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좀, 편하게' 바꾼다면 - 오랜 제안을 놓고

문답 / 발언

예배당으로 아끼고 조심해 주셨으면,
모든 분에게 깨끗한 모습을 보이고, 신앙에 유익하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교회를 '좀, 편하게' 바꾼다면 - 오랜 제안을 놓고

사회 0 192 2021.06.29 15:51
(경험담)
저는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기독교 학교를 다녔습니다. 학교는 늘 '율법주의, 바리새인'을 비판했고, 사상적으로 아주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저는 신앙이 좀 늦게 들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듣기 전부터 교회의 딱딱한 분위기가 싫었고 신앙이 든 다음에는 무엇이 옳은지를 몰랐습니다.
1960년대부터 제 주변이 타 교단의 중심지였고 학교는 극단적으로 딱딱한 공회를 비판했고 제가 다닌 고향 교회는 그 비판 대상이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1965년경, 학교가 학교 주일학교를 나오라 해서 2번을 출석한 기억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를 기억합니다.
당시 교감 선생님은 얼마 후 서울 충현교회 부목으로 가셨고 이후 홍콩으로 가서 중국 선교에 헌신했는데 중국 선교 역사에 아주 유명합니다.
그 아들이 저와 1963년에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제주도 홍성직 외과의사입니다. 유튜브에 홍혜걸로 검색하면 됩니다.

홍성직 의사가 살아온 평생, 그리고 현재 모습, 이 것이 제게 교회와 인간과 세상과 신앙을 교육 시켰던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모습입니다.
홍혜걸은 유명한 의사만 인터뷰할 수 있는 유명한 유튜버입니다. 이 분이 '생애 최고의 인터뷰'라고 추천하며 홍성직의 생활을 담고 있습니다.
이 분위기가 제 학교의 이사장인 풀무원 원경선이며 1964년, 그 시절에 자연농법으로 유기농과 태양광과 인간다운 삶을 강조한 그 곳입니다.
지성적이되 감성적이며 서로를 배려하면서도 무슨 틀에 매여 하거나 생각 없이 오가는 그런 제약이 없는 세상을 만드려 했던 분들이었습니다.
대한민국 모든 학교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남녀를 분리하며 중고교는 아예 남녀 학교가 달랐는데 우리는 1학년 때부터 짝을 지어 앉았습니다.
학교장의 배려로 그 서슬퍼런 1960년대에 고등학교는 시내를 점령하는 데모를 했고 경찰은 따라만 다녔고 70년대에는 머리를 길러 줬습니다.

고교 내내 한 반에 남녀 학생이 함께 공부했고 교사가 학생과 교제하여 졸업 직후 결혼하는 분위기에 호주 선교부 건축물은 멋까지 더했습니다.
국내에 소개 되기 전의 미국 교회 최신 복음 성가를 늘 배웠고 당시 일반 교회보다 훨씬 앞선 분위기로 전국 기독교 학교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는 현재 우리 공회와 우리 교회의 분위기가 너무 답답하여 불편을 느끼는 분들의 마음을 저도 이해를 한다는 경험일 뿐입니다.
현재 공회 교회의 분위기는 요즘 세상과 요즘 보통 사람들의 마음으로 본다면 잠깐은 몰라도 이렇게 오래 계속 되면 견디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를 선택하기 곤란한 분들은 그냥 생각 없이 몸만 오고 갈 뿐이고 다른 교회를 선택할 수 있는 분들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 집니다.
그 분들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 사실 교회의 기본 방향과 분위기 때문에 좋은 분들이 계시고 싶어도 더 이상 머물 수 없을 상황이 된 것입니다.




(바꾸지 못하는가, 바꾸지 않는가?)
우선 이런 분위기를 바꾸지 못하는 일면이 있습니다. 집안을 잘 꾸민다면 요즘 인테리어를 통해 이왕 같은 주택인데도 참 놀랍게 만들어 냅니다.
재료도 좋고 기술도 좋고 또 아이디어가 좋아서 꼭 같은 부엌을 이렇게 편하게 좋게 위생적이며 분위기까지 좋게 합니다. 모든 면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도배, 장판, 가구, 커텐, 베란다, 천정까지는 좋게 꾸밀 수가 있으나 아파트나 사무실의 중앙 내벽이나 기둥이라는 것은 좀 고민입니다.
내벽이란 기둥 역할을 하는 벽입니다. 공간 이용을 하다 보면 기둥과 벽을 꼭 없애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부분을 없애면 집이 무너 집니다.
교회에는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있고, 교회에는 기둥과 같아서 손을 댈 수가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공부도 부부도 직업도 그런 것이 있을 듯합니다.
공회가 손을 대고 싶어도 댈 수가 없는 부분, 이 것을 교리나 노선이라 합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머리는 맵시를 내도 두개골은 손을 대지 못합니다.

아무리 불편해도 손을 대는 순간, 교회가 교회 되지 않는, 교인들이 가장 쉽게 느끼는 분야는 '교회'와 예배'가 들어 가는 분야들입니다.
그다음에는 '교제'가 들어 가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사실 어떻게 선을 그을 수는 없는데 이 부분을 완화하면 교회가 그냥 무너집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시 더하고, 공회가 바꾸면 되는데 바꾸지 않고 있는 일면도 있습니다. 이 것은 별 문제가 아닌데, 바로 우리의 성격들입니다.
공회는 그 역사적 형성 때문에 또 '교회'와 '예배'를 조심스럽게 지켜 내다 보니까 따뜻한 분들은 초기 적응에 어렵고 억센 분들만 많은 편입니다.
따뜻한 곳에는 소나무가 이상하게 잘 견디지 못하고 죽는 것처럼, 추운 곳에는 열대 식물이나 동물이 버티고 싶어도 결국 포기를 하듯 합니다.
공회를 떠난 분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그렇지는 않으나 대부분 좋은 분들입니다. 따뜻한 분들입니다. 최소한 그렇게 되고 싶은 분들입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런 분들, 공회의 옳고 좋은 노선과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모든 교인을 잘 품고 또 서로가 살피며 갈 수가 있게 한다면
공회의 좋은 점을 견지하면서도 공회가 많은 교인들로 채워 지고 그리고 이런 교회를 찾아 헤매는 더 많은 분들을 모실 수 있기 원한 분들
이 분들이 바로 공회에 오셨다가 공회를 떠난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의 소원을, 이런 분들의 최소한의 부탁을 공회는 들어 줄 수가 없었는가?
공회는 그럴 수 있었습니다. 공회? 어떤 공회.. 누가 공회.. 바로 이렇게 해 줄 수 있는 공회는 공회의 행정이 아니라 공회의 교인들입니다.
타 교단은 교리적으로 교인과 교회를 구분할 줄 알지만 실은 하지 않습니다. 집행부만을 교회로 보는 구조입니다. 공회는 교인이 공회입니다.
공회에 아쉬움을 발견했던 분들, 공회에 부탁을 했고 우리 공회의 빠진 부분과 아쉬운 부분과 모자란 부분을 채울 공회는 바로 그 분들입니다.

다른 분들도 있는데 왜 하필 공회를 아쉽게 생각하면서 떠난 분들만 콕 짚을까요? 그 분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일까요?
공회에 있으면서 공회의 지도부가 되고 공회의 원로가 되며 공회에서 나서 자란 공회의 원주민적인 공회의 교인들이 많지만,
이 분들은 대부분 공회의 아쉬운 점을 모릅니다. 공회의 기둥과 내벽을 바꾸면 안 되겠지만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어야 하는데
정작 눈에 보이지를 않으면 어떻게 바꿀까요? 이들에게 공회가 법으로 규정으로 지시로 행정으로 조처하면 바뀌어 질 수 있을까요?
느낀 분, 실감하신 분들, 공회가 고치면 되고 고칠 수 있는 부분을 두고 아쉬워 하는 분들, 그리고 그 점이 눈에 잘 보이는 분들이란,
그 분들에게 주님은 공회의 그 부분을 고치도록 보낸 의사요 기술자요 A/S 기사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다른 분들에게 떠 맡긴다면..


공회의 지난 세월에 바로 이 점이 그렇게 늘 마음 아픈 대목입니다. 공회의 잘못과 고칠 방향을 알고 제시한 분들,
바로 이 분들에게 보여 진 그 부분은 바로 그 분들에게 그 사명을 주님이 맡으라고 공회에 보낸 주님의 사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공회를 평가만 하고 낙제로 점수만 매긴 다음에 떠나 버린다면 환자를 진단해 놓고 그냥 가 버린 의사와 같습니다.
그렇게 가게 된 것도 공회의 역량이 적어서 그렇지만 적어도 공회는 기본 방향과 형성 과정과 지난 날의 역사를 통해 고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대학병원에 귀가 아파서 온 분, 이비인후과 전문의는 그 귀 아픈 사람이 바로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한 눈에 딱 보면 알 듯합니다.
그런데 대학병원의 이비인후과 과장님이 출근을 하면서 귀 아픈 환자들이 주욱 늘어 선 모습을 보면서 이 병원은 희망이 없다 하고 가 버린다면!

백 목사님 생전에, 교회든 공회든 집회든 어떤 교리나 행정이나 어느 분야를 두고라도 어떤 교인이 견디지 못해서 건의를 하게 되면
그 분에게 그 분야를 새롭게 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달라고 합니다. 그 방안이 좋게 잘 제시 된다면 그를 바로 책임자로 세워 버립니다.
그런데 문제점은 봤지만 처방이 잘못 되었다면 문제점은 동의하나 처방을 맡기지는 않습니다. 문제점이 아닌 것을 지적한다면 다시 살펴 보라 합니다.
서부교회와 공회는 세월 속에 스스로 철저하게 많은 면으로 검토하고 늘 들여다 보고 고쳐 왔기 때문에 사실 모자란 점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땅 위에 교회가 완전체일 리는 없습니다. 고친다고 고쳤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보지 못한 부분,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애를 태웁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누군가 짚어 준다면 교회는 드디어 또 하나 고칠 기회를 잡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환영하지 않는다면 그 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공회의, 늘 아쉬운 부분)
교회를 오가며 좋은 얼굴로 나와도 되는데 괜히 화가 난 척하는 분들, 물론 교회가 그렇게 가르쳤겠습니까? 그 날의 상황이나 무슨 체질일 듯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아니라 대부분이 다 그렇다면, 그 것은 경건이라기 보다는 뭔가 성격상 문제이고 사회성의 문제입니다. 조폭끼리야 무섭겠습니까?
그런데 일반 시민으로서는 무서워 보이니 조폭처럼 보이는 교인에게 잘 인사하고 웃고 상대하면서 그의 표정과 자세를 교인답게 만들면 좋겠습니다.
대부분은 해 봤다 합니다. 몇 번이나 해 보셨을까? 한 번? 두 번! 평생 그리 살아 왔고 집안 내력까지 그렇다면 몇 번의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습관의 죄나 잘못은 그 습관을 들인 만큼의 세월과 노력과 인내와 시도가 필요합니다. 사투리 고치듯, 허리 굽은 자세 고치듯 세월이 필요합니다.
몇 번 노력하다 그만 두면 공회의 부족과 잘못을 알면서도 몇 번의 노력 끝에 포기하는 그 분을 주님이 구원할 때는 어느 정도 노력을 했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저희 공회에 왔었고 신풍을 왔다 가신 분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교리나 노선 자체를 따진 분은 거의 없고 그 것은 본심이 아닙니다.
이제 설명한 것처럼 노선과 교리와 방향은 이해를 하고 좋다고 동의하지만 막상 교회 생활을 하루 이틀도 아니라 평생 이리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더 견디지를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역량 부족입니다. 우리의 단점입니다. 고치면 됩니다. 고치는 곳을 교회라 합니다.
어떻게 고칠 것인가? 이미 있는 교인들, 이미 내려 온 공회와 교회의 역사는 성경을 가지고 교리와 노선과 교회의 방향만 바로 잡았습니다.
이렇게 바로 잡아 놓은 교회에 누가 와도 좋게 잘 다닐 수 있게 만드는 것은 공회를 세우고 지켜 온 분들의 몫이 아니라 새로 오신 분들의 사명입니다.
한 나라가 망할 때 몸 바쳐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들은 전쟁에는 펄펄 나는 실력자들이나 이들은 평화시에 거의 전부 할 일을 못하는 인물들입니다.

전쟁 때는 적을 깨면 되고, 깨기 위해서 습격을 하고 가차 없이 전멸을 시키고 동정도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가족과 주변을 돌아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이 나고 평화의 시기가 되어 나라를 이제 먹이고 입히고 잘 살게 만드려면, 이 때는 전쟁의 영웅이 아니라 정치가가 필요합니다.
국민을 달래기도 하고 기다리기도 하고 밀었다 끌어야 합니다. 전쟁에 이러다가는 전멸을 당하지만 평화시는 무자비하게 쓸면 내 나라가 망합니다.
전쟁 영웅들이 전쟁 후에 자기들이 2선으로 밀려 난다고 불평을 해도 그 것은 서로에게 주어 진 장점과 사명과 실력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독립 운동을 잘한 사람들이 독립 후 나라를 운영하면 처음에는 아주 잘 통치를 하지만 어느 시기가 지나고 나면 독립의 영웅 때문에 나라를 망칩니다.
베트남의 호치민, 중국의 모택동, 소련의 스탈린, 북한의 김일성이 독립이나 전쟁 영웅이라 해도 평화시 계속 집권하는 바람에 나라는 망했습니다.


공회의 지도부, 공회를 아는 사람, 공회의 노선과 교리의 전문가, 공회의 뼈대를 지켜 내고 오늘 이 혼란한 중에 공회의 정체성을 꿋꿋이 지키는 분들,
공회에 새로 온 교인은 그들에게 감사해도 좋습니다. 그들을 가르친 그 선생들을 존경하고 싶다면 정말 존경해 마지 않도록 존경하시라고 권합니다.
공회는 그 성격이 옳고 틀린 것을 찾아 단칼에 고쳐 왔습니다. 남이 대충 넘어 가다가 교회가 속화 될 때 공회는 수술을 거듭했고 미루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회를 알수록 조폭이나 독립군처럼 험해 보이고, 전쟁에 일선 병사들과도 같습니다. 험하고 독하고 매정하며 이상하게 무뚝뚝합니다.
이들이 세우고 지킨 이 교회를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자라 나오고, 처음 오는 교인들이 따뜻함을 느끼고, 이 곳을 배우고자 하는 분들에게 안내하는...
이런 배려 친절 이런 기회 이런 노력은 공회를 다니면서 불편한 점을 눈에 담아 두면서 그리고 공회를 이제 좀 알 듯한 분들이 나서야 할 부분입니다.




(물론, 기둥과 내벽은 손 댈 수 없습니다.)
남녀를 섞으면서는 나가지 않습니다.
불신 가족이 불편하게 생각하는데도 교회를 잘 다니는 또래가 자꾸 모이게 되면 어떤 가정은 문제가 생깁니다.
처음에는 커피 타임을 가질 수도 있고 별도 모임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 만날 수도 있으며 여러 기회에 여러 노력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안 믿는 사람의 동호인 모임처럼 또는 동창회처럼 그렇게만 나가는 것은 곤란합니다. 처음은 다양하게 시작을 해도 갈수록 발전은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커피 타임으로 만나 신앙 생활은 물론 살아 가는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나는 기회가 더할수록 신앙 이야기가 중심이라야 합니다.
서로 믿으면서 느끼는 애로, 아이들을 신앙으로 길러 가는 지혜와 정보. 지난 주간에 받은 말씀을 주제로 대화가 된다면 굉장히 좋은 모임이 됩니다.

이런 모임은 영어학원의 단계별 과정처럼 될 수는 없고, 어떤 프로그램으로 할 수 없습니다. 적절히 잘 살피며 조심하며 한 걸음씩 걸어 가면 됩니다.
무엇을 조심할지 알면서, 편하게 좋게 노력하다 보면, 시편 1편에 의인의 길에 선 의인 모임이 되어 시절을 좇아 신앙 결과를 가질 수 있습니다.
신앙으로 자라 가는 방향, 신앙과 말씀을 중심에 둔 모임, 세상의 허다한 모임과는 다른 모임이 된다면 이는 교회 안에 또 하나의 좋은 교회가 됩니다.
될 수 있으면 부부끼리 먼저 시도가 되면 정말 더 좋습니다. 부부는 늘 쳐다 보니 그렇고 마음 맞는 사람만 만나면 부부는 식어 질 수도 있습니다.
엄마들끼리는 만나고 아이들은 방치가 된다면 이 것도 거꾸로 가는 것입니다. 자꾸 토를 달면 복잡하고 어려워 못하겠다 할 수도 있겠으나
이 문제는 못하겠다고 그냥 둘 일이 아니라 해야 하고 바르게 자라 가야 합니다. 다른 교회의 성가대 폐단을 우리는 여학생 찬양대로 해결을 했습니다.

다른 교회가 목회자들이 월요일에 만나 먹고 다니는 교역자회를 공회는 연경으로 또 기도회로 모여 교회와 교인을 위해 더욱 좋게 노력해 왔습니다.
집회 때 다른 곳은 어른 예배는 따로 진행하고 청소년은 밤무대를 만들어 세상처럼 신나게 보냈으나 우리는 따로 모여 그 날 배운 것을 복습했습니다.
처음에는 편한 자세로 돌아 가며 배운 것을 설명하게 했습니다. 지금은 밤 예배 진행 때문에 조정 되고 있으나 학생들의 복습 시간도 잘 사용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불신 가정 학생만 20여 명이 집회를 참석하게 되자 오전 오후 집회만 참석하고 오후 늦은 시간과 저녁 시간은 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처음에는 1회 참석을 그 다음에는 2회 참석으로, 그 다음에는 더 나아 지게 한다면 어떤 그룹의 어떤 별도 모임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우리 공회는 모든 면에서 기본적으로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차분히 진심을 가지고 노력하면 뭐든지 한 분의 수고를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노력도 필요합니다)
사회에 단체를 원만하게 지도해 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잘 이끌거나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 가려면 세월이 걸리고 단계가 필요한 줄 압니다.
불쑥 한 번 말했다가 그 말이 막히면 포기하거나 화를 내거나 자존심을 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많으면 빠르게 되지 않음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꾸준히 노력합니다. 마침내 목표한 것을 얻어 냅니다. 교회는 누구의 개인 목표나 취향을 달성하는 곳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옳고 바른 것을 찾습니다.
공회는 방향과 노선과 교리까지는 좋은 편입니다. 이 안에 있는 분들이 실제 살아 갈 때 기쁨과 감사와 보람을 느끼도록 돕는 면이 부족합니다.
바로 이 부분을 한꺼번에 해결한다 마시고, 이런 면은 결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한국 사람, 우리들의 체질, 공회인의 성향이 좀 어렵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고치는데 시간과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고 그 수고가 십자가 수고입니다. 주님을 생각하면서 의견을 내신 분들의 수고를 기대합니다.


최근에 여러 교회에 여러 종류의 여러 교인들의 부탁과 제안이 한꺼번에 있었습니다.
이 분들에게 시간을 갖고 함께 의논을 하며 다양하게 한 가지씩 노력해 보겠습니다.
좋은 노선에 좋은 교회가 분위기까지 좋게 만들어서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게시물은 서기님에 의해 2022-06-02 17:31:45 문답 / 발언에서 복사 됨]

[이 게시물은 서기님에 의해 2022-06-02 18:29:01 문답 구자료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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