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이야기, 몇 가지 회상

문답 / 발언

예배당으로 아끼고 조심해 주셨으면,
모든 분에게 깨끗한 모습을 보이고, 신앙에 유익하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결혼 이야기, 몇 가지 회상

사회 0 181 04.26 12:54

(이재순 목사님 가정의 결혼 이야기)
이 글의 이재순 목사님은 우리 교회에 계셨던 민 집사님의 사돈 이재순 목사님이 아니라, 대림 건설의 창업자 출신의 이재순 목사님을 말합니다. 

이 목사님과 저, 그리고 우리 교회와 인연은 이 글 뒤에 적습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도 참고하고 또 이 결혼 이야기의 무게도 짐작하기 바랍니다.



(완벽한 아들)

이 목사님의 아들은 둘인데, 한 분은 서울대 의대를 거쳐 서울대에서 내과로 인턴 레지던트를 거쳤습니다. 동생은 서울대 건축학과 출신입니다. 

한 눈에 공부를 잘 하는 가정으로 파악 됩니다. 동생은 대한민국 건축공모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아마 제 기억이 맞을 듯합니다.

큰 아들은 서울고 서울대, 내과를 거쳤습니다. 주일 문제로 내과를 전공합니다. 대학을 마치며 인턴 할 때 결혼을 합니다.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1976년 서울 사직동교회에서 4년 선배였던 그 분과 잠깐 함께 있었고 제가 신풍으로 오며 제가 맡던 서부교회 주교 부장을 이어 받습니다.

이 분은 서울대병원의 인턴 레지던트를 하던 가장 바쁘고 혹독한 시절에, 부친 이재순 목사님이 백 목사님께 결혼할 아가씨를 소개 받게 됩니다.

백 목사님은 내 딸이라며 며느리 될 사람을 소개했습니다. 이재순 목사님은 백 목사님의 표현 때문에 아가씨 신앙은 서부교회 제일로 생각합니다.


여성은 주교 반사였으나 서부교회에 여반사는 3백 명이 넘습니다. 부산의 2년제 전문대학만 나왔고 나이는 신랑보다 많고 인물은 보통입니다.

제 보기에는 그 인물이 일반 평균 되기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인물과 신앙이란 원래 보는 사람에 따라 너무 다르니 인물 평은 이 정도만 합니다.

그 부모는 서부교회 핵심 교인이며 부산 수준에서는 가정 형편이 좀 어려웠고 고향 시골에서는 그냥 무난하게 살았던 일반 가정 정도였습니다. 

신랑은 소년처럼 동안이고 성격도 신앙도 만사에 좋은 분입니다. 아내 사랑과 처가 애착이 지극하여 병원에 처제들이 근무한 모습이 선합니다.



신랑의 큰 집은 80년대 국회의장을 지낸 이재형과 가족 경영으로 유명한 대림 오너들입니다. 본인은 서울대 의대에 신앙과 성격이 좋습니다.
공회적으로는 어릴 때부터 오직 이 노선밖에 없었고 누가 봐도 목회자 후보였습니다. 그래서 본인도 부모도 서부교회 아가씨면 된다 했는데

서부교회도 인물이나 세상 면을 갖추고 신앙이 있는 분들이 많은데, 누가 봐도 목사님이 평소 주변에 가깝게 두고 계신 가정을 추천했습니다.

신랑은 무조건 선을 봤고 그대로 결혼을 했습니다. 신부 가족은 모두 찬성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신부는 신데렐라가 된다고 모두 보았습니다. 

신부는 백 목사님이 누구를 추천해도 순종을 했을까? 제가 듣기로 신랑 쪽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신부의 결혼 연령으로 보면 퍽 늦었습니다.




(결혼을 두고)

최근 결혼 추진을 두고 기도만 하고 있습니다. 마음 속으로 남자든 여자든 결혼의 상대방을 두고 모두가 선교사의 자세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세상 것을 보는 것은 마지막 결산을 해 보면 참 허무한 것이고, 대림건설의 오너 가족은 결혼을 두고 너무 쉽게 너무 은혜롭게 추진을 하던데..

우리에게는 왜 그런 사람이 없을까, 모두 상대방에게는 자기를 낮추고 나에게 오라 하고 자기는 모두 온갖 것을 다 가리며 기다리는 듯합니다.

우리 교회에 계셨던 정형인 집사님도 이의사 분과와 서울고 동창이며 서울대 출신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할 때 아무 것도 가리지 않았습니다.

안 믿는 가정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그냥 착실히 교회 생활하는 분에게 이 신앙으로 함께 걸어 가겠는지만 물어 보고 간단히 결혼을 추진했으며

언제 제게 언뜻 지나 가는 말로 사모가 대학 나온 것을 아주 이상한 듯 표시한 적이 있었습니다. 공회의 결혼이 원래 그렇습니다. 그냥 합니다.


저는 아무도 할 사람이 없게 되자 누구라도 할 사람을 구하다 추진 되었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우리는 신앙의 걸음에 방해만 되지 않았으면...

이런 생각 하나로 걸어 왔습니다. 최근에는 또 따지고 또 따지고 또 따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 따지는 것이 마7:2에서 남을 헤아리는 것인데.

이런가 저런가? 이 면이 어찌 되는가? 따져서 되는 것도 많으나 따져 봐도 안 되는 것이 더러 있습니다. 결혼만은 따져 봐야 해결은 없습니다.

험한 사람이면 주님이 선교를 보내는가 보다 하면 되고, 좀 덜 험해 보이면 전도를 보내는가 보다 하고, 더욱 나아 보이면 심방 대상일 뿐이며

상대가 좋아 보이면 내가 저 사람에게 신세 지고 살아야 하는 처량한 신세이니 내 실력과 수준이 신세 지고 사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만 가지고 따져도 결혼으로 할 말은 한이 없습니다. 저는 공회와 총공회까지를 두루 아는 편입니다.

결혼은, 그냥 이 신앙에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엄청 좋은 사람이고 조금 불편하면 전도 선교를 각오해야 하고

만일 내게 괜찮아 보이는 점이 있다면 그 면으로 나는 상대에게 신세 지는 것이니 내가 아주 죄송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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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연구소 사이트

제목 : 신풍교회의 재출발 역사 기록 - 이재순 목사님과의 몇 가지 과거


우리 교회가 이 노선의 중심으로 출발하기 위해 1989.8.27부터1990.8.15.까지 참으로 많은 사연을 거쳤다. 한계를 넘어서는 고통이 계속됐다.

바로 그 기간에 전국 총공회 중심인 부산의 서부교회는 이재순 목사님이 우리와 같은 고난을 겪었다. 서부와 신풍만 1년을 함께 같은 처지였었다.

전국 공회 교회 중에 세월이 가도 변치 않을 교회는 서부교회 신풍교회 정도로 손을 꼽았고 그 외에 몇 교회는 급하면 어찌 될지 모르는 상태였다.

백 목사님이 가셨으니 이제 바뀌어야 된다는 것이 3분의 2고, 배운 것이 옳고 바르니 지도자가 가도 바꿀 수 없다는 교회는 약 3분의 1 정도였다.

문제는, 3분의 2가 밀어 붙이면 견딜 수가 없다. 바꾸자는 쪽이 대구공회고 이들이 흔들면서도, 서성교회 중계동교회도 바꾸지 않을 것으로 봤다.

서성은 백 목사님 사위 교회이고 서부교회는 백 목사님 계시던 영향이니 세월이 갈 것으로 봤다. 정말 골수로 지킬 곳은, 중계동과 신풍 뿐이었다. 


지금 남은 곳은 우리 교회뿐이다. 물론 서부교회는 지금도 거의 다 지키고 있다. 그런데 그냥 고사가 되는 중이다. 중요한 것은 바꾼 지 오래 됐다.

그 서부교회 첫 1년은 우리와 입장이 같았고 그 때 목사님이 이재순이다. 70년대 국내 10대 재벌인 대림건설의 창립자로서 시골 교회에 있었다. 

백 목사님 사후 후임을 정할 때 나는 백 목사님 가족 회의에서 그 분을 소개했고 모두가 동의하게 되자 서부교회 후임으로 모신 초기에 활동했다. 

사업가로서 탁월했고 사회적으로도 그릇이 엄청 났으나, 공회 목회자로서는 설교와 모든 면에서 가장 바닥이었다. 그러나 중심과 심지가 강했다. 
70대의 노련하고 의리 있는 분께 현직을 부탁하고 중학생을 10여 년 잘 기르면 나와 전국이 부러워 할 지도자가 될 것으로 봤다. 나의 역할이다.

그 중학생은 40대 중반인데 교회나 다니는지 모르겠다. 이재순 목사님은 딱 1년의 과도기 때만 나와 함께 했다. 잘 모르니 내게 신세졌을 것이다.


이 목사님 부임으로 서부교회가 과거를 지키는 쪽이 되자, 3분의 2를 가진 대구공회는 이재순을 흔들었고, 경험 없는 목사님은 늘 도움을 청했다. 

백 목사님 생전에는 가깝게 지낸 것이 전부였으나, 목사님의 사후에는 이재순 목사님이 신풍만 1년을 쳐다 보고 있었고, 대구공회가 눈치를 챈다. 

신풍을 제거하지 않으면 서부교회와 이재순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대구공회는 이 작은 시골 교회에 전국의 힘을 쏟아 부었고 우리는 고생했다. 

이 목사님의 고생하던 과도기에 강단의 광고나 발표나 공회적 사안의 논쟁과 판단은, 다른 사람과도 의논했으나 마지막 결정은 거의 신풍이었다. 

이 고난의 시기를 가장 가까운 동지로 겪었고 매 순간 긴급 연락을 하던 사이니 공회에 대한 지식과 판단은 내가 맡고 급한 돈은 목사님이 맡았다. 

나와 목사님은 돈에 깨끗했다. 나는 돈이 필요할 때 거액도 바로 청구했다. 목사님은 은행의 신권을 끝 번호만 확인하고 원할 때 바로 건네 주셨다.


1년이 지나며 신풍과 서부가 비슷한 시기에 모든 것이 정리 될 때 이 목사님은 독자적으로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나의 사명도 거기까지였다. 
이후 이 목사님이 예상치 못한 위기를 여러 번 겪게 되고, 그 때마다 신풍을 찾아 소동을 해도 나는 외면했다. 그 분은 그 교회를 책임져야 한다.

1990년 9월 교역자회를 거치면서 목사님은 나의 이전 부탁을 실감하고 신풍을 찾아 난리였고 그 해 시무투표를 겪고야 다시 신풍을 알아 본다.

1990년 3월의 양성원 때는 물론, 1992년의 양성원 건축이 시작 되면서 대구공회가 고소를 시작하자 인간적으로 거절할 수 없도록 연락이 왔다.

나는 백 목사님의 갑작스런 사고 후 서부교회와 공회의 앞 날을 위해 한 번은 활동 했으나 나의 사명은 이 노선의 자료와 연구와 발표가 전부다.

서부교회나 총공회의 교권이나 재산은 2차 업무가 되고 내게는 1차 사명이 있다. 그리고 당시 교권과 재산을 지켜야 할 1선의 인물들이 있었다. 
따라서 서부교회가 통째로 넘어 가고 총공회가 공중 분해가 되어도 그 것은 이재순 이진헌 김응도 이런 분들의 사명이니 나의 길을 갈 뿐이었다.


잘 모르는 분들은 공회의 그런 어른들과 잘 지내고 몇 번만 부탁을 들어 줬다면 지금 총공회와 서부교회가 누구 손에 있겠느냐며 가르치려 든다.

나는 현재 신풍교회 목사다. 시골 바닷가 몇 사람 교인도 내게는 벅차다. 내게는 연구소 사명이 전부다. 하나님이 주지 않으면 개입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나를 향해 좋은 뜻으로 평생 충고해 주고 설명해 주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과 이 노선의 기본과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이재순 목사님과의 지난 날을 몇 가지 적어 보는 것은 그 분 가정의 '결혼' 이야기 때문이다. 흔한 이야기를 대충한다고 생각할 교인들 때문이다.

[이 게시물은 서기님에 의해 2022-06-02 17:32:31 문답 / 발언에서 복사 됨]
[이 게시물은 서기님에 의해 2022-06-02 18:29:46 문답 구자료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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