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회의, 교역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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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회의, 교역자회의

2014.11.06 0 3 2022.06.20 16:04

교회의 회의운영

1.행정 중심의 회의를 구원 중심의 목회회의로 운영
 백영희목사님은 교회의 행정처리, 후배 교역자 양성 등에 대하여 아주 독보적인 모습을 가졌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교단적으로는 교역자회이며 개교회적으로는 권찰회 운영이었다.
공회적으로는 교역자회를 통하여 목회자가 목회에 필요한 공부, 연구, 의논으로 운영하였고 개교회적으로는 심방 전도 교육의 직책을 가진 주일학교 교사인 반사, 구역장인 권찰, 기타 설교 등을 맡은 교인들이 그런 목회적 차원의 의논을 위해 교회회의를 주로 하였다. 그대신  일반 교회에서 체계화가 된 일반 행정중심의 회의는 거의 존재하지를 않았다.
 즉, 인간 구원을 위한 회의, 모든 교회의 관심과 의논 활동은 어떻게 해야 사람을 바로 믿도록 만들 수 있으며, 그럴 수 있는 자신들이 되겠는가? 이 면을 두고 선생으로서 후배 교역자를 가르쳤고, 목회자로서 일반 교인들을 상대하였다. 따라서 행정 절차 중심의 일반 교회와는 달리 의견 대립, 파벌 조성, 이권 오해 등은 거의 전무하였고 이런 방향이 주일학교의 대성공으로 또 초대교회가 재현된 듯한 교회 일반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2.교역자회
 목회자를 양성하고 또 목회적 의논을 중심으로 운영된 교역자회
1)목회자 양성과정에 필수적이었던 교역자회
①목회를 하면서 신학을 공부하는 방법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이론과 실습이 있다. 신학교에서 신학자들이 이론을 먼저 가르치고, 전도사로서 교회 현장을 실습케 한 다음, 정식 교역자인 목사로 임명을 하여 목회를 맡기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이론과 실습을 생략하고 바로 전임 목회를 하면서 이론 공부를 동반하는 경우이다.
 초대교회와 그후 교회내의 새로운 부흥운동이 일어날 때는 거의가 후자의 방법으로 후배를 길렀고, 부흥운동이 성공을 하여 교회가 안정되고 그 힘을 더해가게 되면 예외없이 전자의 방법을 택하여 온 것이 교회역사이다. 이는 두 번째 방법을 목회자 양성의 정상적인 방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 방법으로 목회자를 양성할 능력이나 여건이 미비한 경우 과도기 또는 임시적 방법으로 사용하는 정도이다. 현재와 같이 교회의 경제나 교수 인력이 넘쳐나는 경우는 단일 교회로 출발하는 교단 또는 새로운 형태의 복음운동들이 그 시작부터 신학교의 기본을 갖추는 정도이다. 즉 목회자를 양성하는 방법은 오직 이론, 실습 후 현장 사역이라는 단선만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목회자가 할 일 중에 성경 가르침은 성경과 기도로 본인이 전적 할 일이지 신학교의 학설을 배울 성질이 아니다. 물론 참고는 해야 하고 이런 경우는 얼마든지 목회와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목회자가 할 일 중에 교인을 돌보는 것은 신학의 이론과는 더욱 거리가 먼 것이다. 경험 많은 선배의 지도를 받을 수는 있지만 공부로 먼저 듣고 배운 다음 목회 도중에 기억해서 사용하는 것보다, 목회를 하면서 부딪히는 실제를 가지고 지도를 받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목회와 신학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백목사님은 주일학교 교사인 반사를 양육하여 세계최대로 불리운 주일학교를 운영할 때, 특별한 반사 교육 프로그램은 전무하였다. 제일 모범적인 반사에게 시작하는 반사를 붙여 놓으면 따라 다니면서 저절로 배우게 되고 동시에 전도하며 자기가 인도한 학생은 처음부터 바로 가르친다. 5명의 학생을 맡을 정도가 되었을 때는 반사로 임명을 하지만 실제 반사 노릇은 그 이전부터 하고 있었다. 목회자를 기를 때도 바로 목회를 맡겨놓고 말씀은 본인의 기도와 연구로 행정은 사안별로 지도하며 바로 목회자를 길러갔고 그렇게 100여교회와 교역자를 기른 것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교단이 된 것이다.

②목회현장에서 평생을 배우자는 뜻
 신학교를 졸업했다는 뜻은 목사로 이제 출발할 최소의 기본 소양을 쌓았다는 뜻이 옳을 것인데, 신학교를 졸업했다는 의미를 이제 목사의 충분조건을 가지고 써먹기만 하면 된다는 인식이 베어 있어 배움의 종료로 신학교를 졸업한 많은 목회자들이 평생에 선생노릇만 하게 되지 학생의 입장을 잊어 버리는 것이 목회자에 관련된 많은 모순의 근본 원인이라고 본다.
 왜 신학교 7년 과정을 먼저 밟도록 하지 않고 목회자로 출발부터 시키는가? 쉽게 말하면 신학 7년 과정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평생의 목회 전부를 늘 학생의 자세로 배워 나가고 자기를 고쳐 나가야 되는 진정한 평생 신학생의 신분을 내적으로 가지자는 것이다. 신학 7년에서 배울 기초 소양도 현장 목회를 하면서 배우게 되면 산 지식이 되고 또한 실제적이며 더 효율있게 배우게 될 수 밖에 없다는 신앙에서이다. 평생 배워 나갈 목회의 선생으로서 백영희목사님, 그와 함께 했던 것이 교역자회이다.
 늙어갈수록 더욱 교회가 생동으로 넘치고 한 교회 평생을 설교해도 교인들은 더 은혜를 받게 되며 가장 좁은 신앙의 보수노선을 주장하는데도 교회의 부흥은 가속화되는 목회, 성경 한 권만을 가지고 성경 한권 밖을 넘어 소개하는 일이 없는데도 신학이 들어있는 설교, 인간적인 테크닉을 전부 배제하고 인간적인 사은품 제공을 하지 않는데도 교인이 교회 안으로 빨려들어오게 되는 진정한 목회란 과연 가능할 것인가? 아무리 권위있는 목회자들이라도 전성기가 있고 그 나이를 넘어서면서 은퇴로 이어져야 하는 신앙의 노쇠기가 있는데 모세와 같이 마지막 죽을 때까지 갈수록 밝아지고 더욱 충전해가는 목회자가 있겠는가?
 자기 자신이 죽는 날까지 배우고 고치는 자기 십자가에 매진했던 백영희목사님, 그에게서 시각으로까지 확인할 수 있는 산 목회, 참 목회를 본 사람마다 신학교의 목사 소양교육 7년 대신 그를 바로 찾아 그의 지도를 따라 평생 배우고 평생 고치는 평생 신학생의 자세를 가지는 목회자로 출발하겠다고 모이게 된 것이, 또 그렇게 목회를 시작하라고 지도한 것이 백영희목사님의 교역자 양성 방침이었다.

 신학의 과정을 목회와 동시에 밟도록 하게 됨으로 많은 후배 교역자들이 목회 도중에 느끼는 것이 과연 어떻게 백목사님은 성경을 깨달으며 어떻게 설교를 준비하여 하나님이 기뻐하는 목회를 하고 있는가? 또한 교회와 교인의 여러 사안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궁금하게 되었고 또 양육하여 파송한 지도 입장에서는 한번씩 불러 동시에 가르치기도 하고 연구도 하게 되는 모임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곳은 여기에 해당되는 교역자가 주로 모이게 되어 교역자회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신학교와 다른 것은 목회를 가상으로 준비하는 것이 신학교라면 교역자회는 이미 목회에 나온 사람들이 목회에 대한 실제 상황에서 마주 앉는 것이다. 그 분위기 그 실제성이 신학교의 강의실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연경과 기도로 설교를 준비하면 된다고 알았지만 실제로 해 보고나서 다시 가지게 된 의문은 안되더라는 것이다. 자기는 잘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교인들은 반대로 은혜가 되지 않아서 괴롭다고 호소를 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다시 한번 높은 차원의 목회자 앞에 부족한 자신을 앉혀놓고 다시 한번 설교를 듣고 교인의 입장이 되어 보며, 동시에 가르치는 선생에게서 자신이 어떻게 연경과 설교를 준비하고 수행해야 하느냐는 것을 살펴볼 때 목회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교회와 교인의 구체적인 사안들 그 헤아릴 수 없는 특수하고 개별적인 사안들을 어떤 중심으로 어떻게 처리를 하는지 문의하고 그 지도를 들어보면서 진정한 목회에 힘을 얻어 자기 교회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목회자를 신학교에서 길러 자격이 되었다고 인정이 될 때 비로소 목사로 안수하고 목회를 맡기는 경우와 목회자로 출발할 사람에게 모든 현장을 다 맡긴 다음 배워가며 목회하고 목회하며 배워가도록 하는 경우 중 단연코 두 번째가 더 옳다고 믿고 30여년 이상 지속되어 온 것이 백영희목사님의 교역자회이다.

2)목회적 의논의 교역자회
 장기간 또한 전 교역자들이 평생을 배워도 끝이 없어 배우러 올 때마다 은혜가 넘치며, 돌아가면 목회에 힘을 얻어 확대 재생산 되어 온 것이 교역자회의 실체였으니 교단 전 교역자가 이렇게 한 달에 한번씩 함께 한 자리에서는 자연스럽게 교단 전체의 행정사까지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따라서 교역자회는 교역자가 자기를 고치고 배우는 겸손한 그 자세 그 자리에서 전체 공회적 의논을 하게 됨으로 회의가 가지는 많은 단점을 거의 배제시킬 수 있는 참모습의 회가 되었다. 즉 행정소모적 회의를 지양하고 복음운동 지원적 회의를 지향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교회가 바로 나가도록 힘써 볼까를 연구하고 배우며 살펴보는 것이지 그동안 이루어놓은 교회의 성과에 누가 결재권을 가지게 되고 누가 실무자가 되느냐는 등의 이권 또는 권세를 논의하는 것은 아예 배제시켜 버린다. 누가 십자가를 지며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음에 유리할까를 연구하게 되는 것이다.

 행정의 전문가들이 모여 행정의 효율성과 공정성 그리고 체계성을 완벽하게 맞추는 것이 교회의 회의 모습이어야 한다면, 우리는 사양한다. 교회의 행정이란 효율성이란 다수를 위한 소수의 묵인이 있어야 하며 공정성을 위해서는 외견적 균형이 필수적이며, 체계성이란 성문적 규정을 따라 조직의 논리가 앞서야 한다.
 이러한 모습을 갖추게 되면 이미 교회의 회의는 세상의 기관 단체의 회의와 시간문제이지 꼭 같아지게 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구원을 위한 십자가, 성령의 개별적 역사는 전부 묻히게 된다. 물론 이런 것을 강조하면 거지 움막의 비효율, 편애, 무질서한 단점들이 지적될 것이다. 인간이라 한쪽에 완벽할 수 없다면 차라리 후자에 가까운 것이 전자에 가까운 것보다는 더 복음적이며 은혜롭지 않을까? 다윗이나 모세와 같이 양쪽을 다 가진 때도 있었으나 대개의 경우 교회가 행정이 시원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면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의 모습은 그 속에서 다 묻혀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

 어디 내 놓아도 흠 잡을 때 없는 성공한 사회인으로서의 여성, 그에게 자녀가 있다면 그 가정의 내밀한 곳에는 가정으로서 빠진 것은 많게 되어 있다. 속속들이 자녀를 위한 좋은 어머니의 따뜻함을 다 가진 여성의 경우 사회적 한 인간으로 무대 위에 세워 놓으면 깔끔한 여성으로서는 부족함이 더러 보이게 되어 있다.
 교회가 처리할 행정은 최소한이 좋고 간단한 게 좋다고 단정을 한다. 교회는 복음운동을 위한 최소한의 지원 또는 보조로서의 행정이지 행정이 주가 되고 복음이 행정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은 이미 생명 없는 복음이라고 단정한다. 인간구원을 위해 편리하도록 복음운동에 협조가 되는 행정이 되어 있는 교회, 그 수는 지극히 적다.
 세상기관이나 단체는 동기나 목적은 참고할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반대로 가장 확실하게 또 분명하게 거쳐야 할 것은 바로 과정이다. 객관적으로 또 절차에 따라 바른 행정처리가 되어졌음이 전제가 되고 이것저것이 있게 된다.

3)백목사님 사후의 교역자회
①10년 투쟁의 전쟁터가 된 교역자회
 위의 2가지 목적으로 모였던 교역자회는 1989년 백목사님의 순교로 그 의미가 달라지게 되었다. 원래의 교역자회 성격을 바로 안다면 현재의 공회별 교역자회는 바로 단죄가 되어야 한다. 백목사님과 같이 후배 교역자를 가르치고 지도하여 평생 길러갈 지도적 목회자가 없기 때문이다. 전 교역자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배우는 수준의 선후배였지 지도를 하고 또는 받아야 될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목사님 생전 30여년 이상 계속된 교역자회의는 그 은혜가 교역자로 하여금 평생 목회를 할 수 있는 힘을 주었던 바, 이런 타성에 젖은 총공회 절대 다수의 교역자들은 1989년 이후에도 한 달에 한번씩 모이는 교역자회의 외형을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목사님 생전의 교역자회의 근본 성격, 참석 교역자를 상대로 목회적 지도를 할 수 있고 또 참석한 교역자들은 자발적으로 배울 것이 있어 참석하고자 전력을 다했던 내적 원인이 없어졌다. 이 상태에서 이전 교역자회의 모습만을 유지하고 참석하게 되니까 백목사님이 앉아 가르치던 그 좌석에 선임 교역자가 차례로 또는 이런 저런 이유로 앉게 되고, 앉은 이들은 백목사님이 가진 권위는 없는 상태에서 좌중의 전 교역자에게 이전같이 배우도록 지시 또는 명령을 하게 됨으로 이전 교역자회가 가진 성격의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1989년 백목사님 사후 첫 교역자회의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만 10년을 넘어서면서 총공회 소속의 각공회 교역자회는 단 한번도 이전의 목회적 모습을 보인 적은 없고, 대신 그 세월을 수십년 타 교단들이 누적시켜온 교계적 투쟁, 투쟁적 회의, 이권타협적 결론, 행정을 위한 행정행위의 모임으로 변질이 된 것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교역자회의 성격이 무엇이라는 것을 직시하는 교역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평가할 수 밖에 없다.

 눈이라도 빼 주고자 했던 사도 바울, 사도 베드로 같은 선생은 없고 바울과 베드로도 가지지 않던 교권은 행사를 하게 되는 과정에서 제작된 것이 천주교 교황제도이다. 자기가 먼저 죽고 자기가 먼저 십자가를 지며 기뻐하고 그다음 후배들에게 그 걸음을 소개하던 백목사님은 없어졌고, 그대신 그 자리에 앉은 선임 교역자들이 같은 수준으로 배우던 동급의 교역자들에게 이전 백목사님도 행사치 않던 명령과 교권을 사용하게 되면 일반 교단 이상의 분규가 발생되는 것은 너무도 환한 일이다.
 따라서 교역자회를 할수록 교역자는 더 악해지고 더 폭력적이 되어지며, 교역자회를 거듭할수록 공회의 분열은 더욱 심해졌다. 그 모든 원인이 공회의 전 교역자는 매월 교역자회로 무조건 출석을 해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이 원인이다.
 교역자회가 있으면 한 주간 전부터 받을 은혜에 사모되어 초등학교 입학생처럼 설레이며 참석하고, 한 달간의 목회현장에서 빚어진 모든 자신의 갈등이 백목사님의 설교와 목회 지도 몇 마디에 다 녹아져 버리고, 오히려 십자가의 빚진자로 겸손해진 자신을 가지고 다시 목회 현장에 돌아갔던 교역자들의 회. 모일수록 그 신앙의 힘이 한국교계의 독보적 위치로 표현할 은혜의 세계였었는데, 이제는 전 교단의 가장 무식한 회의법, 무례한 운영법이라고 지적을 받으며 심지어 뒷골목의 소규모 조폭수준의 행동대로 변모된 오늘의 교역자회가 되어버렸다.

②목회중심의 교역자회로 회개, 회귀할 필요성
 지도할 위치가 있고 좋아서 배우러 올 수 있는 목회적 회의로 모일 수가 없다면 회의는 안할수록 짧을수록 없을수록 좋다는 것이 백목사님의 평생 신앙지도였다. 모여서 말이 오고 가면 인간속에 감정은 깊이 새겨지고 이성은 뒤로 숨게 되어 보이지 않는 균열의 시작이 자리잡게 되어 있다.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구원 중심의 교회회 모습과는 정반대로 가게 된다.
 현재 총공회 교역자들의 역량은 백목사님을 대신할 위치에 근접한 이가 전혀 없다. 이런 상태에서 모이는 교역자회는 조폭의 계보 단합대회가 되던지 아니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터일 수밖에 없다. 총공회는 개교회주의이기 때문에 교회간 회의를 위해 함께 만날 필요는 거의 없는 노선이다. 배울 사람이 좋아서 자원하여 찾아가게 되는 모임은 목회적 성격의 회이기 때문에 총공회 노선적이다. 그러나 제도와 관습이 원치 않게 회의를 반복케 하여 참석하는 행정적 회의는 총공회 교역자회 10년이 그 실상이며, 수백개로 나뉜 한국교회의 분열상이 그 배경이다.
 총공회 회의록 제1회부터 반복적으로 강조했던 교회의 개교회주의 선상에서 오늘의 교역자회를 다시 인식하여, 목회적 모임의 교역자회가 되기를 소망하고 현재는 모이기를 극단적으로 조심하며 백목사님을 백목사님으로 만들었던 동력, 즉 주위 모든 이들이 인간으로 만나는 교회 행정에 분주할 때, 홀로 덕유산 산중으로 찾아 들어가서 고요한 중에 계시는 주님을 각자 만나야 한다. 이 일에 시간과 정신, 모든 활동을 집중하게 되면, 좋은 복음 바른 노선을 기뻐하는 하나님께서 장차 이전과 같은 모습의 교역자회를 다시 허락하실는지 기대라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3.권찰회

1.서부교회의 결정기관
1)권찰회
①목회현장에 책임자들로 교회의 결정 주체가 되게 한다.
 서부교회의 모든 결정은 원칙적으로 권찰회의에서 이루어진다. 각 교인들을 책임진 구역장들의 모임을 가진 중요하게 평가한다. 교인을 전도하고 교인을 현장에서 길러가는 그 책임자들의 의논이라야 교회가 행정제일주의로 나가지 않게 되고, 오히려 구원중심의 복음기관다운 운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부교회의 가장 중심적인 교인은 전도와 심방에 일선직인 구역장 혹은 권찰직이라 할 수 있다.

②장로 등의 행정직도 목회 일선직을 지향
 따라서 장로님들이라도 교인을 심방하고 전도하는 책임자의 입장에서 회의에 참석하게 되지 행정 전문가로서의 장로님은 의미가 없는 것이 백목사님의 신앙노선이다. 장로님을 세울 때부터 교인을 전도하고 심방하는 일로 나아가기 위한 격려와 책임의 직으로 인식을 시키고 있다. 물론 대형교회의 특성상 행정면을 특별히 맡을 장로님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경우로 장로직을 가진 사람은 1-2명 정도로 극히 예외적인 경우로 하고 있다.
 장로님이면 가장 전도와 심방에 모범적이며, 또는 앞으로 그 일에 모범적일 때 많은 교인들에게 본이 될 수 있는 분을 택하는 것이 원칙이다. 장로님들 거의 전부가 주일학교나 중간반 또는 장년반 중에서 권찰(구역장)( 또는 반사(교사)직을 맡고 있는 것이 이런 면을 보이는 것이다. 즉 사회적 어른이 교회 안에서 같은 성질로 어른 노릇을 한다든지 세상 업무처리에 익숙한 분이 교회 안에서 같은 종류로 업무처리를 익숙케 하도록 맡기는 장로님이란 극히 예외적이란 뜻이다.

③학생부를 책임진 주교 반사 등도 교회 결정의 가장 중요한 구성인물
 주교 반사들이 일반적으로 교회적 결정에서는 완전 제외되는 경우가 일반이지만, 이들도 일반교인만큼이나 중요한 주일학생을 맡은 동일한 구원일선직을 가진 교인이라는 익식에서 이들에게도 교회의 제일 중요한 결정 기구인 권찰회에 권찰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석 발언 결의를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④일반 교인까지도 원하면 참석할 수 있는 공의회적 회의체
 일반 교인까지 제한 없이 다 참석할 수 있다면 이는 이미 대표 또는 위임 회의체가 아니라 전 교인의 공동의회 성격이다. 자연스럽게 안건의 범위와 중요성에 따라 일선 목회직 만의 회의가 되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주요 교인들의 확대회의가 될 수도 있으며 극히 드물지만 공의회까지도 될 수 있는 것이 서부교회 회의체 또는 의사 결정기구의 특별한 점이다.
 취지는 좋으나 실은 원만하고 효율적인 의논, 집행 등에서 문제점이 있겠다는 질문을 받게 된다. 그러나 교회는 그 본질이 행정 집행체라기 보다는 차라리 가정 공동체의 성격이 더 본질에 가깝다고 보며, 그렇다면 일사분란한 행정 처리를 위해 일반 세상의 행정체를 교회로 옳겨 놓은 듯한 오늘의 교회 운영보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참고하여 가정 공동체와 같은 모습이 주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복음적이겠다고 생각한 결론이다.

 즉, 가정이란 부모의 권위가 특별해야 가정이며, 어린 신앙이 이해와 타산을 떠나 보호를 받고 배려가 되어져야 옳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인정해야 할 특별한 권위는 어린 신앙을 길러가는 일에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으로 나타나도록 인정되는 권위이지 경험과 실력에 의하여 일정한 권세가 뒤따르는 세상의 관직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렇게 행정기관적 모습보다 가정적 모습이 되다보면, 어린 신앙의 답답한 발언도 나오는 것이 정상이겠고 그러나 그런 의견을 논쟁의 반대편 발상으로 볼 것이 아니고 내 자녀의 기특한 성장과정에서 봐야 한다. 시각이 이렇게 된다면 효율성을 희생하고야 양육이 있는 것이며, 매끄러운 외형을 포기해야 따뜻한 사랑의 가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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