 경제 능력이 없을 때인데 한 청년은 죽어도 이 교회에는 안 다니겠다 하고 나갔고 나도 손 목사님이 떠나자 그 교회를 다닐 마음은 없었으며, 그 기회에 복음 교회가 있어 김유정 여 목사님 교회로 출석. 그 목사님의 실명은 김 귀옥. 얼마 전 돌아가셨고, 그 교회가 잘 믿는다 해서 그리 갔고, 손 목사님은 쫓겨 난 후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물어 봐도 아무도 모른다 하고 끝이 남. 이불 보따리 하나 싸놓고 아이가 둘이나 된 것 같음. 사모님은 투덜거렸고 나는 손 목사님을 그렇게 좋아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나가자 해서 나간 사람은 청년.



11. 신앙 비교

고신도 다녀 봤고 애양원 손 목사님도 봤고 순천에서 순복음 교회도 다녀 봤는데
고신은 거룩 거룩 거룩만 강조하는데 성령 운동이 없고
손 목사님은 거룩하게 구별도 했지만 그렇게 성령 운동을 강조
고신은 예배를 드리면 기도 시간에 소리도 없고 묵상만 하는데, 손 목사님은 얼마나 열정적으로 설교하는지 성령의 불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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