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봉한 순교 가족사 - (요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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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봉한 순교 가족사 - (요약본)

2013.04.04 " 0 1 2022.05.20 16:16

* 책 서문과 목록, 그리고 본문 중에 심봉한 집사님에 대한 소개만 간단히 우선 드립니다. 지금 책 출간은 사진 작업 정도를 남겨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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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하며
 
고난의 시기가 되면 ‘신앙’에 관련된 말은 입에 담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고난이란 실제 당하면 모두가 피합니다. 평화의 시기가 아주 오래 가다 보니 고난이 추억거리가 되고 험한 식생활을 체험하는 행사도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숫자도 갑자기 많아져서 헤아리지도 못할 정도입니다. 그리 되는 만큼 참 순교는 묻히고 있습니다.  

‘순교’라는 표현은 입에 잘 담지 않았습니다. 작년에 애양원 쪽으로 들어가던 분을 우연히 만나 ‘심봉한’의 순교 이야기를 듣고 크게 놀랐습니다. 가족은 너무 고통스러워 그 이야기를 묻었고, 이 지역 교회는 관심사가 평화이므로 외면했습니다. 손양원의 순교와 고난조차 본질이 바뀌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동네에서 20대 시절을 살았던 순교자의 넷째 아들을 통해 묻혀 있던 이야기를 확인했고, 자료를 찾아 이야기를 구성할수록 너무 보배로워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한 개인의 순교사로 우선 교계에 소개하고 싶어 저자께 글을 부탁했습니다. 여러 면에서 적임자입니다. 순교자 심봉한, 그리고 자녀의 여생을 통해 순교자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도 소개합니다. 이 책 곳곳에서 발견되는 교회사적 의미 있는 내용들은 다른 기회에 출간되기를 기대하며 곳곳에 표시만 해 두었습니다.

2012. 12. 5.
신풍교회 목사 이영인







일러 두기

1. 자료가 없는 아쉬움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는 그 순교 내용도 참되고 또 후세대를 위해 하나님은 자세하게 기록을 남겨 두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참 순교는 그 사실조차 묻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심봉한 집사님 기록은 2년을 찾아 겨우 몇 가지 자료를 얻었습니다. 고난의 여파가 너무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순천의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뜰의 순교비에서만 그 이름 석 자를 발견할 수 있었고, 관할 노회나 교회 그 어디에도 관련 내용이 없습니다. 순교자 명단에만 남을 분으로 생각하다가 다음 몇 가지 자료 때문에 출간에 임했습니다.

2. 간접 자료 세 가지
 우선, 양용근 목사님의 자료가 있었습니다. 그는 손양원목사님의 애양원교회를 직전 담임하셨으며 일제 때 순교한 분입니다. 심봉한 집사님과는 신사참배 때문에 고초를 겪던 시기와 장소가 같고 담당 경찰도 같습니다. 두 분은 1943년 11월 26일과 12월 5일에 각각 고문으로 순교합니다. 꼭 10 일 차입니다. 두 분을 평소 괴롭힌 담당자들이 구례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고 양 목사님을 고문한 순천경찰서와 심 집사님을 고문한 구례경찰서가 순천 검찰의 지휘에 있었고 처리하는 방법과 모든 과정이 같습니다. 양 목사님의 고난 과정이 상세하게 알려져 있어 심 집사님이 순교에 이르는 과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관련 내용을 대폭 인용하여 당시 상황을 제공합니다.

 두 번째는, 이기풍 목사님 자료입니다. 한국 최초의 목사님으로 제주도와 많은 도서에 교회를 개척했고 고생했는데 1940년에 여수경찰서에 수감된 후 고문 끝에 77세였던 1942년 6월 20일에 순교합니다. 그 날도 주일입니다. 손양원, 양용근 두 분은 경찰 조사 후 재판을 받았으나, 심봉한과 이기풍 두 분은 재판 없이 경찰이 일선에서 죽여 버렸습니다. 심봉한은 평신도였고 이기풍은 연로했기 때문입니다. 재판 없이 고등계가 경찰서에서 죽이는 경우 그들은 사망 장소가 경찰서가 되지 않도록 위장을 합니다. 재판 절차조차 밟지 않았고 고문으로 죽였다는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소생의 가능성이 없을 때 가족에게 얼른 넘겨 버립니다. 경찰의 고문 끝에 임종 직전의 최종 호흡만 남은 상태에서 끌어내는 방법입니다. 이기풍은 끌려 나온 지 7일 만에 순교했고 심봉한은 며칠 만에 바로 순교합니다. 이기풍의 마지막 순간이 잘 전해지고 있어 순천 검찰의 단일 지휘를 받는 전남 동부 지역의 일본 경찰이 재판 없이 고문하고 경찰 차원에서 죽여버리는 최종 처리 과정을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심봉한의 최후 순간도 엿볼 수가 있습니다. 한국교회 신사참배 박해사에서 순교 사례가 거의 없던 지역에 소중한 기록을 더하게 되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세 번째 자료는, 심봉한처럼 독립운동을 하고 또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김철주라는 인물을 통해 살필 수 있었습니다. 심봉한의 순교 후 가족들은 죽고 흩어지고 가족도 재산도 기록도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자 독립운동가이며 신사참배 거부의 동지였던 김철주가 이 가정을 찾아 넷째 아들을 거두게 됩니다. 그는 여수시장과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손양원 사후 애양원의 원장까지 맡았던 신앙가였습니다. 심봉한과 그 가정, 그리고 그의 순교 과정까지 그 시기 그 곳의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던 그는 심봉한의 넷째를 대신 길러 신앙과 세상 면으로까지 훌륭하게 만듭니다. 이 책에서는 심봉한의 순교와 함께 넷째 아들의 성장 과정과 성공을 통해 순교자 가정을 돌보신 작은 역사를 적어 봅니다.


3. 출간에 담은 뜻
 이 글은 순교자 한 사람뿐 아니라 그 가정 전체를 제단 위에 모두 바쳐야 했던 경우를 소개합니다. 신앙과 세상 면으로 풍족함이 넘치는 오늘, 우리가 각오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은 이런 순교사까지를 포함합니다. 넘어서기 어렵고 소망하기 두려우나 이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가 될 경우를 상정하고 실감 있게 읽었으면 합니다.

 이 글에는 한국교회사의 중요한 사건에 관계된 의미 있는 내용들도 있습니다. 자료를 수집하고 출간한 신풍교회는 손양원 순교사의 무대가 되는 애양원 입구의 마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모두가 아는 이야기 외에 많은 내용을 간직한 곳입니다. 손 목사님의 사모님은 남편 순교 후 그 생전의 신앙 길을 따르셨고 일제 때보다 더 큰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 고난이 원인이 되어 돌아가십니다. 한국교회의 화평을 위해 가족들이 차마 공개하지 않았으나 충격적인 이야기가 많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순직이 아니라 순교라 할 만한 사연을 안고 가셨습니다. ‘심봉한’의 순교사를 살피다 ‘손양원 사후의 가족 신앙사’에 핵심 내용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손양원 순교기념관에 왜 10명의 순교자가 단체로 그 모습을 드러냈을까? 순교가 그리 많고 흔했던가? 그런데 심봉한의 순교 소식은 왜 철저하게 외면되었을까? 왜 최근에 순교자의 수가 급증할까? 순교자의 가족들은 이런 질문에 그냥 쓴웃음만 짓고 말이 없습니다. 좋은 일을 한다는데 뭐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라고 합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자인 손양원의 사후 흐름조차 교단의 정치 상황이 개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쉽습니다. 많은 내용은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백영희목회연구소






인용 감사
 이 책에는, 같은 시대에 같은 상황을 함께 겪은 호남의 신사참배 순교자 ‘양용근’ ‘이기풍’ 및 심봉한의 아들인 심보라의 학도병 전우였던 ‘임종철’ 전기서에서 해당 부분을 대폭 직간접으로 인용했습니다. 상기 도서들은 그 가족이나 본인이 이 책에서 인용한 부분들이 잊혀 져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과 사명감으로 출간했으므로 이 책에서 출처를 밝히는 동시에 관련 내용이 다양하게 전해 지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인용을 결정했습니다.

∎순교자 가정의 고난
∎애양원을 거쳐 현미경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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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봉한 ․ 심보라 - 호남의 순교 가족사



순교자 심봉한
● 생애: 1892년 - 1943년 (51세)
● 본적: 전남 구례군 구례읍 신월리
● 수고: 신월교회 설립
● 신앙: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

심보라 (심봉한의 4남)
● 생애: 1932년, 구례 신월리
● 활동: 6.25 학도병 참전, 애양원 의무 직원          
● 성장: 독립운동가 김철주 장로의 후원과 지도
● 경력: 현미경 기술 전문가, 유진벨 기술 고문





목   차

1. 호남지역과 신사참배 거부운동
2. 심봉한의 신앙과 신사참배 거부
3. 심보라의 생애 Ⅰ : 고난
4. 심보라의 생애 Ⅱ : 애양원 직원생활
5. 심보라의 생애 Ⅲ : 현미경 전문가의 여생
6. 심보라의 생애 Ⅳ : 노년
7.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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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아버님의 순교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 당시 아버님의 신앙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님과 어머님을 잃고 저희 7형제는 뿔뿔이 흩어져 고생을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일제 순사에게 매질 당했던 아버지 모습과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밤잠도 못 주무시고 재봉틀을 돌리시다 곧 이어 돌아가신 어머님은 지금도 저의 가슴 깊은 곳에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80이 넘은 나이에 아버님의 삶을 떠올리다보니 벌써 많은 것이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억 속에 있는 아버님의 훌륭한 모습 때문에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올 수 있었고, 저의 삶의 궤적을 기록하는 일이 딸과 외손자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신앙생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아버님의 아들로서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까 위로하며 용기를 내어봅니다.
 지금도 아버님이 너무 그립고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납니다. 부모님의 죽음, 형제간의 생이별, 학도병 전투에서의 생사간의 갈림길, 6.25 전장에서의 부상 등은 기억에서 다 지워버리고 싶은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힘겨움 속에서도 저를 든든히 지켜준 것은 아버님을 통해 영접한 하나님과 복음이었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아버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신월교회와 집에서 우리 가족들이 즐겨 불렀던 찬송, 아버지가 들려주신 성경 말씀, 아버지의 기도 속에서 자라난 저는 많이 부족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며 노년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 순교자 심봉한의 4남 심보라의 회고 중에서




심봉한 (1892년 출생 - 1943년 순교 : 51세)
 심봉한은 1892년 전남 구례읍 외곽인 신월리 출신으로, 고향 땅이 전국 선교사들의 여름 휴양지로 향하는 길목인 인연으로 일찍부터 복음을 받고 신월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호남지역의 평신도로서는 유일한 신사참배 순교자이다. 신사참배 거부자로서, 투옥되고 혹독한 고문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자 일본 경찰이 급히 귀가 조치를 취하였고 며칠만인 1943년 11월 26일 순교하였다. 새벽 3시, 하나님 앞에 선 그 날은 금요일이었다. 이 시기 교인들은 금요일을 주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날로 기억하며 신앙 생활을 했고 그런 자세로 부활의 소망으로 주일을 기다렸다. 다른 두 분은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새소망을 주신 주일에 순교했다.

 심봉한 집사님이 순교한 지 꼭 10일인 12월 5일 주일 새벽에 양 목사님도 순교하셨다. 한 분은 새벽 1시 30분 그리고 한 분은 3시였다. 밤중, 지리산 유역의 겨울 추위 속에 긴긴 밤이 끝이 없을 듯한 그런 시간이었다. 과연 새벽이 오고 또 해가 뜨는 그런 새 날을 볼 수 있을까? 순교자의 가족들에게는 소망이 없었을 시대였다. 그 순교의 새벽이 그런 순간이었다.

 양 목사님은 여러 면에서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아 많은 기록과 그 흔적들이 남겨져 있고 그 자세한 기록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이에 비해 심 집사님은 동일한 시기에 인접 지역에 신사참배라는 같은 죄목으로 옥고와 고초를 겪었으나 순교 과정과 그 이후 가정에 대한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다. 심봉한 집사님의 순교를 통해 신앙환란의 절정기에는 오직 하나님을 향한 신앙 하나만 가지고 걷는 외롭고 고독한 길이며, 순교 후 역사의 평가라도 제대로 받기를 바란다면 그런 일말의 희망도 다 포기하고 가야 할 길임을 깨닫게 해준다. 어쨌든 이기풍과 양용근 전기 내용 때문에 심봉한 순교의 당시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스럽다. 특히 두 분은 같은 구례 지역에서 같은 시기에 같은 이유로 같은 환란을 겪었고 순교한 시기조차 10일 차이다.

 조선총독부가 국가 차원에서 강행한 신사참배 과정에서 전국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들은 그 1차 조사 대상이었다. 사전 조사를 통해 중앙에서 계획을 세우고 다시 지방에 실행을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전국 경찰서의 고등계는 절도 ․ 강도 ․ 살인 등의 일반 형사범과는 그 차원을 달리하는 중죄인을 전담했는데, 그들은 독립운동을 꾀하는 국가 전복, 일본의 종교 대상이 되어 있는 천황에 대한 신성모독죄, 또는 사회의 근본을 무너뜨릴 수 있는 사상범을 전담했다. 최종적으로 신사참배를 통해 모든 교회가 일본 신과 천황 앞에 머리를 숙이게 하는 일을 맡았고, 이를 거부하는 것은 바로 고등계가 맡아 처결해야 할 사상범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 출석을 하는 모든 교인들이 일본의 종교의식인 신사에 참배를 하게 함으로 종교적으로 전향을 유도하는 일이 바로 고등계의 핵심 업무였다.

 이러한 흐름 때문에 당연히 신사참배 탄압은 전국적 수준의 교회 지도자는 말할 것 없고 각 지방 단위로 대표적인 지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노회 또는 교회의 성직자를 향하고 있었다. 평신도의 경우는 적어도 장로는 되어야 그 지목 대상이 되었다. 물론 집사도 특별한 경우는 포함이 되었으나 여기 구례의 신월리 정도에서는 순교에 이르도록 가혹하게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심봉한은 여러 면에서 평소 경찰의 지목을 받을 만한 특별한 사유가 있었다. 그 부친 심갑순이 경찰의 멱살을 잡고 대들 정도여서 평소 불손하게 보였고, 심봉한은 1919년 3.1만세 운동에 가담을 한 경력으로 주목을 당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런 일이 아니라 1920년부터는 국내 전 지역은 물론 만주지역에서 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이 여름 수련기간에 지리산으로 모이는데, 그의 집이 출입구가 되는 구례 입구 기차역의 길목에 있어 지리산 수련지로 들어가는 모든 선교사를 접하는 문제가 있었다. 선교사들은 종교적으로는 일본 신사참배에 적대적 방해 세력이 되고, 국가적으로는 일본을 막아서는 서방 출신 신앙인들이다. 일본은 세계적 주도 국가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와 사생 결단을 내야 했고 국가 차원에서 선교사를 극단적으로 적대시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선교사들이 이 가정을 거쳐 간다는 점에서 참으로 밉게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교사 몇 명만 알고 지내도 친미 스파이 혐의를 받는 이런 현상은 이 지역의 이기풍 ․ 안용근 두 분의 조사 과정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며, 전국 대부분의 신사참배 거부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덮어 씌운 혐의였다. 심봉한은 만주를 포함한 전국의 선교사가 드나드는 길목에 부자로 살며 신앙이 특별하여 선교사들을 환대하고 깍듯이 모셨으니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는 고등계 경찰이 그냥 둘 인물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보면 심봉한은 신월리 마을이라는 시골 동네 유지 정도에 그칠 인물이지 구례 전체 지역 사회의 인물이 아닌데도, 이런 여러 이유가 겹치게 되면서 구례경찰서의 고등계로서는 꼭 꺾어 놓아야 할 인물이 된 것이다. 신사참배를 강제로 집행하던 시기는 미국과 전쟁의 기운이 돌고 있었으며 일본은 이미 중국 등 많은 지역에서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사에 머리만 굽혔다면 이 모든 문제는 간단히 지나칠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의 신앙이 죽어도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등계 경찰로서는 심봉한 한 명을 꺾는 것이 이 곳을 출입했던 모든 선교사들과 한국에 기독교를 전파한 그 노력을 꺾는 상징적 의미까지 음미하게 되어 무자비하게 심 집사님을 고문하게 된다.

 호남지역 3인의 순교자이자 유일한 평신도인 그는 신사참배로 수난 받은 누구와 비교해도 고초가 더 극심했다. 재판에 넘기지도 않고 계속 경찰에서 붙들어 놓고 죽도록 고문을 했는데, 이기풍 목사님은 70세를 넘긴 노령이었고 안용근 목사님은 원래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심 집사님은 타고 난 강골이었다. 그들이 심 집사님을 단순히 죽이는 것만 목적이었다면 단기간에 고초를 당하고 절명했겠으나 그들은 심 집사님으로부터 신사참배를 하고 총독부의 지시를 순응하겠다고 약속을 받아내야 했다. 재판에 넘겨 지면 항복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감옥에 가두기만 할 수 있다. 그러나 재판에 넘기지 않으면 경찰이 조사를 핑계 대고 언제든지 원하는 대로 고문을 할 수 있었으므로, 그 상태를 4년이나 지속했다.

 재판을 받아야 모든 기록이 남게 되는데, 바로 이런 상황 때문에 다른 순교자들과 달리 심 집사님에 대한 조서나 기타 기록이 남지 않아 아쉽기 그지없고, 한 편으로는 바로 이 점 때문에 그의 순교 앞에 더욱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신사참배 순교자가 거의 없는 호남지역에서 배출한 순수 호남 출신의 순교자이어서 더욱 아쉽다. 이 지역의 교회들은 주로 화합을 강조한다. 심 집사님은 진리를 고수하는 신앙 문제를 두고는 타협이 없고 외골수 신앙의 걸음이다. 지역의 교계 흐름과도 달라 교회의 도움이나 관심조차 받지 못하게 된다. 이제 그의 순교와 순교자의 후손의 생애를 통해 그들이 겪은 고난을 되새김질하고 이 지역에도 결연한 신앙인이 없지 않았음을 보여줌으로써 신앙의 후예들을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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