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신풍교회 집사님으로 수고하셨고, 백 목사님 사후 성암교회로 옮겨 충성하시다가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부인은 조정순 집사님으로 우리 교회 김숙자 집사님처럼 인품이 넉넉하며, 3남매를 두셨고 제일 맏이가 이주혜 씨로 손주 세희 세미를 우리 교회로 보내 주셔서 늘 고마운 마음이었습니다. 자격증은 없었으나 실력 있는 한의사로 시내에서 활동하며 경제도 좋았습니다. 1남 2녀를 두셨고 부인 집사님이 동네에서도 따뜻한 분으로 알려 져 있습니다.
지난 달 즈음 백혈병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오늘 돌아 가셨고 여천 제일병원에 모셨다고 합니다. 교회를 대표해서 몇 분이 문상하겠습니다.
참고로,
우리 교회에서 성암교회로 옮겨 가셨던 분으로 김윤선 장로님도 집사님으로 가셨으나 그 곳에서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백 목사님 사후에 공회 내부가 나뉠 때 그 분들은 대구공회가 총공회를 이을 것으로 기대하고 현재 우리 교회와 반대 입장에서 활동하시다가 교회를 개척하겠다면서 30여 명이 가셨으며 우리는 개척비를 지원했습니다. 당시에는 모든 원인이 제 잘못이라고 했으나, 막상 공회가 나뉜 뒤 대구공회의 본 모습과 내막을 알게 되면서 제 반대편에 계신 분들의 잘못으로 알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일단 신풍을 나가신 다음 공회 교회를 개척하지 못하고 김학찬 목사님의 여천교회로 출석하다가 곧 고신 교단의 여천 서교회로 옮겼고 곧다시 통합교단인 성암교회에 정착하셨습니다.
저와 우리의 역량과 용량이 부족하여 그 분들에게 공연한 나그네 생활을 하게 한 점을 두고 늘 마음 아프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도 유종선 김양수 안영채 집사님 가정들은 당시 우리 교회에 제일 주력이었습니다. 일단 나간 분들의 제일 중심 인물은 제게 직접 사과를 하셨고 나머지도 모두 판단을 잘못했다는 입장으로 알고 있으나, 문제는 우리가 평소 모든 면에 그릇이 적음을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신앙이라는 것은 늘 현재 상황이 중요하면서도 앞으로 갈랫길이 닥칠 때 어떻게 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1989-1990년의 일을 알지 못하는 교인들이 대부분이어서 잠시 소개했습니다. 당시 나가신 핵심 교인 명단
- 김윤선 장로님 차쌍덕 집사님 2명: 애양원 직원으로 은퇴, 냉천마을에 농민상회, 공회 장로 후보
- 김양수 집사님 소경희 집사님 4명: 교회 회계, 중간반 반사, 당시 교회 십일조를 제일 많이 했던 분
- 유종선 집사님 김봉순 집사님 7명: 신풍의원 직원, 목회 준비했던 분, 교회 전체를 관리했던 분
- 안영채 집사님 박영애 집사님 4명: 율촌면에서 이발소 운영, 안재남 목사님 사촌 동생, 끝까지 우리를 지지한 분
- 이정일 집사님 조정순 집사님 5명: 당시까지는 동네에서 한약방 운영
- 공정엽 권사님 차균석 어르신 2명: 공회 안재남 처부모, 신풍교회가 직접 세운 유일의 권사님, 나갔다 돌아 오심
이 모든 분들은 저희가 공회의 원래 노선을 떠나게 될 것을 염려하여 공회를 바로 세우려고 최선을 다했고
우리는 그 분들을 지도하는 분들을 알기 때문에 동의할 수 없었고 대화로 풀 수 없어 저희들이 개척을 나가겠다고 제안을 했으나, 그 분들을 지도하는 분들의 거절로 예배당 안에서 분쟁이 1월 1일부터 8월 15일까지 지속 되었고 1층과 2층으로 예배를 나누어 보는 등 많은 곡절이 있었습니다. 개척을 나갈 때 당시 교인 전체를 100명으로 잡고, 나가는 분을 30분으로 잡고 예배당 전체 재산을 7,500여만원 정도로 잡고 그 1/3을 연보하여 드렸으며 이런 기준은 상대방이 제안한 대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