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안을 보내며

문답 / 발언

예배당으로 아끼고 조심해 주셨으면,
모든 분에게 깨끗한 모습을 보이고, 신앙에 유익하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정안을 보내며

사회 1 622 2021.07.03 22:32
(우리를 돌아 봅니다.)
1989년 8월 27일, 백 목사님 장례 후 부산의 연구소 몇 직원이, 이 좋은 노선과 교훈을 전하며 평생을 제1의 사명으로 삼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지금은 모두 떠났지만 당시 연구소 소장이던 이민영 목사님, 그 부친으로 교계적 지도자인 이진헌 목사님, 세계 최대의 주일학교를 대표하던 장영목 목사님, 출간과 업무를 맡은 이신영 목사님도 함께 했었습니다. 세월 속에 이런저런 이유로 떠났습니다. 그 분들은 저희를 변질했다거나 마음이 바뀠었다는 등으로 탄식하며 중간중간 떠났지만 저희는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표시가 날 터이니 기다려 보자며 이 길만 지켰습니다. 1987년 8월 19일, 서영준 목사님의 장례 후 김해 묘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백 목사님의 사무실을 자유롭게 출입하며 서부교회의 각 분야를 책임 진 5명 중에 4명이 곧 닥칠 훗날을 미리 보며 이런 서원을 했습니다. 주일학교 장영목, 중간반을 인수한 특수반 이치영, 연구소 소장 이민영, 그리고 제가 4명이고, 서부교회 행정실에서 서무를 맡은 행정실장님은 어느 쪽을 따지지 않고, 중간에 서서 서부교회만 지키겠다 했습니다.

1997년 8월에 이르자, 저희들은 몇 차례인지도 모를 만큼 제명을 당하고 무슨 죄인지도 모르며 고발을 당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현재 공회가 형성 되었습니다. 1998년부터 인터넷을 사용하게 되자 우리는 전국의 공회 교회들은 물론 교계에 총공회와 서부교회를 대표하게 되었으며 출발 인원보다 더 훌륭한 분들이 많이 들어 오게 되었습니다. 교회도 교인도 많아 졌습니다. 우리는 원래 이 노선이 좋고 이미 생활이 되어 있어 우리는 부족하지만 인터넷에 공개한 대로 교회와 개인 생활을 할 수가 있지만, 우리의 소개로 들어 온 분들은 막상 실제 세월 속에 이렇게 살기는 어려웠습니다. 이 노선의 신앙과 생활이란 말마디 옳으나 문제는 옳기 때문에 틀렸다는 판단이 나오기 전까지는 바꿀 수가 없고, 우리는 바꾸지 않고 살 수 있으나 밖에서 오신 분들은 평생 그렇게 산다는 것은 끔찍했을 것입니다. 참 훌륭하고도 많은 분들이 오셨고 짧게는 1, 2년이고 길게는 10여 년을 함께 했으며 계시던 시기에는 모두가 우리 공회와 연구소의 최고 인재들이었습니다. 다만 평생 자신을 붙들어 놓는 것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 곳을 지키고 있는 우리는 원주민입니다. 원주민은 자기 사는 곳을 따지지 않고 그냥 살고 있습니다. 이주민은 신세계를 어떻게 할지 다릅니다. 아메리카 신대륙에 왔던 청교도들은 미국의 원주민에게 도움을 받고 정착을 한 뒤 미국 대륙을 그들의 고향 유럽보다 좋게 만들었고 그들을 이주민으로 부르던 원주민보다 더 나은 지상 낙원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지금도 우리 안에는 이주민으로 왔다가 원주민이 되고 이제는 원래 원주민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고치며 이 노선의 중심에 서면서, 이 노선의 지도부가 된 분들이 이 곳을 직접 운영하는 순간까지 보는 상황입니다. 타 교단은 인물의 교체로 체계가 흔들리면 어지럽다 하여 교회를 '체계화' 시킵니다. 공회는 체계화란 석고화가 되며 기계화가 되어 그 속에 하나님과 연결과 하나님의 인도를 버려야 하기 때문에 극구 반대합니다. 주일 학생이라도 그 주장이 옳으면 목회자와 온 교회가 순종하자는 식입니다. 주님은 언제 어떻게 누구를 통해 역사하실지 알 수가 없다는 점 때문에 공회는 처음부터 그 누구라도 옳고 바르면 따른다는 쪽입니다.
 
그 동안은 제가 모든 면에서 앞에 섰습니다. 지금은 최근 몇 년을 지켜 보셨듯이 설교 외에는 하는 일이 없습니다. 새로 일하는 인재들 때문입니다. 제가 했던 일 중에 참으로 부끄럽고 잘못 된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일은 그 때마다 분명히 대서특필하여 공개했으니 재론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일은 세월 속에 아무리 돌아 봐도 잘한 일들도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20세 결혼에 30세 전후로 아이를 3-4명을 낳고, 이후는 각자의 형편에 따라 알아서 하되 전체 방향은 이 것이 시대의 험악한 세상과 교계의 탈선과 공회가 주저 앉을 때 이 길을 가는 지혜였습니다. 백 목사님 생전의 70년대와 80년대보다 더 우리는 역주행을 하며 노력했고 현재 공회의 주력 가정들은 이런 방향에서 형성이 되어 있습니다. 현재 주춤하고 있지만 다시 이렇게 되어야 하고 될 것으로 소망합니다. 교리나 예배와 달리 부부와 출산과 가정의 경제라는 문제는 교회가 방향만 제시하지 그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형성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은 있었으나 실제 그렇게 될 가능성은 사실 없었습니다.



(이 노선을 정말 지키려면)
우리 공회의 출발 목회자들만 봐도, 제가 30세에 결혼했고 다른 분들은 자녀가 2명입니다. 백 목사님 생존의 총공회 전성기 80년대에 결혼입니다.
모든 면에서 그 때와 비교할 수 없이 불리한 시대이지만 결혼과 출산을 통해 우리 앞에 당한 세파를 현실 속에서 받은 말씀으로 시작해 봤고 우리는 90년대를 통해 오늘의 모습을 가질 수 있도록 기초를 다녔습니다. 학생들의 공부와 진학과 진로 문제를 두고는 1996년에 오혜진 선생님부터 시작했고 지금은 공회 학생의 공부와 진학과 진로에 관한 한 우리는 우리 신앙을 지키면서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길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경제 면은 1998년부터 동천의 김기곤 집사님이 누구라도 한 가정의 경제만은 해결 할 수 있도록 설비 기술을 가르쳤고 이와 동시에 학생들이 학습 방법이 발전하며 현재 모든 교인들의 생활은 최소한 해결했습니다. 자녀 교육과 가정의 경제를 기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이 은혜 때문에 우리는 20세 결혼과 30세에 4명의 아이를 최소한의 표준으로 제시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공회의 외부 저력은 이렇게 좋은 편입니다.

결혼을 두고, 조례 조사님이나 연구소 직원 출신들의 결혼은 특별한 배경을 가졌기 때문에 일반 교인처럼 예로 제시하기는 곤란합니다. 일반 교인의 결혼은, 1998년과 1999년에 결혼했던 문 장로님의 따님들이 그 시작이 되었습니다. 공회에 들어 온 지 1년도 되지 않았으나 원래 우리와 체질이 같았기 때문에 적응이라고 할 것도 없었고 모든 부탁도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결혼에 별 생각이 없었을 문숙희 선애 선생님이 공회의 기본 방향에 따라 20대 초반에 결혼을 했습니다. 지금은 그 나이가 보통이거나 늦었다 할 수 있으나 당시로서는 본인들도 또 우리 공회로서도 처음이었습니다. 일반 교인 가정에서, 그리 급하지 않을 분들이, 우리의 신앙 노선 때문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결혼에 나섰습니다. 이 때부터 일반 교인들에게 이 모습은 장차 자기들의 그림이 되었고 이후 공회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하나가 던져 지면 하나에 그치지 않습니다. 가라지 씨앗은 더욱 잘 퍼져 나갑니다. 곡식은 몇 배 어렵습니다만 역시 전파가 되며 확산합니다. 어느 쪽이 더 강한가? 결과를 보면 알게 됩니다.

2000년대에 들어 서면서 최근까지 공회의 결혼과 출산은 우리가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을 보충해 왔었습니다. 위에 두 분은 자녀들이 결혼하는 중입니다. 내가 걸어 봐서 나쁜 길은 남에게 부탁하면 안 되는 것이고 내가 걸어 봐서 좋은 길은 남에게 권해야 합니다. 자기 가까운 사람에게는 더욱 강하게 권해야 맞습니다. 자기 자녀들에게는 더더욱 그렇게 해야 맞습니다. 이런 넓은 면을 마음에 담기 때문에 이 번에 김정안의 장례식에 대한 제 마음은 다른 분들과는 또 다른 면이 많습니다. 고마운 면도 많고 미안한 마음은 그지 없고 또 아쉽고 아쉬운 점은 더욱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학생 청년들은 모두가 다 좋은 분들입니다. 10대 후반을 거치면서 세파와 안팎의 파고에 패이고 깎인 부분들도 있지만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면이 있어야 오히려 사람답고 정상입니다. 그 모든 분들, 현재로 본다면 20대를 중심으로 우리는 약 7-80여명의 결혼할 청년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 모두가 볼 때 가장 좋은 사람, 착한 사람, 편한 사람이었습니다. 공회 결혼의 첫 열매여서 그랬을까요?



(장례를 진행하며 절감하는 것)
오늘 이 사람을 보내고 왔습니다. 조례교회의 장례라는 그늘에 제 마음을 묻어 놓고 가지 않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새벽에 마음을 바꿨습니다.
이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무슨 실수를 했다면 그 실수는 그 주변의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별 것도 아닌 일입니다. 우리가 모두 서로 잘 알기 때문에 물어 볼 것도 없고 이 말을 따질 사안도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의 작은 실수를 가지고 이 사람은 고민을 했습니다. 이런 고민을 책임감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책임감은 자책감으로만 묶어 두고 이 자책감을 가지고 주님 앞에 다시 일어 서는 소망이 필요했습니다. 다른 주변 사람이라면 그 정도 실수는 실수도 아니라며 되려 주변에 광고를 하면서 호탕하게 웃고 다닐 일입니다. 그런데 작은 것 하나를 가지고 가족에게 부모에게 교회와 주변에 너무 큰 짐을 져 버렸습니다. 책임이라는 것은 그렇게 지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이 있을 때 그 해결과 대처와 책임이라는 것은 그 반대 방향을 향해서 걸어 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할 일인데 그냥 주저 앉아 버렸습니다.

오늘 장례를 번복하면서 굳이 간 것은 오늘 모인 주변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한 사람의 넘치는 책임감을 두고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장례식치고 오늘 설교의 모습은 모두가 본 적이 없을 듯합니다. 오늘 참석한 우리 모두와 이 글을 읽는 모두는 정안과 비교할 때 뻔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처럼 이렇게 죄와 실수가 있다면 그냥 있을 수 없습니다.  정안과 비교를 하면 우리는 평소에도 지난 날에도 최근에도, 아니 지금도 모두들 참으로 큰 잘못과 실수를 하면서도 감추고 모른 척하고 광고까지 하면서 주변에다 나를 본 받으라고 우리는 부추기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넘어 지는 것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로 삼을 때부터 피할 수 없도록 우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입니다. 넘어 지게 한 것은 일어 서는 것을 가르치는 것인데 우리에게 미안해서 주저 앉았습니다. 우리는 쓰러지고 넘어지면 미안해 하기는 커녕 진흙탕에서 뒹굴고 놀고 있는데, 그는 미안해 했고 그 미안한 마음이 책임감을 넘어 좌절감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부분을 두고 저는 저를 돌아 볼 수밖에 없습니다.

몇 달 전에 별 일이 없을 때 사무실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할 일이 있어야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다며 결혼을 권했습니다. 자리를 잡고 결혼하겠다 합니다. 대학 1학년인데 1년 후에 하겠다는 그 뜻이 책임감 때문이라는 것이 느껴 졌습니다. 어떤 것은 조금 늦은 것이 낫고 결혼은 조금 빠른 것이 나은데 이 댁에 여러 건을 부탁하다 보니 차마 밀지를 못했습니다. 목요일 밤에 사고 소식을 듣자 너무 미안했습니다. 지도하는 사람으로 평소 신뢰를 받았더라면 제 부탁 때문에 힘을 내서 결혼이라는 길에서 바쁘게 살았더라면 주변의 별 것 아닌 것에 틈을 주지 않았을 텐데. 어쨌든 주변에는 비슷한 청년들이 많습니다. 저는 이 시대를 탄식하는 것은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탄식에 그치지 않고 해결이 되도록 길을 활짝 열어야 하는데 제가 가진 힘이 닿지를 않습니다. 모두가 교회는 그냥 대략 오가는 정도고 청년들의 마음은 모두가 나름대로 무슨 생각과 계획이 많습니다. 별로 좋을 것도 없어 보이고 대부분은 평생을 두고 후회만 할 것으로 보입니다. 달리 할 일이 없으니..

요즘은 이전 그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도록 간곡히 간곡히 기도를 합니다. 저 우매무지하며 저 망할 길로 돌진하는 미련한 이들의 눈을 띄워 달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장 귀하고 좋은 사람을 먼저 하나 데려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보다 여러 면에서 볼 때 착하지 못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생각 하나 잘못이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데려 가시며 남은 많은 사람에게 깊이 절감하며 돌아 서고 또 눈을 새로 뜨고 각자 더 밝고 더 좋은 길을 선택할 수 있게 함으로 많은 열매가 맺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한 생명에 많은 열매를 바랍니다. 지금 20대라는 인생 최고의 황금기를 덧없이 보내는 우리 청년들, 30대가 되었다면 이미 세상식으로 결혼을 해야 할 듯하고 그 결혼에는 우선 좋아 보이나 막상 하고 보면 제가 왜 이렇게 부탁하는지 알지 않을까! 좋게 말합니다. 다른 길이 더 낫다면 밀어 드리겠으나 더 좋은 길이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들 꿈을 깨시고 우리 함께 우리가 가야 할 바쁜 길을 재촉하시면 좋겠습니다. 주일을 앞두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이 게시물은 서기님에 의해 2022-06-02 17:31:45 문답 / 발언에서 복사 됨]

[이 게시물은 서기님에 의해 2022-06-02 18:29:01 문답 구자료에서 이동 됨]

Comments

지켜보며 2021.07.04 08:35
정안의 나이때 목사님의 하신말씀미 생각납니다.
넌 결혼할 자격이 안돼!

 다른 표현 이었으나 그땐
그렇게 들렸읍니다.
작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누구나 똑같으니 ,일찍 중매결혼하라는
뜻인것 같습니다. 아직도 모르겠지만
복돼게 들으려  부단히 나름 애썼고 수년동안을
목사님 말씀이  소망속에  넌 개야 무슨? 부스러기나 먹어
라고 속삭이곤 했습니다.
참 죽고싶은 심정 이었고 한나를 찾았읍니다.
나도 일찍 결혼 하고싶었으나 방법이 잘몬됐는지
오히려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고, 되레
한줄기 빛은 멀어 지더군요.
하여튼 한 말이 살리고 한 선생의 한 표현은
귀한청년을 학생을 살리는데 그는 옆에 그 누군가가
없었나 봅니다. 그 생각 에서도 지식의 선견도 없구
말입니다. 예정이었으니 치부하겠으나지만,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복된 길을 구해봅니다.

한다고 돼는것이 아니고,됐다고 되어진것이 아니니
은혜를구하고 끊임없이 배워야 하고,
참으로 대 심방이 필요한 때입니다.
또 요즘은 아니라 할지도 모르겠다 하겠을지 모르지만요.
또한 부공3의 목적은 연구소 이니 모든것을
헤쳐 나아가야 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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