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09.8.31. 10:30-13:10
이름 : 차 병용, 화순, 합동 교단 은퇴 목사님
관계 : 개척 초기부터 주일 학교 반사로 충성
1. 신상
1934년, 76세, 초등 8세 입학
1945년, 12세, 초등 3학년에 해방
1946년, 13세, 초등 4학년에 교회 첫 출석
1947년, 14세, 초등 5학년에 신앙 크게 열심
1948년, 15세, 초등 6학년에 반란 사건
신산 서당 1년
1950년, 17세, 6.25 전쟁
1952년, 19세, 부산 성경 학교 1년
순천 성경 학교 2학년
서울 개혁 신학교
1956년, 2월 입대
1959년, 4월 제대
2. 교회 출석
손 동장이 2세 아래인데 초등 4학년 때 율촌 초등 학교에서 선임 큰 아이들이 괴롭힐 때 나는 키가 크고 학년이 위였으므로 율촌 초등 학교에서 막아 준 일이 있었고 그때 동장에게 누구냐고 물으니까 신풍이라고 해서 똑똑히 보면서 신풍 어디냐니까 애양원 목사님 아들이라 해서 앞으로 말려 주겠다고 말했는데, 집에 가서 사모님께 형이 말리고 날 친하게 지나자 했다 하니까 정 사모님이 당장에 데려 오라 해서 뒷날 학교에서 만나서 학교 끝나고 사택으로 갔고, 사모님이 잘해 주시고 전도를 해서 교회를 다니고 나는 집이 너무 가난해서 사택에 늘 가서 사는 정도.
3. 가정 형편
본가는 학서에 있었고 신풍 역에서 등을 넘어 동네로 들어오면 첫 집이고 부친이 대나무로 챙이를 만들었으므로 대밭이 100평 정도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건들이거나 뭐라 할 때는 삿갓쟁이라고 별명.
4. 애양원
- 사택
애양원 밖에는 애양원 사택 3채가 있는데, 차 과장님 집과 원장 의사 집과 목사님 사택. 목사님 사택이 첫 집, 그 위에 과장 댁 전부가 애양원 사택. 손 목사님 사후에는 사택을 서 현식 후임 목사님께 내 드리고 원래 사택에서 애양원 쪽으로 조금 이동하여 지은 집에 거주.
- 애양원 시절
애양원 안에 교회는 환자 교회였고 애양원 밖의 성암 교회는 직원 중심. 직원들은 차 면장이 당시 애양원에 서기, 유 서기, 신씨 운전사, 조수 김 윤선 등 5-6명 가정이 예배. 밖에서 예배를 드리기 전까지는 원래 직원들이나 외부에서 믿는 몇 사람들이 애양원 안에 들어 가서 예배를 드렸고 당시에는 애양원 예배당 강단 바로 뒤에 직원용 별도 좌석 공간. 건물 안에 보통의 장의자 2줄. 직원 외에는 차 병용, 닭머리 문숙자 어머니, 차 중철 의사 큰집 조카 차 수애 정도가 주일 예배에만 참석. 애양원에는 당시 철조망이 있어 출입 통제, 나는 통과.
4. 손 양원 목사님
목사님 계실 때, 토 요일이면 부흥회를 마치고 기차로 오시니까 역에 마중 나가고 월 요일에는 가방을 가지고 역까지 모신다. 나는 가방을 들어 드리고. 어떤 때는 애양원 트럭이 있어 역까지만 모실 때가 있으며 손 목사님은 한 주간도 애양원에 계신 적은 없다,
직접 마주칠 일이 별로 없는데도 교인들이 그분을 따르는 것은, 그때 환자들이 결혼식을 하면 목사님은 환자들하고 음식도 꼭 같이 먹는데, 일반 가정집에서 하듯 한다. 행위의 은혜, 말씀의 은혜는 지금까지도 손목사님 은혜 같은 은혜는 없다, 나도 손목사님 타입으로 설교하려 했는데, 목사님의 설교 메모를 보면 드문 드문 메모만 하고 원고를 읽고 보고 하지 않는다, 내가 본 5년이 그러했다,
5. 정 양순 사모님
손 목사님 생전의 사택은 당시 차 병용은 보리밥도 못 먹고 살았는데 그 당시에도 소고기 다리를 부엌에 걸어 놓은 정도. 냉장고가 없으니 걸어 놓았는데 그런 모습은 처음. 일반 가정은 소고기를 보지도 못할 때인데 사택에 가면 맛있는 음식도 주고, 구제품이 나올 때였는데 우리는 무명베 떨어진 옷 입는데 좋은 옷도 주셨고, 사모님께 사로잡힘. 배 고프면 늘 오라 해서 동장이와 같이 자고 학교도 같이 가도록 함.
6. 성암 교회
- 예배당
일제 식민지 시절에는 애양원 앞의 부락에 예배당이 있었는데 붉은 도단 예배당. 그 예배당은 어릴 때 없어졌고, 해방 후 교회를 가게 될 때는 차 과장님 하고 손 목사님 둘이 의논해서 새 예배당 마련. 예배당은 마을에 묵어 있던 동청이 위에는 짚으로 잇고 목재 5칸 집. 예배당을 마련하기 전에 서 현식 목사님이 애양원에 전도사로 먼저 부임했고 그 곳에서 강도사가 되고 손 목사님 사후에는 안수를 받아 애양원 후임. 동청에서 예배 드린 것이 1년도 채 되지 못해서 손 목사님 순교하고, 서 목사님이 애양원 후임이 되자 사모님이 성암 교회를 유지하지 못해서 폐쇄.
- 주교 시작
서 전도사님이 애양원 부목으로 부임 후 동네 밖에 예배당이 마련 되고 주일 학교가 시작 된 것. 차 병용이 당시 10여 학생들을 보통 끌고 다녔고 함께 봉사도 하자 해서 다니니까 교회 하나 마련해 줘야 하겠다고 된 것. 그래서 내게는 열쇠도 별도로 준 것. 주일 학교의 인도자는 오 정순 사모님, 차 병용은 보조. 사모님은 입이 찢어져 모두들 째보라고 했으나 찬송을 참 잘했고 순천 중앙 유치원 교사를 하셨고, 그 분이 주일 학교를 시작하자 나는 학생들을 몰고 다녔으므로 사모님을 도와 둘이서 주일 학교를 시작. 내게도 열쇠를 따로 주셔서 여닫기
7. 개척 과정
- 시작
사모님은 애양원을 다니다가 목사님 돌아 가시고 애양원에서 새 집을 지어 준 데서 살았는데 처음 몇 년은 도왔으나 고려파로 성광 교회를 개척하자 지원을 차단. 고려파와 총회가 갈라진 해에 차 병용 집 위에 있던 어느 집이 부산으로 이사를 했는데, 남자는 차씨고 부인은 부산 댁이어서 부산으로 이사를 가고 그 빈 집을 사모님이 구입하여 그 집 안을 털어서 예배 드린 것이 개척 시작. 비행장 못 가서 중간에 예배당을 돌집으로 짓고 고신파 교회를 세운 것.
개척의 시작은 사모님이 혼자 했고, 사모님은 처음부터 성암 교회를 다닌 적이 없음. 서 귀덕은 뒤에 백 영희 파로 갈 때 나왔고, 서 귀덕은 그래서 고신 측과 상관이 없고, 백 목사님 집회 후부터 따르기 시작한 것.
성암 교회에서 성광 교회의 개척이 서 귀덕의 개척이라고 말을 하는 것은 사실을 아예 모르고 하는 소리, 서 집사님은 차 장로님 때문에 아예 나서지를 못했다.
- 목회자
성암에는 손 활인 전도사를 모시고 왔고, 이 진섭 전도사님은 후임인데 하동 밑에서 장마당 장사하던 사람으로서 사명을 가지고 나왔다가 신풍을 떠나면서 하동 고향으로 가서 다시 장사한 사람, 하동에서 4키로 거리 정도인데 장사하게 되면서 오라 해서 다시 간 기억.
손 활인은 원래 크게 성공한 것으로 기억. 순천에 고신 측 장천 교회에 왔을 때 한 번 만났고, 성격이 아주 칼이었으며 아주 철두철미한 완전 고신 측 인물로 얼굴도 기억 나고, 뒤에 고신 총회장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김 진섭 조사님 후로는 고향을 나와 있었기 때문에 후임 기억이 없고
안 재선이 예배당 지을 때 순천 제재소 이야기는 들은 것 같고
예배당 지을 때 나는 달섬에서 돌을 떠서 배로 옮겼는데 내가 그 일을 거의 맡았고 일하다가 발에 때 못이 들어 간 기억.
- 개척 시기
차 병용은 초등 학교를 졸업하고 1년 동안 신산으로 서당 공부했고 그해 가을에 사모님이 부산으로 고등 성경 학교를 보냄. 성암 교회에서 개척한 시기는 사모님이 고려파로 개척하여 성암 교회로부터 갈라져 나왔기 때문에 나를 부산으로 보낸 것. 사모님이 백 영희 조사님을 좋아해서 서부 교회에 가서 배우라고 소개해서 다녔는데, 그때 전라도에서는 백 목사님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때여서 사모님에게 처음 들었음. 사모님이 고려파로 개척한다고 애양원이 차별하여 눈물 많이 흘리심. 부산에서 1년 공부할 때 피난 정부가 부산에 있고 성경 학교가 주변이어서 학생들이 부민동의 대통령 관사에 봉사 간 기억.
백 조사님은 서부 교회로 와서 일하라고 했을 만큼 나는 열심, 서부 교회를 가면 밥을 주는데 밥을 먹기 위해서도 갔고. 안 용준 목사님이 계셨는데 너무 잘해 주셔서 고마웠고 차 종석 장로님이 부산에 학교를 오면 찾아 와서 학비도 주고 또 선교사들에게 이야기를 해 줘서 선교사들이 무료 식사권도 줌.
- 순천 성경 학교
부산에서 순천 성경 고등 학교로 옮겨 2학년에 들어 가서 1년 공부, 이 시기에는 순천서 공부를 하면서 주일에는 신풍으로 와서 사모님 개척한 초가 집에서 반사. 순천 성경 학교에는 차 남진 목사님이 계셨는데 유명 인물(성악가, 총신 교수 등). 그 분의 첫 딸이 애양원의 유 서기 부인. 순천에서 1년 공부한 후
- 사택 형편
사모님 딸들은 부산에서 공부했고, 명 향식 여자 부흥사가 동희에게 피아노를 사 줬고 셋째 딸은 전적으로 배우고, 둘째 딸은 사범학교를 나와서 중학교 교사했을 것이고, 셋째도 피아노를 생활하도록 사 줬는데 명 부흥사가 도움.
- 정 양순과 서 귀덕
정 양순 사모님을 따라 서 귀덕 집사님도 고려파로 개척을 하고 싶은데 남편 차 과장님이 애양원 안에 있어 어려움. 결국 부인이 고려파라 해서 차 장로님은 직책이 떨어졌고 백 목사님이 부산에 어디 취직을 시켰는데 처음에는 안 갈 것처럼 하다가 뒤에 취직은 했으나 일체 비밀로 했었고 서 집사님도 비밀적이어서 밖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 후 성암 교회에서 다시 불러서 애양원 일은 그만 둬도 성암 교회 장로님 복귀. 서 집사님이 완전히 백 목사님을 따르게 된 것은 백 목사님이 집회를 한 뒤.
- 신풍과 백 영희
성광 교회 개척 시기에 직접 집회 온 기억 있고, 애양원 교회에도 집회 온 기억이 따로 있음. 애양원에 백 영희를 집회 소개한 사람이 바로 사모님이었는데 당회는 입장이 그렇지만 교인들과는 사모님이 친밀.
- 애양원과 사모님
애양원 식구들 중에서는 사모님하고 밤10시가 넘으면 권사 집사님들이 와서 나 모르게 저 한 쪽에서 밤새도록 3-4시간씩 교회 문제로 이야기. 교회 문제로 늘 눈물 흘리고 그렇게 했다. 그 때부터 사모님은 애양원에서 뭐 안 줘도 산다 이렇게 각오를 했다, 명 현식 여사도 애양원 부흥회를 왔다가 사모님 형편을 알게 되어 딸들을 돕게 된 것.
- 개척과 서 현식
손 목사님 사후 성암 교회는 서 현식 조사님이 애양원 당회장이 되니까 성암 교회를 바로 예배당으로 출발시키고 직원들이 밖에서 예배 드리게 했는데 처음 몇 번은 사모님과 나도 성암 교회를 다녔는데, 차 장로님 부친 장례 때는 내가 좀 컸기 때문에 상여 맨 기억.
- 개척 교인들
계란 장사한 백 동학 집사님은 나이는 훨씬 많았고 사람이 그렇게 진실했고 애양원 손 양원 사모님 때문에 연결되어 왔는데, 애양원에서 계란을 주지 못하게 하니까 한 몇 년 하다가 여수로 갔다가 그 뒤에 서울로 이사하여 서울에서 한번 만난 기억.
- 훗날
신풍에 뒤에 온 박 래석 목사님은 백 목사님도 잘 알지만 김 현봉 목사님으로 소속. 뒤에 보니까 박 목사님은 김 목사님 쪽으로 갔고 정 양순 사모님과 서 귀덕 집사님은 백 목사님으로 머리를 돌림.
김 현봉 목사님은 성광 교회 시절에 매년 집회를 오심. 교회 소속이 고신과 총회가 다시 합할 때 김 현봉으로 갔다면 추리가 맞을 것. 박 래석이 신풍에서 병이 낫는데 서울로 데려 가서 치료 시킴. 그 때는 내가 목회할 때인데 와서 보면 박 목사님이 달섬에 기도 굴을 만들어 놓고 금식 기도를 많이 하다가 머리에 이상. 그 계통에서 다른 사람이 따라 가지 못할 만큼 열심이었고, 머리가 잘못 된 다음에는 정신이 없어 멍했고, 김 현봉의 제일 측근인 이 교부는 우리 교인과 결혼했고 부부 관계는 없었고, 그도 신풍 집회. 이 교부가 신풍을 잘 알게 된 것은 박 래석 목사님과 고향
8. 객지 생활
- 서울 개혁 신학교
집이 워낙 어려워서 돈을 벌러 서울. 아버지는 죽고 형님은 징용, 동생도 남의 집 살고 혼자서 어쩔 수 없어 서울로 간 김에 종암동에서 개혁 신학. 훗날 개혁 신학교.
- 입대
군 입대하고 본대에 막 가니까 제대라는 소리 나옴. 당시 전쟁 때문에 제대가 없다가 06 군번부터 제대하던 시기. 군번이 9977... 3년 좀 더했고 26세 제대. 제대 1년 전에 신풍 왔다가 그때 박 래석 목사님과 최 은조 전도사님이 좋은 처녀니 앞으로 목회할 수 있다며 권했고, 논산 훈련소 경비대 대장이 예수 믿고 잘 알고 그 집 조카와 학교 같이 다닌 연고로 결혼 가능. 원래 전방에 배치를 받았는데 당시 이모가 잘 아는 법사위원 순천사람 윤 씨가 휴가를 가니까 이모 집에 와 있는데 어디 있는지를 물어 본 뒤 후방으로 부른 것. 전방에서도 수송관과 보좌관이 예수를 믿는데 날 보고 설교를 해 달라 했고 군종도 부산 고려 성경 선배여서 잘 있었는데 후방. 훈련소에서 조교 될까 해서 걱정을 했는데 경비 대장이 물어서 정보처를 원하자 그곳에 보내줘서 정보처에서 제대. 군에서 하사였는데 제대 때 정책 때문에 상병으로 강등 되어 제대.
- 결혼
결혼은 1958년 25 세였고 복산 교회에서 주례는 남 영환 목사님.
- 제대 후
제대하고 왔을 때, 조카 되는 사람이 아주 머리 좋고 영리한 청년인데 ‘삼촌 우리 둘이 배 하나 사서 사업을 해 보자’고 하는데 처가인 복산으로 갔고, 처의 오빠가 서 동연 장로님, 그 곳에 가니까 사촌 되는 처남이 돈 5만원만 된다고 했는데 당시 그 돈으로 산 배는 쓰지도 못할 작고 낡은 배. 그 배를 타고 화양면에서 복산리 대곡으로 돌아서 여수항을 통해 신풍으로 와야 하는데 음력 8월 13일, 추석 2일 전에 사라호 태풍을 그 바다에서 만났는데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돛이고 노고 다 떠내려가고 물 퍼내는 양은 솥 하나만 있었는데, 그 것으로 물을 퍼내면서 태풍을 통과하여 화양면 멸치 많이 잡는 고진 앞으로 들어오니까, 막 그 큰 바람이 잠깐 쉬는 날인데, 다른 배들은 굵은 로프로 다 묶어놓고 있는데 작은 배가 험하게 들어오니까 모두 귀신이 들어 온다고 하여 겁을 먹고 보고 있었음. 무사히 들어왔다. 그때 여수 만성리 바다 옆 터널 철로 너머로 큰 배가 육지로 올라 와 있던 사라호 태풍. 그런데 내가 가는 배 길의 주변은 하나님께서 잔잔하게 인도해서 들어 온 것. 그때 나는 기도하기를 ‘날 살려 주십시오, 바람이 불어 고기를 못 잡습니다.’ 했는데 하나님 인도로 고향으로 들어왔다. 고향에서는 내 시체를 찾아 여수로 어디로 찾다가 들어왔다, 들어 온 바로 그 뒷날 미평 역전 교회가 났다며 박 래석 목사님이 말해서 부임.
- 미평 역전 교회
방 하나 있고 일제 때 도단 지붕 밑에 사람 3-4명 예배 드리는 곳. 지금 아파트 된 곳에 나무들로 예배당을 지었고, 현재는 미평 밑의 큰 교회가 위로 이전. 미평 교회 위에 있는 교회. 미평 3년 시절에 고려파와 총회가 합동을 했고, 광양 이동.
미평 목회 시기에 성광 교회에 김 현봉 목사님 집회 와서 참석.
- 신황리 교회
미평에서 3년 있다가, 광양 진상 신황리 교회 부임하고 1년도 못되어 환원이 되어 나는 순천 노회 잔류하여 합동파.
- 백야 교회
화양면의 백야도에서 2-3년
- 낙성 교회
벌교의 낙성 교회로 가니까, 광양에서 갈라진 것처럼 벌교도 통합과 합동이 나뉘는데 합동은 교인이 작고 나와서 개척하고, 작은 집에 있었는데, 그 곳을 애양원이 인연이 있다고 해서 애양원 사람들이 벽돌을 찍어도 주고 애양원에 최고 기술자가 와서 그 교회를 지어 준 것. 교단은 합동과 애양원 측 통합이지만 개인 인연으로 지어준 것, 낙성 교회 지금 5-600명, 그 곳에서 4-5년 근무한 뒤 다시 합동을 시켜 놓고 내가 나와야 새 교역자를 모실 수 있으니까 사임
- 봉양 교회
돌산의 봉양 교회로 왔는데 당시 60년 역사였고, 봉양에서 2층 큰 교회 짓고
- 두라 교회
여천군의 남면에 두라 교회를 거쳐
- 백호 교회
함평에 백호 교회를 맡고
- 동부 교회
영광에서 동부교회를 맡고 은퇴
9. 기타
- 사모님 신앙 전환
원래 사모님 성격이 강하고 신앙이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천사처럼 보지만 목사님 돌아 가시고 두 아들 그렇게 되고 동장이도 그렇게 되니까 진짜 하나님이 계시면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나 하여 기가 막히고 원망 불평하던 어느 날 아침, 사택에서 자고 일어난 차병용이 동쪽을 보니까 아직 해가 뜰 때가 아닌데 달이 15일 보름 달 떠는 것처럼 뜨면서 동인이가 나타나서 즉시 쫓아가서 사모님을 얼른 불렀다. 보자 말자 사모님은 날 보고 예수님이 오신다 하면서 정신 차리라고 했는데 그리고 나니까 동인이 뒤에 동신이도 나타나면서 그 순간 그 해는 예수님으로 변하고 두 아들의 발 아래쪽으로 달이 뜨고 두 아들이 붙들고 있는데 예수님이 손을 들어 사모님을 향해 축복하는 것을 사모님과 나하고 둘이 봤는데, 그 광경을 보라고 옆에 있는 원장 집을 향해 불러 대니까 한국 원장의 아들 정식이가 나하고 같은 또래인데 그 집의 부엌에서 서서 봤고, 뒤에 애양원에서도 다섯 집이 함께 봤다고 들었다. 그 때 동장이가 함께 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후부터 사모님은 과거 신앙을 되찾고 담대히 고신을 개척, 사모님이 개척한 것을 그래서 기억. 애양원에서는 보조를 끊어도 사모님은 내가 애양원에서 안 줘도 내가 주를 위해 죽으련다 하면서 모든 것이 이전으로 돌아 가면서 완전히 바뀌었고 불꽃같이 되어 주여 주여 하고 힘 있게 다님. 그 때 그 모습은 환상이 아님. 내가 혹시 환상인가 해서 다리를 때려 봤고, 내 육안으로 본 것.
- 동장이
신앙 생활을 하지 않았고
- 사모님
부산으로 가신 후에는 다시는 안부를 못 들었고 돌아 가실 때도 몰랐고, 전쟁 때 부산에서 공부하던 시기에 안 용준 목사님이 앞으로 사모님이 부산으로 올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서 알고는 있었다.
- 백 영희
백 목사님에 대해서는, 내가 알기로 고신 측에서 강도사 시취를 시키지 않았는데 고신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그래서 오래 동안 조사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