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19.8.6 레1:10 번제의 양의 순종 염소의 거역, 새의 변덕 더러움을 정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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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19.8.6 레1:10 번제의 양의 순종 염소의 거역, 새의 변덕 더러움을 정결하게

교인 3 307 2020.06.0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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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06 화전 (5대 제사 집회 4)

제목 : 번제의 양의 순종 염소의 거역, 새의 변덕 더러움을 정결하게

본문 : 레위기 1장 10절 -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그가 단 북편에서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다 같이 기도 드리겠습니다.

(기도)
구약의 제사로 오실 주님을 소망하며, 시공을 초월하여 대속 받은 주의 백성들이, 자기의 죄로 주님 단 위에 죽으심을 보며, 구원받은 감사로 이제 자기 심신의 죽여 없앨 자기 짐승, 자기 잘못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드리고, 남은 때를 주의 인도 따라 믿는 사람으로 살 수 있는, 레위기의 제사의 내용을 살펴 볼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심을 감사하나이다. 이 시간도 깨어, 말씀은 인도하시고, 우리는 따라가며, 말씀의 칼로 우리 속에 버릴 것, 끊을 것, 우리 속에 죽일 자기 죄, 자기 중심, 모든 더러운 것을 살펴, 세상과 반대로 하늘을 향하여 마음껏 달려가는, 능력의, 변화의 은혜를 받는 시간 되게 해 주옵소서. 8월의 첫 주를 생각하며, 모이는 곳곳의 집회 위에 말세를 감당할 빛과 은혜를 주시되, 부족함으로 이곳에 모인 저들에게, 제사를 통한 자기 헌신, 자기 투쟁, 돌아서는 빛의 생활의 은혜를 주옵소서. 어린 심령 하나도 붙들어 주시고, 모든 것이 감사 가운데, 주님을 향항 이 시간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새벽에는 ‘소의 번제’. 오전에는 ‘양이나 염소로 드리는 번제.’ 금번 집회는 전체적으로 구약의 제사를 살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다 바쳐 드리는 번제, 내 속의 자기 주관을 다 갈아버리는 소제. 하나님과 하나되는 화목제, 큰 죄는 속죄제로, 작은 실수, 작은 죄도 넘겨 지 아니라고 속건제로 드리는 다섯 가지가 레위기 1장에서 5장입니다.

1장 3절에 “그 예물이 소의 번제면”, 소를 가지고 번제로 드리려거든, 다 태워 없애는 것이 번제라, ‘하나님 앞에 바쳐 사는 생활’. 그 중에 “소라”. 두 번째는, 10절에 “양이라”. 소는 똑같이 순종을 하지만은, ‘일을 해 내는’, ‘수고하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소”라고 그랬습니다. 교회의 모든 일을 해내는 일꾼을 소라고 한다면, “양”이라는 것은, 일을 해서 짐승이 아니라, ‘순종’하기 때문에 양입니다. 주인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예. 굶겨 죽여도 그 자리에서 굶어죽지, 나부닥 거리지를 않습니다. 순종은 ‘양’. 똑같이 순종은 하는데, 일을 하여 주인을 위한 평생의 수고는 ‘소’. 믿는 사람의 수고, ‘소로 바쳐드리는 번제가 되라’. 믿는 사람의 순종, ‘양처럼 순종하라’. 그리고, 소와 양을 통해,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수고 할 일, 주님 앞에 말씀으로 순종 할 일을 가르치기 위하여, 천지를 창조 할 때 동물을 만드시며, 별의 별 동물 중에 소와 양을 만드신 것은, ‘소를 좀 보고 배워라! 미련타 무시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는 소가 되어라. 등신이라고 조롱을 받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순종의 양처럼 되어지라.’ 새벽까지는 소였습니다. 순서는 거의 같습니다.

이제 10절에 “양”을 봐 보십시다. “만일 그 예물이 양이나 염소의 번제면” 예물이라 그랬습니다. 제사로 바치는 제물은, 하나님 앞에 ‘예물’, ‘선물’입니다. 예물, 선물, 제물, 똑같은 말입니다. 연보, 헌금, 세무서에 세금 면제 받으러 갈 때는, 연보, 헌금을 기부금, 납부 영수증이라고 그럽니다. 그 단어에 따라서 강조하는게 다르지요? 하나님 앞에 바쳐 태워 드린다 ‘제물’, 하나님 앞에 감사하여 바친다 ‘예물’, 반드시 예물은 그 속에 감사가 들어 앉아야 예물이라 그랬습니다. 억지로나, 마지 못해서나, 인색함으로 하지 말아라. 고린도후서 9장의 신약의 연보를 가르치면서, “인색함으로는 하지 말아라. 아깝거든 하지 말아라. 억지로는 하지 말아라” 해봐야,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처럼, 헛일합니다. 아나니나와 삽비라의 연보처럼 되돌려버리면 큰일이 납니다. 고린도후서 8장 12절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대로 받으신다” 소까지 바칠 수 있느냐? 소로 드려라. 양 밖에 드릴 수가 없느냐? 양이라도 된다. 소도 안되고 양도 안되면, 14절에 “새의 번제” 비둘기라도 된다! 큰 비둘기, 비싸서 잡기도 어려우냐? 새끼라도 된다. 부족한 우리, 못난 사람을 위해서, 아무리 적어도, 길을 내 놓으셨습니다. 길은 있습니다. 다만, 감사의 정성에 따라, 형편 따라, 어떤 사람은 소처럼 주를 위하여 수고하고, 소처럼 수고하여 큰 일을 못한다면 양처럼 순종하는 사람이라도 되고. 그 마저도 실력이 없거든, 비둘기 한 마리, 비둘기는 새 중에 유일하게 ‘화목’, ‘평화’로운 ‘온순’한 새라고 그랬습니다. ‘못 났느냐? 새 한 마리라도 된다.’

지금 소에 이어서, 양입니다.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면” 먼저 양과 염소를 복습을 많이 했으니까, 간단하게. 양과 염소는 비슷한데, 둘을 나란히 길러본 사람은, 서양이든 동양이든 길러본 사람은 너무 차이가 나서, 극단적으로 비교가 됩니다. ‘순종’하면, 뭐라고요? ‘양’. 그 다음 양하고 비교를 하면, ‘거역’. 그러면 ‘염소’입니다. 순종의 마음, 거역의 마음. 믿는 사람은 중생 되는 순간, 두 마음이 한 마음 속에 다 들어 앉아 있습니다. ‘내 속의 염소는 언제 활동을 하는가? 내 속의 양은 언제 들어 앉아, 그래도 순종하는가?’ 염소는, 양 떼가 모이면 가서 들이받아서 다 흩어놓습니다. ‘분쟁’. 남 잘되고, 남이 편한 꼴을 못 봅니다. ‘시기’, ‘질투’, ‘분쟁’. 옆집에 잘 먹고 잘 사는데, 왜 배가 아파 가서 그냥 떠 받아야 되지요? 염소니까. 양은 모여서, 눌려 죽는 줄도 모르고, 10마리, 20마리 있는대로 전부 산더미처럼 들러 붙어버립니다. ‘화목’, 염소는 ‘분쟁’, 양은 ‘화목’. 풀을 뜯어 먹어도, 양을 먹여본 사람은, 억센 양들은, 젊은 숫양들, 억센 양들은, 좀 질긴 것, 사나운 것을 뜯어먹고, 그리고 나면 새끼들은 그 밑에 여린, 가는 풀, 여린 풀을 뜯어먹고. 이렇게 다른 양을 생각하는 것이 양이고. 염소는, 자기 먹을 것 대충 먹고, 나중에는 밟아서, 남 먹을까봐서, 남이 잘될까봐, 남이 평안할까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플까봐. 사촌까지 갑니까? 형제끼리도 그런데.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실은 형제도 크면 그럴 것인데, 참 안면 때문에 그냥 사촌을 그냥 괜히 갔다댔지. 설날에 한 식구들 모였는데, 큰 형님 돈 벌어 잘 됐으면, 작은 동서 좋아서, 우리 편 잘 되었으니까 박수칠 일인데, 왜? 소화제 먹으러 다니나요? 내일 저녁에 가기로 해 놓고, 몇 마리 듣고 점심 때에 가버리나요? 양이 아니라, 우리 속에는 염소가 들어 있습니다. 염소. 어쨌든, 주인이 말하면 양은 ‘예’. ‘양순’ 합니다. 염소는 거칩니다. 억셉니다. 그 억센 것도, 주를 위하여 견딜 때는 좋은 장점입니다. 양도 양순해서 좋지만은, 이단이 데려간다고 줄줄 따라가는 양떼들을 봐보십시오. 항상, 장점, 단점을 섞어서 우리에게 주시며, 어떤 죄악 속에서도 장점을 챙기면 에덴동산 되고, 에덴동산 안에서도 단점은 찾으려 하면, 선악과를 먹게 되어집니다. 또 양과 염소는, 자기가 자기를 볼 때 염소는 잘났습니다. ‘교만’. 양은 ‘겸손’합니다. 부끄럽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러운게 좋은 겁니다. 거친 세상을 살 때는, 잘난 척도 하시고, 돈도 벌어야 되고, 진급도 해야 되니까, 경쟁도 하고 별의 별 짓을 다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죄송하여 겸손한 것이 맞고, ‘뭐 이 정도면, 교회 중간쯤은 가지 않겠는가? 이 정도면 교회 원로 정도 되지 않겠는가?’ 미안하고 죄송하여, 고개 숙일 수 있는 겸손. 교회를 50년, 70년 다니고도 끝까지 양의 겸손으로 종신하는 목회자, 교인들도 계시고. ‘이 정도 수고했는데, 안 알아줘? 나 없이 니들이?’ 이 마음이 퍼뜩 들어오는 순간, ‘이건 염소구나!’ 잡아 죽일 자기입니다. ‘겸손’과 ‘교만’. 양은 서로 서로 ‘사랑’의 심성이 있습니다. 염소는, ‘질투’의 그런 본성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와 서양과 이스라엘과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을까봐, 여기 저기 자료를 좀 찾아봤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 역사의 자료든, 현재든, 양과 염소는 이렇게 닮았는데, 정 반대로 만들어놓으시고 오늘 여기 10절에, 양이나 염소로 번제를 드리려러거든. 이렇게 두 개를 나란히 놔뒀으니, 내 마음 속에 양 성향, 염소와 같은 요소를 살피며, 하나씩 나갑니다.

먼저 11절, “양이나 염소를 주님 앞에 바치려거든” 귀한 순종을 주님 앞에 바치려거든! 자기 속의 억센 질투, 분쟁을 꺽어서, 하나님 앞에 죽여 바치려거든! 소는 ‘회막문’입니다. 양과 염소는 어디에서 바친다고요? 다같이. ‘단 북편’입니다. 성막이라는 것은, 성막, 성전이라는 것은, 해가 뜨는 동쪽으로 문이 나 있습니다. 해가 뜨는 동쪽은 하나님을 향한 곳입니다. 소는, 하나님 앞에 충성을 할 때는, ‘회막문’에서 바칩니다. 바로 바쳐 버립니다. 그런데, 양이나 염소는 문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그 다음 ‘북쪽’으로 가지고 가서, 북쪽 뜰에서 잡습니다. 왜 북쪽인가? 따뜻하면 어느 쪽이요? 학생들? ‘남쪽’. 남쪽 나라하면, 따뜻하고 살기 편한 곳. 북쪽은요? 추운 곳, 어려운 곳, 살기 곤란한 이런 박한 형편을 북쪽이라고 그럽니다. ‘순종은 북쪽에서’ 그 말은, ‘순종은 어려울 때도 순종 할 때에, 순종이 순종’입니다. 좋을 때 순종을 누가 못 하나요? 여기에 있는 우리 수준으로, 남자가 연봉 1억 벌어 주는데, 그 남자한테 순종 잘하지, 뭔 대들고 싸울건가요? 연봉 1억이 우스운가요? 연봉 10억 갔다주는데, 뭐 여자가 순종하고, 10억을 챙기지, 싸울 일이 있는가요? 기쁠 때, 수월할 때, 좋을 때 순종은, 이게 순종인지 아닌지, 알아보기가 좀 어렵습니다. 언제라야? 순종을 순정인 줄, 정체가 나오고, 알 수가 있을까요? 연봉 1억, 한 달에 천만 원씩 척척 갖다 주던 남자가 어느 날 직장에 쫓겨나서, 100만 원 달랑 들고 실업 수당 갖다주면, 그때도 그 남자한테 순종 할까요? 그렇게, 북쪽의 어려운 추울 때도 순종을 한다면, ‘아! 저 사람은 좋을 때 순종도 정말 순종이었구나.’ 어려울 때 보니까, 북쪽 어려운, 혹독한 환경 속에서 순종할 때 보니까, ‘아, 참 순종이구나’ 주님 믿어 영광 받고, 복 받고, 주일날 온 가족이 평화로울 때, 그때 말씀대로 지키고, 주일을 잘 지킨다는 것은, 긴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신사참배 환란이 오니까, 인민군 6.25 점령이 되니까, 이제는 주일날 교회를 갔다가는 어려워지겠고, 곤란해지겠고, 난리가 나겠고. 이게 ‘북쪽’입니다. ‘우리 전부 교회 갑시다. 교회 가는데 좋습니다.’ 이럴 때에는 남쪽. 하필, 남 북한도 그리 되어 있지요? 남한은 교회 가는 사람들 떄문에, 시내 불 꺼지면, 십자가가 많아서, 불신자들이 그냥 죽을 지경이랍니다. 한 골목에 교회가 몇 개씩. 큰 건물은, 한 건물 안에 교회가 2개, 3개씩. 교회 가는 사람이, 누구든지 갈 수 있고, 주변에서 함께 가자고 하고. 이럴 때는 남쪽의 좋은, 따뜻한 신앙의 형편. 38 이북의 평양에는, 성경 들고 찬송하고, 주일 지킨다고 가다가는, 한 사람이 아니라, 사돈 팔촌까지 난리가 나는 판이니, 그런 환경은 남쪽인가요? 북쪽인가요? 북쪽.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남쪽은 따뜻하게, 북쪽은 춥게 만들어 놓고, 성경에 ‘북쪽’이 나오고. ‘북풍’이 나오면 ‘어려운 환란, 어려운 때로구나.’ 가정의 경제가 어려울 때, 북쪽입니다. 어린아이에게 부모님이 일찍 가버렸습니다. 이 아이에게는 강한 북풍이 휘몰아칩니다. 북쪽. 신앙생활 따뜻하게 하던 때는 남쪽. 신앙생활 하기가 어려운 쪽은, 북쪽. ‘양은 어디 가서 잡아라?’ 북쪽에 가서 잡아라. 남쪽이 아니라 북쪽에 가서 잡아라. 순종은 하나님께 언제 순종할 때에 참 순종이라고요? 어려울 때의 순종이 순종입니다. 결혼 주례 때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변치 않겠느뇨?’ 그러면, 신랑도 ‘예’. 신부도 ‘예’. 그러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는가요? 기쁠 때야 좋지요. ‘슬플 때도 함께 하겠느냐?’ 이게 문제이지요. 아내가 건강한데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아내 정신 지체 장애 1급 들어가 놓으면, 긴 병에 효자가 없다고 그러던 그때가 조선 시대입니다 긴 병에 효자가 없다고 하던 그 떄가 조선시대입니다. 석 달이면, 효자인지 아닌지, 뭐 그냥 표가 안 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강건하거나, 병들 때에도 남편을 사랑하며, 존중히 여기며 순종하겠느냐?’ 여기 결혼한 여반들, 그 얘기 다 들으시고 했을 걸요? ‘예’라고 했었을걸요? 지켜보는 사람들 앞에, 맹세 했을 걸요? 남자가 돈 벌어 주기는커녕, 교통사고 나서 들어 누웠는데, 어떡하지요? 이거? 평생 돈 벌어 준 남자가 50에 퇴직하고, 60 되면 여반들이 그냥 떼어내지를 못해서 죽겠다면서요? 50-60남자가 아내한테 떨어지지 않으려니까, 비 맞은 가랑비가 질척거려, 떼어내도 떨어지지 않아서 죽겠다고, 여반들은 모이면 그런답니다. 여기는 우리 10대들은 안 그럴 것 같지요? 엄마가 그러는데, 딸이 안 그러려고? 할머니가 그러는데, 손녀가 안 그러려고? 아니라, 아니라해도 결국 강아지는 개 따라가고, 망아지는 말 따라가고, 그래서 할머니를 보면 결국은 어머니는 그리 되겠고, 딸은 결국 그리 되겠구나 이래서, 백 목사님 생전에 중매를 설 때에, 남자 돈 잘 버는 것, 여자 인물 좋은 것을 구하면,  불러다가 꼭 그 말을 합니다. ‘장모 보거라. 20년 지나면, 그리 된다. 그 아가씨 할머니 쳐다보고거라. 평생 살면서 그 얼굴 보고 살아야 된다.’ 얼굴 보지 말라 할 때, 그 말을 합니다. 여기 ‘양’은 ‘순종’을 말합니다. “단 북편에서 잡아라” ‘환란에서’ 괄호에 그렇게 적으시면 됩니다. ‘환란에서’. 더 적을 학생들은 ‘어려움에서’, ‘고난에서’. 고난에서 순종하는 것이 참 순종.

염소는요? 염소도 북쪽에서 잡습니다. 염소를 북쪽에서 잡나요? 평소는 양처럼 딱 연극을 하는데, 어려워보니까 이제 속의 것이 불뚝 나오는데, ‘어, 이거 양이 아니라 염소였구나.’ 어려워보니까 알겠습니다. ‘어려워도 순종’, ‘끝까지 순종’. 어려울 때에, 내 속에 불만, 증오, 질투 불쑥 튀어나오면, 이걸 딱 잡아다가, 주님 앞에 ‘아직도 이 마음 속에 염소가 있었습니다. 순종은 어려워도, 끝까지 저는 갑니다.’ “잡을 것이요” 죽일 것. 잡을 것이요. 죽여 버릴 것. 이 죽인다는 말을 남의 교회를 죽이고, 남의 나라를 죽인다고 잘못 읽어가지고, 유럽의 교회들은 십자군 운동이라 해서, 800년 전에 왕이고, 귀족이고 뭐, 몇 십만명이 이스라엘까지 쳐 들어가서 사람을 죽인다고 생 난리였는데, ‘저 이슬람을 믿는 중동 사람 죽이러 가기 전에, 네 속의 자존심부터 죽여라! 네 속에 있는 속아지부터 죽여라! 너 부부 사이에, 서로 뻔히 보고 아는 잘못이 있지 않느냐? 가정 안의 죄악과 먼저 싸워 죽여버려라!’ 자기가 자기 속의 자기 죄를 죽이면,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남이 볼 때도, ‘그것 참 사람 신앙생활을 잘한다. 그게 맞겠다.’ 이리 싶고. 자기는 들여다보지 않고, 자기 속에 죽일 것은 쳐다보지 않고, 남 죽이러 다니느니라고 설치면. 요즘 모두들 다 비판 받듯이 그리 됩니다. “단 북편에서” 환란에서, 순종의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잡을 것이요” 양을 잡을 것이요. 염소를 잡을 것이요. ‘끝까지 순종’.

그 다음 “각을 뜰 것이라” 12절에 보니까, “그는 그것의 각을 뜨고” 양이나 염소도, 소처럼. ‘머리’ 잘라 버리고, ‘앞발’, ‘뒷발’ 잘라버리고, ‘가슴’, ‘배’ 낱낱이 조각 조각을 내는 것을, ‘각을 뜬다’ 그럽니다. 굳이 말하자면, 토막 살인처럼. 왜? 양이나 염소를 각을 떠야 될까? 똑같은 죄라도, 일반적으로 ‘그냥 제가 죄인입니다.’ 글쎄요. 덕담으로 그냥 하는 말인지? ‘제가 눈으로 보는 죄를 많이 짓습니다. 제가 듣는 복이 없어, 들을 때에 죄를 많이 짓습니다. 저는 안갈 곳을 잘 돌아다닙니다. 발로 짓는 죄가 많습니다. 저는 성질나면 손이 먼저 나갑니다. 이 손으로 지은 죄가 많습니다. 저는 이 좋은 손으로 노름하는 습관을 못 버렸습니다.’ 이렇게 죄를 구체적으로 조각 조각내는 사람은, ‘그 사람 죄와 싸워봤구나! 그 말은 그냥 말이 아니로구나.’ 알 수가 있고, 통짜배기로 그냥 뭉뚱거려서, ‘제가 죄인입니다.’ 그러면, ‘죄인인 척 하는 것인지? 정말로 죄인인지? 모르겠다’ 이리 됩니다. 반대로 감사를 할 떄에도, ‘범사에 감사합니다.’ 그 연보 봉투의 범사의 감사는, 될 수 없으면 적지 않기를 노력하셔야 됩니다. ‘만사, 모든 일을 감사합니다.’ 뭐 저 사람은 감사가 넘치는구나 싶은데, 글쎄요. 그런 감사보다는, ‘지난 한 주 교통사고 지켜주신 감사’ 아, 저 사람은 한 주간에 사고를 당할 뻔 했구나. 그것은 작은 감사 같은데, 느껴봤고, 실제 감사입니다. ‘작은 아이 학교에서 무사히 돌아오게 하신 감사’ 아무리 안전하게 지켜도, 오다가 넘어져 머리 잘못 다쳐서, 평생에 뇌성마비 걸리면 어떡합니까? 친구끼리 놀다가, 잘 한다 하다가 그냥 앞니가 하나씩 빠지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아이는 새총 놀이 하다가, 새총을 거꾸로 잡으면 눈이 나가버립니다. 평생에 한 눈 없이 사는 아이. 이래서, 주일 날 감사 연보를 해도, 한 주간을 돌아볼 때에, 느껴볼 때에, ‘이번 주간은 참 교통에 대한 감사는 해야 되겠다.’ 아이 낫게 하신 감사. 집회를 두고는, 예전에는 큰 차로 한 목에 오니까, 기사만 단속하면 되는데, 전부 차 한 대라, 그 많은 차 중에 한 대만 굴러버리면, 박치기 해버리면, 남의 일입니까? 그게 내 일이 되고, 내 차가 되면 한 몸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많은 사람이 오고가는데, 한 대도 사고가 나지 않아야 되는데, 서울에서 오는 3-4시간 한번도 졸지를 말아야 되는데, 나는 졸지 않았는데, 상대방 차가 졸면서 나를 치면, 괜찮은가요? 좋기는 좋은 세상이나, 집회를 두고 기도를 할 때에도, ‘왕복, 교통, 안전을 지켜주옵소서.’ 이 덕유산 산골짝에 돌 하나 잘못 디뎌, 접질러 놓으면 몇 달 절어야 됩니다. 신앙 없는 사람은 집회를 생각하면, 발 접질린 것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것, 하나 하나를 구체적으로 감사하고, 구체적으로 회개하는 것은 조각 조각을 낸다고 그럽니다. “각을 뜬다” 순종의 양을 잡아 드려라. 그냥 통째로 올리지 말고, 팔, 다리, 목, 조각 조각, 조각을 내거라! 새벽에도 순종, 새벽기도. 출근하면서 주님 동행 잊지 않으려고 순종. 퇴근하면서 2차 3차 가고 싶은데 딱 끊어버리고, 가정으로 돌아오는, 퇴근길의 순종. 어렵지요? 새벽에 눈 뜨면, 죄 짓기는 어렵습니다. 또 양심이 있으면, 새벽 기도를 다녀옵니다. 그리고, 아침 출근하고 학교 갈 때는, 깨끗한 마음으로 출근을 했는데, 하루 종일 공부하고, 하루 종일 돈 벌다 보니까, 저녁에 돌아올 때는, 가서 안 될 곳에 슬쩍 가고 싶을 때도 순종! 끝까지 순종! 그럴 때에 나오는 염소의 잘못 부분도 꺽어 죽여서 순종. 그래서 ‘각을 뜬다’는 말은, ‘해체할 것’. ‘조각 조각 구분할 것’, ‘하나씩 떼내어, 나누어 생각해볼 것’. 하나님 앞에 바칠 때, ‘범사에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가 천 개가 되고, 만 개가 되어,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때에는, 할 수 없어 그냥 그만 ‘범사에 감사합니다’만은, 여기 있는 우리들의 수준으로는 될 수 있으면, 그 중에서 제일 절박한 것, 제일 감사한 것, 하나를 딱 떼어 회개! 하나를 딱 떼어 감사! 그게 전부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렇게 구체적일 때, 실질적인 때, 따져볼 때, 그 때가, 그게 주님이 ‘기뻐’ 받으신다.

그 다음에 네 번째는, 머리도 잘라버려라. “머리와”, “기름을 베어낼 것”. 머리라니요? 생각, 지식, 사상, 마음을 ‘머리’라고 그럽니다. 특별히 생각, 지식도 떼 버려라! ‘순종을 하되, 주의 말씀 지식에 따라 순종’, 내 속의 거역, 내 속의 질투를, 염소같은 것을 죽여도, 말씀에 비교하고, 말씀에 비춰서 딱 짤라, ‘이 생각은 틀렸다. 이것은 죽일 생각이다.’, 옳은 생각은, ‘이 생각은 죽어도 순종이다.’ 머리는 ‘지식’입니다.

“기름을 베어낼 것” 기름은,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기름에 대한 사무엘의 해석이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출애굽할 때에 아말렉 백성이 구원의 역사를 막았으니 아말렉을 진멸하라. 사람뿐이 아니라 짐승까지 살아있는 것은 살려두지 말라.’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가서 전쟁에서 이기고, 사람을 다 죽이며, 아각왕, 왕은 인물이 좋지요? 이것 붙들고 친구할 수도 있지요? 이것 붙들고 얻을 것이 많아서, 아각왕 하나는 살려두었습니다. 쓸데 없는, 위험한 인간들은 다 죽이고, 왕 좋은 것 하나는 살려두었고, 두 번째로, 모든 짐승을 다 죽이면서, 시시한 것, 다리 저는 것, 돈 안되는 소와 양은 다 죽여놓고, 기름진 짐승은 살려두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아, 기름진 것은 좋다는 말이구나. 귀하다는 말이구나.’ 그리고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할 때에,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 그래서, 기름이라는 것은 배고플 때, 어려울 때, 영양이 없어 비실비실 말라 비틀어질 때의 기름이라는 것은, 잘 먹은 재료가 되고, 귀한 연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역사의 ‘동물성 기름’이 나올 때는, ‘귀한 것, 소중한 것’을 기름이라 그럽니다. “기름을 떼어낼 것”

그리고, 이제 25페이지로 넘어가서, 새벽에 공부한 소. 금방 잠깐 살펴보는 양과 염소를 복잡하니까 ‘비교’를 해봅니다. 하나님 앞에 번제를 가져올 때, 경제가 넉넉하면! 신앙이 좋고, 건강하면, 뭘 가져 오라고요? 소! 신앙이 없고, 형편이 어려우면 어떻게요? ‘양이나 염소라도 된다. 있는 대로 가지고 와라.’ 대신에, ‘흠 없는 것으로 가지고 와야 된다. 하나님 앞에 가지고 오는데, 정성이면 되지만은 정성조차 없으면 아니된다.’ 레위기 22장을 한번 잠깐 가서 살펴볼까요? 레위기 22장, 잠깐 뒤로 넘어갑니다. 레위기 22장 19절, 180페이지 읽어보니까, “번제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려거든, 열납되도록”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를 가지고 오되” 어떤 소? 어떤 양? 어떤 염소라고요? “흠 없는 수컷으로 가지고 오너라” 20절, “흠 있는 것은 아니된다.” 어떤 건데요? 22절에 가니까 “눈먼 소는 안된다!”눈 밝은 소는 네가 챙기고, 눈 먼 소는 하나님 갖다주고, 그것은 안된다. “상한 것도 아니된다! 찢어진 것, 저는 것, 몹쓸 것은 하나님 하시라고 주고, 그 다음 깨끗하고 온전한 것은 네가 챙기고, 그것은 안된다!” 소가 없어서, 양을 가지고 오는 것은 된다. 양이 없으면 비둘기라도 된다. 단! 흠 없는 것으로 가지고 오너라. ‘정성’은 가지고 와야 됩니다. “눈먼 것, 상한 것, 한 쪽이 떨어져 나가버린 것,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 안됩니다. “종기 있는 것, 괴혈병 있는 것, 비루 먹은 것을 너희는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교회가 정성, 정성, 정성 그러니까, 삼성 이건희 회장이 교회 오면서, ‘정성을 보니까’ 10원짜리 들고 들어오면, ‘너한테는 10원짜리가 정성이 아니다! 거지가 10원짜리 가지고 오면, 그 정성을 본다. 너의 10원과 재벌 회장님 10억보다 더 하다.’ 무조건 적다고 정성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형편에 따라’ 속에는 ‘감사’, 밖에는 ‘정성’. 정성이라는 것은 자기로서는 최선을 다해야 됩니다.

“흠 없는 수송아지, 흠 없는 양” 교재 25페이지입니다. 소는, 일을 하는, 수고하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의 교회에 수고하는 이런 일은 ‘회막문’ 즉각 바치고. 양의 순종, 염소의 나쁜 이런 기질은, 회막 안으로 끌고와서 ‘단 북편’에서 잡아라. ‘어려울 때에 봐야 보는 것이다.’ 둘 다 ‘책임을 전가’합니다. “안수를 하고” 그 다음 가지고 온 백성, 우리가 제물을 “직접 잡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단 사면에 피를” 뿌립니다. 이래도 죽었고, 저래도 죽었고. 가정에서도 죽었고, 교회에서도 죽었고. 어려울 때에도 죽였고, 쉬울 떄에도 죽였고, 잘나갈 때에도, 하나님 앞에 목숨 바쳐서 충성. 어려울 때에도 마찬가지. 단은 정사각형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때나! 집에서 보니까, 좋은 아빠. 남들한테는, 험한 깡패. 집에서 처 자식한테는 폭군, 동네에서는 이장, 반장하느니라고 온 동네에서 저렇게 좋은 분이 없습니다. 온 동네 아줌마들이 다 부러워합니다. 집에 가서는 폭군인데. 단은 정 사각형입니다. 가정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처 자식이니, 하나님의 선물로 충성. 이웃은 하나님 앞에 전도하여 얻을 식구들이니까 충성. 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맡긴 많은 백성이니까 충성. 불신 사회는 안 믿는 이들이 우리를 쳐다보니,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충성. ‘언제, 어디서나, 어떤 형편에서나.’ 이게 “단 사면에 피를 뿌려라.” 양이 순종의 충성도, 염소의 거역의 꺽어대는 이것도, 전부는 피는 생명인데, 어떤 면으로든지, 피를 흘리는 것이 맞습니다. 흔히 우리 목회자들의 실수 중에 하나가, 자기 교회는 잘 되도록, 있는 충성을 다 하지만은, 여러 교회가 함께 모이면. 여기는 좀 곤란하니까, 옛날 100개 교회가 있던 공회 시절에, 서울 강남 롯데 본점 맞은편의 잠실동 교회는, 지금 현재 대한민국 공시지가로, 제일 값이 비싼 곳입니다. 한 블럭을 잠실동 교회는 다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회비 모을 때는 돈이 없습니다. ‘예배당 건축하느니라고 돈이 어렵습니다. 우리는 가난합니다.’ 빚쟁이 교회입니다. 대한민국 제일 비싼 땅을, 하나씩 사 드리는 데는 정신없이 총력, 연보를 다 해서 제일 비싼 교회인데, 공회비 모으면, 시골 교회 10만원, 20만원 보태 주는데, 그때는 돈이 없답니다. 왜? 교회에 빚이 있어서. 돈이 없어서 빚이 아니라, 부동산 투자 하느니라고 돈이 없어서. 이렇게까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단 사면에 뿌릴 것” 이면으로도 목숨 바쳐 생명. ‘교회를 위해서는 충성하나, 여러 교회가 함께 일을 할 때에도, 변치 않을 수 있느냐?’ 이게 어렵습니다. 가정의 식구들 돌볼 때에는 뭐 알뜰해서 그냥, 흘린 못 한 개도 주워담는 사람이, 교회 돈은 공돈이니까, 공동의 돈이니까 인심 푹푹 쓰고, ‘예. 뭐 거지 다 달라는대로 주시고, 주변 사방에 다 뿌리시지요.’ 주로 좌파 쪽에 데모하는 사람들이, 전국에 예배당을 팔아서 거지를 주랍니다. 자기 집은 안 팔면서. 네가 너희 집 팔아서, 거지 다 주고 나서 교회를 향해서, ‘교회도 그러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거 양심에 맞는 말이겠지요? 6.25 전쟁에 미국의 장군의 아들들이, 한국에 와서 장애자가 되거나, 죽은 사람이 100명이 넘는답니다. 미군 별을 단 장군의 아들들이 한국에 와서 죽고, 부상당한 사람이 100명이 넘는데, 우리나라 별을 단 장군의 아들 1명 죽었답니다. 알고 보니까, 그 한 명이 아버지 몰래 지원 나와가지고 앞장 서다가 죽었답니다. 이게 우리 수준입니다. 남한테는 ‘충성해라!’ 너는? ‘나는 시간이 없어서.’, ‘목사야 뭐 목사한다고 나섰으니까 충성하십시오. 우리는 신앙이 없어서 교인 노릇합니다.’ 곤란합니다. 목사는, ‘목사니까 제가 먼저 앞장 서 보겠습니다.’ 하면. 좋은 목사. 교인은요? ‘앞장 서느니라고 고생하십니다. 부럽습니다. 따라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게 교인의 자리입니다. ‘앞장서지 못해 죄송합니다. 부족해도 앞장 서 보겠습니다.’ 이러면 되는 교회. 목사는, ‘교인들이 뭐해?’ 그러면, 또 교인은 그냥 있나요? ‘월급 받고, 목사 너는 뭐해?’ 이건 망하는 교회. “단 사면으로” 남자도 여자도, 어린 교인도, 장성한 교인도. 이 면으로도, 저 면으로도. 모든 면으로 피는 뿌려야 됩니다. 확실하게 죽여, 없애 버려야 됩니다. 내 속의 나, 나는 무조건 죽일 것.

그 다음에 이제 죽여놓은 이 소를, 죽여놓은 이 양을, “가죽을 벗기고” 부분 부분 “각을 뜨고” 그 다음, “다리와 내장은 씻어라” 다리는 돌아 다니지 않는데를 돌아다녔으니까, 죄악의 세상을 산다고 돌아다녔으니, 어느 누구인들 그 다리가 깨끗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인들, 그 다리가 깨끗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노년에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 공연히 한 말이 아닙니다. 멋있게 겸손하기 위해서 척 한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돌아봐도, 남들이 볼 때에는, 죽을 매를 여러번 맞고 뭐, 바울처럼 깨끗하게 산 사람이 없는데, 받은 진리의 말씀으로 자기를 돌아보며, 지난날 걸어온 걸음 걸음을 볼 때에, ‘참 죄송합니다. 씻을 것 밖에 없습니다.’ 이게 옳게 본 것입니다. 그 다음, “내장을 씻어라” 새벽에 살폈습니다. 우리 속에 뭐가 있나요? “분함과 악한 생각과 음란과 간음과” 남 죽어라는 말은 못하지만은 미워하는 마음이 살인하는 마음인데, 요한일서에 이렇게 해석을 해 놨습니다. “미워하는 자는 살인한 자니” 살인한 적은 없는데, 미워한 적은 여기 다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 살인자입니다. 남 말을 할 시간이 없는, 우리는 내 속에 씻을게 많습니다. 소 안에도. 주의 일을 하면서도. 또, 순종만 했는데도 들여다보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소나 양이나, 가죽도 벗겨야 되고, 덮어 쓰고 있는 외부의 행위 다 벗겨버리고, 조각 조각 각을 뜨고, 다리와 내장을 함께 씻고. 지금 소에는 “머리와 기름”을 적지 않았는데, 적으셔야 됩니다. 8절에 봐볼까요? 8절에, 이것은 소 이야기입니다.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소를 각을 떠라”, “머리와 기름을 단 위에 올려 놓으라”는 것을 보니까, 머리와 기름이 있습니다. 생략이 된 것이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나무 위에 화제로 드려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머리, 기름, 내장, 정강이. 모든 것을 흠향하고 받으시느니라.” 26페이지로 넘어갑니다. 이게 양입니다.

이번에는, “새”를 봐 보겠습니다. 자 한번 고개 드시고, 저를 보시고, 구약에는 제사, 신약으로 오면요? 예배가 됩니다. 구약은 칼을 들고 소와 양을 잡습니다. 신약은, 말씀의 칼로 누구를 잡나요? 여반들, 누구를 잡나요? 남편? 남반들, 말씀의 칼로 주일 설교 듣고, 집에 가서 여편네한테 ‘이리 배웠냐? 저리 배웠냐?’ 그러면, 여자 잡는 겁니다. 구약은 칼을 들고 소와 양을 잡고, 신약은 말씀의 칼로 자기를 잡습니다. 부부가 똑같이 주일 설교 듣고, 남편이 와서 ‘오늘 말씀에 나는 참 이렇게 미안하더라.’ 그러면, 아내가 ‘이제 좀 철들고, 신앙이 드는구나’ 좋아 보이지. ‘그래, 너는 죄인이 아니냐?’ 그러지 않을 걸요. 똑같은 말씀의 검을 받아, 아내는 아내의 자리에 자기를 잡고, 남편은 남편 자기의 자리에 자기를 잡고, 밥상에 지켜보는 아이들은 누구를 잡고요? 부모님이 앞서 말씀으로 각자 자기를 잡고, 자기를 회개할 때에, ‘그 말씀으로 나도 저렇게 잡아야 되겠구나’ 그러면, 다윗이 될 겁니다. 아버지가 이새라고 다윗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새의 아들이 8명입니다. 이새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다윗이 된 것이 아니라, 다윗 때문에, 이새가 다윗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말씀의 칼로, 남편은 자기를, 아내는 자기를. 그 모습을 보며 아이들은, ‘나도 저렇게 믿는 것이 옳겠구나.’ 어린 나는 나대로, 작은 칼로 어린 자기를 잡고. 목회자는 설교하면서, 자기를 잡고. 그럼 떳떳할 수가 없는 겁니다. 자기를 잡아본 것만큼, 교인은 ‘그래도, 교인보다 목사가 나을 텐데, 목회자가 자기를 저렇게 잡아대니, 그러면 교인된 우리는 나를 잡을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면, 무슨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그렇게, 목회자가 자기를 잡지 않으니까, 목사 가족이 와서 칼을 들고 그냥 잡아대는 겁니다. 그러면 이해가 되지요? 제가 저를 평소에 많이 잡아 놨다면, 왜 제 가족이 저를 잡는다고 오고 그러겠습니까? 안 잡으니까, 이제 할 수 없이 하나님께서 녹을 데리고 와서라도 잡지. 사울이 자기가 자기를 잡지 않으니, 아말렉을 통해서 결국은 자기를 잡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자기를 미리 잡아버리니까, 하나님이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의 손에 칼을 줘서, 천하 만방을 잡아버리지.

양과 소에 이어, 이번에는 새입니다. 14절. “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예물은 속에 무엇이 들었고요? 감사. 감사가 든 것은 예물. 속에 감사가 들어 있지 않으면, 뇌물! 아니면, 남을 죽이는 독약. 그렇습니다. 속에는 ‘감사’, 밖에는 뭐라고요? ‘정성’이 있어야 예물입니다. 겉은 정성, 속은 감사. 10살짜리 천 원 용돈으로, 엄마 생일날 선물을 사오면, 10살짜리의 천 원은 정성입니다. 속에는 감사니까, 예물이 됩니다. 30살 취업해서 월급 200만원 받는게, 부모 생일날 천 원짜리 들고 들어와서, ‘저도 정성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러면, ‘너한테 천 원은 정성이 아니다! 네 속의 감사는 감사가 아니다!’ 속에는 감사, 밖에는 정성이 들어 붙어야 ‘예물’입니다. “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소가 없느냐? 양으로 해라. 양도 없느냐? 새 한 마리라도 된다. ‘형편’에 따라 하라. 고린도후서, 몇 장 몇 절요? 8장 12절. 기억하십시다. “할 마음만 있으면 된다. 없는 것은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있는대로 받으시는 하나님이다.” 3절의 소! 그만큼 되지 않느냐? 10절의 양이라도 된다. 양도 없느냐? 14절의 새 한 마리라도 된다. 정성이면.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면” 어려운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입니다. 못난 사람입니다. 참 복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됐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면, 소로 번제를 드릴 나를 주겠다. 당장에도 소 이상으로 볼 수 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이 되는” 이 법을 가지고 14절을 살피는 겁니다.

“새의 번제면” 새는 두 가지입니다. 1번, 어떤 새요? 산 비둘기. 멧 비둘기를 말합니다. 들판에, 산에 날아다니는 것. 우리나라는 집 밖에 나가면 산입니다. 몽고같은 나라, 이스라엘 같은 나라는 들판입니다. 그래서, 들 비둘기, 산 비둘기, 멧 비둘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집 비둘기가 아닌 것, 기르지 아니하는 것, 집 안에 있지 아니한 것을 말합니다. “산 비둘기” 비둘기는 성령의 역사를 말한다고 그랬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에 큰 역사를 하셨습니다. ‘자연으로 받는 성령의 은혜’ 기르지 않아도, 천지 사방에, 밖에는 비둘기가 많습니다. 산 비둘기다. ‘내가 기르지 않는 성령의 역사의 은혜라’ 집 비둘기는 내가 노력하고, 기도하고, 열심히 충성하고, 마구 발버둥을 칠 때, 성령이 역사하는, 이런 역사를 “집 비둘기”라고 그럽니다. 여기에서는, 소가 없으면 양으로, 양도 없으면 새 한 마리라도! 아무리 적어도, 상관은 없다. 부자는 소가 많은데, 소는 순종을 잘하니까 데려 오기가 쉽습니다. 소가 없으면 양이라도, 기르는 양 데려오기는 쉽습니다. 양도 없으면, 새 한 마리라도 잡아야 되는데, 참새 잡아보셨습니까? 10명 안될걸요? 참새 잡아 보신 분들? 작아서, 힘으로는 잡기가 쉬운데, 날래서 못 잡습니다. 독수리는요? 구름만큼 떠 있어서, 총으로도 못 잡습니다. 어려운 것, 힘든 것, 멀리 있는 것 말고. 새는 작은데, 간단한데, 그 중의 비둘기는 잡기가 쉽습니다. 사람하고 가까우니까. ‘비둘기 한 마리라도 수고해서, 잡아 와라. 집에 새가 없거든.’, ‘만약에 너의 집에 비둘기를 기르거든, 집 비둘기라도 된다. 집 비둘기 중에 작은 것, 새끼라도 된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 ‘충성’을 봅니다. 작은 것을 보는게 아니라. 큰 자는 큰 것, 작은 자는 작은 것. 큰 자는 큰 충성, 작은 자는 작은 충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정성’은 보십니다. 공회는 옛날부터, 돈 없던 옛날부터, 교회 연보궤를 두어 알아서 연보하게 했지, 이렇게 연보를 매미채처럼 거두고 그러질 않았습니다. 다른 데서 연봉 얼마한 것, 얼마한 것 이렇게 발표를 하면 모금이 많이 되지만은, 공회는 그렇게 모금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상적으로. 그러다 보니까, 이제 어떤 장점이 있느냐? 양심껏, 원해서, 정성껏 할 수 있는 사람이, 남 눈치 보지 않고 연보하니까 소망이 생기는게, 이게 공회의 장점입니다. 공회의 단점은, 부자인데, 부산의 서부교회 제일 부자 600억 재산인데, 50만원 연보 안하고 몇 년 버티는 것을 봤습니다. ‘정성이 문제지 뭐, 돈은 문제인가?’ 30년 전의 재산 600억입니다. 설교록 편찬할 때에, 평생 회원이 50만원입니다. 서부교회 직원들 월급이 6만원입니다. 8개월 월급, 50만원, 평생회비 50만원 연보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제일 부자 장로님은 50만원 연보를 안 합니다. 안 하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이 정성을 보지.’ 예. 정성을 봅니다. 6만원짜리 월급에 50만원 연보와, 600억 재산에 5만원짜리 연보는 다른 겁니다. 자꾸 밖으로 나갈까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돈 많은 사람이, 교회에서 돈 값을 하는 것도 탈! 이것 틀렸다고 자꾸 잡다보니까, 연보 안하는 것을 자랑하고, 연보하는 사람을 쥐어 박는 것도 탈입니다. ‘소 잡을 사람은 소를 잡아라! 하나님이 기뻐한다.’, ‘양 잡을 사람은 양이라도 된다. 기뻐한다.’, ‘정말로 새 밖에 없느냐? 새 한 마리가 소와 같다! 그 조차 없으면 새끼라도 된다.’

그래서, 산 비둘기, 집 비둘기는 “새끼”라도. 산 비둘기 왜 새끼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을까요? 신명기 22장의 ‘긍휼의 법’을 보면, 산에서 새를 잡을 때, 새 어미와 알. 새가 품고 있는 새끼와 어미를 동시에 못 잡게 했습니다. 이렇게까지 긍휼과 자비를 가르친 것이 있어서, 산 비둘기 새끼를 찾으려면 어렵지요? 함부로 찾아지지도 않지요? 그래서, ‘산 비둘기는 잡기 어려운 새끼 말고, 쉬운 어미 비둘기를 잡아라. 집 비둘기는 기르니까, 어미새가 없거든, 새끼라도 된다.’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를 ‘배려’하시는 말씀입니다. 새입니다. 그러면, ‘새를 가지고 제사장에게 가져와라.’ 14절, “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면, 산 비둘기나, 집 비둘기 새끼로 예물을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단으로 가져다가” 작으니까 주고 받고, 안수할 것도 없습니다. 새는 잡으면 손아귀에 들어가니까 전부이지요? 손아귀에 들어가니까. 소는 덩치가 크니까, 머리에 안수하며, ‘나의 죄를 이 소에 다 맡겼습니다’ 하고 죽입니다. 양은 적지만은, 머리에 손을 얹고, ‘내 죄를 이 양에게 다 옮겼습니다.’ 죽입니다. 죄값은 사망입니다. 비둘기는 한 손이니까, 한 손에 잡고 다 들었습니다. ‘제 죄가 이 비둘기 안에 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비둘기의 목을 비틀어 끊고” 비틀어 끊고. 단은 ‘십자가’라 그랬습니다. ‘십자가에 위에’. “머리를” 머리는 지식, 다른 말로는 ‘생각’이라 그랬지요? 소 머리와 양 머리와, 개 머리와 새 머리를 한번 그림을 마음 속에 그려 보시겠습니까? 소 머리가 참새만큼 흔들면, 멀리 떨어져 나갈 걸요? 소는 오로지 하나 보고 끝까지 일하고, 걸어가다가 엎어져 죽습니다. 한 번 보면, 앞을 향합니다. 새는? 잡으러 오는 사람이 없는데도 뽀시락 하면, 여기저기 하루 종일 두리번입니다. 보시락 소리가 안 나면, 심심해서라도 여기저기 기웃거립니다. ‘변덕’, 끝없는 변덕. 이것을 ‘새 머리’라고 그럽니다. 그 머리 어떻게 하고요? “비틀어 끊어 버리고” 생각을 돌려, 이제는 청산을 하라! ‘여기가볼까? 저기가 볼까?’ 월부 책 장사가 책 팔기 위해서는, 할부 차 장사가 차 팔기 위해서는, 이 가게, 이 손님, 저 손님. 하루에 10명, 100명 만나러 다니는 것도 소와 같은 충성입니다. 두리번 거려서는 안되는데, 여기 두리번 저기 두리번, 번개처럼 이렇게 자꾸 머리를 돌려대면, 그거 곤란합니다. 그만 대학에 국문과 하나 들어갔으면, 국어로 한번 평생을 걸어 보든지. 또 공대로 갔으면 공대로 한번 평생을 걸어보든지. 한 길을 끝까지 걸어보는 사람. ‘한 우물을 판다’ 그러지요? 이 공장 갔다가, 저 공장. 옛날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업을 하면, 보통 추석에 이제 고향에 돌아옵니다. 월급 얼마? 10만원. 너는 얼마? 10만 5천원. ‘나 거기 가도록 자리 알아봐 줄래?’ 새 떼처럼 기웃 기웃, 여기저기, 안 가도 되는데, 가서는 안되는데, 이 생각, 저 생각, 복잡한 생각을 가르쳐서, ‘새의 머리’라 그럽니다. 어떻게 하라고요? “비틀어 끊어 버리고” 안 할 생각 좀 말아라! 잘못된 생각을 이제는 좀 비틀어 끊어버려라! 머리를, 변덕스러운 생각을 비틀어 끊고, 생각을 돌려, 이제는 청산하고! 하나님 앞에. 한번 교회 발 디뎠으면, 예전에 여기 우리 집회 때, 찬송 인도하던 분. 그 분이 개척 교회 갔는데, 개척 교회의 문제가 생겨 교인이 다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이 교인이 ‘마지막 교인 다 떠날 때까지는, 제가 그 교회를 지키겠습니다.’ 이랬는데, 마지막에 목사님이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공회로 들어왔습니다. 참 대단하지요? 교인 다 떠나도록 끝까지 지켰는데, 마지막에는 목사님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제는 더 지킬 수 없어, 여기에서 새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이런게 소의 충성, 양의 순종입니다. ‘저 교회 에어컨 들었대’ 우르르. ‘저 교회 에어컨은 구식이 아니라, 시스템 난방식이래’ 우르르. ‘저 교회는 나무 의자 치우고, 극장식 안락 의자로 다 바꿨대?’ 기웃 기웃. ‘저 교회 새로운 목사님은 찬송도 잘한대, 신학도 있대, 신학교 강의도 간대, 설악산 놀러도 갔다 왔대.’, ‘옆의 교회는 제주도 갔다 왔다는데? 저기는 선교 갔다가 해외 여행 갔다 왔다는데?’ 이런 두리번 거리는 것은 비틀어서 좀 끊어버리고, 옳은 진리를 배우기 위해서는, 땅 끝까지라도 다닐 수 있고! 주의 인도를 따라 광야 40년은 매일 천막을 치고 옮겨 다닐 수도 있고, ‘바꾸지 않아도 되는 것, 바꿔서 아니되는 것은, 새 머리를 끊어버려라! 변덕스러운 생각, 생각을 돌려 끊어 청산해버려라!’

머리만 가지고 안되고, 새가 바쁜 것은 앉은 것은 ‘머리’인데, 움직이면 ‘날개’이지, 날개입니다. 17절에 날개는 어떻게 하라고요? “그 몸을 찢어 버려라” 날개를 찢어 버려라. 찢되, 그 17절 앞에 보면, “또 그 날개 자리에서 그 몸을 찢되” 몸통도 가볍지만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날개는 몸통에 비해서 또 너무 크지요? 소는 덩치는 큰데, 발 4개는 움직이는 만큼만 필요하게 달려 있습니다. 새는 덩치는 이만한 것이, 날개는 몸통보다 몇 배나 더 큰 것이 새입니다. 도무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늘 이랬다, 저랬다. 끝없이 변덕스러운 날개짓 끊어버려라! 두 번 다시 변덕 부리지 못하도록!’ 그러나, “아주 끊어버리지는 말아라. 그 몸을 찢되 아주 찢지는 말아라.” 날개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쓸데 없이 돌아다니니까 문제이지. 발이 잘못 되었나요? 안 갈데를 가니까 문제이지. 눈 자체가 문제인가요? 그러면, 눈을 만든 하나님이 잘못되었지. 안 볼 것을 보니까 그렇지. 힘 있는 팔로 약한 사람 업어 주고, 교회 데리고 오면 좋은 팔인데, 이것으로 약한 것을 쥐어 박으니까, 그 놈의 팔이 문제이지. ‘찢되, 아주 찢지는 말아라.’ 필요해서, 달아 놨습니다. 필요 없는데 날아다니니까 찢어버려라! 안갈데 못가도록, 변덕 못 부리도록. “날개 자리에서 찢어라” 마음대로 돌아다니던, 행위를 찢어버려라! 행위입니다. 행위를 찢어버려라. “아주 찢지는 말아라.” 주신 그 위치, 그 기능 자체는 죄가 없습니다. 무죄입니다. 팔은 무죄입니다. 팔을 잘 못 쓴 행위가 죄입니다. 눈은 선물입니다. 잘못 본 눈이 문제입니다. 날개 자체는 새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입니다. 은혜입니다. 안 갈데 가고, 안 움직여도 되는데 자꾸 돌아다니니까, ‘날개 가지를 찢어 버려라. 그러나, 아주 찢지는 말아라.’ 하나님이 주신 돈, 돈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돈이 일만 악의 뿌리면, 돈을 주지를 말고, 믿는 사람은 돈을 가지지 말아야 됩니다. 그런데, 돈은 일만 악의 뿌리가 아니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 돈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 이걸로 잘 쓰면, 하나님의 자녀를 잘 기르고, 충성하고. 복음 운동하는데, 얼마나 귀한데?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이랬는데, 부자면 죄인이라고요? 부자를 죄인 취급하면, 그 나라는 망합니다. 돈 많이 번 부자를 손가락질하고 욕하면, 그 사람 경제적으로 실패합니다. 정주영씨 돈 번 것이 부러워야 부자가 되지. 부자가 아무나 부자가 되나요? 얼마나 열심히, 얼마나 근면하게, 얼마나 연구하고, 얼마나 절제하고, 얼마나 안 썼는데? 생각 없이 물려받은 돈은, 놔둬도, 저절로 없어집니다. 저주 안해도. 가난한 사람이 벌어 부자 된 것은, 그 안에 눈물이 있고, 땀이 있고, 연구가 있고, 절제가 있고, 건설이 있습니다. 그것을 욕을 해요? 부자 욕을 하려면, 다 거지가 되지. 자기는 아브라함처럼 부자되고 싶고, 남들한테는 거지 나사로가 되라? 그런 도둑놈의 심보! 그게 양심인가요? 정치 이야기 아닙니다. 좌파가 돈 못 벌고,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부자면 무조건 죄인으로, 무조건 나쁜 놈의 인간으로 만드는데, 그러면 가난해져야지요? 그러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지요? 소련 다 굶어 죽었고, 중국이 공산주의할 때에는 얼마나 굶어 죽었고, 북한 공산주의 할 때는 몇 백만명 굶어 죽었습니다. 그런 것을 봤으면, ‘돈을 잘 못 벌고, 돈을 잘못 쓰는 것이 문제지, 돈 자체는 죄가 아니구나!’ 이래야 될 것인데, 부자만 되면 죄인이라고 쥐어 박고, 부자를 욕을 할 때에는 온 5천만명이 신이 나는데, 여기에 있는 교인, 믿는 사람은, 그거 신앙의 반대입니다! 공산주의란, 시작할 때부터 ‘기독교 죽이기’로 약속하고 출발한 것이 공산주의입니다. 공산주의의 출발은, 종교적으로는 기독교를 죽이기, 경제적으로는 부자 죽이기로 시작을 했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좌파나 공산주의는 싫어해야 그게 맞는 겁니다. 그러면, 자본주의 우파는 좋은건가요? 자본주의 우파는 돈을 사랑함으로 일만 악의 뿌리가 되어 썩어 망합니다. 우리는요? 얼마든지 주시면, 주의 뜻대로 귀하게 쓰고. 열심히 살았는데, 주지 않으면 거지 나사로처럼 살고, 우리는 알아서 가난하면 가난이 좋고, 부자면 부자가 좋지. 부자도 싫어하지 않고, 가난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좌와 우는 아니지요? 여기 “비둘기 날개를 찢어 버려라” 쓸데없이 날아 다니지 말아라. 이 가지, 저 가지, 여기에 붙었다. 저기에 붙었다.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가, 이것은 불신자들도 나쁜 줄 압니다. ‘박쥐가 이쪽 저쪽 들어가는 것은, 나중에 좋지 않더라.’ 불신자들도 압니다. ‘가지 않을 곳, 쓰지 않을 곳, 붓지 말아야 할 곳은 찢어버려라! 그러나, 그 자체를 없애버리지는 말아라.’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소와 양은 잡으면, 피를 ‘단 사면’에 뿌립니다. 완전히 죽이라고, 다시는 돌아다니지 말라고. 비둘기는, 피가 적기 때문에, 따로 받아서 흐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단에서 잡아서 바로 흘려 버립니다. “단 곁에 흘릴 것”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 앞에 자기 부인은 철저해야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화제로” 몇 절인가요? 17절, “그 날개 자리에서 그 몸을 찢되, 아주 찢지 말고, 제사장이 그것을 단 윗불, 불 위 나무 위에” 단은 십자가입니다. 하나님 앞입니다. 그 위에 불로, ‘성령의 불’로. 그 다음 나무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위에 주님을’ 자기의 소를, 자기의 양을, 돈이 없으면 새 한 마리라도 올려놓고, ‘주여, 소를 올려놔야 되는데, 부족하여 새 밖에 없습니다. 양이라도 올려놔야 되는데, 부족하여, 새 한 마리 밖에 없습니다. 한 줌 밖에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대속은, 너든, 나든 누구든지 같습니다. “그것을 살라, 번제로 삼을찌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단 위의 불은, ‘성령의 불’을 말합니다. 구약은 불로 질러 태우면 됩니다. 신약은, 옷을 태울까요? 휘발유를 들이 붓고 분신을 할까요? 그런다고, 해결이 될까요? 이 성경 말씀을 읽다보니까, 말씀이 칼이 되어 나를 짜르고, 내 속의 악을 짜르고, 내 속의 죄를 짤라내고. 맞나요? 말씀을 읽고, 말씀을 배우고, 말씀을 살피다보면, ‘이건 틀렸구나. 이것은 옳구나.’ 칼로 잘라버립니다. 이 잘라낸 이 욕심, 나쁜 생각, 자기 중심. 참 복 없는 그런 자기의 악습! 말씀으로 들어보니까, 악습, 죄를 알겠습니다. 이게 드러나니까, 이게 구별이 되니까, 성령이 ‘그거 태워버릴 것, 없애버릴 것, 잘못 가졌다!’ 건강을 모를 때에는, 암 세포가 주먹만한 것이 들어 있으면, 배 속에 주먹만한 암세포가 들어 있으면 배 불리 잘 먹어서 배가 든든한 줄 알았습니다. 간이 딩딩 부으면, 죽는 줄도 모르고 이게 좋은 것인줄 알았습니다. 간암 4기 말인데! 그런데, 의학이 발달 되어, 간은 작아야지. 간이 크면 죽는 겁니다. 나중에 ‘화목제’에 가면, 간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콩팥, 간. 간은 의학 사전, 의학을 모를 때에도, 죽을등 살등 모르고 설치면 뭐가 크다고 그러지요? 눈이 크다고 그럽니까? 발이 크다 그럽니까? ‘간 크네?’ 죽을 때가 다 되었네, 그 소리입니다. 간이 큰 것은, 간 경화나 간 암이라 이것은 안 좋은 것인데, 이것은 수술해서 짤라내버려야 되는데, 말씀의 칼로, ‘이것은 잘못 되었구나!’ 그리고 보니, 이 악습, 이 악령, 기가 잡니다. 이게 기가 차서, ‘이런 것을 붙들고, 이런 것을 안고 살았나? 이제는 완전히 없애버려야 되지!’ 그 깨달음이 ‘영감’입니다. 영감이 성령으로 깨닫게 하지 않으면, 죽을 것을 붙들고, 좋다고 자랑하고 다닙니다. 세월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뚱뚱하고 체격이 좋으면, ‘아이고, 사장님이다.’ 부러워했는데, 탈북한 분들이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도 북한의 간부들은 몸이 이렇게 다 낫답니다. 그리고, 다 부러워 한답니다. 건강 상식이 있고, 모든 걸 알고 보니까, 저처럼 살을 이렇게 쏙 빼면, 지성인들은 ‘그 몸 관리를 해서, 건강하구나’ 이렇게 봅니다. 저를 보고 ‘이게 살이 없어서 은혜 없다’ 그러는 분은, 제가 속으로 ‘건강상식이 없는가보다. 지성인들은 저를 보면 부러워하던데’ 지식 하나가, 지식 하나가 들어가면, 좋은 것을 나쁘다. 나쁜 것을 좋다고 뒤집어 버립니다. 지식 하나가 들어가면. 말씀의 바른 지식이 들어가서, ‘과거에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성공했다고, 자랑을 했는데,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번 돈이, 이게 자폭할, 이게 시한폭탄이구나!’ 알고나면, 얼른 짤라서 내버려야 되는데, 이 깨달음! 성령의 영감이 깨닫게 하면, 옛날에 그 좋아하던 나쁜 습관을, 옛날에 그 자랑하던 그 악의 취미를. 이제는 가차 없이 끊어 버리는게 되지요. 그래서, “제단의 불로 살라라.” 성령의 영감으로 깨닫고 보면, 과거의 좋은 것, 과거의 자랑하던 것을, 이것을 창피한 줄 알고, 이걸 원수로 알고, 이걸 돌아서게 되어 있습니다.

한 페이지 넘겨서, 28페이지. 그러면, 새에 대해서, “가난하고 힘이 없으면 새 한 마디라도 된다. 새는 산 비둘기나, 집 비둘기 새끼라도 된다.” 가지고 오면, 제사장은, 15절에 “단으로 가져다가 머리를 비틀어 끊어버리라” 그리고, “성령의 불로 살라 버리고” 다시는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변덕스러운 생각과 행동이 없도록, “피를 단 곁에 흘릴 것이니라” 그래 놓고, 16절. “멱통과 더러운 것은 없애버려라” 없애는 것이, 제하는 겁니다. 새를 잡아 제물로 드릴 때는, 새의 멱통, 목입니다. 멱통. 그리고 이 멱통을 잡아보면 그 속에 닭똥집이라고 그러지요? 새들은 입에서는 주워 먹고, 입에 들어가고 나면, 입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새는 주워 먹으면, 멱통 속에 들어가서 모입니다. 그래서 이 멱통은 더러운 것이고, “이 더러운 멱통을 제하려 버려라.” 멱통이라니요? 목을 ‘멱’이라고 그럽니다. 똑같은 말입니다. 멱살, 어디이지요? 목입니다. 멱통, 멱살, 멱. 새의 멱이라는 것은, 새는 무조건 보이는대로 돌아다니면서 있는대로 주워 먹고 봅니다. 일단은 주워 먹고. 이 집에 가든, 저 집에 가든, 이 교회를 가든, 이 책을 읽든, 이 학교를 가든, 뉴스의 아나운서가 이 말을 하든, 저 말을 하든, 주워 먹고 보는 것이 새라! 새의 멱통은 별의 별 것이 다 들어 앉았습니다. ‘일단 주워 담는 곳’. 멱통을 제거해라. 그 속의 더러운 것을 전부, 16절 “단 동편 재 버리는 곳에 던져버려라” 네가 새 같은 인격이 되어, 별의 별 곳에 다 돌아다니고, 별의 별 것을 다 주워 먹은 것, 그 더러운 것은 단 동편,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는 이런 것은 주워 먹지 않겠습니다. 청산하고 내버려 버려라! 씻어버려라! 소와 양은 내장과 정강이를 씨어서, 단 위에 태웁니다. 안 돌아다닐 곳을 돌아다닌 정강이, 내 속아지, 내 속에 든 잘못된 옛사람의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된 그런 내 속아지를 다 버려버려라! 씻어버려라1 그리고, 태워라! ‘새는, 돌아다니며, 별의 별 것을 주워 먹은 것 전부 제거해서, 단 동편 재 버리는 곳에 내버려라. 그거 주워 먹지 말아라!’ 예전에는 책이 몇 권 없어서, 안 믿는 사람의 책이라는 것도, 읽을 책, 읽으면 좋은 책 밖에 없었습니다. 책이 몇 권 없으니까! 지금은 책이 산 더미처럼 많아서, 죄 짓는 책, 더러운 책, 별의별 책이 산더미처럼 많은데, 책이 참 없던 때 불신자라도, 귀한 책, 지혜로운 책, 인간이 되는 책. 그때에 ‘책을 읽어라. 책을 읽어야 사람이 된다.’ 독서를 강조했습니다. 그때의 책은 읽으면 불신자가 세상 살아가는데는, 좋은 지식, 상식이었고. 지금의 책은 안 믿는 사람의 안 믿는 책도, 책 껍데기도 더러워서, 눈에 담았다가, 씻어 버리지도 못해서, 눈을 뜨고 보지도 못할 표지, 내용, 그림. 읽어 좋은 책은 희귀하고, 내다 버릴 더러운 책은 산더미처럼 많은데! 책만 읽으라? 책만 많이 읽으면 된다? 읽는대로 들어가면, 그게 사람이 되고, 지식이 되어 그 인간이 되는데? 옛날 책은 없어서 그렇지, 읽기 싫어서 그렇지, 읽으면, 세상 살아가는데는 그래도 쓸모가 있었습니다. ‘책을 읽어라’ 그 말이 그래도 괜찮은 말이었습니다. 지금은, ‘책 읽지를 말아라! 텔레비 보지를 말아라! 음악을 귀에 담지도 말아라!’ 이렇게까지 조심해야 될 때입니다. 안 믿는 사람 술 먹고 유행가를 불러도, ‘인생은 나그네길. 인생은 나그네길.’ 안 믿는 사람이니, ‘이거 어떻게 되는고?’ 이렇게 고민이 되니까 교회를 오는 겁니다. 유행가, 불신자 술을 먹어도 나오는 유행가가, ‘인생은 나그네 길!’ 그 유행가 노래에, 술 먹다가 울다가 교회 오는 사람이라도 있었는데, 지금 유행가, 지금 노래 가사는, 마약 먹고, 혀 꼬부라지는 소리, 술 먹고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마약 먹고 정신 빠진, 고장난 인간들, 저 폐차장에 보낼 이런 노래를 듣고 그냥, 귀에다대고 눈에 다대고 쏟아붓고 앉았으니! 여기 “비둘기의 멱통과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려라”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되었습니다. 애들 눈에 좋아서 끊어 놓을 수 없는게 마구 쏟아지지, 휴대폰으로 쏟아지지, 텔레비에 쏟아지지, 그림책, 이야기 책, 동화책, 별의 별 책은 넘치지! 노아 때는 물로 홍수에 빠져 다 죽었습니다. 오늘은, 물로 홍수에 빠져 죽을 것도 없이, 지식의 홍수, 죄악의 홍수, 더러운 곳의 홍수로, 태평양보다 더 많은 물이 넘쳐서! 그림에 빠져 죽었고, 드라마에 빠져 죽었고, 인터넷에 빠져 죽었고, 책에 빠져 죽었고, 공부하는 지식에 빠져 죽었고, 한 도시에 박사가 하나 있을까? 없을까? 그러했는데, 신풍의 교회에 목사님이 7인가 8이 되는데, 신학 박사만 5입니다. 신풍 바닷가에 7-8개 교회 중에 신약 박사님이 5개쯤 되었으니, 한국의 신학박사가 언제 5천명, 8천명 그러다가, 지금은 만 명 넘어간답니다. 이미 공회도, 신학 박사님이 몇 십명 되어버렸습니다. ‘읽을 것을 주워 먹었느냐? 들을 것을 주워 먹었느냐? 먹어, 양식이 되고, 신앙의 양식으로 자라가는 복의 말씀을 주워 먹었느냐? 돌아다니며, 별의 별 것을,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대로 주워 담은 멱통 뜯어버리거라! 그 더러운 것들은 전부 다 단 동편에 갔다, 재 버리는 곳에 던져 버리거라! 돌아보지도 말아라!’ 먹어야, 생존 하던 때가 옛날입니다. 지금은 덜 먹는 것이, 건강에 좋은 때가 되었습니다. 한 자라도 배워야 살아남던 옛날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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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 2020.06.09 17:10
한 자라도 배워야 살아남던 옛날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덜 배우고, 조심해서 배우고, 가려 배우고, 안 갈 때 안 가는 노력을 해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세계 여행이 자유로운 때, 여행을 많이 다녀본 것이 부럽고, 자랑하던 때가 되어, 박형룡 박사라고, 한국의 교리 선생님인데, 한 60년 전에 세계일주를 하고 나서, 교리책을 5권인가 짓다가, 그 6번째는 세계 일주를 한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교리책에, 박형룡 박사 전집에. 모르는 세계를 ‘아, 우리는 이리 살았는데 저리 사는 것도 있구나.’ 그때는 가서 배울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안 가본게 자랑인 때가 되었습니다. 저는 어디 안 가봤다고요? 저 아직까지도 제주도 안 가봤습니다. 이게 자랑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저 제주도 가봤습니다.’하면 ‘얼마나 촌 놈이길래, 제주도 갔다 온 것도 자랑이냐?’ 이럴 겁니다. ‘저 안가봤습니다.’ 이게 어느날 자랑이 되어버렸습니다. 새는 ‘주워 먹는 것’이 새입니다. 보이는대로 뭐든지 먹고 봅니다. 안 믿는 사람은, 보이는대로, 돈이든, 지식이든, 자격증이든, 뭐든지 다 거머쥐면 성공이고, 믿는 사람은, 말씀의 양식, 하나님 앞에 가질 것, 옳은 것, 바른 것, 구별하고 구별하여, 좀 뒤떨어져도, 남보다 못하더라도, ‘구별하라’ 더러운 멱통, 더러운 것은 다 버려야 됩니다.

29페이지, 잠깐만 살펴보십시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 ‘총 정리’입니다. 제사는 구약의 5종류입니다. 지금까지 배운 것이, 1장의 번제입니다. 번제는 크게 3가지 종류로 드립니다. 다같이 첫째는요? 소. 둘째는요? 양과 염소. 가난하고 부족하면, 어떻게 하라고요? 새. 어떤 것이든지 ‘흠 없는 것’이라야 됩니다. 비둘기, 새는 흠 없는이라는 말을 적지 않았는데, 그것은 덩치가 작으니까, 따로 ‘흠 없는’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생략’입니다. 그 다음, 소는 ‘회막문’. 양은요? ‘단 북편으로 데리고 가서.’ 어려워도 순종! 어려울 때에 드러나는 내 속의 잘못을 해결해라! 새는 작으니까, 바로 ‘단’입니다. 소와 양은, 머리에 ‘안수’를 합니다. ‘죄는 내가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와 양을 잡겠습니다. 나 대신 주님이 죽습니다.’ 새는 머리에 안수할 것도 없이, 소에 잡혀버렸습니다. 그 다음 머리에 안수하고, 도살! 소를 가지고 온, 양을 가지고 온 사람이 직접 잡아 버립니다. 새는 안수할 것도 없고, 내가 잡을 것도 없이, 신앙없고, 어렵고, 불쌍하니까 제사장이 대신 잡아버립니다. ‘비틀어 끊을 것’ 그 다음 소와 양은 ‘단 사면’에 뿌립니다. 언제, 어떤 면으로든지 완전하게 죄는 끊을 것! 죽여버릴 것! 내 속의 죄와 악은 완전히 끊어버릴 것. 평생의 우리의 목적입니다. 목표입니다. 새는 피가 적으니까, 단 곁에 그냥 흘렸습니다. 이렇게 신앙 어린, 부족한 우리를 위하여 주일학생 하나를 위해서도, 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배려’를 해 놓으셨습니다. ‘어려워서 못 믿겠다’ 그럴 것 없고, ‘없어서 못 믿겠다.’ 그럴 것 없고, “주지 않은 것은 받지 아니하시느니라.” 있는 것만 원하십니다. 그 다음, 제사장이 이렇게 하고 나면, 양을 가지고 온, 그 다음 내가 ‘가죽’을 벗깁니다. 세상을 살며 세상과 접한 잘못된 행위를. 그리고 그 잘못된 것을 ‘각’을 뜹니다. 부분 부분. ‘머리’의 지식, ‘기름’의 좋은 것 다 나누어 드리고, ‘내장’과 ‘정강이’의 더러운 것은 씻어버립니다. 새는 ‘멱통’과 ‘더러운 것’만 제하면 됩니다. ‘날개’는 찢어버리고.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을 제사장이 단 위에서 불 살라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소와 양의 경우는 머리, 기름, 씻어버린 내장과 씻어버린 정강이, 4개가 타서 올라갈 때에, 그 연기를 맡으시고, 하나님이 ‘수고했다. 착하다. 이제 됐다. 너는 대속의 사람이 됐구나! 이제는 너와 나 사이에 가림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위에서 주는 복으로 마음껏 받아라’ 새는 그대로 다 올려놓고 태워버립니다. 그리고 나면, 번제는 원래 다 드렸으니까, 그 다음 새는 멱통과 더러운 것은 ‘폐기’입니다.

하나만 더 합니다. 번제는 다 드리는데, 짐승의 가죽은 벗겨서, 제사 드린 제사장에게 줍니다. 이 더러운 가죽! 이 더러운 행위! 세상 살면서 별의 별 것이 다 묻은 이것, 어디에 쓰라고요? 나는 잡아들이고, 가죽은 벗겨,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제사장은, 억센 동네 양아치가 교회를 오면, 억센 동네 양아치는 양아치 노릇하던 억센 것은 벗어 놓고 와야 되고, 목회자는 그 교인의, 억센, 강한 성격을, 주를 위하여 열심과 충성에 쓰게 하면, 그게 다 복으로 바뀌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옛날에 가졌던 모든 것은 다 배설물로 버렸다’ 사도 바울은 믿기 전에 가졌던 지식과, 로마 시민권과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더럽다고 다 벗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로마 시민권과 바울의 지식을, 주님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로마와 세상에 전도하고 선교하는데 일일이 다 쓰셨습니다. 번제는 가죽을 벗기고, 안의 것은 모조리 다 태워 없애버립니다. 가죽은 어떻게 하고요? ‘너는 손대지 말아라! 너의 과거, 너의 잘못된 것은 두 번 손대지 말아라.’ 목회자는, 이 교인의 단점, 저 교인의 죄, 저 교인의 잘못된 것도, 돌려서 옳고 바르게 쓰면! 술 먹고 유행가 부르던 사람이 회개하면, 마이크 잡고 찬송 인도할 때에도, 102장의 은혜로운 찬송을 할 수가 있고. 말로 남을 훼방하과, 못된 짓 하던 사람이 회개하면, 이제는 자기처럼 말로 교회를 훼방하는 인간을 가서 이겨서, 막는데도 좋고. 절의 중하다가 회개하고 교회를 다니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불교인 만나서 전도하는데에는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미신 믿다가 돌아온 할머니, 미신 믿는 할머니 전도 하는 데는 좋고. 저처럼 학교를 좀 공부해본 사람은, 불교인 만나서 전도하기도 어렵고, 미신을 모르니까 미신 믿던 할머니 만나서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모르니까! 그런데, 공부 좀 했다고 겁쩍거리는 사람한테는, ‘아이, 이 사람아, 공부 그거 다 도서관에 가면 책이 많은데, 그것을 머리 속에 다 외웠다고 그렇게 자랑하냐? 요즘 컴퓨터는 그거 다 담고 앉았다.’ 이런 말을 해버리면, 뭐 말이 막혀 버리지요? 깡패가 회개하면, 주먹 쓰는 것들 전도할 때, 유리할 것이고. 절 믿던 사람이 회개하면, 절 다니는 사람 붙들어, 교회 모시기 좋을 것이고. 가난해 본 사람이 회개하면, 가난한 사람에게 회개 시키기 좋을 것이고. 부자가 다행스럽게 회개하고 교회 다니면, ‘나도 돈 벌어 봤네! 돈은 나도 벌어봤네! 그거 아무 짝에도 쓸모없드만’ 부자가 그 말을 할 때에 권위가 있지. 저처럼 돈 안 벌어 본 사람이, ‘돈, 뭐해?’ 그러면, 부자는 뭐라 그럴까요? ‘네가 돈 맛을 못 봤지! 네가 돈 맛을 알면, 목사 안할걸?’ 지금은 우리나라 제일 큰 재벌이, 삼성, LG, SK 그리 갑니까? 70년대만 해도, 현대, 삼성 다음에 LG하고 대림건설이 맞 먹었습니다. 대림이 다섯 손에 들 때에, 대림 산업의 제일 돈 많이 버는 대림 건설을 만든 분이 이재순 목사님입니다. 그 분이 해방 후에, 서울 제일 부잣집에 분수까지 차리고, 멋 부리고 그러다가, 75년인가? 뉴욕 지사장 가라고 할 때에, 사표 내고 남해 완행열차 버스 타고 갈 때, 보따리 하나 지고, 그리 간 분입니다. 그래서, 대림건설 중역들이 모여서, ‘우리 대림건설을 만든 형님이, 남해에 저렇게 보따리 하나 가지고, 고구마 있는 방 한 칸에 목회를 한다니까,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예배당을 남해 서상에 하나 만들어주자.’ 그래가지고, 대표들이 왔었습니다. 대림은 가족들, 사촌들이 모인 회사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분은, ‘돈? 나 5대 재벌 해봤다. 돈? 돈 가지고는 안되더라.’ 아 이러니까, 돈 가지고 껍적거리는 사람은 이재순 목사님만 보면, 다른 소리 안 합니다. 불국사 위에 석굴암이, 불국사 위의 절입니다. 그 절의 제일 원로 목사를 ‘조실 대사’라고 그럽니다. 그 분이 우리 집회에 오던 정형인 집사님 외삼촌입니다. 불국사 위의 석굴암 꼭대기의 조실대사가, ‘평생 믿어봐도 그거, 돌 밖에 없더라’ 하고 마지막 돌아 가실 때, 서부 교회에 와서, 우리와 함께 예배 드리고, 장례를 우리가 치뤘습니다. 이런 분 하나 때문에, 대한민국의 불교가 흔들어져 버립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중들은, 일반 중들이고. 도만 닦는 도사들은, 일반인들이 얼굴을 못 봅니다. 저 성철 같은 사람처럼. 그런 사람이 평생에 불교를 다 파봤는데, ‘돌 밖에 안되더라. 늘그막에 예수 믿어, 천국 갑니다. 불국사에 나 죽었다고 부고도 하지 마시라.’ 그랬는데, 어떻게 듣고, 불국사의 무술 중들 100명이 와가지고, 눈을 찌른다고 이렇게 서부교회를 난동을 부렸었습니다. 그런 조실대사 하나, 능요대사입니다. 이 사람이 돌이켜 놓으니까, 절 믿는 사람, 중들하고는 만나면, 제가 그 사람부터 말합니다. ‘이 사람 아시느냐?’ 그 사람 백분의 일도 안되거든요? ‘그 사람, 우리 공회 교회 다니셨다’ 평생에 절의 중 노릇한 것은 내 버릴 가죽입니다. 가죽을 벗겨, 이것을 들고 목사가 써먹으니까, 얼마나 전도하는데 좋은지? 회개할 것도 있고, 태워버릴 것도 있고, 드릴 것도 있고, 받아서 내가 가질 것도 있고. 이게 제사 5가지 종류의 첫 번째 번제를 살펴봤습니다.

오후 예배부터는 두 번째 ‘소제’로 나갑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기도)
말씀이 칼이 되어, 남이 아니라 나를, 세상이 아니라 우리 교회 내부를, 가족이 아니라 나의 살아온 나의 생활, 나의 성격, 나의 신앙을 수술하고, 해부하여, 쪼개고, 가르고, 끊어내고, 버릴 것은 버리고, 씻을 것은 씻어버리고, 모든 것을 다 태워, 주님 앞에 이제는 소처럼, 이제는 양처럼, 주의 일, 순종으로만 나아가고, 비둘기의 성결한 성령의 사람으로만 살아야 되겠는데, 지난 날의 잘못된 것, 소와 양과 염소와 비둘기라는 새를 가지고, 다 바쳐 드리는, 이 면으로 우리의 숙제를 삼아, 집회 기간 내내, 나는 소처럼 충성했는가? 나는 양처럼 순종 했는가? 나는 염소처럼 잘못된 면을 회개하고 돌이켰는가? 뭐든지 주워 먹고, 어디든지 날아다니던 이 변덕스러운 정처 없는 인간으로 살았던 과거를 전부 불태워 버리고, 날 위하여 다 바쳐 죽은 주님의 대속의 공로 붙들고, 남은 때는 낮아진 생활, 언행까지를 충성스러운 제단 위의 제물로만 살아가는 우리 학생들, 우리 모든 교인들이 되어, 산 속의 휴가철이 아니라, 못 듣던 말씀 한 번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번제의 제물에 다 태워드리는, 이 면 해결하고, 회개하고 씻어버리는, 새 출발 능력의 기회가 되도록, 만 가지 필요한 은혜로 동행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 자유하겠습니다.



초타 : khr
교인 2020.06.09 17:10
설교요약



① 월후 : 레위기 5대 제사

 - 창조 (출발) – 성막 (동행) – 생활법 (실행) – 제사 (헌신)

 -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신앙생활과의 관계

 - 소와 양의 제사로, 대속의 은혜와 믿음의 세계를 나타냄

 

② 월밤 : 제사 제물

 - 형편에 따라 (소, 양 염소, 비둘기),  예물이 되어 (흠 없는, 수컷으로)



③ 화새 : 번제 1

 - 내가 제물되어, 완전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잘못된 생각을 끊고, 씻어

    대속에 붙들려 완전 속죄의 향기. 

 - 소의 번제 (즉시 죽여, 무언의 순종으로 끝까지 충성)



④ 화전 : 번제 2

 - 양, 염소의 번제 (환란에서 거역을 꺽고, 낱낱이 쪼개어 바친 온전한 순종)

 - 새의 번제 (변덕의 더러움을 끊고, 찢고, 폐기함으로 바친 소망의 거룩)

 - 가죽  (완전히 벗겨진 잘못된 행실, 제사장에 의해 생명으로 재 사용)
교인 2020.06.09 17:10
방송담당: 실시간 참석기록

gyu111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장신경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김희락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엄동환-질서속 성장 강동주교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서형미님이 입장하셨습니다.  [08/07-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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