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완종 장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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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완종 장로님

2009/09/26 0 7 2022.03.30 13:59

일시 : 09.8.28.10:30-13:50
이름 : 유 완종 장로님  
관계 : 초기 교인



1. 신상

- 개인
1936년생(호적37년) 74세, 산곡 출신
18세에 교회 출석(53년)

- 산곡
산곡은 양반 동네라 해서 불신 경향. 그래도 순복음 교회 목사 한 분, 고신 측 허 윤채 장로님(75세, 광양 인실 교회)과 그 사촌 허 인채 교장(63세, 여수 광림 교회 장로)가 다 우리 교인들. 산곡의 유 길종 장로님은 처음부터 성암 교회이고 아버지가 옛날 영수이며 유 장로는 78세, 이 귀형 목사님이 매고를 다녀서 그때 성암 교인이었는데 부인이 고신 출신이어서 나중에 성광 교회 다니다가 서울 갔고 목사님 되고.



2. 개척

① 시기
18세(53년)에 초가집에서 예배드릴 때 출석, 출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터를 닦으며 건축 시작.

② 정 양순
- 출발
사모님이 나와서 가정 집에서 예배 볼 때 18세(53년) 교회 출석. 사모님은 원래 애양원 교회를 다니시고 애양원 밖에는 직원들 가족이나 주일 학생들 때문에 성암 교회가 작게 있었는데, 사모님이야 거리낄게 없으시니까 처음부터 막 바로 나섰고

- 장소
사모님이 나와서 예배 볼 빈 초가집을 산 것이 백 동학 집사님 집이고, 그 집에서 예배를 보면서 뒤에 지을 돌 예배당과 거리는 50-70m. 밭에 있었고 성암 교회를 다니다가 그 집에서 개척.

- 교역자
나올 때는 나는 없었고 나는 성암을 처음부터 다니지 않음. 내가 교회 출석할 때 교역자가 없었고 사모님이 예배를 인도. 그러다가 하동에서 장 목사님이 부임했을 것. 나는 처음에는 교회 열심히 출석하지 않음.

- 성격
사모님 성격은 한마디로 어린애 같아 일을 잘못하면 팍 했다가 나중에 돌아서고 그래. 서 귀덕 집사님하고 맘이 좀 안 맞았지.

- 애양원 관계
애양원과 사모님 관계는 대립이 아니다. 교인들은 안 그런 데 위에 서 현식 목사님이 사모님을 견제, 서 목사님이 공개적으로 배척은 하지 않으나 보이지 않게 압박. 애양원의 일반 교인들은 사모님을 서로 좋아서 난리들이니 애양원으로 심방도 갔고. 여수 순천 지역 다른 교회들은 노회를 지시를 받지만 과거 애양원 교회는 선교부 지시를 받는데 서 목사님은 선교부 계통에 배경이 든든하여 특별한 관계.

- 신앙
정 양순 사모님이 개척한 문제는 내가 사모님 가방 들고 심방을 많이 따라다녀서 아는 사실. 사모님은 토요일이면 심방 다니면서 헌금들 다 나눠주고 그래. 사모님 따라 다니면서 제일 불안한 것이 나환자들 촌에 가서 그 사람들 눈물 흘리면 손수건으로 닦아주고 또 자기도 닦고, 그놈 갖고 감 같은 것 따 가지고 닦아주고 먹으라고 주니까. 며칠 전에도 집에서 그런 이야기 했는데, 밥 먹으면 된장에 뽕잎 같은 것 넣어 놓았던 것 닦아 가지고 밥에 올리고.
사모님이 ‘나는 사위는 교역자 사위 안 얻는다.’ 그랬어. 사모님이 목사님 애를 많이 먹였다는 말은 질투심이 강해. 애양원 정원이 천 명인데 하나 죽으면 하나 들어오는 식으로 천 명을 맞췄는데, 들어가는 입구가 가정을 가진 환자 사는 곳이 있고, 오른 쪽 여자 병동이 있고 넘어가면 남자 병동, 목사님이 여자 병동에 가면 지금과 달리 옛날에는 막 곪아 빠졌는데 목사님이 눈물도 닦아주고 그러면 그 환자들이 자기 병든 건 생각 안 하고 목사님에게 지나침.
사모님 때문에 어려울 때는 목사님이 ‘나의 인내의 스승이다. 그 사모님이 그렇게 행해야 내 신앙이 자란다.’ 그런 말이 흔했고, 목사님이 심방을 가면 집회 다닌다고 낮에 잘 못 가니까 밤에도 심방  
옛날에는 집사님들이 사모님 집에 가서 놀리기도 했다, 환자처럼 해 가지고. 그때는 비가 오면 예수님 오신다고 교회로 다 모이고 그랬어요. 예수님이 오시면 교회로 오신다고 해서. 비가 오면 교회로 모였다. 오실까 싶어서 모이야 된다고 했다, 어느 날 비가 무지 많이 떨어지는데 막 병든 어떤 사람이 병원에 입원하려고 오는데, 차에서 내리니까 비가 오는데 성암 교회로 갔는데, ‘저쪽에 가보시오.’ 해서 성광 교회로 보낸 거야. 저녁에 사모님이 모두 자는데 그 사람 담요 덮어주고 우리도 그래 같이 있는데, 아침에 보니까 그렇게도 험한 환자를 무릎에다 눕혀 놓았다. 저녁녁에 비 맞았다고 이불을 덮어주고 ...
여자 집사들이 남자 복장을 꾸며갖고 거기를 가니까 저기 동네 사랑방으로 가라 더래요. 환자 거지 모양으로 해 가지고 가니까. 그래서 손 양원 사모님 집으로 가니까, 입원하러 와서 하룻밤 잘 수 없냐 그러니까 식모를 보면서 ‘방 비워줘라. 너는 여기 와서 자고... ’ 그러니까 집사님들이 가방이고 뭐고 내 버리고, 달아나.

- 서 귀덕
서 집사님과 차 종석 장로님은 고신을 좋아했으나, 차 장로님이 애양원 직장 문제가 워낙 크니까 장로님이 선뜻 움직이지 못했고 서 집사님은 성암 교회를 다니면서도 연보와 후원은 전부 개척 교회에 주력. 서 집사님 뿐 아니라 차 장로님도 요즘 장로들과 비교할 수 없이 자신의 신앙이 좋았음. 서 집사님이 신앙이 강하다고 해서 장로님이 따라 가는 정도가 아니고 두 분 다 신앙이 좋음. 그래도 서 집사님은 장로 2-3명 묶어놔도 못 당할 신앙과 성격. 찬송가를 불러도 ‘내 주는 강한 성이요’만 하는 정도. 교회 때문에 장로님이 직장에서 떨어져도 굴복을 하지 않음. 서 귀덕 집사님 양 아들은 충무동 교회 다녔고,

- 초기 교인
첫 예배 교인들은 공 정엽, 딸 차 상희, 서 귀덕 집사님 차 중철 조차인 차 수예, 문 숙자(김 판심 딸), 박 순애, 나머지는 몰려 다니는 청소년들. 그 청소년들은 예배당 건축 때에만 출석
여반은 정 양순 사모님, 서 귀덕 집사님, 김 판심 집사님 3사람이 주동이나 초기 서 귀덕 집사님은 교회를 맘대로 이 쪽에 오지 못하니까 헌금만 하고 직접 나오지 못했고, 정 양순 사모님은 각처로 다니면서 헌금을 구하러 다니니까 못하고 김 판심 집사님이 교회 실제 살림은 두루 했고, 청년 중에는 김 종화가 두 살 아래인데 수고했고. 개척할 때는 등도 없고 후레쉬도 없고 바닷가에서 갯돌하고 자갈을 이어 날랐는데, 그 때 교회에 10여 명 처녀들이 있었고 동네 청년들이 저녁이면 나와서 건축을 거들어 주었고, 차 병용 목사님이 백 집사님 집에서 예배 보기 전에 애양원에서도 예배를 봤을 것이며 정확하게 알 것.

- 초기 주요 교인
김 복록 장로님 : 초기 교인, 지금 성광 교회 중심. 그 땐 집사
차 병용 목사님 : 주일 학교 열심, 교회 주동, 예배 인도도 했고,
백 동학 집사님 : 성암 교회 사찰, 서 집사님이 나올 때 따라 나왔을 것. 빈 초가집 산 것이 집사님 집.
김 판심 집사님 : 그때 권찰
김 종화 조합장 : 베드로 신앙이라고 할 정도로 하면 하고 안하면 않고 시원시원. 급한 성격. 임종 전에 흩어진 개척자들이 전부 옛 교회로 모이자며 제의. 유 완종보다 나이 1-2세 위.

- 배경
총회파와 고려파가 갈라질 때 사모님 신앙은 확실히 고신 쪽. 뒤에 성광 교회에 모신 강사나 목회자들이 고려파, 옥중에서 입을 찍혀서 입이 빠진 손 명복 목사님도 오셨고.

- 성암의 압박
손 목사님 순교 후 성암에서 애양원에 있던 서현식 목사님이 사모님께 압력 행사. 애양원에서 지어 준 사택을 압수하는 등. 사모님이 신풍을 떠나야 신풍에서 고려파 운동이 줄어 드니까. 사모님이 신풍의 사택에서 부산으로 간 것은 부산 자녀들에게 가려는 것이 아니라 애양원이 사택을 압수했지. 강력하게 압력. 서 목사님은 손 목사님을 생각해서 그럴 사이가 아닌데. 서 목사님 사모님이 선교부 계통으로 배경이 좋았고 서 목사님은 어렵게 자랐고 사모님은 입술에 큰 상처.
서 목사님이 여수에서 개척을 많이 했다고 말들 해도 서 목사님에 대한 인상은 안 좋음. 하여튼 압력이 상당히 강했어. 교회뿐 아니라 정 양순 사모님 개인에게도. 물론 겉으로 표시는 나지 않게 했지. 처음에는 손 목사님 돌아가시고 사택까지 마련해 드렸는데. 애양원에서 애양원 사택이므로 그걸 비워 주면 부산에 사택을 사준다고 했고 목사님 묘지도 부산에다 옮겨 줄 수 있다는 말까지 있었어.

- 건축
* 안 재선 : 예배당 건축 때 나무는 안 재선이 순천 원천 제제소에서 제공. 그 집에 무슨 관계.
* 목수 : 어떤 정신 없는 사람이 가정 불화가 났는지 옛날 군인 가방 같은 데 목수 연장을 넣고 정처 없이 돌다가 교회에 예배를 보러 들어 왔다가 목수 일을 맡음. 보수를 보고 한 것이 아님.
* 기간 : 교회 건축은 성암 교회보다 성광이 먼저 시작. 성암은 1 년만에 완공하고 성광은 뒤에 완공.
* 비용 : 초가집에서 예배를 보며 사모님이 모금 운동을 해 오면 조금씩 건축을 늘려 3년만에 완공.
* 자재 : 돌은 달섬에서 깨어 나름.
* 방해 : 성암에서 성광 건축을 무조건 방해할 때인데 우리가 건축에 필요하여 불러 놓은 석주를 저쪽에서 돈을 더 주고 데려 가니까 그 밑에 사람들도 성암으로 일하러 감.
* 봉사 : 낮에는 자기 일을 하고 밤에 나와서 일을 하니까 안 믿는 청년들이 모두 나와서 일을 했고, 나는 안 믿는 가정이고 신앙도 없었으나 밤에 예배당 짓느라고 낮에는 밥상 앞에서 기도하다 졸아서 엎어진 정도. 지금도 어디 가서 이야기를 해도 하나님이 일하려 하시면 하나님이 쓰신다고 확신있게 증거. 교회 건축이 특별하게 역사 되었다는 것에 자부심. 신앙도 없고 사람도 없는데 주위 각 동네 청년들 10여명이 나와서 예배당을 세워 놓고 원래 상태대로 갔다. 예배당 옆의 구 선모도 그 때 신앙 생활을 했고, 김 현봉 목사님 측으로 들어 가기 전쯤 떨어질 청년들은 다 떨어졌고.
* 토지 : 처음에는 구암 동네 뒤에 마을에서 땅을 비워놓았는데 예배당을 지으려 하니까 동네에서 반대를 하면서 대토를 준다고 제의를 했고 그 땅이 차 상희 작은 아버지 소유. 대토로 내놓는 땅은 곡식이 안 되는 박토이니 옥토하고 바꾸게 되었다. 그런데 예배당 터로서는 바꾼 곳이 더 좋았다. 하나님께서 석수도 불렀고 목수도 불렀고 교회 일하는 데 청년들을 동원 시켰다. 그들이 밤낮으로 일했으나 건축이 끝나니까 그 청년들은 원래 불신 상태로 돌아갔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건축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느낀다.



3. 개인 연혁

- 동기
구암에서 놀다가 자고 오는데 아침에 소나기가 쏟아졌고 의지할 곳이 없어 외따로 있는 집에 들어갔는데 마침 새벽 예배 중. 처음 나오는 사람이 새벽기도까지 나온다고 해서 환영. 서 귀덕 집사님이 김 판심 집사님에게 나를 이야기해서 그때부터 교회를 출석. 교회 출석은 전적 노력했고. 교회 출석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예배당 건축 시작.

- 타향
사모님이 신풍에 계시고 아직까지 부산으로 옮기기 전에 내가 먼저 서울로 갔다.

- 결혼
27세 결혼, 첫 아이가 교회 다니다가 서울. 불신 결혼이어서 교회 주례 때문에 하나는 세례를 받고 하나는 학습이 필요. 신부가 믿는다고 하는데 여천 상암 어디라 해서 교회를 갔으나 교적에 없어, 당회장 남 영환 목사님이 6개월 후에 하자 해서 학습 받고 결혼식을 하려 했으나, 근처에 교회가 없어. 가마 타고 장가 갈 때니까 교회 청년들이 신부 집에 가서 마당에다 예배 볼 곳을 임시 지어 가지고 거기서 박 래석 전도사님이 주례.



4. 교역자

- 하 전도사님
고신 시절에 하 전도사님인가 경상도에서 온 전도사님이 먼저 계셨는데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던지 교회 지어 놓고 아직 가마니 깔고 예배 드릴 때인데 성암 교회 예배 끝나고 집으로 가는 시간까지 기도. 1시간이고 뭐고 그렇게 오래. 대표 기도도 그렇게 오래 하시고.

- 류 우열 전도사님
그분 후에 류 우열 목사님이 오셨는데 나중에 합동측에 있다가 통합측으로 가셨는데, 교회에서 돌팔이 기자들이 아가씨들한테 편지 오고 그런다는 문제로 성광 교회를 신문에 내니 안 내니 하는 문제가 시끄럽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전도사님은 놀라서 가버리고

- 박 래석 전도사님
그 대신에 온 분이 박 래석 목사님인데 전직 경찰 출신이고 박 래석 목사님이 나보다 한 살인가 더 먹었을 거요(유 완종 36년생), 아주 젊을 때 오셨고 설교도 잘했고 대인관계를 굉장히 잘했으며 이 교부한테 많이 배우는 그런 시기. 교인 온상에서 일도 많이 도와주고 환자들이 있으면 토끼 사다가 배를 내서 잡아다 주고 그래서 지역에서는 인정을 받는 정도. 무슨 일이라도 다 잘했는데 처음에 한번 오셨다가 오래 계신 중에 건강 문제로 떠나셨던 적이 있었음,
신풍에 비행장이 들어오고 예배당 이전 때문에 돈이 나왔을 때 박 목사님은 보상금 60만원을 가지고 순천에 가정 집을 사서 남문 교회를 개척하고 나왔으나, 훗날 없어짐

- 곽 봉빈
그 후임으로 오신 곽 동빈 목사님은 피난 오신 이북 분이며 익산군 삼기면 기산 교회에 있다가 신풍 부임. 곽 목사님의 사모님이 기산 교회 노처녀로 이 교부를 따랐고, 곽 목사님이 신풍에 올 때는 독신이었다가 신풍에 와서 결혼.

- 기타
* 곽 목사님은 신풍 교회 부임 후 이 병규와 백 영희 소속 때문에 혼선.
* 박 목사님은 순천에서 남문 교회 개척해 놓고 집회를 나갔다가 병원 생활. 박 목사님이 한참 잘 나갈 때 집회를 갔다가 기도하고 예배 보시다가 쓰러져 버렸고 침을 맞으면 된다고 해 가지고 한의원인가 어딘가 가셨는데 시험 도구가 되어 입원. 뒤에 병이 좀 나았으나 갈 곳이 없으니까 곽 봉빈 목사님께 박 목사님이 다시 신풍 교회로 오겠다 하니까 승낙, 곽 목사님이 비켜 주겠다 하면서 교인들께 물으니까 다들 박 목사님이 신풍으로 오면 좋겠다 했으니 전에 잘하다 갔으니까. 당시에 내가 삼일면 증흥 처가에 있는데 거기 무슨 일이 있어 그 곳에 있었는데 박 목사님과 곽 목사님이 함께 와서 교인이 다 동의하는데 집사님만 승낙하면 성광 교회로 다시 오겠다고 했고, 나는 목회자가 오고 가는 것은 교인을 위해서 결정해야 하는데 목회자의 몸이 안 좋다고 오는 것은 안 된다. 목사님 생활비를 내가 보태주는 한이 있어도 안 된다 해서 거절. 그 후로는 몰라.
* 손 활인 조사님
손 활인 전도사님이 오셨을 때, 내가 교회를 다닌 기억은 확실하고, 그 분은 성암 교회가 아니고 성광 교회 목회자였고, 그분이 오실 때는 가정집에 있었을 때며 목회자가 없었을 때 오신 것. 박 목사님이 성광 교회에 오신 것은 상당히 뒤에 왔고. 박 래석 목사님은 4번째 정도로 기억. 박 목사님 앞에 있었던 박 창호 목사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 전체적으로
손 목사님 사모님이 개척을 위해 완전히 따로 나와서 예배를 드릴 때 어떤 분이 한 분 왔다가고 그 뒤에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박 래석. 첫 번째가 이 진석이든가? 그 분은 신학생은 아니고 어디서 잘 믿는 집사님이 전도사로 왔던 것이고, 그 뒤가 류 우열, 네 번째 오신 정도가 박 래석 목사님. 그분이 오셨을 때는 이미 예배당을 많이 지었을 때. (사진을 보면서는 얼굴 확인) 손 활인 목사님은 여수 충무동 교회에 계시지 않았던가? 곽 봉빈 목사님 뒤로는 내가 이미 박 래석 목사님하고 개척을 나갔으니까 모르고.



5. 집회

- 백 영희
하 전도사님 시절에 백 목사님이 집회 온 기억. 백 목사님이 애양원에 따로 집회 오셨다는 것은 말만 들어 기억이 있고 당시는 건성으로 다녔기 때문에 애양원 집회에는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성광 교회에서도 별도 집회 인도한 기억이 틀림 없고 조사님 시절로 기억하며 성광 교회가 초가 시절은 아닌 것 같고. 설교 때 원고는 아니고 메모지 비슷하게 몇 자 써서 한문 풀이 식으로 했고, 그때 젊었을 때 하신 걸 한번 봤어. 나중에 목사님들 잘못을 지적한 것 때문에 제명 당했다는 말을 들었고 그래서 목사 안수를 할 때 교단에서 안 해 줘서 목사 5인이라야 되니까 김 현봉 목사님과 그 계열에서 안수 받는다고 했음.

- 김 현봉
김 현봉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분이지만 성광 교회는 이 교부가 박 래석 목사님과 전북 동향이어서 백이 좋았으므로 자주 집회

- 이 교부
신풍 교회 옆에 여풍 식당이 원래 교회 사택이었는데 이 교부가 와서 직접 건축한 정도.  머리는 비상한데 결국 여자들 때문에 그렇게 됨. 박 래석 목사님과 같은 전북 출신인데 이상하게 그리 된 것. 부인이 신풍 교인.

손 목사님 사모님도 부산에 계실 때 삼각산 기도원 같은 데에서 만남. 사모님이 이 병규 목사님 집회도 오심.



6. 소속

- 고려파
처음에 고신으로 출발. 1957년 입대하기 전에는 고려파였고 61년 제대 후 한참 지난 뒤에 박 래석 전도사님 삭발. 김 현봉 목사님의 신풍 집회 인도가 지난 한참 뒤.

- 김 현봉
박 래석 목사님 인연으로 교회가 이 교부 쪽으로 연결을 많이 가지면서 김 현봉 목사님 교회로 소속이 되었는데 교인들은 교회의 소속 변경을 잘 몰라

- 이 병규
1965년 김 현봉 사후에 이 교부를 거쳐 이 병규 목사님의 계신측으로 소속

- 백 영희
1974년에 소속 확정



7. 계신과 공회

- 분리
신풍과 성광으로 분리할 때는 나는 다른 교회를 다녔는데 고향 이야기니까 뒤에 들었고 차 상희 엄마가 주장을 했다고 들었고, 서 귀덕 서 천석 서씨 집안들 유 종선 백 인천 집사님 이 분들도 다 마찬가지 입장으로 들었고.  

- 서 천석
서 천석은 청주서 목회한다 했는데, 그 집이 처음에는 아현 교회 김 현봉 목사님에게 갔을 것. 그 아들도 목사 되고. 둘 다 이 교부를 좋아했어. 상사의 최 정호 집사도 이 교부를 좋아했고 이 병규 계통에 있다가 나중에 백 목사님 계통. 남문 교회와 최 정호 집사님은 직접 상관은 없으나 그도 이 교부 박 래석 이 병규 목사님을 보따리 싸 다니면서 따라 다님. 매주 부산 백 목사님한테 다닐 때 최 집사가 다님.

- 차 요한
차 요한 목사님이 순천에 개척 나온 박 래석 목사님이 집회 갔다가 병이 나자 이 병규 목사님이 그를 보내서 남문 교회를 임시 맡았는데, 남문 교인들에게 투표를 해서 서부 교회 가기로 결정하고 서부 교회로 교회가 넘어감.
분쟁이 있었고 교회 위치는 순고 5거리 바로 위쪽이며 신풍 비행장 보상비 60만원으로 신풍 출신 남 재호씨 집을 구입한 남문 교회 개척. 처음 개척할 때 교인들은 이 병규 목사님을 모르는 사람들이고 다른 교회가 맞지 않아서 나온 사람들도 왔고, 차 목사님을 따라 공회로 간 사람들은 갔고.
남문 교인 딸 중에 여수로 출가해서 박 은석 목사님 교회를 다닌 경우가 있었는데 박 은석 목사님은 뒤에 충청도 쪽으로 갔다는 소리를 들었고, 박 은석 목사님과는 자주 만나고 같이 통하는 사이.
남문 교회가 넘어 갈 때는 재판까진 안했지만 싸울 때 차 요한 목사님이 반대 쪽을 나가라 하고 대문을 잠그면서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만 들어오게 했고 반대한 사람은 못 들어오게 막아 버려서, 내가 불 집게로 쓰는 연탄집게를 가지고 대문을 틀어서 들어 갔는데 기물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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