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새19.5.8 출21:28 소의 관리, 자기 장점의 관리

집회 다시보기

동영상이 준비 중이면 '제목'란에 요일만 표시, 설교 타이핑이 준비 중이면 제목 앞에 별(*)을 표시, 타이핑이 첨부되면 점(.) 표시 

.수새19.5.8 출21:28 소의 관리, 자기 장점의 관리

교인 2 188 2020.06.09 17:16
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설교요약

① 신분법 (자유) : 원하고 원함으로 오직 진리와 영감에 순종하는 자유
② 신분법 (주종) : 종을 통해 다시 신앙의 자유로 나아가라
③ 생명법 (고살) : 필벌은 남의 고통을 알게함으로 십자가를 가르침
④ 생명법 (오살) : 판단에는 늘 사람의 행위와 하나님의 역사를 구별
⑤ 생명법 (하극상,인신범) :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 그 근본과 연결을 바르게 
⑥ 상해법 (사람 상해, 종 상해, 낙태)
 - 타인의 사명, 기능 요소를 손상
⑦ 재산법 (소)
 -  소의 관리, 자기 장점의 관리

190507 집회 7 (수새)

제목 : 소의 관리, 자기 장점의 관리

본문 : 출애굽기 21장 28절 -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에 맞아 죽을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 것이며 임자는 형벌을 면하려니와 소는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인하여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므로 남녀간에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죽일 것이고 임자도 죽일 것이며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명하면 무릇 그 명한 것을 생명의 속으로 낼 것이요 아들을 받든지 딸을 받든지 이 율례대로 그 임자에게 행할 것이며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에 맞아 죽을지니라

(기도)
기도 드리겠습니다. 완전자, 영원불변의 절대의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목적하시고 끌려가는 소가 아니라, 알지 못하는 돌이 아니라, 배우고 감사하고, 기뻐함으로 찬송하며, 소원하고 걸어가는 신앙의 자유의 참 신앙을 원하셔서, 우리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오늘 세상에 두지 않으시고, 중생으로 불러주신 주님. 중생의 생명을 가졌으니, 힘써믿기를 소원하는 저희들 되게 해 주옵소서. 쉬울 때에 원함으로 믿는 것은 쉬우나, 투자하며 희생하며 포기하며, 어려워도 즐거운 마음, 감사한 마음으로 믿는 것은 우리로써 어렵사오나, 말씀으로 그리되는 소원을 가지고 노력하는 저희들 되게 해주옵소서. 아직은 그렇게 되지 못하나, 장기간의 고문과 고형과 사람으로 넘어갈 수 없는 밤중의 극한 환란이 있을 때에도, 어떻게 주의 이름으로 능욕받는 이 일에 합당한 자가 되었는지, 찬송하며 나온 사도들과 같이 우리도 미리 준비하여 그런 날이 되어질 수 있게 해주시고, 그로 인하여 주님 오심을 반갑게 기다리고, 각자 주님이 부를 날, 주님 앞에 찬송하며 설 수 있도록, 자유성의 신앙, 주님과 연결된 생명의 신앙, 그리고 우리에게 각자 맡긴 분담의 자기 장점, 자기 특점, 자기 위치와 사명에 감당할 수 있는 기능 구원, 우리의 모든 요소를 아껴서 잘 살펴, 주님 원하시는 대로 충성하는 저희들 되게 해 주옵소서. 이 아침도 재산법으로 우리에게 맡겨 놓은 재산, 우리에게 맡겨 놓은 우리의 자본, 우리의 시간, 우리의 교인, 내 마음 속의 여러 요소들, 심신의 여러 기능들, 복되게 관리하고 복되게 잘 사용함으로, 가진 것이 바로되어 내가 바로 되고, 내가 바로됨으로 가진 것이 더 바로되어, 주님으로만 달려가는 이 아침이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깨달아 감사하고, 원함으로 걸어가는 신앙만 신앙입니다. 매여, 끌려가는 신앙은, 신앙은 아니지만은, 신앙이 되기 위해 자라가는 과정으로 보시면 되어집니다. 세상에 붙들려, ‘내가 이래서 되나?’ 하는 신앙은, 얼른 돌아서서 회개해야 됩니다. 세상 좋아 교회가 생각도 나지 않고, 말씀 떠난 생활이 흐뭇하여, ‘왜 내가 교회를 다니고 말씀에 붙들렸던가?’ 이리 되어진다면, 하나님의 크나 큰 매가 오든지, 아니면 불택자이든지, 둘 중에 하나일 수 있어서, 이게 자랑이 아니고, 얼마나 근심해야 될 재앙인지 모릅니다.

만사를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져야 되는데, 집회를 오는 정도의 세상 포기, 희생은 하고 오는 여기 우리가 되어져 있습니다. 대부분은, 어느 정도의 소원과 어느 정도의 감사일지는 몰라도, 어느 정도 되는 것이 여기 있기 때문에, 신앙에 굉장히 앞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장기간의 고문과 고형 속에서도, 사도들이 사도행전 5장에, 채찍질 당하고 풀려나갈 때, ‘어떻게 주의 이름으로, 이렇게 매 맞을 자로 불려가, 매까지 맞고 나올 수 있는 이런 우리가 되었는가?’

어떤 분들은 열심히 믿었는데, 일본 경찰이 불러다가 예수 믿는다고 두들겨 패니까, 집에 와서 얼마나 화가 났던지, 성경을 불사지르고, ‘이 놈의 예수 다시 믿는가 봐라’ 그리고, 죽는 날까지 안 믿어버린 분도 있습니다. 집회장소 건너, 산 넘어 일입니다. 우리공회 가장 많은 교인의 집안의 제일 어른입니다. 일제 때에 교회를 설립하고 설교까지 했던 분입니다. ‘이렇게까지 충성하면, 복이 하나 더 오지 않겠는가?’ 복이 아니라 매가 오니까, ‘왜 교회 대표가 되어, 내가 가서 대표로 매를 맞아야 되나?’ 그리고, 믿지 않아버렸습니다. 평소에 작은 손해도, ‘어떻게 주님 앞에 이렇게 바쳐드릴 수 있고, 내 것을 꺽고 드릴 수 있는 이런 내가 되었나? 감사’ 이것은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는 당장에 그리 되어야 되고, 이것은 뭐 마음 먹으면 바로 그리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북쪽에 믿는다고 붙들려가서 그 자리에 처형을 받으면 ‘뭐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뭐 눈 감고 그냥, 한번 죽을갑세, 전쟁을 하다가도 많은 군인이 죽고, 의료 사고에도 죽는데, 순식간에 죽는 것은 죽을 수 있다’ 그것도 어렵지만은, 반가운 마음으로 순간 죽음을 각오한다면, 귀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 위에 장기간의 고문과 고형이 쪼아 들어오며, 그 다음 ‘어떠하냐?’ 이렇게 물어본다면, 저부터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 아침에 이 말씀을 읽으며, 고문과 고형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그 고문을 능가하고, 그 고형에 고통당하는 육체를 내 마음이 달래가며, ‘이게 주님 십자가에 동참이다. 흙 한주먹으로 만들어놓은 이 지극히 못난 것이 만유주 하나님의 구원에 고난에 동참을 하는 것이다.’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내가 주님의 일부가 되는 일이요. 주님이 되어지는 방법입니다.‘이럴수가 있나?’ 토끼가 호랑이한테 먹히면, 토끼는 없어졌으나 토끼의 요소는 어디에 들어가 있지요? 호랑이가 되었습니다. 토끼가 늑대한테 잡아먹히면, 토끼는 존재적으로 없어졌는데, 토끼의 요소가 분해가 되어 늑대의 뼈가 되고 살이 되어, 늑대의 일부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주의 것되는 방법은 먹혀야 되는데, 식인종 같으면, 구약 같으면은 이 몸을 바쳐 불살라, 주의 것이 된다고 육체의 이스라엘은 그렇게도 가르쳤지만은, 신약의 우리들에게는 몸은 그대로 두고, 이 몸을 다스리는 내 주체, 내 인격, 내 신앙이, 예배 보는데 무릎이 아프니, ‘무릎아, 고생한다.’ 그런데, 그 무릎으로 죄 짓고, 그 무릎으로 즐겁게 등산은 다녔고, 그 무릎으로 공 차면서, 아픈 것은 즐거워서 오히려 자랑을 했고, 그 무릎으로 돈 벌며, 농사 지으며 닳아빠졌을 때에, 벌어 들어온 돈 때문에 그 무릎을 기꺼이 희생했고, 자원해서 취직을 했는데, 예배드리느니라고 엉덩이가 아프고, 무릎이 아플 때, 의자를 놓고 않지만은, 또 등받이도 하지만은, 피할 수 없는 무릎과 허리에 고통이 올 때, ‘무릎아, 허리야, 말씀 받느니라고 고생한다. 너 고생으로 진리를 깨달아, 이 진리의 내가 되고, 내가 됨으로 이 일에 네가 쓰여지고, 닳아지고, 너가 당하는 고통은, 그거 십자가의 부스러기 십자가가 되어진다.’

이렇게 한 방울, 한 방울씩 좋을 때 모여진 것이 총합이 ‘기름 준비’가 되어, 어두운 저녁까지 불을 켜는 사람, 더 어두워지니까 기름이 딸려서 이제 끝나는 사람. 밤중까지 이어지는 사람, 인간으로서는 넘어설 수 없는 그 한계를 넘어서고, 그 다음 주님을 맞이하는 그 정도에 따라서, 나의 요소가 주의 요소로 먹혔고, 쓰임으로 없어짐으로 바뀌었고, 토끼가 호랑이 에게 먹힘으로, 토끼가 호랑이가 되어버렸습니다. 토끼 이것은 원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와 주님의 사이, 우리와 진리의 사이는, 진리가 나를 쓸 때에 내가 쓰임을 받는 순간에, ‘이런 횡재가 어디에 있나? 이런 합당한 자가 되어 능욕 받는 이 영광의 일에 내가 드디어 들이 섰구나! 참 감사하다.’ 하여, 내가 감사함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나를 진리에 붙들려지고, 쓰여지고 없어지고, 주님 동행에 이것을 사용을 해버리면, ‘자유성’. 그러면 내가 없어지고, 없어진 내가 주의 일부가 되고, 주의 손 발이 되고, 주님으로 자라가는 이런 내가 되어집니다.

그래서 신앙의 ‘자유성’이라는 것은, 믿는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고문과 고형 속에서도 붙들고 가야 되는 ‘가치관’입니다. 가장 귀한 것. 애국자들, 독립 운동하는 사람들이, ‘내 나라를 위해서 내가 죽을 수 있다니, 이런 영광, 이런 기회가 어디 있나?’ 손꼽아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기회가 올 때에 한 몸을 던져버리듯이, 썩어질 나라, 약소국, 살려나봐야 나라 꼴도 못 찾는 그 나라를 위해서도 그리 살고 죽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도령, 이몽령이 같은 그 10대에 벌써 개망나니 하는 짓을 보니까, 그 놈 평생에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대충 짐작을 할 수가 있겠지요? 그 남의 동네, 아버지 따라 남원에 왔다가 10대 때에 벌써 공부는 안 하고 집적거린 것이 나중에 그게 높은 벼슬하고 그냥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그런 놈을 향해서 춘향이가 ‘이 한 몸 죽어 나가도 변치 않는다’고 이런 춘향이 노래도 있고, 심봉사 아버지를 위한 몸 바치는 심청이도 있고, 국가에 애국하느니라고 죽어나가는 사람도 있는데, 그 일에 쓰여진 것은, 늑대한테 먹힌 것이고, 이리한테 잡혀 먹힌 것이고, 족제비한테 먹힌 것이고, 먹혀봐야 족제비되고 이리되고, 잘해봐야 호랑이 되는 이런 맹수성, 이런 몹쓸 인간들이었는데,

‘만유주 하나님, 불변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영원 자존자 완전성의 내가 쓰임을 받게 되었다니? 내 경제가, 내 행위가, 내 시간이, 내 장점이, 이럴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원하고 원함으로 준비하여 ‘주가 쓰시겠다.’ 말씀이 내놔라 할 때에는 기다렸던 모든 준비를 아낌없이 들이부어, 주님의 머리에 삼백 데나리온 향유를 일시에 바로 부을 수 있다니? 평소에 아무렇게나 흩어 버리고, 자기를 치장하면 다 방종이 되고, 낭비가 되고, 자기를 영화롭게 한 죄가 되는데, 주님 필요할 때에 그 발에! 주님 원할 때에 그 머리에 부어! 그 동안 준비했던 전부를 쏟아붓는 이런 마음. 옆에 지켜보던 제자들이, ‘여인이 결혼할 때를 위하여 평생에 모아놓은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그 제일 귀한 향유 항아리를, 그 옥합을 저렇게 깨뜨려 허비하다니?’ 12사도는 옆에서 허비라고 했습니다. ‘아, 예수님 발에 잠깐 찍어 향유는 그렇게 해도 충분한데, 들이 부어? 발에 묻자 전부 땅 바닥으로, 이 땅 위에, 이 세상 위에 없어지는 저런 낭비, 저런 허비, 저런 과소비를 하고 있나?’ 자기를 치장하는 것은 과소비이고, 허비였고, 주님께 필요할 때에 쏟아붓는 기회는 한번 밖에 없는 이런 횡재인데, 12제자도 생전에는 허비라고 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 받고 그들은, 그때야 깨닫고, 이 한 목숨 주님이 거두워갈 때를 기다리며 달렸고, 12제자의 원하는대로 기회 주실 때마다 아낌없이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팔아 만든 향유를 주의 발에, 주의 머리에 붓고 갔습니다.

오늘 우리도, ‘신앙의 자유성이란, 평생에 늘 한번도 빠짐없이 가져야 되는 나의 정체성이라!’ 이렇게까지 살펴주셔야 됩니다. ‘이 주일을 기다렸고, 이런 주일이 없었더라면, 내가 이 날, 이 시간에 어디가서 무슨 짓을 했겠는가? 참 감사하다.’ 훈련이 덜 되어 앉는 것은 어렵고 시간 빼는 것은 아직도 서툴지만은, ‘어떻게 주일을 아는 내가 되었고, 주일 앉을 수 있는 내가 되었으니 참 감사하다.’ 그 주일은 그 주일이고, 습관으로 오고 가고, 밀려 오고 가고, 남이 보기 떄문에 부득이함으로 앉는 주일은, 육체의 이스라엘, 남들이 볼 때에는 주일이고, 주님이 볼 때에는 신약의 신령한 오늘은 주일은 지키지 않은 사람입니다. 만사, 매사를 그렇게, ‘원하는 신앙으로 걸어갈 공회가 맞는가?’ 그러면 이 공회가 맞습니다. ‘이것은 못 가서 그렇고, 내가 부족해서 그렇지, 이 교회는 내 교회라, 이 교회를 위해서는 원할 때에 내 목숨까지 바칠 때에 영광이 되겠다.’ 할 때에 그 교회가 모 교회, 자 교회, 본 교회가 되어집니다. 평생에 남의 교회 다니는 사람, 평생에 남의 교파에 선 사람, 평생에 남의 가정에 아내가 되어, 남들이 보면 건전한 부부로 평생을 살았는데, 마음은 그 가정의 아내가 아닌 여자로 평생을 살 수도 있습니다. 춘향이도 뒤에 정신 차리고는 그리 되지 않았을까? ‘이런 놈을 위해서, 내가 그런 고문을 다 견뎠을까? 이런 잡 놈이’ 조선시대의 이몽룡이, 그 이도령이 춘향이 하나보고 살았을 것 같습니까? 임금부터 여자가 몇 명인데? 그것을 따라가야 출세이고, 훌륭한 사람인데. 그 십대에 철 없이, 몰라서 절개를 지키느라고 온갖 고생을 다 했는데, 철이 들고 보니까, ‘썩을 놈, 이런 놈을 갖다가 위해서 내가 살았다니?’ 그런데 남들이 알아주니, 여전히 겉으로는 절개를 지키지만은, 속으로는 ‘참 인간 의지할 것 없구나’ 그랬다면 그 마음에, 내가 내 목숨 다 바쳐, 바침으로 감사할 이런 절대의 세계는 없을까? 그러지 않았을까? 그런데 복음이 없으니 그러다가 찾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었을 것이고,

못난 우리들은 그럴 생각도 못할 우리들인데, 주님이 먼저 오셔서 전도하시고, 구원하시고, 이 복음에 이런 말씀을 깨닫고 보니까, ‘이 말씀, 이 길, 이 신앙을 위하여 수고하고 나를 꺽고, 나를 절제하고, 나를 끌어갈 수 있는 이런 교훈을 받고, 이런 길을 받아, 이런 자리가 마련이 되었고, 출애굽기 21장이 이런 말씀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니, 나도 우리 중에 하나가 되어, 이 복음이 내 복음이 되어야 되겠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가정에서든지, 직장에서든지, 늘 잊지 말아야 되는 것이 신앙의 ‘자유성’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 붙들려 연결될 때, 생명의 문제, ‘생명을 아껴라’, 생명이 잘못되면 죽음으로 대신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기 위하여 ‘평소에 남의 이 하나를 빼면, 너의 이도 하나 빼어, 네가 뺀 이가 어떤 고통과 어떤 가치가 있는지, 실감하고 느껴보라! 그리고 다시 한번 빼보라’ 그러면, 뺄 사람이 없습니다. 남의 이만 치고 그 사람이 용서하니까, 하나 친 것이 아니라, 둘 치고 셋 치고 평생에 남을 치다가, 하나님 앞에 서고보니까 돌이킬 기회가 없어져버렸습니다. 알고 서고 보니까.

그래서 살아갈 날이 남아 있는 생존의 교인에게,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남을 쳤을 때에는 반드시 동급으로 손해를 끼쳐,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반드시 남에게 끼친 손해는 자기도 그 손해를 겪어보게 해서, 그 다음 구원의 체휼, 구원의 긍휼, 구원의 동정하는 자가 되라.’ 부자가 거지가 불쌍해 보여 밥 한술을 줘도 좋은 일을 했지만은, ‘그보다는 이 추운데 밥 한 술에 저렇게 어려우니, 그 어려움이 어느 정도일까?’ 잠깐 마음속에 느끼면서, 밥 한 술을 주면, 이건 그냥 동정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긍휼을 지나 ‘체휼’이 되어집니다. 밥 한술을 주며, 그냥 복지한다고, 구제한다고 던져줄 수도 있는데, 그건 밥 한술에 끝납니다. 어려운 그 사람의 형편이 나를 앉혀보고, 느껴 보고, 그리고 내게 주신 하나님의 역량을 계산한 다음, ‘이 형편에 저 사람에게 이 형편은 전달하는 것이 맞다’하고 넘겨 줄 때는, 이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에,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여기까지 원하는 마음에, 그 다음 하나님과 연결된 신앙으로, 다른 사람의, 하나님과의 연결된 신앙의 생명을 아껴주고,

어제 밤에 ‘상해법’을 3번째로 살펴봤습니다. 자원하는 사람, 하나님께 붙들려 살아가는 신앙의 사람이 가진 ‘장점’은, 신앙의 요소와 특별한 기능은, 찬송의 기능 가진 사람도 있지요? 기능의 특별한, 기도의 특별한 은혜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전도의 은혜 받아, 똑같이 전도 하는데 많은 열매가 맺혀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능과 심신의 요소는 다 다르며, 맡길 사명과 위치에 따라 장 단점이 다른 것이지, 사람이 못난 사람이 없고, 사람이 남보다 못난 사람은 없습니다. 눈이 듣지를 못하니, 눈이 귀머거리임에는 틀림이 없지만은, 눈보고 못 듣는다고 장애자라고 그러고, 쥐어박는 사람은 없습니다. 눈과 귀를 비교해 볼 때, 눈이 듣지 못하는 면을 보니까, 귀머거리는 귀머거리인데, 눈에게는 보라고 위치와 사명을 주셨기 때문에, 눈이 못 보는 면을 가지고, 못 났다고 비교하고, 자기를 비하하고, 자기를 쥐어박을 것은 없습니다. 잘 살펴, 내게 준 사명이 아니라, 내게 준 위치가 아닐 때는, 그것은 귀가 듣는 것을 부러워하고, ‘나는 눈이니, 눈으로써 보는데 불편이 없는가?’ 이 면에 주력하면 되기 때문에, 천 명이든 만 명이든 택한 백성, 하나님의 사람, 교인들은 단 한번도 남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고, 남보다 더 못한 사람이 없도록 불러 모아 놓으셨는데, ‘연보 많이 하는 사람은 신앙이 있고, 연보 적게 하는 사람이 신앙이 없어,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할 수 있는데도 안한 것이 문제이지, 잘 살펴서 할 수 있는만큼 했을 때에는, 다섯 달란트와 한 달란트가 주님 앞에 똑같은 신앙과 똑같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 그래서, 내가 내게 받은 은혜와 내 장점을 못 살려 하나님 앞에 낙제이지. 남의 장점과 남의 위치와 나를 비교해서, ‘귀처럼 듣지 못하니, 눈인 나는 보는 장점이 있으나 듣는게 없어서 장애자다, 못 났다.’ 그러는 것은 기본적으로 신앙에 큰 문제가 생깁니다. 그 사람 눈 노릇 제대로 할 일은 없습니다. ‘귀가 들으니, 나는 보는 면을 충성해야 되겠다.’ 그래서, 각자 주신 사명과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해야 되는데, 자원하는 신앙이 하나님께 붙들려, 생명의 신앙이 되었는데,

내게 맡긴 나의 요소, 나의 장점, 나의 기능을 만약에 ‘손해 보이거든’,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신앙건설의 ‘파괴’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의 신앙의 요소와 기능도 상해하지 말라’, ‘돌로 치지 말라. 주먹으로 쥐어박지 말아라.’, ‘실수하여 잘못했을 때는 돈으로 갚아라’, ‘그 사람의 그 기능, 그 요소가 대충되고, 보충되고 원상회복이 되기까지 네가 가진 전부를 다하여 보장을 하라.’ 책임을 말했습니다.

오늘 아침은 ‘재산법’입니다. 자유성의 신앙의 본질.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이 받아 가진 자기 신앙의 요소와 기능과 다 잘 갖췄는데, 그가 가진 돈, 그가 가진 소, 그가 가진 재산이라는 것은, 자기 위치에, 자기 사명에, 자기 기능에, 자기 요소로 자라가는데 필요한 이것은 ‘재료’입니다. 건축 설계 자격증도 있고, 건축 허가증도 받았고, 인부들도 다 모았고, 땅 문제도 전부 해결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벽돌을 10장 갖다 놓으면, 10장만큼만 지을 수 있습니다. 3층을 올릴 수 있는 몇 만장 벽돌을 확보했으면, 3층까지는 올라갑니다만은 그 이상은 벽돌이 없어 못 올라갑니다. 이게 믿는 우리에게 주신 ‘시간’이며, 믿는 우리가 가진 자기의 ‘재산’입니다. 그 재산, 구약에 목축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재산은 ‘소’였습니다. 현금, 금융, 돈이 없던 시절, 있어도 돈은 멀고, 우리나라는 논과 밭이라면, 구약 이스라엘의 직업의 가장 귀한 재산, 본질적인 재산은 ‘소입니다.’

“소가” 소만 해당 됩니까? 나귀는 해당이 없나요? 모든 것이 마찬가지인데, 가장 ‘대표적’이고, 중요한 소를 앞세워, “소가” 28절, “남자나 여자를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에 맞아 죽을 것이요” 소라는 것은, 사람이 기르는 짐승, ‘재산’입니다. 오늘 신약 우리에게는, ‘네가 지도할 너의 교인, 너희 교회 교인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쥐어 받아, 그 사람이 신앙을 포기하고, 신앙에 손해가 간다면, 그 사람의 신앙이 중단이 된다면 책임져라.’ 구약은 기르는 짐승, 신약은 크게 말을 하면 교회의 교인, 내 속으로 들어오면, 내게는 소처럼, 내가 가지고 내가 써야 되는 나의 재산이 있습니다. ‘신앙의 재산’, ‘신앙의 방편’이 있습니다.

“소가 남자나 여자를 죽이면”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대우합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죽이면’ 신앙의 앞선 사람의 신앙을 죽이며, ‘남자’를 죽인 것이고, 앞선 신앙의 책임자를 뒷받쳐, 함께 하며 보충하며 그를 신앙으로 만들도록 기도하는, 그 따르는 사람의 신앙의 그 사람을 죽이면. 그 다음 넘겨서 “소는 돌에 맞아 죽을 것이다” 사람과 짐승을 확실하게 ‘구별’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을 죽인 그 신앙은 ‘둘째 사망’에 빠집니다. 다시는, 다른 사람의 신앙을 죽인 그 소는, 자기 그 요소는! 자기가 잘 쓰고 관리하여 길러가야 되는 그 면은, 다시는 구원의 기회가 없어집니다.

그 다음은, “그 소의 고기는 먹지 말라” 고기라니요? 그 짓을 한 그 요소, 사람의 신앙을 해친 요소, 그런 요소는 자기 것으로 삼지 말아라. 구약 레위기 11장에 이어지는 말씀에, ‘쥐는 먹지 말아라’ 쥐만 안 먹으면 되나요? 쥐 같은 눈치 보는 인격이 되지 말아라. 족제비도 먹지 말아라. 기웃거리며 눈치보며 기회 보며 냅다 차고 도망가는 그 인격! 그 인격을 만드는데 움직인 요소들,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라. ‘돼지도 먹지 말아라’ 쥘 수 있으면 다 쥐어버립니다. 먹을 수 있으면 다 먹고 치워버립니다. 남이야 더럽다고 하든지, 말든지. 네 것도 내 것, 내 것도 내 것. 먹을 때도 먹고, 안 먹을 때에도 먹고. 손 대서는 안되는 것도 손 대고, 손댈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못 먹는 것이 없고, 못 가는 것이 없고, 구별이 없고, 있는대로 다 끌어다가 다 먹어치우는, 오늘 우리는 다 돼지들 아닌가요? 이 직장, 남들은 들어가면서 좋다고 출세라고 하지만은, 믿는 사람으로서는 문제가 딱 보니까 있지만은, 이걸 구별하면 ‘소’와 ‘양’입니다. 그러든 말든 먹어 치워버리면, 안 먹을 것도, 구별도, 가릴 것도 없이, 너는 있는대로 다 끌어 먹는구나. 해야 될 결혼도 있고, 안 해야 될 결혼도 있고, 가야 될 직장도 있고, 포기할 직장도 있고, 배우면 좋은 기술도 있는데, 이 기술은 배워서 아니되는 기술도 있을 것이고, 포도주 맛을 보는 기술자가 있답니다. 굉장히 돈을 많이 받는 전문가랍니다. 연봉 1억 주면, 포도주 맛을 보고, 포도주 회사에, 포도주 제품을 생산하는 기술 책임자로 오라는데, 향이 특별하고 맛이 특별하여 가자면 가야 되겠습니까? ‘저는 돼지가 아니라, 그 직장은 못 갑니다.’, ‘맥주회사 외판 총 책임자가 되십시오. 연봉 10억 주겠습니다.’, ‘저 돼지가 아니,라 그건 못 먹습니다.’ 천하 모든 사람이 못 가서, 발버둥쳐도, 우리는 돼지가 아니라, 먹을게 있고 안 먹을게 있고, 구별이 있을 때, ‘소’와 ‘양’입니다.

가질 수 있으면, 먹을 수 있으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으면, 밑도, 끝도, 종류도, 대상도 없이, 다 끌어다가 먹어 버릴 때, 너는 돼지다. 이것을 구약에 가르치기 위하여 ‘돼지는 먹지 말라’ 유대인들은 지금도 돼지고기 안 먹습니다. ‘왜 먹지 말라고 했는가?’ 그것은 모르겠고. 돈이라는 돈은 다 거머쥡니다. 그 사람들. 법이라는 법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법률가들은 전부 모두 그 사람들입니다. 언론 전부 그 쪽입니다. 비판할 것이나, 비판 안할 것이나, 전부 언론, 금융, 학계, 의로계, 전부 다 거머대고, 다 점령해놓고 돼지고기는 안 먹습니다. 왜? 그들 조상에게 주님 오실 때까지 돼지 고기를 먹지 말라고 했던가? 믿는 사람, 하나님의 백성이란 줘도 못 먹는 것이 있고, 남들은 싫다고 해도, 먹어야 될 것도 있고, 남은 한 번 먹고 꿀꺽 삼키는데, 나는 한 번 듣고 또 새겨보고, 한번 듣고 또 새겨보고, 신앙의 자유성이 뭔지? 한 시간 배웠고, 두 시간 배웠고 여섯시간째 또 게워내워 앂어. 또 새김질해서 또 삼키고, 평생 되새김질하는 것이 소와 양입니다. 그리고 걸어갈 때에는 구별합니다. 갈 데인지? 아닌지? ‘그렇게 까다롭게 계산하고 살피고, 다 따지고 언제 직장 가고? 언제 돈 벌고? 언제 공부하고? 언제 이 험악한 경쟁 사이에 생존하며 살아남겠는가?’ 그것은 주님께 맡길 때에 신앙이고, 그게 걱정이 되면, 자기가 주님이지요.

‘돼지 먹지 말라’, ‘족제비 먹지 말라’, ‘박쥐 되지 말라’ 박쥐도, 레위기 11장에서 못 먹게했습니다. 박쥐 먹고 싶다고, 그게 잘 잡히나요? 사람 눈에 안 띄는데만 돌아다니고, 박쥐 잡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데, 박쥐 구경 하는 것도 어려운데, 왜 박쥐를 먹지 말라고, 신구약 성경 그 많은 말씀 중에 박쥐를 적어놓으셨겠습니까? ‘박쥐를 먹지 말아라’ 먹으면, 내가 됩니다. ‘박쥐가 되지 말라’ 그말입니다. 박쥐는 구경 못 해서, 징그러워서 안 먹고,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가, 박쥐의 행위는 하고, 너는 박쥐를 먹은 박쥐 인간이다. 음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레위기 11장에 그렇게 꼼꼼하게 구별하고 기록해놓은 것은, 신령한 오늘 우리들에게, ‘이런 사람이 되라. 이런 사람이 되지 말라.’, “남을 떠 받아 죽이는 소의 고기는 먹지 말라.” 그런 인간 되지 말라! 목회자도 마찬가지고, 교인도 마찬가지지만은, 어느 정도 가다보면, ‘저 사람 없으면 나에게 기회가 주어지겠다.’ 할 때, 슬쩍 떠밀어 그냥 제거하고, ‘드디어 내가 그 자리에 올라갔다’ 그러기가 참 쉽습니다. 그 유혹을 죽는 날까지 인간의 본능은,  자기중심이 있고, 자기중심이란 무저갱으로 끌어대기 때문에, 이런 요소가 있는데, 그 남을 떠 받아 죽인 사람. ‘이 사람 제거하지 않고는, 내가 제 자리 올라가지 못하겠다.’ 그 사람은 제거하는 방법 많습니다. 소문 퍼뜨리는 방법, 도와줘서 실수하게 하는 방법. 알려주면 되는데, 알려주지 않아서 넘어지게 하고, 그 다음 ‘아이고 안됐습니다.’ 제치고 그 다음, ‘할 수 없이 제가 그 자리 앉아야 되겠군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남을 떠 받은 소인데, 그 소고기는 먹지 말아라. 아까워도.’ 그런 인격이 되지 말아라는 말입니다.

소는 알다시피 덩치가 큽니다. 일단 먹고 생존하는 것이 어렵던 고대 사회에, 소는 죽으면, 소 한 마리로 잡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맛있게 먹고, 힘을 얻어서, 또 경제활동, 생존활동을 할 것인데, 그 큰 소가 아무리 아까워도! 먹지 말라. 소와 양은 먹을 수 있는 제일 대표적인 음식입니다. 제일 귀한 교인입니다. 다른 사람을 떠 받아 신앙을 낙심케 하고, 교회를 다닐 수 없게 만든 그 교인의 행위, 그 교인의 떠 받는 습성, 그것은 네 것을 만들지 말라. 이 정도면 나머지는, 살아가면서 다 자기 환경에 누구를 조심하며, 누구를 닮지 말아야 되며, 나는 과거에 몇 명을 떠 받아 어떻게 했는지가 다 눈에 보여야 됩니다. 일일이 손 꼽아서 예를 들면 가장 확실하겠지만은, 안면이 받혀서 신앙의 문제 생길까봐, 쉽게 말씀 드리기는 어렵고,

백 목사님 돌아가시고 ‘그 설교를 한 번 더 듣고, 복습을 해야 제대로 알지 않겠는가? 너무 어려운 말씀, 너무 은혜되는 말씀이, 너무 강물처럼 쏟아져버리는 바람에, 듣기는 많이 들었는데, 한 말씀을 깊이 공부할 기회가 없었는데, 돌아가셔버렸으니, 수 없는 그 말씀 중에 하나씩 끄집어 다시 들어보며, 이게 어떤 말씀이었는지, 깊이 심각하게 연구하고 나를 비교해봐야 되겠다.’ 그래서, ‘당분간은 복습이 맞지 않겠느냐?’ 이게 총공회 안에  부산공회의 출발의 정신입니다. 대구공회로 이름 붙인 그 분들은, ‘백 목사님 초상 쳐 버렸으니, 그 분과 갔을 때 그 분과 함께 남겨진 설교는 전부 박물관에 보내고, 묘지에 묻어 버리고, 새 날이 열렸으니 새로운 사람을 세워, 그 사람을 따라가면 좋지 않겠느냐?’ 싸울 것 없이, 간단하게 두 길은 그런 길이었는데, 당연히 저야 우리 길이 옳았다고 생각하겠지요. ‘복습이 얼마나 소중한데, 이 보배를 놓쳐? 새로운 사람 선출해서 마음껏 가고 싶은 사람 다 따라가고, 나와 내 가족은, 나와 함께 하는 나의 신앙동지들은, 머리가 나빠, 듣기는 많이 들었는데 제대로 들은게 없어, 한 말씀씩 다시 끄집어, 복습을 몇 년할지? 몇 십년 할지? 몇 백년할지? 연구 좀 해보자.’ 뭐 이 말이 나쁩니까? 그럴 수 있는 것이지. 학교 공부 마쳤는데, 머리가 나빠 칠판에 쓴 것 받아 적기도 어려운데, 친구 것 빌려다가 빠진 노트 다시 하고, ‘이게 뭔 말인가?’ 방과 후 학습은, 나쁜건가요? 죄인가요? 지옥에 갈 몹쓸 행위인가요? 둔하고 머리가 나쁘고 신앙이 없으니, 복습하는 것이고, 대구공회 분들은 백 목사님 생전에 쏟아지는 말씀을 전부 자기 것으로 만들어 위대해져버렸고, 백 목사님 이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제 그 분 초상쳤고 이제, 새로운 지도자로 새 날을 맞이하는 되는 겁니다. 신앙 있고 훌륭하니까, 복습이 필요없는 위대한 대학생들도 있는 것이고, 맨날 복습해도 몰라서, 맨날 재수해야 되는 머리 나쁜 우리도 있는 것이고, ‘머리 좋은 사람들은 새 공부하고, 머리 나쁜 우리는 복습하고, 너희들은 너희 길 가고, 우리는 우리 길 가고, 공회는 하나로 가고, 그러면 뒤편은 알아서 하면 되겠네.’ 맞는 말 아닌가요? 불신자를 불러놓고 말로 해도, ‘말이 되네.’ 그렇지 않을까요? 공부 1등하는 사람이 한 번 듣고 다 알았다고 ‘그 다음 장으로 넘어갑시다’ 그러는데, 나머지 친구들은, 머리가 나빠, 한 번 듣고 모르겠는데, ‘선생님 한 번 더 설명해 주십시오’ 그러는 그 학생들이, 나쁜 학생들인가요? 퇴학시키고 제명시킬 못된 놈들인가요? ‘한번 듣고 다 알아버린 1등 너만 학생이냐? 10번 들어야 겨우 알아듣고, 세상 살 때 그 지식을 써먹는 친구들도, 학생 아니냐?’ 왜 목사님 가신 이후에, 공회의 큰 두 길의 근본의 방향이 그렇습니다. 이렇게 좋게 말하면, 아름답게 들리지요? 그런데, 이것을 딱 바꿔서 욕을 하자면, ‘배은망덕한 놈들! 부모 죽기를 기다렸다가, 부모 재산 팔아먹고, 주색잡기에 써먹을 망나니 같은 놈들! 네 놈들 잘 되는가 보자.’ 이 말이나, 그 말이나 같은 말입니다. 처음에는 좋은 말로 했지요. ‘대구공회 여러분들은, 백태영 목사님과 그를 따르는 공회의 3분의 2는 여러분들은 한 번 들으니까 다 알지요? 저와 부산공회로 갈 3분의 1은 머리가 나빠, 한번 들으니까 모르겠습디다, 복습하겠습니다.’ 싸울 것도 없이, ‘한 쪽은 새 공부해서 진도 나가시고, 우리는 복습해서 재수하겠습니다. 왜 교회가 싸웁니까? 왜 교회를 나옵니까? 왜 공회를 깰 겁니까?’, ‘우리는 복습 하시고, 그쪽은 새 공부하시다가, 1년, 5년, 10년 쯤 지난 뒤에 보니까, 다 안 줄 알고 진도가 나갔지만, 헛일 했구나 이러시면, 이 쪽 반으로  오셔서, 같이 복습합시다.’, ‘우리는 재수하고 복습을 할 건데, 재수를 하고 복습을 하다보니까, 아는 것을 괜히 복습을 해서 진도가 나가야 되는데, 판단을 잘못 했으면, 우리 진도 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고, 뒷서며 배워가면 되지, 이것을 가지고 뭘 칼을 들고 전쟁을 할 것이냐?’ 처음에는 달랬습니다. 달래니까 제명시킨다고 돈을 들고, 치려고 그럽니다. 그 돌로 치면, 책임을 져야 되거든요? 돌로 쳐서 죽으면, 그 사람들 죽어야 됩니다. 돌로 처셔 이쪽이 상하면, 상한 값을 내놔야 됩니다.

돌로 치려는데, 그것을 막으려니까 그때만 해도 신앙이 없어, 막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무슨 방법으로 막았느냐? ‘복습하면 신사참배와 같은 우상의 죄다.’ 제명시켜야 된다고 펄펄 뛰는 사람들이 회의를 하는데, 요즘은 동남아를 갑니까? 30년 전에는 놀러가면 부곡 하와이, 창녕 쪽에 온천, ‘부곡 하와이’라는 유흥지도 갔는데, 이 사람들이 회의를 하기를, 부곡 하와이 파크 호텔, 3층에서 회의를 했던가요? 그 소식이 들립니다. 그래서, 그냥 한 장을 써 가지고, ‘대구공회 위대한 분들이, 부곡 하와이 호텔 350호실에서 회의를 했답니다.’해서, 한 장 적어 버렸습니다. 그건 말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저도 돌을 들고 쳐 버렸지요. 거기에 참석한 분들이, 지금 부공2나, 지금 대구공회 주력들입니다. 그분들이 숫자로 지금 제일 중진들이고, 원로들이고, 나름대로 전부 다 지도자들인데, 아니 뭐 회의를 갔다가 목사님들이 호텔에서 하거나, 커피 불러 시켜 먹으나, 식당에서 하나, 교회에서 하나, 그 분들은 그런 것을 초월하는 사람들이라, 호텔에서 회의한 자체가 죄 되는 것은 아닌데, ‘호텔에서 회의를 했다’ 말을 하면, 공회 전체 교인들이 ‘아 이것들 벌써 타락을 하려고 시작을 하는구나.’ 내용은 몰라도, 겉을 보고, 열매를 보고, 옳은 대로 돌아설까봐, 그 말을 적고, 그 말을 뿌려 버렸습니다. 그 때 참석한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목회적으로, 지도자적인 권위에 타격을 받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 이름만 나오면, 그 때 잘했단 말은 못 하겠지요. 속으로 꽁하고, 그것 때문에 얼마나 큰 피해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때 그 말만 안했어도, 지금 여기 수천 명이 모였을지도 모릅니다. 이게 다 잘 한다는 것이, 엉겁결에 들고 쳤는데, 돌이 될 수도 있고. 죽일만한 나무가 될 수도 있고, 주먹질이 될 수도 있고, 그러면서, 배우면서 하나씩 나갑니다.

내 소가 남을 받아 죽였습니다. 내가 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게 부족한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이 소는 죽여야 됩니다. 두 번 다시 남을 받아서 신앙을 파탄내지 못하도록. 그러나 이 소를 잡아 먹이면, 그 배고프던 시절에 얼마나 좋은 잔치를 하고 음식이 되고 양식이 될터이나, “그걸 먹지 말라” 그런 인간이 되지 말라, 그 인격, 그 습성을 네 것으로 삼아, 그런 짓을 또 하면 아니 된다. 그래서 “때려 죽여라. 그리고 그 고기는 먹지 말아라” 사람과 짐승을 구별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죽인 그 신앙은, 둘째 사망입니다. ‘아낌없이, 그 고기는 먹지 말아라.’ 왜? ‘다른 사람의 신앙을 받아 파탄시킨 그 요소는, 자기 것으로 만들지 말아라.’ 교회에서 이런 말을 하고, 이런 행동을 하고, 이런 조처를 하고, 이런 눈치를 하고,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일로,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신앙이 파탄나고 끝장나고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은, 교인들이 잘 믿는다고 애쓰며, 충성하다가 그만, 다른 사람 신앙을 죽는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럴 때는, 책임은 지지 않습니다. 형벌은 면합니다만은, ‘그 행위는 두 번 반복하지 않도록 하라.’ 그래서, “아까운 그 고기를 먹지 말라.”, ‘사람을 해친 것은, 신약의 다른 사람의 신앙을 해친 것은, 어떤 것도 용납하지 말라.’ 그게 “사람을 떠 받아 죽인 고기는 먹지 말라.”

“임자는” 주인은, 책임자는, 지도자는, “소가 우연한 실수” 사람이 아니라 소라, 소인데 그냥 떠받아버렸는데, 상대방이 죽었습니다. 그게 소입니다. 그 소를 가진 주인, 지도자, 책임자가 책임질 것은 없다. 소의 우연한 실수, 소가 소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실수입니다. 고양이가 떠받아 죽은 사람 보셨습니까? 강아지가 떠 받아, 넘어져 죽은 사람 보셨습니까? 소는 고양이보다, 강아지보다 더 착한데, 덩치가 크기 때문에, 떠 받으면 죽어버립니다. ‘나는 착한 사람인데, 내가 믿은 세월이 많고, 나를 지켜보는 사람이 많고, 교회 안에 나의 위치와, 나의 책임이 중하고 오래 되어지면, 아무리 선하고, 아무리 착해도, 작게 움직였는데, 상대방은 그 충격에 나가 떨어져, 죽을 수가 있는 겁니다.’

“임자는 형벌을 면한다” 소의 실수는 우연한 실수니까, 소의 덩치 때문에 나오는 불가피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겁니다. 주인에게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문제는, 한 번 떠 받은 소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죽었으면 바로 죽여 버리는데, 그리고 “이런 고기는 먹지 말라” 이런 인격, 이런 신앙은 아니된다. 이걸로 끝이 나는데, 이 소가 사람을 한번 떠 받은 적이 있는데, 다행히 넘어져, 다치지 않고, 그냥 잘 지나갔습니다. 보니까, 이 소는 받는 버릇이 있습니다. 웬만한 개는, 자연적인 개, 왠만한 개는 아무리 좋아도, 밥 먹을 때 손대면 물려고 그럽니다. 개의 속성입니다. 소는 길러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소가 풀을 뜯어 먹는데, 풀을 못 뜯어 먹게 방해를 하면, 자기도 모르게 소의 본능으로 떠 받는 버릇이 있다. 다른 소는 그러지 않는데, 이 소는 그런 버릇이 있더라.’ 한번 봤고, 두 번 봐서 발견을 했습니다. ‘이 소는 이런 버릇이 있구나.’, ‘신풍교회 장로님은 다른 것으로는 아무리 쥐어박아도 웃고 넘어가는데, 이 말만 하면 격하게, 갑자기 그냥 돌변을 하시더라.’ 받는 버릇을 봤습니다. 그리고 받으면, ‘그때는 관리 목회자, 네가 책임져라!’

“받는 버릇이 있어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않음으로 남녀 간에 받아 죽이면” 누굴 죽이지요? 소가 떠 받아, 소가 떠 받은 그 사람이 죽었는데, 받는 버릇이 없는 소가 우연히 떠받은 것은, 그건 소만 처리하고. 아깝지만, 그걸로 끝납니다. 받는 버릇이 있는 줄 아는데, 관리하지 못하여, 또 받아, 다음에 죽으면. ‘그 때는, 소 임자, 네 놈이 받아 죽인 것이다!’ 그래서, 공회는 장로를 함부로 세우지를 않습니다. 신풍교회 출석 교인 비교하면, 장로님 다섯 명에서, 열 명 이상을 세워도 되는 형편입니다. 동천교회도 다섯명 세울 수 있는 교회입니다. 권사는 뭐 요즘, 옛날 집사가 요즘 권사니까, 신풍교회 권사 50명 세워도 될 겁니다. 다른 교회 비교하면, 다른 곳에 다니다가 오시는 분은 거의 권사이니다. 안 물어봐도. 왜 못 세우는가? 교인들에게 착한데, 신앙이 있는데, 세월이 지나가 소가 덩치가 크면, 슬쩍 쳤는데 상대방은 받혀 죽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직책을 줄여놓고, 목사들은 전부 목사하고?’ 조례교회 조사님, 지금 25년 목회하고, 도시에 자리잡은 교회인데, 아직도 ‘전도사’입니다. 원래 그 직책을 그렇게 가지고 가는 것이, 제가 그리 갔어야 됐습니다. 그러려고 했습니다. 소가 되면, 슬쩍 접촉을 했는데, 상대방은 나가떨어져 버립니다. 전도사 술 한 잔 하는 것은, ‘전도사니까 그렇겠지? 이게 크면 목사 되겠지.’ 그런 완충이라도 있는데, 목사는 돈 주고 산 후르꾸 목사라도, 목사 이름 부르는 순간, 술 한잔 해 놓으면 텔레비에서 막 그냥, 도배칠을 합니다. ‘목사도 이렇더라!’ 덩치가 커놓으면, 인간이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파급이 커서, 상대방이 받는 충격이 많아서, 넘어지는 결과가 너무 큰데, 이것을 전부 다 책임을 가져가야 되기 때문에, 공회는 목사라는 직책 자체를 ‘회피’하는 것이, 그게 ‘전통’입니다. 전국 최고의 부흥강사가 되어, 목사들이 몇 백명씩 와서 배울 때도, 백 목사님은 ‘전도사’였습니다. 그걸 생각해 본다면, 저 같은 사람은 죽는 날까지 전도사로 끝나도 마땅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 길을 걸어가려다보면 제명당할 것이고, 제명당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안수를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수를 할 때마다 끝없는 이단 시비에,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파탄이 날까봐, 그래서 공회의 한 명은 안수를 받아, 적어도 직책 때문에, 안수 때문에, 세례 성찬 때문에 끝 없는 소모전에 휘말리는 일은 막아야 되겠다 싶어, 원치않게 목사가 된 것입니다. 목사가 세 명이 되지 않으면, 또 목사 세 명 아닌데 안수했다고, 또 끝없는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그 때마다 사람들이 시험될 것인데, 그걸 해명할 기회가 없어서, 그래서 이치영 목사님, 이신영 목사님 목사 안수를 했었습니다. 3명까지는 필수였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냥, 죽는 날까지 목사 안 되는 것이 더 나은데, ‘너는 목사고, 왜 나는 목사 안주냐?’ 이 문제 생겨놓으면은, 귀한 인재들 잃을까봐, 그래서 또 두 분이 더 목사님 되셨습니다. 원래 한 명이되면 되는 자리입니다. 이 부담, 이 짐을 교인들에게 돌려, 공회는 장로님 두 분 밖에 없습니다. 문 장로님, 오 장로님. 두 분은 공회의 소입니다. ‘내가 남을 받았나? 지나가다가 슬쩍 접촉했지.’ 사자가 생쥐를 이쁘다고 한 번 핥고 나니까, 생쥐는 ‘죽다 살아났습니다’. ‘아, 귀엽다고 토닥거렸는데?’ 생쥐는 ‘열번 죽다 살아났습니다.’ 이게 소와, 소와 접촉되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착한데, 일꾼인데, 공회의 소중한 인재들인데, 덩치가 소가 되다보니까, 한 번 머리를, 그냥 한번 이렇게 운동을 했는데 부딪치면, 나가 떨어져서 살 수도 있지만은, 뒤에 낭떠러지가 있거나 잘못되면, 떠 받혀 죽을 수가 있습니다.

소나 양은 기본적으로 초식이고, 방어적이라 겁이 많아, 도망가는 것이지, 이것은 남을 떠 받아 죽이는 이런 공격성은 없는 것이 ‘소’입니다. 순종성, 말 없는 일꾼, 교회의 기둥입니다. 그런데, 그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장로님이라는 직책은 소와 같아서, 덩치가 있어서, 그냥 슬쩍 부딫힌 정도인데, 그냥 집에 일이 있어, 그래서 일이 있어서 그냥 웃지를 못 했는데, 처음 오는 교인이 ‘장로가 날 보고 웃지도 않는 걸 보니까, 날 무시하는가 보다. 이 집단은 새로오는 회원들은 영 그냥 높은 장로가 깔보는갑다.’ 이러고, 교회 다니는 것을 포기를 해버립니다. 소가 사람을 더 받아 죽었습니다. 그럴 때에는 문 장로님께 ‘어쨋든 좀 웃으셔야 됩니다.’ 장로님이 은혜 받았다고, 회개한다고 인상을 꾸기고 앉아 있으면, 다른 사람들 중에 아는 분들은, ‘아, 장로님이 회개를 하는갑다. 장로님이 은혜를 받아서 그러는갑다.’ 더 은혜를 받는데, 처음 오는 교인이 장로님이 웃지 않으시면, ‘어디서 굴러온 것들이 와가지고, 집쩍거려?’ 이렇게 자세를 부리는 줄 알고, 시험듭니다. ‘그래서 장로님은 할 수없이 자꾸 인자하게 웃는 연습을 하셔야 됩니다.’ 한번 말할 때는 떠 받는 버릇까지는 아닙니다. 그런데, 두 번째가 되면 그 다음부터는 장로님이 웃지 않아서 시험든 교인이 있다면, 하나님은 ‘목사, 너도 죽어라!’ 책임을 함께 묻습니다. 문 장로님은 잘 웃으시니까, 일부러 문 장로님 말씀을 드리는겁니다. 신풍교회 오 장로님은 체질적으로 웃지를 못하는 분입니다. 몇 명이 그 얼굴 때문에 시험에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동네 안 믿는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야기가 많이 들어옵니다. ‘장로 교회 갔는데 성이 나가지고 우락부락해가지고 그냥, 그 교회 가고 싶었는데도, 그 장로 상다꾸를 보면 그 교회 갈 마음이 없어져서, 옆 교회 가버렸다.’ 핑계지요! 없는 핑계를 만들면서, 남의 옆구리를 쑤시는 못된 인간이지요 만은, 교회니까! 우리는 믿는 사람이니까! 우리는 복음의 십자가를 져야 되는 사람들이니까. 괜히 억지로 갔다가 욕하는 건 줄 알면서도, ‘어쨌든 장로님, 좀 웃으셔야 됩니다. 목사는 동네 다닐 일이 별로 없는데 목사는 동네 다닐 일이 별로 없는데, 장로님이 생활 속에 어울려 있기 때문에 지켜보고, 장로님은 착하고 소지만은, 기둥이고 일꾼이지만은, 덩치가 장로라 소의 덩치이기 때문에 부딫히면 작은 것들은 나가 떨어집니다. 죽일려고 그런 것이 아닌데, 결과적으로 그렇습니다’ 라고 애걸복걸을 설명해서,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는데,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너희 교회 장로 인상 때문에, 시험든 사람 죄, 전부 네가 다 갚아라’ 그러면, ‘뭐 집회때 은혜를 끼쳤습니다. 목사 때문에 감사연보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잘한 것이 100인데, ‘너 때문에, 너희 교회 소 때문에 나가떨어져서 다친 사람 청구서는 200이 들어왔다고 그러면, 100은 잘했으니 칭찬받고 200은 책임져라’

교회 목사와 장로를 가지고 예를 드니까 이해가 쉽지요? 가정으로 돌아가, 아버지 소 떠받아, 시험 들고 신앙 포기한 자녀들의 숫자는 한량도 없을 겁니다. 사장이, 사장하는 것은 돈 벌려고 사장 했는데, 종업원 쓰는 것은 월급 주고 돈 더 많이 벌려고, 종업원을 썼는데, 종업원들은, ‘신앙 있는 집사님이 센터장이니까, 신앙 있는 장로님이 우리 회사 사장님이니까, 감기 걸렸는데도, 하루 빼 주겠지. 친구하고 약속 있어 지각해도 봐주겠지.’ 그거 봐주면 안 되는데, 이것저것 자꾸 붙여서 개깁니다. 매를 들고 좀 고쳐야 되겠는데, 호남 순교사에, 심봉한 순교자의 아들, 심보라라는 분, 우리가 아는 그 이상의 유명한 분입니다. 그 심보라의 동생 되는 분이, 아버지 죽고, 고아가 되어 가지고, 10대 때에 비누공장을 다녔는데, 옛날 비누공장은 가장 험한 제조업입니다. 비누 공장을 다녔는데, 비누공장 사장님이 집사님이랍니다. 순천에 제일 큰 중앙교회, 신앙 있는 집사님이 ‘사장’인데, 그 비누공장에 10대에 직공으로 들어가, 세끼 밥을 얻어 먹던 시절에, 아버지 순교하고, 어머니 그 여파로 일찍 돌아가시고, 고아가 된 순교자의 외로운 이 아이가, ‘신앙있고, 부자 집사님 사장님 집에 공장에 다니니까, 밥 한 그릇 더 주겠지?’ 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 사장님이 얼마나 짠지? 그렇게 박하게 잡아 돌리더랍니다. 그래서, ‘이놈의 교회를 다녀? 예수 때문에 죽은 아버지는 개 죽음했고, 어머니는 처참하게 됐고, 나는 고아라, 이 놈의 세상에 이렇게 예수를 믿어? 죽는 날까지 교회라면, 이를 갈고 사시더라’ 이런 이야기를 돌려 들을 때, 여기 있는 우리 교인들이, 돈 잘 벌어 비누공장 사장님 되면, ‘너도 휴가 가거라. 너는 빠지거라, 너는 100만원 일해도 200만원 줄게’ 그러겠습니까? 그러면 회사 망하겠지. 회사 망하면 그 사람 세끼 밥 먹을 직장도 없겠지. 회사가 살아남으려니까, 회사 경영을 위해서 사장으로써는 요구하는게 있고, 사장으로써 요구하는 것이 인간이란, 요구하다 보니까 밭의 모퉁이를 종이를 살짝 넘어가, 손대면 안 되는 옆집 밭의 곡식까지 낫을 댈까봐, “밭 모퉁이까지는 낫을 대지 말라”고 했는데, 그게 어디 쉽습디까? 노동자 시절에는 사장한테, ‘좀 넉넉하게 쓰면, 내가 집사님, 장로님 신앙 때문에, 은혜 받고, 교회를 열심히 다녔을 것인데’ 다 그러는데, 그 인간이 사장되어 보십시오. 더 할 놈의 인간이지, 그 말하고 그런데 눈을 뜬 사람이, 사장되어 놓으면, 요즘은 시집이 없지요? 시집 세게 산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어놓으면 ‘나는 그렇지 않겠다.’ 그래도, 듣고 본게 그거라, 시집살이를 더 강하게 한다고 그러지요? 그게 인간 심리입니다. 그게 우리들입니다.

소가 소니까, 덩치 때문에 이것은 순응성이 있고, 이것은 곱고, 이것은 착하고, 이것은 일꾼이고, 이것은 주인에게 말 없는 기둥인데, 소가 소라, 소기 때문에, 부딫힌 다른 사람을 떠받아 죽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인에게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소는, ‘이 착한게, 실수인데’ 그러지 않고, 소는 죽여버립니다. 실수라도, 착해도, 하다보니 잘한다는 것이 그리 되어도, ‘다른 사람의 신앙에 절단난 것은 아니된다. 그 뜻으로 죽이고’ 둘째 사망입니다. ‘그 고기를 먹지 말아라. 이것은 반복해서는 아니된다.’ 그런데, 평소에 소가 한번 부딪치며, 사람을 다 치고, 받는 버릇 있는 걸 봤습니다. 그리고, 단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받았는데, 이번에는 죽었습니다. 이 때는, ‘이 소의 임자가 어느 놈이냐? 네가 떠받아 그 사람 죽은 것이다. 네가 살인자다!’ 이리 생각하고, 지난 날을 회고해보면, 우리가 떠받아, 내가 떠받아 신앙 파탄낸 사람이, 몇 명인지 헤아리기도 어려울 껄요? 전도를 잘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남들 평생에 하나도 어려운데, 10명 전도한 분도 계십니다. 우리는 10명이나 전도했으니까, 굉장한 일꾼으로 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데리고 온 10명은 우리가 알고, 이 분 때문에, 교회 다닐 사람이 교회를 못 다닌 숫자가, 10명 이하는 아마 아닐 겁니다. 그 이상이 되지. 떠 받아 죽은 사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계산에 없고. 데리고 온 사람만 계산에 두니까 그렇지. 전부가 공로자고, 전부가 애국자이고, 직원들은 전부가 ‘회사에 나 때문에 사장이 먹고 살았다’고 다 자기가 공로자입니다. 세례 학습 할 때에, 여자분들. 시골의 여반들 세례학습 때에 물어보면, ‘나 때문에 우리 가족은 다 일어섰고, 나 때문에 망할 집안 다 위대한 집안이 됐다’고 집안에 공로자 아닌 분들을 저는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 집안의 시어머니는 ‘저 인간 때문에 교회를 안 나올 건데, 내가 교회 다녀 주느라고 애를 먹고 있습니다. 아들 때문에.’ 이러고 있습니다. 나는 다 공로자입니다. 나의 주관, 나의 중심, 내 중심, 내 지식으로 보니까. 저인들 제가 목회를 못한다고 생각하는 줄 아십니까? 잘한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신풍교회를 왔다 간 사람과 왔다가 남은 사람의 숫자를 비교해보면, 교계적으로 공회적으로 굉장히 신앙 좋고, 위대한 인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는 목회를 잘했는데, 의롭게 했는데 그 인간들이 공연히 그 짓을 하다가 나갔겠지.’ 저는 그리 계산을 하고 싶어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모여지고 쌓여지다 보면, 목자가 수고해서 길러놓은 양이 열이면, 목자가 실수해서, 잘못해서 떠받아 죽여놓은 것은 열이 아니라, 하나인지, 열인지, 백인지, 천인지? 목회자도 자기를 그렇게 계산해 본다면.

한 아이의 인생의 잘못된 책임은 주로 어디로 다 가지요? 엄마들한테 다 떨어집니다. ‘애비가 저 꼴이니까, 남자애들이 저 모양이지.’ 똑같은 아브라함 밑에 이스마일이 나온 것은, 애비 때문이 아닙니다. 어머니 ‘하갈’ 때문에 그리됐지. 똑같은 아브라함 밑에 둘째 아들 이삭이 이삭된 것은, 이삭을 읽어보면 무능한 사람입니다. 착하고 용하지만은, 이삭이 이삭된 것은 이삭의 어머니가 ‘사라’라 그렇습니다. 목회자와 교인의 관계는, 잘 보이니까 ‘산 위의 동리라’ 잘 보시고, 그 다음 가정으로 돌아가, 한 아이의 평생을 두고, ‘이것 참 귀하다. 참 복이라’라는 점이 한 3분의 1정도 되면, 굉장한 사람일껄요? 정밀하게 조사해보면, 장점이 열에 하나, 둘 되기가 어렵고, 단점, 아쉬운 점이 열에 여덟, 아홉입니다. 아이가 잘 커서 잘 된 것은, ‘이것은 날 닮았고, 내가 딱 지도를 했고, 코치를 잘해서 그렇고.’ 아이가 잘못된 것은, ‘애비 닮았고, 할아버지 닮았고, 시댁 닮았고, 학교 선생들이 월급 받아 처먹고 말이지. 전교조 활동이나 하니까 아이들이 이리됐고, 대통령이 저 모양이니까 사회가 이 모양이고, 이리되니까 우리 아이가 이 땅 위에 살면서 희망이 있나? 호주로 가야지, 캐나다로 가야지.’ 호주로 가니, 캐나다로 가니 그 심리 속에 보니까, ‘천하 어떤 데에 던져두셔도, 내가 신앙의 사람이 되어, 내가 이 아이 하나를 잘 기르면, 모세도 만드는데.’ 모세를 만든 요게벳은 학교가 좋았습니까? 시대 환경이 좋았습니까? 강대국의 일등 시민이었습니까? 부모가 전문 직종이라 그랬습니까? 400년 노예 생활, 인종을 말라 죽이는 그 환경 속에, 이것은 사느니 죽느니만도 못한 그 환경, 제일 극단적인 마지막에 요게벳은 모세를 모세로 만들었습니다. 학교? 환경? 대통령? 경제? 사회? 친구환경? 하나도 빼지 않고, 가장 극단적으로 잘못된 속에서, 요게벳 하나 하나님 앞에 바로 되니까, 강에 던져 버려 죽일 자기 아이를, 강에서 구원하여 200여만 명 하나님의 백성, 전부를 엎어 가나안 앞에까지 데려다 놓는, 모세가 되었습니다.

목회자가 목회하여 교회를 위하여 수고한 것을, 다니는 출석 교인들은 대개 ‘수고했다’ 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겠지요. 시무투표 통과를 하겠지요. ‘이것은 불신임을 하고, 내보내자는 운동을 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어서, 절이 싫으니 내가 떠나자고 떠난 교인들은 얼마나 되는지?’ 교회 오고 싶어도, 그 인간 때문에 교회 가지도 못 하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더 많은지? 자기 아는 것만 가지고 계산하니까 공로자이지, 이 나라에 애국자 아닌 사람이 있습니까? 회사 직원들이 ‘나 때문에 사장이 먹고 살고, 회사가 운영이 된다’고  큰소리 치지 않는 직원들이 있는가요? 좋은 직장, 좋은 대우 다 받으면서, 공무원마다 ‘내가 이 나라를 갖다가 이렇게 세계 10대국을 만드는 행정 관료 중에 하나로 수고했다.’ 안 그런 인간들이 있는가요? 제 눈에는, 공무원들 월급 10분의 1 노릇하는 인간도 없는데, 다 잘라버리면 속이 시원하겠는데. 우리가 흔히 평가할 수 있는, 남을 쉽게 보면서. 이걸 가지고 가정으로 돌아가, 자기 아이를 지켜보며 ‘이놈을 면밀하게 분석할 때, 쓸만한 것은 10%, 잘못된 것은 50%, 나쁜 것은 40%.’ 누구 책임인가요? 한 아이를 하나님이 하늘나라에서 세워놓으면서, ‘이거 임자 누구지? 이 아이 선생 누구지? 이 아이 목사 누구지?’, ‘신풍교회 누군데요?’, ‘그거 말고, 그건 알고.’ 목사가 거꾸로 가도 엄마의 신앙이 바로 되면, 요게벳처럼 모세를 만들어냅니다. ‘아 아이의 지도자가 누구지? 임자가 누구지? 관리 책임자가 누구지?’ 아빠가 아니라, 엄마를 옆에 세워놓을 겁니다. 히브리 5장인가요? 회개할 자처럼. 반드시 계산이 있습니다.

수고하여 잘한 것이 하나면, 알지 못하여 떠 받은 것은 열일 것이고, 수고하여 잘한 것이 열이면, 내가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계산을 못해서 그렇지, 나 때문에, 수고하고 죄송하고 잘못된 것은 한도 없을 것이고, 그래서 할 수 없이, 날 닮으라고 플랜카드 내 걸고 떠들지 못하고, 숨어 죄인처럼 교회에만 나오고, 예배만 되고, 설교만 되고, 기도만 되면, 그냥 죄인되어 엎드려, 엎어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용기를 내라, 뭐 된다고 생각해라!’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마구 선전을 해야, 마구 교회가 광고가 되어서 손님이 오지. 세상장사는 그리 하면 됩니다. 그래야 삼성이 되고. LG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신앙은, ‘이놈이 죽일 놈입니다.’ 이렇지. ‘아, 이만하면 그래도 뭐 본이 되지 않을까요? 이만하면 뭐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요?’ 이 생각이 들어가는 순간, 벌써 하나님과 끊어진지는 옛날입니다. 썩어 송장, 흔적도 없는 사람이 된 꼴입니다.

‘소가 남을 받았느냐?’ 죽었으면 바로 죽여 버려라. 이런 일은 두 번 아니된다. ‘소가 남을 받았느냐?’ 다행히 죽지는 않았습니다. ‘안 죽었느냐?’ 다행인가요? 소가 떠 받아, 죽었습니다. 소만 죽습니다. 돈만 끝납니다. 소가 떠받았는데, 상대방이 죽지 않았습니다. 다행인가요? 그 다음에, 이 소가 다시 받았는데, 그 사람이 죽으면 ‘그 때는 소가 아니다. 네 놈이 죽어야 된다.’ 차라리 받는 소가 받아 죽여, 소만 죽으면 소만 끝나지만은, 소가 받았는데 죽지 않으면, 그 다음부터 받는 버릇없는 이 소가, 받아서 죽으면, 내가 받아 죽인, 내가 사람을 죽인, 내가 ‘책임’이 여기까지 갑니다. 그 소가 교회 장로님인가요? 그 소가 가정의 엄마인가요? 그 소가, 우리 속에 있는 나의 ‘욕심’입니다. 나의 ‘의지’입니다. 나의 ‘인내’입니다. 인간 속에 있는 욕심, 인간 속에 있는 의지, 인간 속에 있는 감정, 인간 속에 있는 야망 이라는 것은 굉장한 소입니다. 이게 들어서 일을 다 해냅니다. ‘나도 1등 해 봐야지! 나도 취직 해봐야 되지, 나도 좋은 가정 만들어봐야 되지’ 하는 그 소망, 그 의지, 그 욕심이 내 속에 소인데, 이 욕심과 의지라는 것이 나를 먹여 살리고 나를 일으켜 세우는데,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 나도 모르게 신앙 양심을 떠 받아, 잘 반 죽여놓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 한 번만 눈 감으면 횡재하니까.’ 그러면 ‘뒤에 잘 믿으면 되지’ 이렇게 욕심이, 큰 돈이 눈 앞에 왔을 때, 신앙의 양심이 ‘돈은 크지만은, 이것은 안되는데?’ 라고 할 때에 떠 받아 반 죽여놓습니다. ‘한번 더 말하면, 그냥 두지 않아! 내가 이 돈이 문제는 있는 줄 알지만은, 문제없는 돈이 있냐? 이 돈을 잡은 다음 경제 안정이 되고 나면, 그때부터 신앙 열심히 할 것이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달래가며 슬쩍 접촉을 했는데, 알고보니 소와 슬쩍 접촉이 되면 상대방은 나가 떨어집니다.

‘죽는 것이 정상인데, 죽지 않았느냐?’ 받는 버릇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정, 어떤 사람은 가족사랑, 어떤 사람은 학구열, 어떤 사람은 남의 대한 책임감, 어떤 사람은 하다못해 욕심, 물질욕, 명예욕, 별의별 소들이 우리 안에는 많습니다. 이 소와, 이 양들을 잘 다스려, 하나님 앞에 곱게, 좋게 만들어놔야 되는데, 그 중에 소라는 것은 일은 많이 하지만은 떠 받는 ‘버릇’이 있습니다. 떠 받는 버릇은 없어도, 떠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있습니다. 자기 속에 자기를 자기 만들고, 자기를 성공시킨, 자??

Comments

교인 2020.06.09 17:34
자기를 성공시킨, 자기 안에 가장 큰 일꾼은 ‘소’입니다. 이건 다른 것과 접촉하면서, 내 속에 있는 다른 신앙 양심과, 다른 고운 마음 성화된 요소를 더 받아 상할 수도 있고, 이게 밖으로 나오면 남을 칠 수도 있습니다. 교회로 말하면 목사와 장로가 다른 사람들을 좋게 하는 것도 있지만은, 알게 모르게 많은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다 알지 않습니까? 딱해서 말을 못해서 그렇지 뭐 일일이 말을 하자면, ‘나는 목사에게 은혜 받았다’라는 사람은 하나라면, ‘나는 목사에게 시험 들었다’는 사람은 열인데, ‘할 수 없어 다녀준다는 사람’이 90%나 되지만은, ‘차마 떠날 수가 없어, 내가 이 자리에 앉아준다.’ 그게 다 더 많지 않습니까?

내 마음 속으로 돌아와, 나의 장점, 나의 귀한, 나의 가장 큰 특점, 내가 오늘 그래도 남들과 함께 살아가는 내 속의 나 만든 그 일꾼은, ‘소’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것이 내 속에 신앙의 양심과, 신앙의 길러가야 되는 성화된 요소와 부딪칠 때마다, 대개는 반 죽여놓습니다. ‘목사님, 장로님에게 시험 들어서 교회에 나가지 못한다’ 그러는데, 그 말도 맞는데, 더 은밀하게 속에 들어가 보면, ‘내 속에, 나도 한 번 돈 벌었으면 좋겠다. 열심히 살아, 열심히 벌어 남 같이 살아 봤으면 좋겠다’는 이 의지! 이 필생의 야욕이! 이게 들어서 부지런하게 일도 하고, 이게 몸 관리도 하고, 이게 남 밑에 꾸지람 들어가며 돈도 벌고, 기술도 배우고, 그래서 이 사람을 돈 벌고, 성공한 사람으로 만든, 이 사람 속의 황소인데, 일꾼인데, 가장 큰 소인데, 그 가정에 이것이 다른 요소와 접하며, 많은 상처를 주고, 그 중에 신앙으로 하나밖에 없는 기회를 아주 죽여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돈 욕심 이놈! 이것이 좋긴 좋은데, 이게 이번 신앙을 죽여놓는 것을 보니까, 두 번 다시 내가 거지로 살아도, 돈 욕심, 이 야망, 이 학구열은 이번에는 죽여놓겠다!’ 쳐 죽여버려라. 떠 받는 소로 인하여, 내 신앙의 상처가, 상처가 아니라 희망 없이 끝났을 때에는 그 요소는 죽여버려라. 끊어버려라!

‘이번에 이 욕심이, 이 의지가, 이 자존심이’, 자존심을 들어서 사람을 얼마나 관리하는지 모릅니다. 여성에게 자존심이 있으면 자기 인물 관리를 깨끗하게 하겠지요. 자존심이 없으니까 게을러 씻지는 않고, ‘나는 검소하다’ 그러겠지. 그 자존심이 여성을 여성답게 만들었는데, 여성을 여성답게 만들고, 훌륭한 여성까지 만들었는데, 이 면을 보면 그 자존심이 일꾼입니다. 소입니다. 그런데 그 자존심을 딱 건드려놓으면, 오뉴월 서릿발 되도록, 속으로 이를 꽉 깨물고 ‘저 인간하고는 죽어도 안 본다.’ 이리 되겠지요. 이 문제로 내 속에 좋은 신앙 하나가 죽어 버렸으면, ‘내가 여성으로, 여성답게 만들 내 자존심을 포기해버리겠다! 잿 구덩이에 뒹굴더라도.’ 이리 되어야 되고, 속으로 살짝 ‘아! 자존심, 나를 관리하는 나의 절제성이 나를 여성답게 만들었으나, 이게 지나쳐 그 다음 신앙에 손해가 많구나. 조절해야 되겠다.’ 고삐를 넣어, 고삐를 틀어쥐어, 일은 하되 남을 떠 받지 못하게, 철저하게 관리하지 않다가, 그 다음에 이 자존심 때문에, 이 자기 관리의 절제성 때문에, 여성이 여성다워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여성은 되었는데, 자기 속에 다음에 다른 신앙 하나를 끝내버렸으면, 이번에는 ‘네가 죽어라.’ 소가 사람을 떠 받아 죽여도, 소만 죽여라. 떠받는 버릇이 있어 한번 그런 행습을 봤는데, 틀어 쥐고 관리하지 않았다가 그 다음 사망 사고가 나면, ‘주인 너? 네가 다른 사람을 쳐 죽인 자니, 너도 죽어라!’

시간이 다 되어서, 76페이지까지만 합니다. 78페이지 ‘임자도 죽일 것’ 주격 책임이니, 몸에 대한 마음의 책임, 심신에 대한 영의 책임, 그래서 영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셔서 해결을 했습니다. 대속의! 주님의 대속의, 신인양성 일위의 십자가 대속의 원리까지 이어져 있고, 붙들려져 있는 것이 ‘소가 남을 받은 일’입니다. 그 일 때문에, 그 원리 때문에, 하나님이 오셔서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이 다음 책임질 것은 영원히 해결해놓으시고, 우리 마음, 우리 인격에게 ‘너 가진 장점! 너 가진 남다른 특별한 점, 소다. 잘 관리해라.’ 소는 코를 꾀어 고삐를 틀어쥐면 아이가 끌어도 딸려옵니다. ‘뭐 착한데, 뭐 순한데, 쥐어박아도 멍청한데.’ 관리 안하고 소 고삐 쥐지 않고 풀어놓았다가, 슬쩍 부딫혔는데, 나가 뒹굴어졌는데 죽었으면, 이 아까운 소, 이 아까운 귀한 인재, 이 아까운 장점을 ‘포기’를 해야 됩니다. ‘죽지 않았으면, 이제는 다시는 틀어쥐고, 두 번 다시 놓치지 말아라. 한번 놓치면 그때는 네가 죽는다.’ 이게 대속의 원리입니다. 주님 오신 원리입니다. 주님이 대신 죽고 우리에게 부탁해놨습니다. 소 고삐를 우리에게 넘겨주며, ‘너한테는 인내력이 특별하지? 너는 두뇌가 특별하지? 너는 자존심이 특별하지? 너는 의지가 남다르지? 너에게 준 너의 소다. 이 소가 일을 다 해줄 것이다. 그러나 그 소를 고삐를 틀어쥐고, 관리를 잘할 때에 그 소로 네가 살림을 일으켜 세운다!’, ‘방심하면 소는 부딫히는 것을 덩치 때문에 큰 피해를 준다. 그 책임은! 그 소를 죽이든지, 너의 하나 밖에 없는 그 장점을 포기를 하든지, 관리하지 못하면 네가 죽어야 된다.’

여기까지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어떤 장점, 남다른 굉장한 점을 주셨는가? 반드시 있습니다. 없다고 생각하는 자기가 원수입니다. 어떤 사람, 몹쓸 사람, 어떤 실패자라도,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남 다른 소, 남 다른 큰 장점을 주시고, 소망을 하십니다. 나는 내게 무엇이 소인가? 틀어쥐고 잘 관리하지 않으면, 이게 슬쩍 실수했는데, 실수가 아니라 상대방이 죽어나가는 이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면 이 장점, 이 굉장한 일꾼을 포기를 해야 됩니다. 다행스럽게 죽지 않았따면, 이제 두 번 다시는 없습니다.

우리교회의 소는 누군가? 말 없는 가장 큰 일꾼이 어느 분인가? 내 속에 남 다른 장점, 하나님이 주신 큰 은혜는 뭔가? 남들이 도무지 따라올 수 없는 내 속에 참 특별한 은혜는 반드시 있습니다. 이게 남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치게 되어집니다. 귀하게 쓰라고, 귀한 남다른 은혜를 맡겼는데, 이것을 철저하게 관리하지 못하면 이 귀한, 이 소중한, 이 일꾼, 남다른 장점, 하나님이 귀하게 준 이 특별한 이 은혜가 내 속의 다른 신앙의 고운 요소들을 쳐버립니다. 소에 밟혀 죽어 얼마나 큰 손해가 많은지, 새벽의 말씀입니다.




초타 : khr
교인 2020.06.09 17:34
<b>방송담당:</b> 실시간 출석기록

gyu111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백선진님이 입장하셨습니다.
hart62님이 입장하셨습니다.
jacob1234님이 입장하셨습니다.
jacob1234님이 퇴장하셨습니다.
울별결솔파파님이 입장하셨습니다.
jacob1234님이 입장하셨습니다.
jacob1234님이 퇴장하셨습니다.
jacob1234님이 입장하셨습니다.
jacob1234님이 퇴장하셨습니다.
jacob1234님이 입장하셨습니다.
jacob1234님이 퇴장하셨습니다.
gyu111님이 퇴장하셨습니다.
백선진님이 퇴장하셨습니다.
hart62님이 퇴장하셨습니다.
울별결솔파파님이 퇴장하셨습니다.
엄동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엄동환님이 퇴장하셨습니다.
엄동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엄동환님이 퇴장하셨습니다.
엄동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엄동환님이 퇴장하셨습니다.
엄동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엄동환님이 퇴장하셨습니다.
엄동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엄동환님이 퇴장하셨습니다.
엄동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엄동환님이 퇴장하셨습니다.  [05/08-08:24]
Category
State
171,084 since 2005
153,839 since 2020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